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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경전이 있는데 천수경이라는 경전을 말해요.
불자의 제자라면 가장 기본적인 불교의 기준이 되는 경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항상 일상생활에서도 수지독송하는 가장 기본 경전이라고 이해하면 되는데
반면에 아주 명확한 개념으로 정의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최고 진리의 경지인 아뉴다라삼막삼보리를 함축하는아라한 경지를 포괄하고 있는 까닭으로
(아라한 경지: 나와 내가 없는 , 모습으로도 생각으로도 분별하고 판단하는 따위의 정신 을 지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 서로가 똑 같음을 보는 경지)
생각을 벗어나야 한다는 재인식이 요구되는 발로를 추구하다보니 그만 애매모호하게
생각으로만 살아내야 하는 우리같은 중생들이 인식하기에는 모호해지고 입장이 빡빡해진 것이지요.
무어라고 딱히 꼬집어 말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요, 노래도 그런 노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뭔지 몰라도 딱 꼬집어 말할 수 는 없어도 사랑을 느낀다는 그 심정을 말하지요.
그와 같은 것이기도 해요.
생각을 벗어나야 비로서 보인다?
그런데 생각을 없게 하고 어떻게 살아내요? 안 그래요? 자다가 남의 다리 잡고 봉창 뚜드리는 소리 아이래요?
그러하니 애매 모호 한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이 있는 종교관이므로 단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복적 신앙관으로
흘러가버리는 경향이 되고 말았지요.
그런데 복을 비는 기복신앙관도 맞는 방편불교식이므로 틀린것은 아닙니다.
수행정진을 전제하는 수행법이므로 몰록 집중하고 기도하며 발원하는 것을 반복하다보면
자연적으로 깨치게 되고 자기 자신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보는 관점으로 확보되는 과정이
생생하게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접근법으로서는 매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흘러나간 것이니
단점으로 지적할 만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도 아울러 소개합니다.
하지만 불교를 믿지 않거나 인연이 없는 분들은 더우기 이해가 도통 안가는 것이고 무신 만신처럼
오해하는 일도 일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성향으로만 불교관을 마주하기 때문에 불교용어의 개념을 잘 몰르게 흘러나와
미신이니 만신이니 하고 논리없는 비난성으로 치부되기가 쉽게 되어 버린 경향을 말합니다.
퍼스트 모더니즘의 이원론 사상에 천착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분들에게는 더욱 더 이러한 비판이 심합니다.
그러므로 개념적이나마 아주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는 선상에서 더 높은 곳을 추구할 수
있는 인간의 인식정도로서 신도가 되거나 현대인이 된다면 마땅하게나마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야 불교를 믿던지 안 믿던지 나름대로 견햬의 선택이 션명해서 몰상식한 이해없는 관념에서는
벗어 날 수 가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요.
사실 불교는 수십년간 믿은 신도 도 이렇듯 개념이 모호해여 어디가서도 무엇하나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가 없게 되는 경우가 많읍니다.
하지만 타인에게 이를 설명할 수 없어도 그럴수록 자기 주관적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더욱더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은 있읍니다.
괜히 어설프게 알고 내 잘났다 하는 것 찾지말고 속닥하게 자기 집안 가사를 영위하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지니고 계속 수행하는 편이 좋은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원래 저처럼 뭣도 모르는게 오질만 넓어서 이것 저것 참견하고 말만 무성해지는 것 보다
차라리 그편이 더 나을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하나 어떤 일편이 옳다라는 장담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살아내는 당사자만이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충실한 것 아니겠읍니까?
이런 경향으로 인하여 이런 말이 있읍니다
기독교 믿는 사람은 말을 우애 그렇게 잘하는지...
성경말씀을 전하는 목사님들은 말을 참 잘합니다.
말로서는 조선의 땅 전부 하루아침에 다 꿀꺽 하도 다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말을 잘 하십니다.
그렇지요?
불교 믿는 사람은 말을 잘 못 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진리가 없다는 보편적인 가치관도 함축하기 때문이며
불교용어가 하도 애매모호하게 자리를 깔아놔도 말을 잘 몬하게 하는 목적도 있기 때문이지요.
이해가 가십니까?.
그러므로 말 잘한다고 진리를 다 보고 안다라고 할 수 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말 잘 몬하고 발표력 떨어진다고 기죽을 일 전혀 없읍니다.
