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문 날의 삽화(揷話) 3
박 완 서
나에게는 도자기를 하는 딸이 하나 있다. 요새 흔한 취미나 여가선용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어엿한 명문 대학 도예과를 졸업하고 꾸준히 작업을 하고 있으니, 이왕이면 우아하고 듣기 좋게 도예가인 체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으련만 그 아이는 곧잘 ‘사기장이’ 라고 자칭하고 있다. 하긴 개인전은 물론 그 흔한 공모전이나 그룹전에도 한번 출품해본 적이 없으니까 도예가라기엔 자격이 좀 모자랄지도 모르겠다.
그 방면에 욕심이 나는 건 그애보다는 나여서 국전이나 이름 난 공모전의 광고가 날 때마다 은근히 충동질을 해보지만 그 아이는 사기장이가 넘볼 일이 아니라고 막무가내였다. 겸손을 떠는 것 같지도 않게 완강한 걸 보면 그 아이 나름으로 도예가와 사기장이 사이에 서로 넘볼 수 없는 금을 긋고 있는 듯했다. 나는 내 딸이 도예가연하면서 한가락 하는 여자로 지냈으면 하는 허욕을 단념 못 하는 푼수로는 도자기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학교를 졸업시킨 것밖엔 작업실 하나 마련해준 게 없었다. 물레는 하나 사주었지만 전기가마네 가스가마네 하는 비싼 물건은 엄두도 못 냈고 딸이 그런 욕심을 내비친 적도 없었다. 작업실은 넓은 단독주텍에서 사는 친구네 지하실을 뜻이 맞는 동창 몇이서
빌려 쓰고 있었다. 뜻이 맞는다는 게 사기장이 이상의 욕심은 없는 동호인끼리라는 뜻은 아닌 듯싶은 게 그중에선 국전에 입선하거나 공모전에 특선을 해서 축하를 받는 친구도 해마다 한두 명씩은 생겨났다. 내 딸이 그런 친구 얘기를 하면서 부러움이나 시샘 같은 걸 억지로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속이 좀 상했다. 저게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재능의 한계를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려니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딸애는 공부를 중간쯤 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예능 방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최소한도 E대학은 보내고 싶은 내 욕심 때문에 고3 때 미술 지망으로 바꾸었고, 그해의 추세가 데생의 기초가 약한 지망생들이 도예과로 몰리는 경향을 덩달아서 탄 게 합격의 과녁을 맞추게 된 데 불과했다. 그야말로 운수가 좋아서 딴 간판이기 때문에 거기 자족하지 못하고 졸업하고 나서도 시난고난 전공의 일손을 놓지 못하는 그애가 대견하다기보다는 딱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도 문득문득 허욕을 부리게 되니 정작 딱한 건 내 쪽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도예가연할 가망도 없다면 도자기 하는 게 곁에서 보기에도 할 짓이 못 되었다. 성형에 들어가기 전에 흙을 밟고 온 날은 작업복도 말이 아니었지만 기운도 탈진해서 막노동판에서 모군을 서고 돌아온 것과 진배없었다. 흙을 밟는 게 어느 만큼 힘이 들고 또 어떤 모습인지 본 적도 없고 그애 역시 자세한 얘기는 안 했지만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한옥 기와지붕을 고치려면 진흙이 많이 든다. 푸살푸실한 진흙을 부려놓으면 ‘데모보 라고 불리는 막일꾼이 물을 적당히 봇고 개놓은 진흙 위에 가마니를 덮코 정강이를 걷어붙이고는 맨발로 올라서서 들입다 밟아서 흙을 차지게 만들었다. 고루 차지게 밟은 진흙을 애녀석 머리통만하게 뭉쳐 지붕 위로 올리면 노련한 기와장이는 만져만 보고도 제대로 밟았나 덜 밟았나를 알아맞히고 덜 밟았으면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도자기 만드는 흙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모양이었다. 원 세상에, 내 딸이 그 희고 매끈하고 가냘픈 종아리를 걷어붙이고 그 짓을 하다니. 예전에 사기장이가 왜 바닥 천민의 생업이었나를 알 것 같았다. 복중에도 외씨 같은 버선발이 치맛자락 밑에서 보일락 말락 아장걸음을 걷는 게 부녀자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미덕이던 시절에 딸년이건 여편네건 닥치는 대로 종아리를 걷어올리고 맨발로 흙을 밟아야 밥을 먹을 수 있는 게 오죽한 천민이었을까는 뻔했다.
“대학까지 나와 예술을 한다는 애들이 꼭 흙 밟는 일까지 해야겠니? 기와장이만 돼도 그런 일은 데모도한테 시키던데 너희들도 그런 허드렛일은 사람을 사서 시키면 안 되겠냐?”
언젠가 이렇게 권해본 적도 있다. 사람을 살 것도 없이 밟는 구실을 해주는 기계도 있고, 기계적으로 밟는 과정을 거쳐 당장 성형할 수 있게 돼 있는 흙도 판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런 고생을 했어? 미련한 것. 많이 비싸냐? 많이 비싸도 그렇지, 아낄 게 따로 있지, 명색이 예술을 한답시고 그만한 밑천도 안 들까?”
막도자기가 얼마나 싸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지라 나는 허덕이며 희떱게 굴었다. 그때 딸애는 아득한 시선오로 나를 흘긋 한 번 쳐다보고는 짧게 대답했다.
“흙 밟는 맛에 도자기를 하는걸요. 아니면 벌써 그만뒀을 거예요.”
나는 그애가 첫애가 아니기 때문에 자식들이 부모의 소망과 꿈을 배반하고 세상살이의 독자적인 방법과 생각을 갖기 시작하는 갖가지 수법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때처럼 무안하고도 괘씸해보기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작업실에서 줄창 미장이 데모도처럼 흙만 밟는 것은 아닌 모양으로 마침내 구워낸 도자기를 집으로 들여올 적이 몇 달에 한 번씩은 있었다. 많이는 백 점이 넘을 적도 있었고 아무리 적어도 오륙십 점은 되었다. 실패율이 거의 없는 가스가마를 빌려서 굽는다지만 초벌구이 재벌구이를 거치는 동안 금가고, 내려앉고, 비뜰어지는 게 생겨나게 마련이어석 반타작이나 될까 말까라고 했다. 금이 가거나 모양이 망가져서 못 쓰게 되는 것 말고 마음에 안 들어서 그 자리에서 깨뜨려버리는 것도 적지 않다는 것도 무슨 말끝엔가 얼핏 들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집에까지 가지고 들어온 물건들은 제 딴엔 그래도 잘 빠졌다 싶은 것들일 텐데도 딸이 그때처럼 심란하고 허전해 보일 적도 없었다. 그러건 말건 나는 그애가 손수 빚은 올망졸망한 그릇들이 포장에서 풀려나 제 모습을 드러내는 걸 지켜볼 때가 제일 즐겁고 대견했다.
