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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창작소설, 즉 팬픽입니다.
UCC게시판이 없어서 자게로 가긴 그렇고 팬아트 외의 창작물도 올라오는 팬아트 게시판에 업로드하는데
문제가 되면 자삭하겠습니다.
※ 인물 간의 호칭이나 존칭을 전부 다 기억하지 못하므로 오류가 있을 시 제보 받음.
※ 자해석이 들어갔으므로 캐릭터가 좀 다를 수 있음.
※ 커플링 없음.
신: 아스타롯 그 후에.
2.
바르디나르의 부활과 함께 재건되었던 코우나트 성은 바르디나르의 소멸과 함께 붕괴해버렸다. 전투에 지친 몸을 격전지에서 뉘일 수 없었으므로 그랜드 체이스는 코우나트 붕괴지와 비교적 가까운 엘프들의 왕국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다친 몸을 치료받고 허기진 배를 잔뜩 채우고 각자의 방에서 곯아떨어질 동안 마리는 알현 요청을 받아 응접실로 들어섰다.
응접실에는 드워프의 왕 아론과 엘프의 여왕 갈라드리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리가 들어서자 서슴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보였다. 안경알 너머로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가 잠시 딛고 있는 카펫 위를 훑었다.
“알현이라면서 이곳까지 발걸음 하시게 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마리 밍 오네트 왕녀님.”
“딱히… 두 발로… 걸은 것뿐.”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갈라드리엘이 손짓한 곳은 그 자리에서 가장 높은 상석이었다. 동시에 사이가 안 좋은 엘프와 드워프 국왕들을 코앞에 두는 자리였기에 마리는 굳이 그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좌석에 손을 대고 끌어당겼다.
“저는 여기가 편…해요.”
“네? 네. 왕녀님께서 편한 데로 앉으시지요.”
저들과의 거리가 확 벌어진 곳에 앉자 침체되어 있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꼿꼿이 편 허리로 앉은 마리를 제 딴에는 몰래 본다고 훔쳐본 아론이 코를 킁킁거렸다. 자기 대에서 살아있는 천족을 만나게 된 것이 감격스러웠다.
“무슨 일…이지요?”
“쉬시는 차에 이리 자리를 청하게 되어 송구합니다만 내일이면 그랜드 체이스 일행이 떠난다고 들어 급히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렇소. 왕녀께서도 그들과 함께 떠날 건가?”
당연한 질문을 받을지 몰랐기에 마리는 눈만 둥그렇게 떴다. 왕녀에게서 어떤 대답도 나오지 않자 갈라드리엘이 아론을 흘겼다. 성질만 급한 드워프가 괜히 나서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몸은 어떠신지요? 이곳에 오실 땐 쓰러져 계셨던 터라 걱정을 많이 했답니다.”
몸. 상태. 갈라드리엘의 질문은 한결 더 마리의 입을 무겁게 했다. 최후의 전투를 마치고 이곳 엘프의 숲으로 직접 돌아온 일행들과 달리 마리는 내내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덕분에 피로에 지친 그랜드 체이스들이 쓰러져 잠든 동안에도 이렇게 멀쩡히 의식을 차리고 있을 수 있었던 거겠지마는.
갈라드리엘의 질문에 맞춰 마리는 찬찬히 제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코우나트 유적지 이후의 기억은 잘려나간 것처럼 깜깜했다. 그 뒤 눈떠보니 일행들이 이미 바르디나르를 무찔렀다고 하고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태였다.
“몸은… 괜찮아요. 기억은 여전히 없지만 그래도 전보다 머리는 맑아진 것 같군요.”
확실히 그랬다. 머릿속이 전처럼 뿌릿하지만 않은 것은 소울 스톤과 접촉한 덕일 터였다. 분명 뭔가를 알게도 되었던 것 같은데, 잊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기억이 불분명하다는 것은 들었지만 코우나트에 대해선 정말 하나도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에잇, 무슨 말을 그렇게 빙빙 돌려! 이보게, 왕녀. 이곳 아케메디아에 남지 않겠나?”
무슨 말이지? 이번에는 마리도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끔뻑하고 말았다. 돌연히 결론부터 언급하는 아론의 작태에 갈라드리엘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놈의 드워프 왕, 천오백 년 가까이를 전쟁해왔지만 저놈의 급한 성격은 한날도 변한 적이 없었다.