말은 꺼내면 대부분 자기 잘난 것이고 자기 옳은 것만 말하려 하는 것이 태반인데
전부 다 잘난것이가 같이 잘난것이 평등성지이고 진리이니 말 몬 한다고 벨 걱정할 필요는 없읍니다.
저도 결국은 매 한가지입니다, 그래 니 잘났다 라는 말 많이듣읍니다. ㅎ
사실 본인 정도면 불교를 믿는 입장인데 말이나 글이 유별나게 많이 하는 편이지요.
사실 진리의 면으로 불교의 입장으로 진리의 면면을 기준하여 보게되면 제가 말하는 모든 것도 전부 맹탕입니다.
진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도 49 년간 맹탕 인 말씀만 하셨읍니다.
저 역기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여 살을 부쳐 소개할 뿐이므로 제 말은 사실을 전혀 없읍니다.
전부 부처님 이름으로 소개할 뿐이지요, 이 맹탕 하신 말씀을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 말에는 진리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도 말입니다. 49 년간 허벌나게 말씀만 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맹탕 같은 말만 하신 것 또한 주어져 있기에 그래도 법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도 있어야 합니다.
냄새안날 정도로 입 꾹 다무시고 말씀이 하나도 없었다면 부처님 법이 지금 존재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이라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단지 사람으로 살아내는 전제조건에서만 말입니다.
인간의 전달매체는 말은 필요악이다 할 수 있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49 년간 말씀하신 분량을 다 읽고 이해하기로 덤벼들자면 1000 년은 더 살아도 모자랍니다.
얼매나 양이 많은지 말입니다. 제가 불교를 한 삼십년 공부했음에도 아직도 태반을 몬 읽었으니까요
그러므로 불교의 역사가 2,500년이 지나가지만 일반적으로 착하면 복받고 악하면 죄받는다 이러한 개념선상에서만 머물러 있을 뿐 입니다.
그러므로 스님들께서 이러한 까닭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주시지 않는 까닭이 있읍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냥 들어서 아는 것으로 불교를 접근해서는 아니된다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씀에 대하여 읽는 것으로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몸소 경험하고 실천하고 스스로 궁리해서 이 법도를 잡아내라 하시는 수행법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미리 잘 안 가르켜 줍니다. 그냥 인연이 되면 스스로 알겠지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불교의 특징입니다. 고로 불교의 특징은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궁리를 해서 최선을 다 하는 사람만이
잡아낼 수 있다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고로 불교는 포교방법으로서는 셩경말씀 전도하는 분 들보다는 아주 젠병입니다.
몸소체험하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궁리하고 염불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부잘하는 학생이 예습 복습 그리고 강의시간에 단 한문제라도 안 놓치고 열심히 공부하는
실천력이 없음에도 그냥 공부를 듣기만 하고도 잘하는 학생 보았읍니까.
불교공부도 자꾸 일념으로 반복해서 암송하고 염불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집중되고
진공상태가 되어 삼매지경에 빠져 정신이 맑아지고 어떤 아우라지가 탁 서게 되면
그까짓 개념정도의 이해는 안해도 다 깨침의 지경을 넘어서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고로 불교를 개념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선상에 머무는 것도 잘못된 수행법이긴 한 것입니다.
하지만 궁리를 해야 하므로 현대문명속에서는 보편적인 이해도를 전제해야 수행법이 더 빠르고
몰록 깨치는 기회가 많게 작용할 수 있으니까 개념을 이해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도래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읍니다.
우리들이 하는 이 말도 부처님 법으로 보면 아우성인 것입니다.
고로 모든 세계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그리고 특히 사람들이 내는 말 소리가
전부 아우성으로 돌아다니기에 이를 모두 다 보고 아는 분을 관세음보살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수경의 개념을 이해하기로 한다면
"천개의 손을 지니신 관세음보살님" 요렇게 됩니다.
아니 이게 말이되요? 손이 천개라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있어?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보살이라는 것도 사람을 형상화 한 방편 이지만 우엣든간에 사람기준으로 보살 된 분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천개라는 1,000은 하늘을 칭하는 중국의 한자 天(천) 을 의미하고 공간으로 본다면
십방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알아도 십방을 모르면 안되는 그런 논리를 말함인데
동서남북 팔방과 상하 가 주어진 공간 십방의 모든 공간에 돌아댕기는 소리는 다 잡고 다 본다는 것을 천개의 손 으로 의인화 한 것입니다.