어머, 이 빛깔 참 잘 빠졌다 얘, 이 선은 기가 막히구나, 어쩌고 내 기분에 들떠서 챤사를 해봐도 그애는 더욱 침울해질 뿐이었다. 그 애가 가까스로 참고 있는 건 무엇일까? 재능에 대한 절망일까? 어미의 지칠 줄 모르는 헛된 욕망에 대한 혐오감일까? 이런 달가워도 안 하는 찬사가 끝나면 나는 그것들의 용도에 대해 묻기도 하고 궁금해하기도 하는데, 내 딸이 칭찬보다도 싫어하는 게 바로 그런 질문이었다. 파는 도자기처럼 한눈에 찻잔이면 찻잔, 대접이면 대접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물컵으로 쓰기엔 너무 두루뭉술하고 손잡이도 마땅치 않길래 꽃을 꽂아보면 그럴듯해 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딸이 그걸 꽃병으로 만들었는지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대접으로 쓰려고 부엌 찬장에 얹어두었다가 막상 국을 뜨려고 하니 가상이가 몇 군데 패어 있는 게 볼씽사나워 슬쩍 치웠다가 나중에서야 그게 재떨이였을지도 모른다고 깨닫게 될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라도 만든 이의 의도를 알아맞힐 수 있는 건 몇 개 안 댔다. 나는 딸애가 그릇들에게 부여한 운명대로 그것들을 쓰고 싶었고 또 그렇게 하는 게 창조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용도를 종잡을 수 없는 그릇에 대해선 그게 뭔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 딸은 대답 대신 모욕당하고 억치로 웃는 것처럼 참담하게 일그러진 웃음을 웃거나 “어머니 좋을 대로 생각하시면 되잖아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만들었단 말예요.” 그렇게 싸울 듯이 대들고 나서 어깨를 탈골이 된 것처럼 축 처뜨리기도 했다. 그렇담 저까짓 것들이 순수한 예술품이란 말인가? 예술이라면 질색인 주제에…… 나는 느딧없이 딸이 아니꼬워져서 속으로 이렇게 뇌까리곤 했다. 아무 생각도 안 했다는 게 예술가들이 흔히 말하는 무사(無私)의 경지 같은 걸 말하려는 것 같아서 였다.
이것을 뭣에 쓸 거냐는 물음이 질색인 대신에 그것들을 뭘로 쓰든지 딸애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재떨이를 몰라보고 국대접으로 쓴다고 해도 그애는 끝내 모른 체했으리라. 그 그릇들의 용도에 대해선 당초의 괴팍스러움도 교만함도 없어서 그저 무엇으로든지 소용이 닿는 것만 감지덕지하는 듯했다. 그것들을 보고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집어주는 것도 내 마음대로였다. 누가 가져갔대도 딸은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우전 내 눈에 드는 걸 몇 점 골라내고 나서 시집간 큰딸이나 세간 난 큰며느리를 불러서 쓸 만한 걸 골라가도록 했다. 친구를 일부러 부르는 적은 없었지만 우연히 놀러 왔다가 보고 탐을 내도 곧잘 인심을 쓰곤 했다. 그러나 “잘 간수해, 너. 누가 아니, 내 딸이 유명해질
지. 그럼 그거 가보(家寶) 된다” 하는 말로 내 숨은 허영의 자락을 드러내 보이는 걸 잊지 않았다.
이렇게 저렇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나서도 으레 몇 점은 처지게 마련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문갑이나 장식장 위에다 늘어놓게 되는데 딸은 그때 또 한번 괴팍을 떨었다. 그것들을 일일이 수거해다가 산산이 박살을 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장식품이 되고 만 것들에 대한 딸의 응징은 신들린 것처럼 무아지경이어서 나는 엉뚱스럽게도 흙을 밟거나 성형을 할 때의 딸도 저러하지 않았을까 유추해보곤 했다. 그러나 이건 뭐냐, 조건 뭣에 쓸 거냐고 그 그릇들의 용도를 묻는 걸 제일 싫어하던 딸이 막상 실용가치에서 제외된 그릇들에 대해 그다지도 지독한 혐오감을 나타내는 심사가 무엇인지 내가 이해하기엔 좀 어려웠다. 대강 깨뜨려버리면 누가 주워모아 집착이라도 할 줄 아는지 딸은 부수고 또 부수어 산산조각을 내고도 부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제 딴엔 흙으로 돌아가게 할 작정인 듯했으나 예리한 사금파리만 한 무더기 만들어놓고 탈진을 해서 손을 놓곤 했다. 딸이 손을 다칠세라 나는 그것들을 도맡아 치우면서 속으로 어려워, 어려워, 소리를 수도 없이 삼키곤 했다. 그 딸도 시집을 가더니 도자기 일을 흐지부지 쉬고 있다. 여가도 없겠지만 그 괴팍을 받아줄 사람이 없어서일 거라고 나는 문득문득 고소해하기도 하고 서운해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마루에서 어찌나 극성맞게 뛰는지 안방 구들장이 다 들썩하는 것 같았다. 이어 비명인지 환성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날카로운 아이들 소리와 한껏 볼륨을 높여놓은 어린이 프로의 시그널 뮤직이 섞여서 들렸다. 아침방송의 어린이 시간이 시작되고 있다면 이른 시간이 아니기 때문인지, 그런 시끄러운 소리들이 삼십 분만 더 자고 싶은 나른하고 감미로운 졸음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좀더 즐기고 싶은 건 늦잠이 아니라 늙은이들만 사는 집에 손자들이 와서 잔 날 아침의 활기 넘치는 소요인지도 몰랐다. 나는 비몽사몽간에도 얼굴 하나 가득 인자한 미소를 띠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렸다. 문틈으로 할미의 동정을 엿보던 아이가 더 기다리지 못하고 할미의 잠을 깨우러 들이닥칠 차례였다. 계집애라면 손가락으로 할미 뺨을 찔러보거나 귓전에서 뭐라고 속삭이겠지만 사내녀석이라면 다짜고짜 몸으로 덮쳐 할미 갈비뼈를 결리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스멀대는 장난기를 이기지 못하고 실눈을 뗬다. 벌써 해가 높다란 듯 커튼을 통해 희석된 빛이건만도 방 안은 눈이 부시게 환했다. 어제던가 그제던가, 텔레비전으로 활짝 핀 진해의 벚꽃을 본 것은. 나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도 잔물결처럼 일렁이는 방 안의 밝음에 간지럼 타듯 몸을 꼬며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방문이 한 뼘쯤 소리없이 열렸다. 