“갑작스런 요청에 놀라셨을 겁니다. 하지만 왕녀, 드워프 왕 아론의 뜻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군요.”
“그동안 세계에 있었던 모든 흉한 일의 원흉 바르디나르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제 일행 분인 그랜드 체이스도 저마다의 삶터로 돌아가 자신들의 생활을 일구어 가겠지요.”
저마다의 삶? 그것은 낯선 얘기였기에 마리는 계속해서 눈만 끔뻑끔뻑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와 같은 모험은 더 이상 없는 건가? 그랜드 체이스에게.
“세계를 구한 일이니 인간은 인간 사회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고 엘프들도 자신들의 숲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온데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묻고 싶습니다, 왕녀님께선 어떤 장래를 꿈꾸고 계시온지요?”
입술에 풀이라도 붙은 것처럼 연이어 떨어지지 않았다. 마리는 장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없었다. 파괴의 신전에서 깨어나 그랜드 체이스에서 합류하면서부터 그저 함께 했을 뿐.
‘아스타롯…… 바르디나르는 내 기억과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파괴의 신과 그 배후에 숨어 있던 바르디나르를 무찌르기 위한 그랜드 체이스의 원정은 마리에게 흩어진 기억을 되찾는 단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그 바르디나르도 없어. 적이 없으니 그랜드 체이스도 더는 모험을 하지 않아.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나…는?’
“딱히 머무를 곳이 정해진 게 아니라면 왕녀님, 부디 이 아케메디아에 남아주시는 것도 어떠련지요. 그 청을 드리려고 이 밤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미동 없이 침묵하는 마리에게 갈라드리엘이 조심스럽게 고했다. 본디 코우나트는 천족인 왕족을 중심으로 인간과 엘프, 드워프가 인종과 국경에 상관없이 어울렸던 신성왕국이었다. 하지만 에르나시스 해머의 폭주로 코우나트 왕국이 소멸되고 그 잘못이 서로 상대 쪽에 있다고 생각한 드워프와 엘프는 신성 왕국 멸망 이래로 끝없는 전쟁을 치러왔다. 이제 그게 다 바르디나르의 이간질과 획책이었다는 걸 알았으니 양 종족은 그동안 일그러졌던 관계를 다시 쌓아가야 할 터였다.
허나 음모로 인해 벌인 전투라 할지라도 천오백 년 간 쌓아온 감정의 골짜기는 두 종족에게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았고 자신들끼리 회복을 하기에는 너무도 먼 길을 걸었다. 이때 천족인 왕녀가 남아 그 옛날 코우나트 시절 때처럼 중재를 해준다면, 아주 먼 이야기가 될 테지만 그 옛날 신성왕국 시대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랐다. 끝없는 전란과 피와 저주가 흘렀던 이 아케메디아에도――.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두 종족의 시선에 마리는 뭔가를 답할 수 없었다.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에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생각해주시면 될 일이랍니다. 저희도 왕녀님을 모시려면 준비기간이 필요하고 다행히 우리 세 종족은 수명이 긴 편이니까요. 왕녀님, 기억이 없어 잊어버리셨겠지만 인간의 수명은 엘프나 드워프, 천족보다도 훨씬 짧답니다. 해서 인간은 수명이 긴 장생족을 두려워하고 질투해 끔찍한 일을 벌이기도 하지요. 부디 인간들과 함께 가는 것만은 재고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혀에 기름칠이라도 했나, 말빨이 장난 아니구먼. 내가 하고자 하는 말도 그거야, 왕녀.”
“생각해…볼게요.”
더듬더듬 답하고서 인사할 정신도 없이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두 왕이 다시 일어나 배웅해주었지만 이미 등 돌린 마리에겐 보이지 않는 광경이었다.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기고 나니 마리는 자신이 마을을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조차 가려져 어둔 밤, 인적이 드문 곳, 그곳에는 까만 머리카락의 장신의 사내가 잔디바닥이 침대요, 깜깜한 밤하늘이 이불인 양 세상 편히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지크하트.”
그저 무작정 걸음을 옮긴 것뿐인데 발견한 하이랜더의 모습에 마리는 알 수 없는 안정감을 얻었다.