결국 십방의 허공에 돌아다니고 서성거리며 아우성하는 소리를 모두 다 보시는 보살님을 찬탄하는
게송이 천수경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일단 됩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님이 십방의 중생들을 위해 허벌나게 노바닥 돌아다니는 게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 있은데 공간전체가 마음자리이기 때문에 적적 부동하게 앉아 계시는데
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 중생들 마음안에도 척 하고 앉아 있으므로 울리는 목소리를 다 보고
다 알고 계신다 이렇게 여기시면 맞는 것입니다.
안과 바깥 어디에서 다 상주하시는 소리를 다 보고 다 아는 보살님을 관세음 보살님이라 이름합니다.
소리는 왜 공간에 돌아다니는가? 부처님께서 6 년 고행끝에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탁 깨칠때
온 세계가 다 진동으로 울리는 것을 보신것입니다. 이와 같읍니다
진동은 무엇인가? 소리입니다.소리는 결국 아우성이지요, 서로 소리끼리 부딧힌다는 것인데
이렇게 소리가 섞이니 울렁거리는 파도 같은 것입니다.
속이 불편하면 속이 울렁거려 꼭 토할 것 같지요?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타 보십시요. 울렁거려 속이 난리가 나지요.
빛이 발생하는 양태는 충돌입니다, 천지창조는 지수화풍이 서로 충돌하는 운동으로 발생하는
창조세계가 되므로 소리가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파도치며 바다가 울렁거리기는 것도 수와 화가 충돌하거 섞이면서 바람이 일이 때문에 소리를 내고 울렁거리는 파도가 생기는 것입니다, 바다는 언제나 해조음이 있는 연유가 그것입니다,
이 울렁거림은 소리로 기인하는 것이지요.
지 수 화 풍 중에 수진과 화진이 기압차이든지 , 온도차이던가에 서로 다른 극대극이 부딧혀
충돌하는 현상으로 빛을 만들어 내기때문에 부딧히는 순간 빛과 소리를 함께 일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사람사는 세계를 娑婆(사바) 세계라 이름합니다.
娑(사: 모래 沙+계집 女) 婆(파: 물결 波+계집女) 를 말합니다.
모래 라 하는 것은 물에 씻겨진 작은 알맹이 같은 것을 말하는데 음양이 섞이 음의 세계인
생명으로 몸을 만들어 (토진) 아주 모래알처럼 적은것이 무수하게 온 공간에 생명으로 주어져 있는데 파도물결 처럼 울렁거리며 아우성대며 서로 상대하여 살아내는 세계를 사바세계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든것이 물결치는 파도처럼 울렁이며 울렁증을 가지고 서로 밀고 당기며 살아내는
아우성의 소리로 가득하다 이러한 뜻이 됩니다.
아러한 의미로서 빛 과 소리가 만생명성품들이 (중생) 다 지니고 이를 운동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빛을 보고 소리를 다 보는 분을 관세음보살님이라 하는 것이고 부처님 를 두호하시고
중생의 이러한 사바세계를 제도하는 비서실장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석가모니 여래 장법으로 중생의 빛과 소리를 보고 중생을 인과응보에 맞게끔
제도하시고 보살펴 주시는데
십방에 상주하는 생명성품은 모두가 같음을 행하니 그 같음에 의하여 장엄하고 확실하고
인연으로 하여 모습을 나투게 해 주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갑돌이와 을돌이가 있다 합시다.
갑돌이와 을돌이는 서로 같다는 것을 전제하는 관법을 여래장법이라 합니다.
같지 않은데 왜 갑돌이가 을돌이를 같다고 할 까요?
원래 갑돌이와 을돌이는 하나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소개한다며는
갑돌이는 을돌이겉천 모습만 보거나 행위하는 것만을 보고서는 을돌이를 증오하는 생각을 낸다 합시다.
이를 중생이 보는 관점이지요,
그런데 을돌이를 증오한다는 생각을 내자 마자 갑돌이는 을돌이는 증오한다는 생각을 자기 몸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그래야 생각을 그렇게 같음으로 내기 때문입니다.