발목이 나오게 껑충한 청바지 가랑이가 먼저 들어오면서 문은 좀더 열렸다. 시끄러움이 멎은 대신 아이의 억제된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아이의 빨간 점퍼를 건너뛰어 얼굴을 찾았다. 버짐으로 얼룩진 입 언저리, 콧구멍이 빤히 보이는 납대대한 코, 아둔한 것도 같고 교활한 것도 같은 눈, 불밤송이처럼 곤두선 갈색 머리의 까만 얼굴이 둘, 이층으로 겹쳐져서 안방을 엿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후닥닥 도망을 쳐버렸다. 부엌 쪽에서 밥 뜸 드는 구수한 냄새와 아이고 이 웬수야, 하는 만수네의 지친 듯한 나무람 소리가 끼쳐왔다. 아이들은 내 손자가 아니라 만수네의 손자였다. 나는 나른하고 달착지근한 비몽사몽간에서 깨어나 머리를 끌어올려 뒤통수에다 핀으로 꽃으면서 일어나 앉았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는 남편의 베갯잇에 어지럽게 달라붙은 유난히 새까만 머리칼을 일일이 뜯어내면서 우울하게 한숨을 쉬었다. 재떨이 엔 담배꽁초가 다섯 개나 구십 도로 꺾인 채 거품 같은 가래침과 범벅이 돼 있는 걸 보면 새벽부터 잠을 설친 모양이다. 남편의 퇴직 후 우리는 둘 다 수면시간이 자연스럽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걸로 바뀌어 있었다. 삼십여 년간 강박관념이 돼온 출근 시간에서 놓여난 해방감 때문이었는지 섭섭함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자정까지 텔레비전을 보았고 그러고 나면 출출해서 달고 말랑말랑한 생과자나 찹쌀떡 같은 걸로 주전부리까지 하고 입가심으로 차 한 잔 마시고 나면 거지반 한시가 돼서야 자리에 들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줄창 지켜왔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던 버릇이 바뀐 것을 남편은 이제야 어른이 된 것 같나고 말하곤 했다. 만수네가 손자를 데리고 들이닥친 후 남편은 그들과 더불어 늦게까지 텔레비전 앞에 턱 쳐들고 앉았기가 뭣 했던지 혼자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찍 일어날 만도 하건만 저 극성스러운 애녀석들 때문만 같아서 부아부터 났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꿰면서 거실로 나왔다. 그만그만한 연년생 형제들은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부엌에서 파를 다듬고 있는 저희 할머니 치맛자락에 엉켜붙어 칭얼대고 있었다.
“놔두고 아이나 봐. 손님 노릇 좀 하면 어때서 꼭 조석을 떠멜려고 그래.”
“나 한시반시 가만히 못 있는 거 알잖여?”
“그래도 그렇지 한 사날 놀고먹는다고 삭신에 녹슬까봐서?”
나는 이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사날이란 말에 알아들을 만큼 못을 박는 걸 잊지 않았다. 세 식구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지 오늘이 사흘째였다. 오던 날부터 빨래며 집 안 청소며 조석을 마치 줄창 해오던 일처럼 스스럼없이 해내고 있지만 그건 제가 좋아서 하는 거고 나도 할 만큼은 했다. 오던 날은 지녁 먹고 치운 후여서 라면을 끓여먹도록 했지만, 다음날은 불고기를 세 식구가 약비나게 먹도록 했으며 비록 막과자일망정 아이들의 주전부리거리도 한 보따리를 사다가 안겼고, 둘째날은 근처 상가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기장이랑 품이 넉넉한 걸로 옷도 한 벌씩 사입혔고 그만그만한 자식들을 기르는 딸네 아들네로 전화를 걸어 안 입는 아이들 옷을 모아들인 게 이불꾸러미만했다. 그만큼 해주었으면 오늘쯤 떠나는 게 예절이었다. 오늘도 눌어붙어 있다면 해줄 게 없었다. 갈 때 노자를 얼마나 주어 보내면 후하단 소릴 들을까 생각해놓은 액수를 만약 내일이나 모레까지 눌어붙어 있으면 반을 깎아야지 하는 심통이 날 만큼 오늘은 떠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영감님은?”
거실에도 화장실에도 남편이 안 보이자 나는 만수네에게 물었다. 만수네는 흐릿한 표정으로 마당 쪽을 가리켰다. 말수가 적은 건 여전했다. 하긴 수다스러웠으면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 말짝으로 더러는 잊어버렸건만도 생각나는 것만 얼추 긁어모아도 책으로 엮으면 열투 권 분량은 될 거라는 게 그녀의 기구한 팔자였으니까.
남편은 파자마 바람으로 마당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앞집 사이의 담이 금가 있는 게 볼 때마다 마음에 걸렸다. 해토 무렵이나 장마 때는 더했다. 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큰 금이 Y자가 삐딱하게 쓰러지는 형상으로 한가운데 나 있는데도 담은 앞 집 쪽으로도 우리집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수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설마 내 집 쪽으로 무너지랴 싶은 마음 때문에 양쪽 집이 다 못 본 체하고 있었다. 양쪽 집이 다 지어진 후 몇 번 주인이 갈린 집장수 집이어서 당초의 그 담을 쌓은 게 뉘 집인지 만약에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뉘 집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지 분명하지가 않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양가가 공동으로 새로운 담장을 쌓는 비용을 부담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거였으나 못 본 체하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쪽에서 덤터기를 쓸 것 같아서였다. 우리와는 달리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있는 앞집에선 더 신경이 쓰일 법한데 먼저 말을 안 꺼내는 걸 나는 지독한 집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니 나야말로 그 집이 조금만 만만해도 덤터기를 씌우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좀 물러앉으시 잖구…….”