“마리? 일어났네.”
사람이 다가오자 지크하트는 상체를 일으켜 다가오는 마리를 한 번 응시하고는 곧 고개를 돌려 언덕 아래를 쳐다 보았다. 단순히 시선을 돌린 게 아니라 뭔가를 바라보는 듯해서 지크하트가 보는 쪽을 마리도 따라가 보았다. 의지할 달빛조차 없어서 숲 아래는 캄캄하기만 했지만 안경에 설계해둔 마도공학으로 어둠 속에서도 열원을 탐색할 수 있었다.
‘엘리시스?’
그곳에는 엘리시스와 에이미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까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딱히 엿듣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인사 한 번 건네고 나서는 사람이 곁에 있든지 말든지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하이랜더인 이 남자는 앞으로 무얼 할 건지 궁금해졌다. 호기심이란 기억을 잃은 마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강렬한 감정이었고 그에 따른 자제력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당신은 앞으로 무얼 할 건가요?”
“으응? 앞으로?”
뭔가를 조금 생각해본다는 듯이 턱을 매만졌던 남자는 곧 털어놓듯이 손을 내려놨다.
“아아, 귀찮아.”
생각하는 게 귀찮다는 걸까, 말하는 게 귀찮다는 걸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이 남자는 불노불사가 된 이후로 육백 년 이상을 살았다고 하는데 나이가 들면 저렇게 다 나태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이 남자의 고유한 성격인 걸까. 마리는 궁금했다. 너무 궁금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상태로 깨어나서 불사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마리는 지크하트가 궁금했었다. 불사신, 하이랜더는 코우나트의 최정예 전투집단이었으니까 기억의 실마리였던 그의 존재를 알아가는 건 부표 없이 기억상실의 바다에서 떠돌던 마리에게 조금씩 해수면 위로 올라가는 일과 같았다.
마리가 침묵한 채 빤히 쳐다볼 때면 무언가가 터지는 일로 끝나기 십상이었다. 전투를 끝낸 지 얼마 안 됐고 괜한 폭음으로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면 더 귀찮을 게 분명했기에 지크하트는 스리슬쩍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러게, 앞으로라. 그 찢어죽일 자식도 사라졌으니 이제 뭐하지. 꼭 해야 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잖아.”
지크하트. 풀네임은 에르크나드 지크하트로 카나반 왕국 출신이었다. 타고 나길 천재로 태어나 자신감이 강하고 굉장한 귀차니스트기도 했다.
“꼭… 하지 않아도… 되나요?”
“물론 아무것도 안 하면 굶어죽겠지. 굶어죽을 정도로 굶는 것은 끔찍하다고. 끄응.”
“그럼 먹고 살기는 해야겠군요.”
“그렇지, 그것도 있고. ――여태까지 하고 싶은 대로 살았으니까 이제 앞 말고도 뒤를 봐볼까 싶네.”
마리는 머리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밝혀둔 등불만 보였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린 마리는 지크하트의 곁에 앉아 또 빤히 응시했다. 방금 한 말은 문맥상 현실상의 뒤가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얘기하는 게 맞을 거였다. 이 남자는, 바르디나르를 쓰러트린 이후에도 과거에 머물려는 걸까.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딱히 입 밖에 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속마음이 툭 튀어나갔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언제나 그렇듯 별 고민하지 않는 듯한 가벼운 답변이 돌아왔다. 마리는 따지고 싶어졌다. 말이 많은 성격이었다면 이미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 안에 넘치는 궁금증과 달리 뭐 하나 한마디 건네는 것도 쉽지 않았다. 헌데 어떻게 당신은 매번 그렇게, 늘 쉬운 듯이 말하는 걸까. 쉽지 않은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먼 곳을 보고 있던 검은 동공이 문득 마리를 돌아봤다. 전투 중에는 서리칼날 만큼이나 날카로운 은안은 지금 단정히 가라앉아 새카만 색으로 그 망막 속에 자신을 담고 있었다.
“그래도 막막해서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면 상담 같은 것 정도는 들어주지.”