갑돌이는 을돌이와 같아진것입니다, 갑돌이가 을돌이를 보고 증오한다는 생각을 작용하면 동시에
을돌이는 반작용을 하여 갑돌이의 생각을 비추어주고 가져가게 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를 생각만큼 을돌이가 관세음보살로 나툰 것이지요.
갑돌이는 을돌이의 증오하는 것과 같음을 행한 것입니다.
이를 같다 라고 합니다, 이를 여래작용이라 합니다.
을돌이는 가만히 있었는데 생각을 갑돌이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자기 주관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을돌이는 가만히 있었으니 금강좌를 틀고 적적부동하게 가만히 있는 존재일 뿐이지요
단지 갑돌이가 생각을 그렇게 내도 한도에서는 말입니다.
그런데 을돌이에 대하여 갑돌이가 아닌 다른 999명이 제각기 을돌이를 생각하는 견해는 어떻할까요.
인연마다 계기마다 맺어진 정분마다, 일 형때에 따라 목적함에 따라 개별적으로
다 다른 생각을 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을돌이는 단지 하나이고 세상에 태어나 자기 하나만 스스로 행하는 데.
다른 상대들 1,000명들이 각기 을돌이를 보면 을돌이라는 존재가 1,000 개나 돌아다니는 것과 같읍니다
각자가 생각이 다르기때문에 생각만큼 을돌이는 존재로 나투는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무엇이 진짜 을돌이가 되겠읍니까?
을돌이 역시 입장 바꾸어 갑돌이나 다른 999 명의 객관적으로 생각을 내면 역시 상대방은
가령이야기 한다면 1,000 개의 생각이 돌아다니는 것이 됩니다.
줄여 보게되면 전부 빛의 운동이고 소리로 울렁증에 들어 착각하여 모순을 담는 부족함에
의해서 입니다.
그렇지요, 자기가 보는 관점에 따라 상대방을 보고 생각이 달라지는데 이 생각이라는 것이
지수화풍 중에 수진과 화진이 부딧혀서 빛이 일어나고 소리가 생겨나는 동시에 생각을 하는
것이 생각의 정체가 됩니다, 그이후 운명이라는 바람이 불어댑니다.
그리고 이후 그 생각을 내는 데로 스스로 나투게 됩니다, 그 나툼의 작용에 말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를 말합니다. 말은 생각을 담으니까요.
그 말의 소리로서 주어지는 특징의 빛이나 소리종류를 다 보고 아는 분을 관세음 보살님이신데
갑돌이나 나머지 999명이 다 을돌이를 보는 관점에서 생각이 다 달라지는 그 생각을 관세음 보살이
다보고 다 알고 행하는 만큼 그렇게 나투게 되는데 이를 을돌이는 관세음보살님이 현신하셨다
하는 것입니다.
지구가 유독 하나인데, 78억명인구가 다 생각을 내어서 지구를 보므로서 지구를 보는 관점과
견해가 대부분 조금씩이나마 다 틀리고 차이가 납니다, 이를 차별세계라 합니다.
지구가 78 억개로 나투어 돌아다니는 세계를 사바세계라 이름한다 이를 말합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정의를 내려 판단해도 지구가 직접 되어보지도 못한 인간들이 아무리 판단해도
헛것인 것입니다. 지구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지구라고 하지 않읍니다.
지구가 자기는 지구라고 주장합디까?
그러믈 생각으로 보는 관점의 지구는 진리의 입장에서는 원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것이 원래 없는데 지구라고 생각을 내고 살아가고 그것도 인간숫자처럼 생각을
지닌 인간이 저마다 지구를 78 억개의 지구가 나투고 있는 꿈의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각자 자기들이 지구하나식 만들어 놓고 사는 것이지요.
이를 원효대사께서는 일체유심조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를 전부 마음이 다 만들어서
창조해 놓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를 망상의 세계라 이름하고 헛되고 헛되다 하나님게서 말씀하신것도 이 말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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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세계의 생명들은 모두 빛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맞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모습이나 생각이라는 것은
진리에 벗어난 허망함이므로 꿈의 세계와 같으니 원래 없는 세계이다 하는 것이지요.
오로지 진리는 빛입니다, 또한 빛이 발생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의 본처를 볼대 빛을 보는 것과 같읍니다..