표시를 해놓진 않요쩌만 담장이 우리집 쪽으로 무너질 때 어디까지가 위험하리라고 마음속으로 가상의 줄을 쳐놓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남편이 못마땅해서 나는 좀 얼뜬 소리를 냈다. 그리고 허둥지둥 슬리퍼를 꿰면서 그를 끌어낼 듯이 다가갔다. 남편은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던 것에서 눈길을 돌리면서 입을 벌려 웃었다. 틀니를 아직 끼지 않은 분홍빛 잇몸 때문인지 문득 남편이 천치처럼 보이면서 나는 내던지듯이 담장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담장 밑에선 예서 제서 칸나의 새싹들이 붓끝처럼 뾰족뾰족 흙을 쳐들고 있었다.
“토끼풀이나 좀 뽑아주시잖구요.”
양회로 처바른 장독대를 빼면 열 평이나 될까 말까 한 마당에서 담장 밑을 따라 기역자로 꺾어 대문 있는 데까지 띠를 두르듯 흙을 돋워 꽃밭을 만들고, 그 나머지에 잔디라고 깐 게 작년부터 극성맞은 토끼풀한테 잠식을 딩하더니만 올해는 아예 토끼풀 천지였다. 잔디는 돋아날 낌새도 안 보이는데 토끼풀의 어린 잎들은 잘잘 기름이 흐르게 푸른 빛깔이 어우러져 그들의 영토를 매일매일 눈에 띄게 넓혀가고 있었다.
“잔디면 어떻구, 토끼풀이면 어떻소. 푸른빛이나 보면 됐지.”
잇몸이 드러나게 웃을 때와는 달리 남편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파자마 바람에 틀니도 아직 안 낀 주제에 머리는 기름 발라 곱게 빗어넘기고 있었다. 정수리가 대머리 지고부터 그걸 가리기 위해 남편은 왼쪽 귀 위에 가르마를 탔다. 그러나 옆머리도 정수리를 넉넉하게 덮을 만큼 숱이 많은 건 아니어서 기름 발라 가까스로 덮은 정수리의 새까만 광택에 나는 담즙처림 쓰디쓴 혐오감을 느꼈다. 기름 바르지 않은 검은 머리가 무성하던 그의 젊은 날을 떠올리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나의 젊은 날도 그의 기억 속에 그렇게 함몰돼버렸다면 우리의 산 자취는 무엇이란 말인가. 남편의 그 특이한 머리 빗기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내 경대를 쓰지 않고 꼭 화장실 거울을 이용했다. 걸어잠근 화장실 안에서 염색한 옆머리를 한 올 한 올 아껴가며 공들여서 정수리에다 기름으로 늘어붙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대머리를 보는 것보다 몇 배 고통스립다는 걸 남편은 아마 모를 것이다. 서로 그런 것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근 사십 년을 해로했다는 게 과연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남들이 말하는 소위 복 많은 부부다운 사십 년 동안의 세월이 너무 하찮은 시각의 거스름에도 쉽사리 그 무의미함을 드러낸다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나는 허우적 대듯이 말했다.
“아침이 다 됐나봄디다. 들어 갑시다.”
안에서 아이가 기를 쓰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큰아이인지 작은아이인지 나는 아직도 그 녀석들의 목소리를 구별하지 못했다. 남편이 이맛살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부엌에 좀 가보지 그래요. 두 아이 건사하기도 힘들 텐데 조석까지 시켜먹으면 쓰겠소.”
“지 좋아서 하는 걸 어쩌란 말예요. 그것도 오늘 내일이에요. 더 있으래도 있을 사람들이 아니니 너무 그러지 말아요.”
나는 의식적으로 남편의 말을 곡해하려 들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나. 그래도 내 집에 온 손님 아니오. 행여나 저들이 우리한테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생각할까봐서 그러는 거요. 그건 도무지 당신답지 않은 짓이기도 하구.”
남편이 애원하듯이 말했다. 나는 남편의 소심한 눈길을 피하며 흥, 하고 얼핏 코웃음을 쳤다. 내가 나답지 않다는 남편의 말에 나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짓궂은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법 없이도 살 사람, 이 험난한 세상에 그래도 처자식 안 굶긴 게 신기한 사람 등이 그가 살아오면서 얻어들은 세평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낮추었다. 자기 집에 남아도는 선물꾸러미를 실어보내온 아우네 운전사에게도, 손자가 보고 싶어 비교적 자주 들르는 딸네 아파트 수위에게도 남편은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고 나잇값도 못하고 최고의 공대말을 썼다. 성경에선 도처에서 마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고 겸손하면 높임을 받는다고 설하고 있지만 세상 인심이란 그런 게 아니어서 그들은 금세 안면을 바꾸어 남편을 우습게 보기 십상이었다. 정년으로 퇴직할 때까지 한 번도 직장을 옮긴 적이 없는 그의 은행에서의 진급은 남보다 빠른 것도 더딜 것도 없었다. 큰 실수 없이 오로지 착실하기만 한 은행원의 거의가 다 그렇듯이 그도 부장급에서 퇴직을 했고 나도 거기까지가 남편의한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감이 없었다. 일찍부터 남편에게 그 정도밖에 기대를 안 할 수 있었던 것도 실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버릇 때문이었다. 장상까지 남편을 찾아간 적은 없었지만 그가 어떤 모습으로 아랫 사람을 거느릴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에 닭살이 돋곤 했다. 그의 노릇으로는 부장도 과분했다. 내가 이렇듯 사믓 냉철한 관찰자 노릇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그의 사는 방법에 완벽하게 순종해왔다고 여기고 있는 말투였다.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 걱정 말아요. 왜 점점 더 좁쌀영 감이 돼가시우?”
나는 한 번도 과욕이 깃들어본 적이 없는 남편의 얼굴을 난감한 듯이 바라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가 웅크리고 앉았던 자리에서 뭉그적대며 일어섰다. 무릎에서 녹슨 소리가 날 것처럼 굼뜨고 어설픈 몸놀림이었다. 철썩, 하고 네 절로 접은 조간신문이 땅으로 떨어졌다.
“아이들이 안경을 밟아서 그만 못 쓰게 만들어놓고 말았다우.”
그는 아침마다 한 시간이나 넘어 걸려서 통독하는 신문을 그렇게 끼고만 있었던 까닭을 이렇게 변명했다.