매끄럽게 올라간 입 꼬리가 보기 시원했다. 첫 인사로 폭탄부터 내밀었던 그날에도 이리 웃으며 따라오라고 했었다. 어딘지도 몰랐고 무얼 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그와 그의 일행들과 함께 하는 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로 혼자인 시간은 사라졌다. 방황하던 자신을 붙들어준 소중한 동료들, 그리고 이 남자…….
“전처럼 막 사라지지만 말라고.”
자리에서 일어난 지크하트가 엉덩이를 털었다. 그의 말은 마리에게 금시초문이었다. 따라 일어서며 의문을 던졌다.
“사라진 적 없어요.”
“사라진 적 있어.”
“없어요.”
“있어.”
불쑥 다가온 얼굴에 몸이 경직되어버렸다. 그렇게 성큼 다가오면 마리로서는 다시 생각해보는 수밖에 없다. 정말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그런 건가?
“코우나트 유적지에서 사라졌었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겠지만. 자, 네가 잃어버린 거.”
코앞까지 내밀어지는 손에 우두커니 있으니 지크하트가 눈동자를 굴렸다.
“손.”
무슨 의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손을 폈다. 그 위로 귀걸이 두 개가 떨어졌다. 바로 손을 거두어 귓불을 만져보았다. 유적지에서 의식이 끊기던 그날 했던 귀걸이 한 쌍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이게 지크하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은 그의 말대로 정말 자신이 사라졌던 모양이다.
“늦었다, 데려다 줄 테니 슬슬 자자고.”
제 볼 일 마쳤다는 양 남자는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마리는 여전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쫓아가고 싶지만 여전히 혼란스럽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코우나트 시절을 잊어버린 것만으로도 허전한데 깨어나서도 또 공백이 생겼다는 게 안타깝다. 그때의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었지. 왜 이 남자의 곁을 떠나버린 걸까.
“안 갈 거냐?”
몇 걸음 걷던 하이랜더가 돌아보았다. 그 검은 눈동자를 다시 본 순간 마리는 뿌리박힌 것처럼 꼼짝 못했던 두 발을 서슴없이 떼어냈다.
마리를 방에다 데려다주고 지크하트는 창밖을 흘깃거렸다. 인기척을 보아하니 엘리시스와 에이미도 숙소 근처까지 다 왔다. 이쪽은 더 신경 쓸 것 없겠지만 마을과는 멀리 떨어진 변두리로 옮겨진 마족 세 마리는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마족을 혐오하는 엘프와 드워프 탓에 이 숲 마을에 들어오진 못하고 외딴 곳에 쉴 곳을 제공받은 거였다. 그러고도 엘프 주민들이 안심하지 못했기에 로난과 라스가 감시역 아닌 감시역을 자처하고 갔지만 아직 어리숙한 애송이들을 다 믿을 만큼 지크하트는 무디지 못했다.
‘앞으로 해야 할 거라.’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잔디밭에 누웠던 옷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웠다. 이불빨래는 어차피 엘프들의 몫! 씻는 것도 귀찮고 눈뜨는 것도 귀찮아 푹신한 베개에 힘 뺀 머리를 한껏 기대었다.
과거 고향 카나반과 가문을 내버려두고 아케메디아에 왔던 건 몬스터의 근원을 알고 싶어서였다. 검술 실력이야 그때도 좋았지만 유적탐사 같은 건 일도 모르는 애송이었던 터라 결국 유적지의 함정에 휘말려 죽을 뻔했고 그런 지크하트를 발견한 하이랜더들이 목숨을 구해주었다.
하이랜더. 그것은 천족과 함께 코우나트에 있어서 특별한 존재였다. 단순히 강한 무력집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두 족속은 이 세계의 번영과 연관되는 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존재들이었다. 신과 인간의 혼혈인 천족과 신의 인정을 받아 최강의 육체[불노불사]를 받은 게 하이랜더였다.
하이랜더들은 신에게 인정받은 무위로 신들과 신들의 후예인 천족, 그리고 그 왕국인 코우나트를 지키고자 결의했으나 바르디나르의 음모로 인해 가장 중요한 때 봉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끝내엔 참살당하고 말았다.
‘내가 흔적을 남겨버리고 만 탓에.’