나중에는 본래면목이라는 이름조차 없읍니다, 모두가 본래면목이니 말입니다.본래면목이라 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본래면목을 억지로 말로 한다면 "중도" 라 하는 것이며, 불성이라 하고 성령이라 하는 것입니다.
같음이 온다라는 여래이고 오! 같음이여 하는 여호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천수경은 소리를 내는 말을 잘하라 고 하는 진리를 말씀하시는 경전이 됩니다.
고로 입을 깨끗하게 하라는 " 淨口業眞言"(정구업진언: 입을깨끗하게 하라는 진리의 주문) 이라 하는 것입니다, 곧 생각을 좋게 하나임을 행하는 착한 생각을 내라하는 것인데 이를 "수리수리마하수수리사바하" 라고 하지요.
내 입을 깨끗이 하자 내 입을 깨끗히 하자 이렇게 해도 됩니다, 하지만 노바닥 내 입만 탓해야 되겠읍니까?
모든 중생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깨끗히 하자는 암호를 만들어 낸 것이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은연중에 착한 마음을 들어내는 밀어를 창시한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갑돌이가 을돌이보고 당신은 진짜 부처님이구나, 진짜 보물같은 영원한 생명성품으로 빛을 노래하는
천사구라 하고 생각을 내면 그 천사같은 을돌이가 갑돌이 몸으로 동시에 가서 천사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관세음보살이 동시에 알아채리고 갑돌이가 천사라는 사실로 나투게 되는 것이고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중생으로서 하나의 부처님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천수경이란 이름을 일반적인 시선으로 직역해서 해석한다면
이를 千手經(천수경) 이라 하는데 손이 천개나 되는 경전이라 하는 해석으로 직역 할 수가 있어도.
이렇게 손이 천개나 달린 주체자는 과연 누구인가 하고 물으신다면 십방의 공간에 소리나 빛을 다 보고 아는 觀世音菩薩摩訶薩(관세음보살마하살)이라고 대답할 수 가 있어야 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바로 아래에 (우리들도 부처라는 것은 매 한가지) 직속비서실장으로 실제 세속세계인 사바세계를 제도하게 하는 보살을 내 마음속에 안치하고 지휘하는 것과 매 한가지인 큰 보살님이 상주해 계시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 휘하의 가장 굵직한 직속비서질장들은 총 4 분의 보살마하살이 있읍니다.
문수사리보살 (지혜의 보살)
보현보살 (인과보의 응보보살)
지장본존보살 (공덕의 보살)
관세음보살 (큰 대비심을 내는 보살) 이지요.
이 네분에 대하여 전부를 개념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불교의 전문적인 법회나
특정한 소속체에 들어가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므로 차치하고
내 마음속에 틀림없이 언제나 상주하고 계신다 라고 믿음을 내야 하는 것이며
이치나 실제로 그러한것을 믿어 지니는 것을 불자 제자라 이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이 글을 느닷없이 쓰는가 하면은 "길없는 길을 가겠다" 는 것을 거론한
사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것도 인간세계에서도 국내에 국한하는 정치를 행사한 세상삶의 목적률을 지닌
사람이 "길없는 길을 가겠다" 라고 정치를 하겠느냐 묻는 대답에 말한 것이
그 내용이라서 소개한다 이 말입니다.
이 천수경의 경전 내용이 이런 내용이 있읍니다.
願我速會無僞舍(원아속회무위사)!
나는 속히 무위의 집을 만나기를 발원합니다.
이 내용은 좀 이해도가 쉽게 말하자면
"나는 속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살기를 발원합니다 "요렇게 되요.
관세음보살은 그냥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추어주기만 하면 되는 분이시지요.
내 마음에 금강좌를 틀어 빗과 소리를 다 보고 듣는 부처님을 대위하여 실제를 작용하시는
관세음보살님은 무위의 집에서 거주하시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래도 좀 이해가 어렵다면 좀더 쉬운말로 의역하자며는
나는 속히 코구멍도 없고 입이 없어도 살수 있는 곳으로 빨리 좀 갔으면 하는 발원을 합니다
이렇게 해의할 수 도 있읍니다.
또 마음이라는 것이 코구멍이 있읍니까 입이 있읍니까? 공간이 그런게 있는가 하는 것과ㅓ
같은 처소를 말하는데 이를 무위의 집이라 하는 곳입니다.