“그 비싼 안경을…… 이를 어쩌나. 테예요, 알이에요, 못 쓰게 된 게?”
“둘 다요. 테는 가운데가 뚝 부러졌으니 고칠 생각 말아요.”
“손모가질 잠시도 가만히 안 두더니 기어코 큰일을 저질렀군 저질렀어. 세상에 그게 얼마짜리 안경인 줄이나 알고 저 여편넨 저렇게 태평한가 원. 비싼 물건이 아니 라도 그렇지. 아무리 에미애비 없이 자랐기로서니 애녀석들이 대가리가 저만큼 컸으면 남의 물건 어려운 걸 알아야 사람이 되련만.”
나는 안에 남아 있는 세 사람의 객식구한테 참았던 넋두리를 마구 내뱉으면서 안으로 냅다 뛰어들어갈 기센데, 남편이 치맛자락을 잠아끌어 그 자리에 앉히며 자기도 허리를 굽혔다. 나는 그가 왜 그러나보다는 그의 힘이 세다는 걸 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손을 갈퀴처럼 만들어가지코 땅에서 시퍼렇게 돋아나는 걸 부득부득 쥐어뜯으며 말했다.
“토끼풀을 뽑아줘야겠소. 이놈의 토끼풀 극성에 잔디가 어디 남아나겠나.”
내가 아까 한 말인데도 생뚱스럽게 들렸다. 나는 그 생뚱스러움에 맥이 빠져 그 자리에 스르르 무릎을 꺾고 그가 하는 대로 토끼풀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흘긋 내 눈치를 보고 나선 흐물흐물 웃었다. 나는 화난 듯이 그를 외면했지만 연분홍색 잇몸은 말랑하게 흐느적대는 감촉으로 나의 속살에 늘어붙는 듯하여 진저리를 쳤다.
“그 안경테 과히 비싼 거 아니니 너무 아까워하지 말구려.”
아까와는 달리 틀니를 빼놓았다는 걸 의식 안 할 수가 없는 김 새고 노회한 음성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그건 큰애가 본바닥에서 사온 이탈리아젠데.”
나는 그에게 사납게 눈을 흘겼다. 그건 회사일로 처음부터 유럽 몇 나라를 다녀온 큰아들이 아버지한테 선물한 거였다. 큰아들은 그게 아주 비싼 거라고 했다. 큰며느리는 한술 더 떠서 그게 워낙 비싼 거여서 어머니 선물은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지 뭡니까 했다. 나는 내 선물값까지 보탰으니 기십만원짜리는 되려니 했다.
“아주 싸구려란 소리는 아니구 국산 중급품 값이면 살 만한 겁니다.”
“그럼 그애가 가짜를 사왔단 말예요, 설마?"
“누가 가짜랬소. 이탈리아제는 맞는데 대중적인 거지 다시는 못 만져볼 고급품은 아니더라구요.”
남편이 몹시 민망한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 당신은 아들이 못 미더워서 그걸 들고 다니면서 값을 물어봤다 이 소리 아네요? 어찜…….”
나는 덮어놓고 분해서 입술을 떨었다. 아들한테 선물받은 물건을 들고 다니며 진짜인가 가짜인가 값은 얼마인가를 물어보는 남편의 노추(老醜)와, 경멸과 연민으로 그 물건의 가치를 가르쳐주었을 젊고 반들반들한 점원을 함께 떠올린다는 건 고통스러운 노릇이었다. 나는 그 고통 때문에 아들 내외에 대한 괘씸한 마음조차 챙길 겨를이 없었다.
“설마 내가 일부러 그 값을 알아보러 다녔겠소. 안경점에 알을 끼우러 갔다가 진열장 속에 같은 게 많길래 정가표를 보았을 뿐이오.”
“못된 것들!”
“난 조금도 섭섭하지 않습디다. 좀 좋소. 그애가 과용하지 않았으니 좋고, 내가 개 발에 편자 격으로 분수에 넘치는 걸 쓰고 다니지 않게 됐으니 좋고, 남의 아이들이 부러뜨려도 덜 아까우니 좋고, 그러니 제발 아이들이나 할머니한테 싫은 소리 말아요.”
나는 입을 다물고 토끼풀을 거칠게 쥐어뜯었다. 잘 퍼지는 깐으로는 줄기가 연해 잔디의 단단하게 얽히고 설킨 줄기 사이로 퍼진 뿌리까지는 제거되지 않고 중턱만 잘랐다. 그 연한 게 잔디를 이기는 까닭도 잔디의 땅 속 줄기가 되레 토끼풀 뿌리를 보호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 일을 죽자꾸나 거칠게만 했기 때문에 금방 손아귀에 눅진한 녹즙이 묻어나고 손톱에 새까맣게 흙이 끼였다.
저것들 때문이라니까. 마당으로 나오고 싶긴 한데 두 늙은이의 성난 얼굴에 질려서 분합문올 빠끔히 열고 서로 먼저 나가려고 몸을 비틀며 밀치고 있는 아이들을 흘긋 쳐다보면서 이렇게 뇌까렸다. 적당히 미화돼 있던 우리 가족관계는 물론 남편의 소심하고 무력한 노후까지가 그 있는 대로의 모습을 드러낸 게 나는 너무도 굴욕스러워 그들의 탓이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은 못 알아들었는지 탄하지 않고 잔디는 다치지 않고 토끼풀만 뿌리째 제거하려고 더디고 조심스럽게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도전적으로 남편을 건드렸다.
“저것들을 불러들인 건 당신이란 말예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난 당신처럼 마음에도 없는 듣기 좋은 말은 못 하니까요.”
“누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는 거요?”
“그럼 저것들한테 서울 구경 오라고 신신당부한 게 진심이었·수?”
“진심이잖으면?”
“근데 저것들이 들이닥쳤을 때 왜 그렇게 놀라고 뜨악해하셨수?”
“정말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 했었나보오.”
남편이 낭패한 목소리로 남의 말 하듯 말했다:
“거봐요, 그게 바로 그 소리라니까요. 혼자 실컷 착한 척하더니 꼴좋구랴.”
나는 의기양양하려고 했지만 남편에게 필요 이상의 강한 혐오감을 드러낸 데 지나지 않았다. 남편 역시 안간힘 쓰듯 낭패스러움을 떨치더니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격렬한 표정을 지었다.
“제발 저것들이란 소리 좀 안 할 수 없소?”