지크하트를 구해줄 당시만 해도 하이랜더들은 최초의 목적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비관만 하지 않고 코우나트를 멸망시킨 바르디나르를 찾아 처벌하고 아직도 이 세계를 어지럽히는 몬스터들을 치워버리고자 했다. 몬스터란 생체실험이나 마족의 저주로 파생된 불순물이었기 때문이다.
‘복수는 했다. 이제 남은 건 유지인가. 이봐, 그레이엄. 친구들, 너희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천족이 하나 살아남아 있어. 불노불사라 죽을 일 없다 장담하던 너희들이 다 죽고 코우나트와 관련 없는 나만 남은 이때에 말이지. 너희라면 어떻게 했을 거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답지도 않는 상념에 혼자 이죽거리며 몸을 빙글 돌린 지크하트는 잠에 빠져들었다. 친구들의 답은 꿈속에서 듣기로 하면서.
……바르디나르가 장난감처럼 조종한 하이랜더의 잔념을 부서트린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꿈속에서도 지크하트는 시체가 된 그들을 베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죽은 자는 아무 말하지 않는다. 산 자에게 남은 죄책감만이 산 자를 덮쳐갈 뿐.
날이 밝았다. 마리는 일어나자마자 두 종족의 왕을 찾아가 자신의 뜻을 전했다.
“제 기억은 아직 온전치 않습니다. 다시 되찾을 때까지 다른 곳을 보고 싶어요. 지금의 동료들과 함께.”
“그게 무슨.”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왕녀님. 왕녀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허나 훗날 기억이 돌아오거나 돌아갈 곳을 찾으실 땐 이곳 아케메디아를 떠올려주십시오. 우리 카루엘과 썬더해머 왕국, 그리고 코우나트의 터는 언제까지고 당신이 돌아올 수 있는 고향입니다.”
“갈라드리엘, 이 자식 너 혼자만 점수 따기냐! 우리 드워프도 그건 마찬가지다, 왕녀.”
마리는 깜빡거리며 씩씩거리는 드워프 왕과 웃음 짓는 엘프 여왕을 응시했다. 고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코우나트는 이미 천오백 년 전에 멸망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나라는 아직도 드워프와 엘프들의 기억 속에 문화 속에 남아 있었다.
“고마…워요.”
역시 이 세계는 친절하다. 모두를 지켜주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자신은 일행을 떠났었다. 움찔 어깨가 굳었다. 뭔가가 기억날 듯했지만 떠났다는 것 외에는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래도 떠난 이유 하나가 생각났기에 마리의 입가가 살포시 패였다.
갈라드리엘은 마저 엘리시스와 지크하트를 응접실로 초빙했다. 새벽 단련한다고 일찍 일어났던 엘리시스는 채비를 갖추고 나왔지만 지크하트는 막 잠에서 깨어나 옷만 갈아입고 나온 것처럼 너저분했다.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얘기할 게 있어 불렀다고 들었습니다만.”
엘리시스는 대놓고 지크하트를 노려보며 왜 이 남자를 불렀는지 갈라드리엘에게 따졌다. 회의기 때문에 책임자만 부른다고 해서 혼자 온 것이었는데 그런 자리에 지크하트가 있는 건 무척이나 기분 나빴다. 지크하트를 그랜드 체이스의 간부로 생각하는 거라면 절대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물론입니다, 그랜드 체이스여. 오늘 오전에 이곳을 떠나겠다고 들었습니다. 고향인 대륙으로 돌아가려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카루엘 여왕.”
갈라드리엘은 엘프들의 여왕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케메디아 출신 엘프들의 여왕이었다. 그랜드 체이스 일행 중에는 엘프가 둘씩이나 있었지만 그 둘조차도 출신지가 달랐기에 갈라드리엘을 무조건 엘프의 여왕으로 부르기엔 문제가 있어 그냥 인간왕국에서 하듯 왕국 명으로 부르기로 했다.
“얼마나 떨어진 땅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다를 건너려면 배가 필요할 것입니다.”
“아, 그 뒤는 내가 말하지. 살아서 다시 보게 됐군, 붉은 머리 여자인간.”
갈라드리엘의 말을 비집고 끼어든 아론이 입을 열었다.