원래 상 이없는 생각이 없는 허망함이 없는 길에 들어선 경지를 무위사 라 이름한다 이것입니다.
지구를 생각하는 인구가 각자 하나식 지국 78 억개를 짊어지고 생각을 내는 것은 헛것이므로
생각으로 내는 지구는 하나도 없다는 범주의 진리처를 말합니다.
이런의미를 말하지요.
이것도 좀 이해가 어려워서리 다른 쉬운말 없드나? 한다며는
나는 속히 몸을 받지 않고 몸을 가지지 않아도 영원히 살아지니는 곳을 만나기를 발원합니다.
몸을 없어도 늘 깨어있고 공간에 상주하여 빛을 다보고 소리를 다 보는 (파동) 자리를 말합니다
이해좀 가시는지...
이러한 "원회속회무위사" 는 불교 의 믿음과 가르침의 최고의 목적을 달성하는 생노병사에
벗어나는 해탈도를 "무위사" 라 하는 것이며 이를 말씀하시는 경구가 되며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자리가 됩니다.
고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스로 적적부동하며 늘 깨어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본분사로 하는 최상의 지표자리가 되는데
이를 열반삼매라 하기도 하고 해탈 이라고도 해요.아무것도 안해도 다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를 해탈도를 성취했다라고 하고 해탈도를 성취했다는 생각도 지우는 자리의 경지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열반삼매경에 들어선다 이것이지요.
이거때문에 스님들이 머리깎고 산속에 들어가셔서 노바닥 수행하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행하시어 성불하신 보리심 을 샘풀로 받아들이고
구도자로서 수행하여 나도 부처님처럼 되겠다는 최대의 목척 처를 말해요.
그러므로 우선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해야 하는 것이지요.
영원한 삶의 진리처를 보는 순간 을 오도하는 찰나!.
그러므로 절을 "사찰"이라 하지요" 찰나지간을 잡아 땡기는 마음상태가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라는 생각도 놓아버리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이를 무위의 도 라 이름하는 것인데
어렵습니다, 쉽다고 여기면 한 순간에 다 이룰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무시 무시한 내용을 말하는 것을 " 길없는 길을 걸어간다"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지요.
구도자 중 가장 유명한 근대사의 경허스님의 오도송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의의 도를 성취하신 명언이 있읍니다
無鼻孔(무비공) !
" 원래 참된 나라는 존재는 원래 " 코구멍이 없구나" 하고 오도를 경험큰스님께서 하신 것이지요..
우리나라 근대사에 가장 유명한 선사이십니다.
전북 여산 봉동읍에서 태어나신 분이신데
如山(여산) 이라 우리나라 조상인 기자씨게서 한반도에 건너오시어
여산에 집성촌을 두시고 삼한을 열어놓은 분을 말하고 그 집성촌의 지명을 말해요.
艮괘 의 동이족이라는 칭호가 붇게 된 기원의 발원지이요. 산이 艮山 을
위미하는 것이며 동쪽의 산이니 한반도를 동이족이라 이름한다 이 말씀입니다. 빛을 논하는 빛이 출현하는 동쪽의 민족....
이를 속성으로 止(지) 라 멈춤의 경지의 간괘 속성으로 산신의 선경사상을 창시하신 천부경의 원로 기자씨 를 말합니다.
그 쪽 지방에서 태어나신 분이 경허스님이라 그 인연이 심상치 않아요.
無爲의 道(무위 의 도) 라 길이없는 길을 가겠다는 의미를 맨처음
오도 로 하신 것이 "무비공"이 경허스님의 전매특허이고 의역하면 길없는 길을 말하는데
갑자기 조국이가 이를 양산의 평산책방에서 전 대통령 문재인을 만난자리에서
한 것 같아요.
사실 이러한 구도자의 화두와 진리의 최 첩경을 인용하여 책으로 발간한 분이 계시는데
" 길없는 길"이라는 의미로 책을 쓴 작가가 한분 있어요.
최인호 작가의 "길없는길 "이라는 구도적인 소설을 써서 베스트 셀러가 된 책을 말합니다.
누가 조국이 한테 물었어요.
정치 를 할 생각이 있느냐고?
그라이까 조국은 "길없는길을 가겠다" 고 한 것인데....
이 의미의 무위의 도를 알고난 다음에 말씸을 하는 것인지
이 분이 최인호 책에서 글을 빽긴것인지.