만수네의 처넛적 이름은 분녀였고 그녀의 어미가 우리 친정집 안잠자기였을 때 태어났으니까 그녀와 나와의 주종관계는 태어나기 전부터 비롯됐다고도 할 수 있었다. 나보다 한 살을 더 먹었는데도 꼬박꼬박 분녀라고 하대해도 엄한 어른들이 야단을 치거나 고쳐주지 않은 것도 어린 나에게 은연중 상전의식을 심어 준 결과가 됐는지도 모른다. 분녀네는 과수댁으로 우리집 안잠자기로 들어온 지 십여 년 만에 분녀를 낳았고, 아들을 하나 얻어가질 욕심으로 애걸애걸해서 남의 서방과 동침을 했다는 것 이상은 밝히질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분녀 애비를 모른다고 했다. 아들이 아니어서인지 나는 한 번도 분녀네가 분녀에게 세상의 여느 어미처럼 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 웬수야, 아니면 육시를 할 년, 베라먹을 년으로 딸의 이름을 대신했다. 분녀가 기를 펴고 산 건 아마 분녀네가 죽고 나서였을 것이다. 그 동안 번 돈을 찾아서 구멍가게를 내고 모녀가 독립한 지 일 년 만에 분녀네가 죽자 사고무친한 분녀는 저희 어미 뒤를 이어 우리집으로 식모살이를 들어왔다. 과수가 애를 낳아 길러도 내치질 못하고 데리고 있을 때만 해도 우리집은 가세와 인심이 함께 넉넉했었지만, 분녀가 고아가 됐을 때는 식모를 둘 형편이 못 되었다. 또 진일, 마른일 막히는 게 없던 어미와는 달리 먹성만 세고 일이 거칠어 일제 말기의 식 량난이 극심할 때 마냥 데리고 있기는 좀 곤란한 군식구였다. 그러나 대를 물려 몸을 의탁하려는 걸 함부로 내칠 수는 없다는 상전다운 체모를 지키느라 긍리 끝에 시집을 보보내기로 했다. 내가 여학교 삼학년이었으니 분녀가 열일곱삼 때였다. 시골 외가에서 중신을 서서 스무 살 먹은 농사짓는 총각한테로 시집을 보냈다. 그만하면 괜찮은 자리라고들 했다. 곧 해방이 되었고 일 년에 한두 번씩 친정 나들이 삼아 다니러 오는 분녀는 그런대로 얼굴이 피고 색시 꼴이 박혀갔다. 올 적마나 이불 호청을 있는 대로 뜯어서 양잿물에 삶아 빨아 푸새 다듬이질까지 번들번들하게 해놓는 동안 연방 서방 걱정이 떠나지 않는 걸 보면 금슬이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때 나는 생전 시집 안 갈 것처럼 새침하게 굴 때라 어린 색시가 서방 흉을 보는 것처럼 말을 꺼내놓고 은근슬쩍 자랑을 하는 게 어찌나 징그럽던지 너하고 말 안 할 거라고 야멸치게 쏘아주곤 했었다. 시집간
지 삼 년 만이던가 배가 안암산만해가지고 한 번 다녀가더니만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왔다. 어머니는 미역이네 쌀이네 한 보따리를 해서 내려보내면서 친정 어머니라 해도 이보다 더 잘하지 못할 거라고 한바탕 공치사를 했다. 어머니의 그런 공치사는 이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게, 시집은 보냈으되 아들을 낳아야 미로소 시집 식구가 된 걸로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당신 생각에 따라 큰 짐을 벗은 것처럼 시원하고 대견해서 랑시의 우리집 형편으론 과하게 후하게 구셨다. 나 보기에도 그런 어머니가 세전(世傳)의 노비를 속량해주는 것만큼이나 도량 있어 보였다. 그때 분녀가 낳은 아들이 만수였다.
만수네가 우리 앞에 또 나타난 건 만수가 네 살 때였다. 휴전이 된 직후였고 나는 그제서야 혼처가 나서 광목마전이랑 혼수 바느질이랑 일손이 달릴 때였지만 모자의 꼴은 영락없이 거지여서 그 동안에 소식을 끊고 지낸 걸 나무랄 마음도, 일손으로 반길 마음도 나지 않았다. 만수 애비가 난리통에 파편을 맞고 죽었다고 했다. 농촌과 도시가 다 같이 피폐할 때였지만 농촌에선 배를 곯지 않으면 부자라고 칠 때라 식모살이라도 해서 밥이라도 실컷 먹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애가 딸리지 않은 말만큼씩한 처녀도 시집보내준다는 명목으로 월급도 없이 얼마든지 부릴 수 있을 때였다. 한창 말썽 부릴 애가 딸린 식모를 데려갈 집이 나설 리 만무했다. 거리로 내쫓자니 모자의 꼴이 너무 가긍하고 또 세전의 상전의식도 있고 해서 공치사해가며 하루 이틀 거두기 시작한 게 만수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였으니 십 년은 됐을 것이다. 그 동안 만수네는 친정집 살림뿐 아니라 시집간 딸들의 해산바라지는 물론 세간 난 아들네 생일잔치, 돌잔치, 손님 초대 등에 부지런히 불려다녔다. 나 역시 애기 낳을 때는 으레 만수네가 오려니 했지만 계모임이나 집들이 등 손님 칠 일만 생기면 친정에 전화를 걸어 “엄마 만수네 좀…….” 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곤 했다. 만수네는 그날이 그날같이 진국스럽고 황소처럼 힘은 장사에 입이 무거워서 각각 사는 우리 오남매가 다 같이 의지하고 보배로워했다. 만수 또한 학교 공부는 꼬라비 근처에서 맴돌았지만 기운이 세고 심성이 착한 걸 눈여겨본 친정 부모님은 만수네를 따로 낼 결심을 하고 그 동안 부려먹기만 한 우리 오남매에게 톡톡히 그 대가를 요구하셨다. 야박하게 품삯이라고 생각할 거 없다. 십시일반으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추렴을 좀 내야겠다. 이러시면서 우리들에게 요구한 액수는 그 동안 만수네를 얼마나 부려먹었나보다는 각자의 사는 형편에 따라 공평히 차등을 둔 거였고 또 친정에서 솔선해 내놓은 액수가 친정의 사는 형편으로는 과한 거였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 못 하고 순종했다. 어머니의 도량이 다시 한번 돋보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만수네를 만수의 친가붙이가 남아 있는 충청도 충주 근방 매화나무재라는 예쁜 이름의 고개 밑에다 땅뙈기와 집칸을 마련해서 내보냈다. 같이 자라서 제일 만만하게 많이 부려먹던 나도 그후 곧 만수네를 잊어버렸다. 만수네 대신 파출부를 불러 손님을 치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추렴낸 돈이 아까워질 때나 떼어낸 혹 생각하듯 알랑하게 생각날 따름이었다. 