“배를 타고 베르메시아란 대륙으로 가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리지, 그런 탑승시설 따윈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습니다만?”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한 엘리시스는 아리송하기만 했다. 길게 기른 턱수염 밑에 가려진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자네들은 운이 좋네, 코우나트 시대의 최첨단 기술을 탑재한 비공정이 우리 드워프들에게 남아 있으니까. 물론 우리끼리는 작동까지 시킬 수 없었지만 녹슬지 않게 지속적으로 관리해 왔네. 남은 건 최연소 천재 마도공학자로 유명했던 마리 왕녀의 보조만 있으면 자네들은 하늘을 통해 바다를 건너 고향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렇, 습니까?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마도공학이 쇠퇴한 시기에 태어난 엘리시스는 비공정이 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저 빨리 세르딘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탈 것이라니 감사히 받으면 그만이었다.
가만 듣고 있던 지크하트는 입 꼬리가 이죽거리는 채로 굳었다. 하필 탈것 중에서도 날것이라니. 코우나트의 옛 기술 정도면 대규모 순간이동진 정도는 돼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거 후손 앞에서 싫다고 티낼 수도 없고.
“하하하하, 나야 말로 영광이지. 코우나트 조선기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비공정이 다시 나는 것을 볼 수 있다니.”
“비공정을 운전하려면 왕녀님의 보조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랜드 체이스여. 왕녀님께서는 기억을 찾을 동안 그대들과 동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왕녀께서 바라시니 우리 카루엘에서 따로 수행자를 붙일 수 없지만 이분은 아케메디아와 찬란했던 코우나트의 유일한 왕족, 그대는 책임지고 왕녀 전하를 수행할 수 있습니까?”
갈라드리엘은 마리를 잡을 수 없었다. 왕녀가 원한다면 보내줄 수밖에. 그렇지만 무턱대고 기억조차 불안정한 그녀를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여왕은 약속을 받고 싶었다. 그 바르디나르조차 쓰러트린 영웅들, 그들이 신의로써 왕녀를 지켜주겠다고 한다면 한결 마음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왕국에 가서도 아케메디아의 두 종족이 왕녀의 뒤를 바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고.
“……그랜드 체이스는 평화를 위협하는 악을 섬멸하기 위한 단체입니다. 무리에 합류한 이상 마리를 온실 속의 화초처럼 마냥 돌봐줄 수만 없습니다.”
갈라드리엘 여왕의 권위적인 시선 앞에서도 엘리시스는 의연했다. 외부의 압박에 연연할 만큼 엘리시스는 풍족하지 못했다. 언제나 가장 치열한 곳에서 싸워 이곳까지 왔다.
“하지만 그녀가 동료로서 우리와 함께 하는 한 제 검은 동료를 지키기 위해 피 흘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두 왕을 알현하는 자리인 만큼 무기는 반납해서 없었다. 대신 빈손을 주먹 쥐어 가슴에 얹었다. 뱉은 말엔 한 톨의 거짓 없이 진심이었다.
“진정 역전의 용사다운 말씀이로군요. 이 갈라드리엘, 그대에게 무신들의 가호가 있길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그놈들 가호 같은 거 쓸모없는데. 괜히 수명이나 길어지고 말이야. 곁에서 듣던 지크하트는 분위기 깨지 않고 듣기만 했다. 그런 속내를 읽은 양 이번엔 갈라드리엘의 시선이 지크하트를 향했다.
“그리고 하이랜더여.”
“응?”
옆집 친구가 부르기라도 한 양 스스럼없는 평대에 엘리시스는 관자놀이의 혈관이 불뚝 치솟았다. 이 인간이 또오오!
“그대 또한 이 시대에 하나 남은 하이랜더. 그 피와 살의 맹세에 따라 왕녀를 수호해주겠는가?”
“내가 왜?”
“지크하트!”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벼운 대답에 결국 엘리시스의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지크하트는 태연히 귓구멍 하나를 막았다.
“맞아. 초대의 하이랜더들은 코우나트와 천족들을 지키고자 했었지. 하지만 내가 들어갔을 시기의 하이랜더들은 더 이상 지킬 나라와 사람들이 없었어. 신들 또한 왕국 수호를 조건으로 내게 불노불사를 준 게 아니고 말이야. 천족의 피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사명은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란 거지.”