도대체 맥락이 맞지 않아요. 안그런가요.
가족사의 힘든 고난의 행진중에 있는 것은 사실이라 느낌은 각별하겠지만
구도처의 화두를 해결할 만한 분은 아닌것 같은데
이러한 말을 세상사에 던진다는 의미가 맥락으로 어울리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인생길은 말입니다, 길없는 길이 있을 수 가 없어요.
구도자가 되겠다는 것은 아닐것이고
정치라는 것은 인생사의 부분적인 로정으로서 목적을 지닌 어떤 가치를 실현하기위한 곳인데
코구멍없는 길을 걸어 가겠다?
지금 죽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열반하겟다는 것인지 도대체 맥락이 안 맞는아
이 말입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는 하나의 진리의 테두리로서 토양이 되는 경구로서 간직할 수 는 있어도
수단으로 인위적인 생각이나 견해의 발로로서 전개하는 팩트로서 작용해서는 아니되는
말이다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정치가가 절대로 이러한 O 의 무위의 도를 논해서는 아니되는 것이지요.
한가지를 말해서 성직자나 수행자가 정치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가정을 꾸린다 하며는 잘 할 것 같아요?
나라 망치고 집안맟이고 돈 버는 것은 꿈도 못 꾸는 것이지요
양산이라는 지명은 원래 艮卦 입니다.
그침의 자리이고 빛을 논하는 지명으로 양산인데
책방의 이름도 평산이라 지은것으로 압니다.
오성합리화의 감성적인 정치관은 위험하다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의지를 심은 장소가 평산 이라 할 수 있는 것 같읍니다.
물론 전 문재인 대통령이 나라를 망치고자 정치를 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나름대로 장점은 있겠지요.
민족사의 각자 다른 견햬와 사상에 심취하고 이것이 정당하다는 사실로
반전하고 경험측과 새력들간에 정의적 관점으로 실현하겠다고 시도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반명에 국민들은 이해 할 수 없는 경지에 있다라는 의사표시나
마찬가지 입니다.
진리와도 너무 동떨어진 정치적 전력에서 찾은 맹탕적인 허구사상을
초현하게 전개하겠다는 이상한 감성발로로서만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자리에서 "길없는 길을 걷겠다" 는
중생들은, 백성들은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는 그러한
경지를 깨친 것 처럼 오성홥리화를 가지고 다른 경지에 들어서서
국민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수준을 알기나 하는가 하는 식으로 또 말을 맘대로
한 것입니다.
실제적인 나라의 경제전반과 안전, 역사인식을 토대로 인간으로서는
그 길을 뚜벅 뚜벅 걸어가는 전제아래에서 구도나 진리처름 마음삼고
가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도가 무엇인지, 무위적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들은 말만 하면서 모순을 드러내는 장면이 아니였읍니다 합니다.
관세음보살님처럼 모든 빛을 다 보고 알고 국민의 소리를 다 듣고 보는
경제에 계신분이라서 평산에 가서 책방열고 조국이가 지금
어떠한 위치인데 거기가서 " 길없는 길을 걷겠다 " 하는지 이해가 전혀 아니가는 것입니다.
정치는 감성으로 흐르면 위험해집니다.
패단이 있고 모순률이 있어서 이성적인 관점으로 철저하게
원칙으로 역사인식을 선행하면 지표를 지켜야 하는 것이
정치의 걸음걸이라 생각합니다.
현 좌파진영이 성공하려면 첮째 감성적으로 흘러서는 아니되고
둘째 정치를 시험적으로 생각해서도 아니되고
세째 원칙과 공정을 지키는 전제하에 자기 정치를 실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넷째 역사인식이 공정해야 합니다.
지금 조국씨는 길없는 길을 가겠다는 말에 대하여 또세상에다 말 빛을 진 것입니다.
역사적인 로정으로 실제로서 모순률을 함축하여도 그냥 걸어나가는
로정에서 진리를 향하는 실천력을 합리적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 정치임을 알아햐 하는 것입니다.
또 세상을 흩뜨릴까바 걱정은 되지만 . 무위의 개념을 안다고도 할 수는 없으니
정구업진언 처럼 국민모두를 아울러 하나를 행하는 이치를 깨달은 후에나
그 바탕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장문의 길을 썼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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