또 큰일 때 친정에 모일 때도 만수네가 있었으면 이러저러 했을 거라느니 이러저러하지 않았을 거라느니 아쉬운 대목에서 겨우 생각들을 하곤 했다. 어찌 팔자를 그리 못 타고났을까 동정들을 할 때마다 만수네가 평소 가장 부러워하던 여자 팔자가 뭐였던가에 화제가 미치게 되고 그럴 때 언니나 올케들은 허리를 잡고 웃어젖히곤 했다. 왜냐하면 말수 적은 만수네가 가장 자주 입에 올리며 부러워한 건 결코 유별난 부부 금슬이나 띵떵거리며 사는 재복이 아니었다. 제 딴엔 그런 게 다 과람해 감히 바라지 못하겠으면 하다못해 리어카채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연명하는 계집 서방을 부러워해도 좋으련만 그만큼도 욕심을 부릴 줄 몰랐다. 만수네가 제일 부러워하는 건 남편이 국군으로 전사한 미망인이었다. 얼매나 좋을까, 나라에서 다달이 월급이 나온다니. 그 다음으로 만수네가 부러워하는 게 남편이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생사를 모.르고 사는 생과부였다. 얼매나 좋을까, 기다릴 사람이 있으니. 만수네의 그 절절하고 피맺힌 ‘얼매나’ 를 흉내내면서 킬킬대는 언니 올케를 덩달아 웃지 못하는 게 고작 나에게만 있는 만수네에 대한 우정의 그루터기가 아니었을까. ‘얼매나 좋을까’ 는 뉘 집에서나 두루 풍기고 다닌 소리였지만 나에게 만 해준 소리도 있었다. 파편이 지붕을 뚫었을 때는 굉음과 바람과 먼지로 천지와 정신이 같이 아득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피가 흥건히 괸 가운데서 서방이 “난 괜찮여, 임자 다친 데 없어?” 하면서 환히 웃고 있더라고 했다. 입술이 하얗게 바래서 웃음이 그리 환해 보였던지 아무튼 너무 환한 웃음에 욀칵 무서운 생각이 나서 뒤로 물러나면서 보니 터진 배로 창자가 꾸역꾸역 나오고 있더라고 했다. 그녀의 외마디소리에 서방도 제 배에서 꿰져나오는 창자를 제 손으로 주물러보더니 억, 하고 정신을 잃고 영 못 깨어나고 말았다고 했다. 그 피할 길 없는 절체절명의 목도(目睹)가 만들어낸 그녀의 척박한 상상력을 누가 감히 웃을 수 있으랴.
만수네를 또 만난 건 작년 가을이었다. 만수네를 만났다고 언니들이나 올케한테 전화질을 했지만 처음엔 다들 만수네가 누구더라 하고 못 알아들을 만큼 우리 사이에서 잊혀진 후였다. 작년 가을 우리 부부는 단양팔경을 돌아 수안보에서 일박하고 오는 관광단을 따라간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거의 친한 가족끼리로 구성된 관광단에 우리만 전지전청으로 끼어든 꼴이어서 아는 이가 한 가족밖에 없었다. 단양팔경을 돌 때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다음날 목욕하고 화투치고 음담패설하는 자리에서 우리 부부는 애써 노력을 했건만도 자꾸만 겉돌았다. 우리가 즐겁지 않은 건 참을 수가 있었지만, 그들이 우리 때문에 즐겁지 않다는 건 여간 민망한 노릇이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버스는 오후 늦게나 출발하도록 돼 있었다. 가까이 관광지가 있나 여관 종업원에게 물었더니 무슨 절터로 가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번씩 있다고 했다. 남편은 절터에는 관심이 없는 듯 그냥 걷자고 했다. 걸어서 절터에 도착해도 그만, 가다 말아도 그만이란 생각으로 목표는 우선 절터로 잡고 겯기 시작했다. 그렇게 산책을 나온 관광객도 더러 있는 듯 후미진 시골길인데도 더덕이랑 버섯, 산나물 말린 것 등을 벌여놓고 파는 장사꾼들이 있었다. 만수네도 그런 것들을 팔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해서 어쩔 줄을 몰랐고 그 동안의 안부를 묻는 나에게 생각나는 것만 끌어모아도 소설책 열두 권은 될 거라고 했다.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그 동안 지낸 일을 다 엮어낼 엄두가 안 났던 모양이다. 집이 거기서 가까운 듯했지만 가보자고는 안 했다. 남편이 더덕을 좋아한다며 남아 있는 걸 다 살 뜻을 비치자 돈을 안 받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더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우리를 그 자리에 세워놓고 휑하니 어디로 가버렸다. 이윽고 그녀는 일꾼의 주먹처럼 울퉁불퉁 험악하게 큰 더덕 한 뿌리와 산나물 말린 걸 한 보따리 가져왔다. 집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 큰 더덕은 십 년 넘어 자란 거여서 소주에 담가 몇 달 두면 소주에 산(山) 정기가 다 우러나 산삼처럼 기운을 돋운다고 했다. 말로 뿐 아니라 그 더덕을 받드는 태도가 심마니가 산삼을 받드는 태도가 저러려니 싶을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도대체 얼마를 받으려는 걸까 지레 겁이 날 지경 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사코 돈을 받지 않았다. 남편이 나서서 간청을 하다시피 해서 겨우 국밥집에서 점심 요기를 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동안 어렵게 얻어들은 그간의 사정은 만수가 공장에 다니다 뭘 잘못했는지 지금 감옥살이를 하고 있고 늦게 장가든 그의 처는 아들을 둘 데리고 옥바라지하기가 지겨웠는지 도망을 가버렸다고 했다. 만수네 혼자서 아들 옥바라지하랴 손자 둘 기르랴 고생이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옆에서 대강의 사정을 듣고 난 남편은 또 한번 돈을 주고 싶어 애걸을 했지만 만수네는 터무니없이 당당한 얼굴로 어디서 받아온 물건도 아니고, 힘만 좀 들여 거저로 캔 물견을딴 사람도 아닌 친정붙이에게 돈 받고 팔 만큼 돈독이 오르진 않았노라고 했다. 우리를 만수네가 친정붙이 취급하는 데는 나도 가슴이 찐했지만 마음이 여린 남편은 감격까지 한 모양이었다.