불손을 넘어서 불량스럽기까지 한 말을 아끼지 않는 지크하트였다. 엘리시스는 반납한 무기가 제 손에 들려 있었다면 지금 당장 이 남자의 뒤통수를 쳐서 아무 말도 못하게끔 기절시키고 싶었다. 이 노망난 늙은이가 맞아줄 지는 둘째 치고.
“뭐 그것과는 별개로 마리가 직접 부탁한다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만.”
대놓고 면박을 받은 갈라드리엘과 속 끓는 엘리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씨익 웃는 지크하트였다.
“지켜줘요.”
그의 말 끝나기가 무섭게 마리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이번에는 지크하트도 눈을 끔뻑이다 곧 여유롭게 손을 털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됐습니다?”
“좀 똑바로 하라고요, 지크하트!”
“하하하하하!”
폭발한 엘리시스가 지크하트의 멱살을 붙들 듯이 달려들고 놀란 갈라드리엘과 아론이 손수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 주먹 한 방 못 날린 것이 분했던 엘리시스는 씩씩거리면서도 에이미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두 이종족 왕의 용무가 끝났으니 이번엔 그랜드 체이스 측의 일을 얘기할 차례였다.
호출 받은 에이미는 어젯밤 엘리시스에게 알려준 것처럼 신탁을 두 이종족 왕에게도 전달했다. 멸망의 시가 공표되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기겠지만 그렇다고 수뇌부까지 아주 모르게 둘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뇌부라면 적극 정보를 알리고 이후의 사태에서 도움을 받는 게 맞았다.
또 한 번 에르나스에 멸망의 위기가 찾아온다는 말에 탄식한 두 이종족의 왕은 12사도를 찾는데 적극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 후기
글자수: 11,243자. 1편에서 2배 불어남. 끄아아악.
이번 편 쓰려고 짜맞추고 해석해보니 과연 PC그체에서 남주인공여주인공 소리 들을 만한 지크마리였다. 딱히 지크마리를 밀지는 않는데 라기아스 각성 공식만화 보면 마리의 감정선이 남다른지라 지크하트에게 의존적인 형식으로 이어쓸 듯. 그카오에서 마리지크를 풀어주면 그때 변화된 관계에 대해 재정립하기로 하고....
지크하트는 맹목적 복수심을 표출할 때 외에는 능구렁이 같이 웃고 다녀서 딱히 속내가 밝혀지지 않은 인물이다. PC에서 그렇게 비중이 많았는데;; 심리는 대충 이럴 거다나 아니면 필자의 로망대로 적었고.
지크하트와 엘리시스의 관계는 그카오 와서 한결 유연해진 게 보인다. 신: 아스타롯 전을 벌일 때만 해도 엘리시스가 지크하트에게 나 방해하지 마라느니, 지크하트도 동료들에게 이제 필요 없다면서 버려두고 간다든지(환영의 미궁) 신뢰 관계가 미흡했기에 둘 사이가 개선되었다면 소탑에 가기까지의 시간 중에 뭔 일이 있었을 거다.
공식에서 마리와 아케메디아의 드워프&엘프와의 관계는 풀리지않았는데 코우나트가 본디 3종족을 아울렀던 것을 생각해보면 나름 천족에게 집착(!)하지 않을까 싶어서 스토리를 이렇게 짰는데 이 부분은 100% 창작임. 설정 기반으로 쓰는 거니까 괜히 자설정 넣으면 꼬이기만 하고 안 좋은데 이놈의 창작병이 도졌다.
하, 제발 스토리 던전 좀. 애들 내용 궁금하다. 그리고 2차 창작은 힘들다. 소비자가 되고 싶엉... 보는 게 제일 편한데 말이지.
남은 편은 디오레이&루펖라스 편. 라임-세르딘 아신 에델 편. 베이가스 편. 그리고 소탑이랑 그카오로 연결시키면 되니까, 최소 5편 이상은 남았다는.... 그전에 끈기가 떨어져서 다 안 쓸 거 같다. 월드 5나 어서 나오면 좋것다.
아래는 라기아스 각성 공식만화. 게임은 섭종했어도 남은 자료와 후속작은 두고두고 씹고 뜯고 맛보기 좋다. 언젠가는 그체카도 추억으로 남겠지.
다시 봐도 존잘 오즈맥스님.......
오즈맥스님 다시 불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