손자들 데리고 서울에 한번 다녀가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남편에게 비아냥거리는 것은 그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약이 된다는 십 년 묵은 더덕 말고도 그때 우리가 거저로 얻은 산나물 말린 것은 여관으로 돌아와 일행에게 골고루 나누어줄 수 있을 만큼 푸짐한 것이었다. 나중에도 심심찮게 인사를 받을 만큼 그 나물들은 연하고 맛 좋은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고지식한 남편이지만 정말 만수네가 손자를 데리고 놀러올 줄은 몰랐던 듯 서울에 오자마자 만수네한테 돈을 좀 부쳐주자고 졸라 나는 그대로 했고, 그것으로 우리와 만수네 사이는 더 이상 주고받을 게 없는 개운한 사이가 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잊그저께 느닷없이 손자들을 데리고 들이닥친 거였다.
“들어 갑시다. 느이들 배고프쟈?”
남편이 아이들을 양손에 하나씩 잡으며 말했다. 할머니가 진지 잡수시래요, 하면서 아이들이 매달린 건 내가 아니라 남편 쪽이었다. 나는 속으로 흥, 꼴좋구랴, 소리를 또 한번 되풀이하면서 남편 뒤를 따랐다.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나고 식탁 위엔 아침상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내가 부엌 수도에서 대강 손을 씻는 동안 아이들은 또 저희 할머니 치맛자락을 양쪽에서 쥐어짜며 뭐라고 칭얼댔다.
“만수네, 불쌍하다고 저에들을 너무 오냐오냐 하는 거 아뉴. 야단칠 때는 딱 부러지게 야단을 쳐요. 에미 애비가 같이 사는 집에서도 할머니가 있으면 아이들 버릇 버려놓는다고 말이 많은 세상이라우. 재들도 생전 만수네가 기를 것도 아니고 언제고 에미 애비가 돌아와봐요, 그 동안 길러준 공은 생각도 안 하고 버르장머리 버려놨다고 탓이나 실컷 듣게 생겼구먼.”
나는 내친김에 이탈리아제 안경 테 얘기까지 하려고 아이들을 한 번 곱지 않게 노려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데 만수네가 불쑥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약속을 안 지킨다고 날 이렇게 주리를 트는 걸 워째. 제풀에 지칠 테니까 내비둬 .”
“약속은 무슨 약속?”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쳐들며 입을 참새 새끼처럼 함빡 벌렸다. ‘어린이대공원’ 소리는 만수네의 넓적한 손바닥에 틀어막혀 미처 끝을 맺지 못했다. 못 알아들은 체 주책이야, 한 마디 해주고 나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의자가 도합 넷밖에 없는 걸 핑계로 만수네는 아이들과 함께 따로 먹으려 했고, 그럴 때마다 남편은 한 아이를 무릎에 앉히면서까지 한 상에서 먹자고 법석을 떨더니만 오늘따라 묵묵히 숟갈질만 했다. 이런 남편의 태도가 나도 편치 않았으니 만수네라고 눈치가 없었을 리 없었다. 아침상을 치우자마자 보따리를 챙겨가지고 나왔다. 나도 남편도 그들을 붙드는 시늉도 안 했다. 그런 인사치레로 다시 한번 속을 흘여다보이기도 싫었고 무엇보다 몹시 피곤했다. 나는 큰아이 호주머니에다 준비한 노잣돈 봉투를 찔러주면서 할머니 승낙받아 너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했다. 대공원에 가고 싶으면 다시 한번 졸라보렴, 하는 꼬드김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제 안경테 얘기를 할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그 말 할 새 없이 떠난 건 얼마나 잘된 일인지 몰랐다. 내가 모아준 커다란 옷보따리를 이고 양쪽에서 치맛자락을 쥐어짜는 아이들에게 지척지척 이끌려 가는 만수네가 골목 어귀를 돌자 나는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만수네가 쓰던 현관에서 빤히 보이는 작은방은 열린 채였다. 나이 먹더니 뒤끝도 흐려졌는지 만수네가 떠난 자리는 깔끔하지가 않았다. 나는 빗자루를 들고 들어가 방바닥에 흩어진 종이쪽지를 쓸어모았다. 갈기갈기 찢어버린 건 내 필적이 아닌가. 나는 그것들을 펴서 맞춰보다 말고 예리한 사금파리에 찔린 듯이 놀라서 그것을 떨구었다. 그것을 떨구었건만도 찔림은 여전했다. 지금 내가 함부로 찔리고 있는 건 손바닥이 아니어서 피할 수가 없었다. 실용에서 제외된 장식용 도자기를 산산이 부수면서 수치스러워하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편지는 수안보 근처에서 만수네를 만나고 와서 돈을 부칠 때 동봉한 편지였다. 남편 성화에 못 이겨 돈을 부치러 가긴 했지만 막상 소액환만 달랑 부치려니 너무 박절한 듯하여 우체국 창구에서 수첩을 뜯어서 쓴 편지였다. 얻어온 나물에 비해 부치는 금액은 많이 넉넉하였으므로 나만큼 너그럽고 인정 많은 사람도 흔치 않을 거라는 자기 황홀이 즉홍적으로 장황한 미사여구를 늘어놓게 했다. 그녀의 고생에 대한 간절한 위로와 함께 언제고 힘이 돼줄 테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의논해주기 바란다는 부탁까지 하고 나니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좋아졌다. 그래서 봄에 아이들을 데리고 상경하면 푹 쉬면서 회포도 풀 수 있고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락 싸가지고 어린이대공원에 놀러도 가면
얼마나 좋겠느냐, 아무리 바빠도 그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그런 기회를 꼭 만들도록 하기 바란다, 기다리고 있겠다, 하는 데까지 편지 사연이 발전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곧 잊어버렸던 편지 사연이 지금 예리한 사금파리가 되어 내 마음에 사정없이 꽂히고 있었다.
방 안을 어지럽힌 건 내 편지가 다였다. 그 밖엔 머리카락 하나 떨군 게 없이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