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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은 1940년에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 말문에 적힌 날짜에 근거하여,
매년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훈민정음을 반포한 세종대왕의 뜻을 기리기 위한 기념일이다.
이 날은 세종문화상을 시상하고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을 참배하며,
전국에서 각종 학술대회와 백일장이 거행된다.
한글날에 앞서,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릉을 찾아
백성들을 위한 성군(聖君)의 발자취들을 가슴깊이 되새겨 보고자 한다.
세종대왕 동상(왕릉입구)
조선 제4대 왕이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세종대왕은 1397년에 태어나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된 후
그 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여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이 되는 전반적인
제도를 갖추었고, 조선왕조가 지배 기반으로 삼은 유교문화를 융성하게 했다.
특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백성들이 쉽게 쓰고 읽을 수 있도록 했으며,
농사에 도움이 되는 천문기구를 개발하고 도량형을 정비했으며, 출판사업을
크게 일으켰고, 대외적으로 여진과 왜를 정벌하고 명의 요구를 적절히 조율했다.
세종대왕릉(영릉,英陵, 사적 제195호)
한글인 훈민정음은 1443년 완성되어 1446년 반포하였는데, 종래 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기형적인 문자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와 해설서, 한문서적의 언해서를 간행하고
활자를 목각하는 등 훈민정음의 보급을 위한 작업을 계속했다.
세종대왕릉 가는길
세종은 1397년(태조 6)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태종 18)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에 22세의 나이로 조선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대왕은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이미 단풍이 들기 시작
세종은 재위한 이듬해에 집현전을 만들어 많은 신진 학자들을 양성했다.
왕립 연구기관인 집현전의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과학 기술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종의 행보에 힘을 실어 주었다.
왕릉입구에 있는 천문관측 기구들
간의
간의는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천문관측 기기로 1432년(세종 14년)에 만들었다.
이 기기는 문헌을 바탕으로 1977년 12월에 복원한것이다.
혼천의
혼천의는 1433년(세종15년)에 만든 해와 달, 별과
오행성(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의 위치를 측정하는 천체관측 기기이다.
이 혼천의는 1669년(헌종 10년) 송이영이 만든 "혼천의 및 혼천시계" 중
혼천의 부분을 2.5배정도 확대하여 1999년 12월 복원한것이다.
관천대(하단)와 적도의(상부 기기)
관천대는 천문관측 기기를 올려 놓던 곳으로,
세종대왕은 경복궁안에 천문관측 기기를 설치하여
관리들에게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토록 하였다.
이 관천대는 "창경궁 관천대"를 본떠서 1988년 12월에 만든것이다.
적도의
관천대 상부에 올려놓은 천문관측 기기로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을 쉽고
편리하게 관측할 수 있도록 연구하여 만든 기기이다.
현재 남아있는 기기가 없어 남병길의 저서 성경(星鏡)에 있는
그림을 바탕으로 2003년 12월 복원한것이다.
소간의
소간의는 간의를 옮길 수 있도록 작은 크기로 개량한 천문관측 기기이며,
1432년(세종 14년) 만들었다. 해와 달, 행성과 별의 위치 고도와 방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우리 선조들의 독창적인 기구이다.
문헌을 바탕으로 2000년 5월에 복원하였다.
혼상
혼상은 하늘의 별자리를 둥근 공 모양위에 표시하여 별자리의 위치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한 관측 기기로 1437년(세종 19년)에 만들었다.
천문관측 기기 중앙의 세종대왕 동상
현주일구
현주일구는 1437년(세종 19년)에 만든 휴대용 해시계이다.
남북을 잇는 가는줄을 지구의 자전축 방향과 같게 하도록 추를 달아 팽팽하게
당긴 후 즐의 그림자를 둥근 시반에 나타나게 하여 그림자가 가르키는 눈금을 보고
시각을 알 수 있다. 이 현주일구는 야외에 전시하려고
문헌에 기록된 크기를 7배로 확대하여 2001년 5월에 복원한것이다.
정남일구
정남일구는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려주는 해시계로 1437년(세종 19년)에 만들었다.
지남침을 쓰지 않고도 남북의 방향을 정확하게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남쪽을 가르키는 해시계라는 뜻으로 정남일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정남일구는 문헌을 바탕으로 2002년 5월에 만들었다.
천평일구
천편일구는 1437년(세종 19년)에 만든 해시계이다.
용기둥에서 남쪽 못까지 연결된 실이 하늘의 적도면과
나란하게 놓여있는 시반면 중앙을 수직으로 통과하며,
햇빛에 의해 사반면 위에 나타난 그림자로 시각을 알 수있다.
문헌을 바탕으로 실제 크기를 7배로 확대하여 2003년 5월에 복원하였다.
일성정시의
일성정시의는 해시계와 별시계의 기능을 하나로 모아 낮과 밤 언제든지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1437년(세종 19년)에 만든 천문 기기이다.
현재 남아 있지않아 문헌을 바탕으로 1998년 2월에 복원한것이다.
자격루
자격루는 1434년(세종 16년)에 만든 물시계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저절로 움직여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가 사용되었다.
자격루의 작동원리는 맨 위의 큰 물그릇에 있는 물이 아래의 작은 물 그릇을 그쳐
더 아래쪽에 있는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이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있는 살대가 점점 올라가
지랫대 장치를 건드리면서 끝에 있는 쇠구슬을 구멍으로 굴려 넣는다.
쇠구슬은 다른 쇠구슬을 굴려 차례로 종과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려준다.
이것은 창경궁 자격루를 본떠 1986년 12월에 만들었다.
앙구일부
앙구일부는 1434년(세종 16년)에 처음 만들어져 조선말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던 해시계이며, 앙구일부란,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솥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목한 반구 안쪽에는 영침(바늘)과 달력 역할을 하는
가로줄 13줄과 시각을 알려주는 세로줄 48줄이 있다.
영침의 그림자가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와 시각을 나타낸다.
세종실록에는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쥐~돼지)을 그림으로 그려서
시간을 알게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과, 종로 혜정교와 종묘앞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 앙구일부는 1985년 12월에 복원한것이다.
앙구일부 안쪽
촬영시간이 9월 30일 11시 59분인데 해시계와 거의 비슷하다
일구대
일구대는 세종때 만들어진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올려놓는 받침대이다.
서울의 혜정교와 종묘앞에 일구대를 만들고 앙부일구를 설치했다.
이것은 경복궁 교태전 아미산에 있는 앙부일구대를 본떠 1988년 11월에 만들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395년(태조 4년)에 북극을 중심으로 하늘의 좌표에 따라
별 1,467개의 위치를 커다란 원안에 표시하여 만든 천문도이다.
윗 부분에는 해와 달의 운행기록과 별자리 그림, 아랫부분에는
우주관, 제작배경, 과정, 만든 사람의 이름과 만든 때가 적혀있다.
이것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을 본떠 1999년 5월에 만든것이다.
측우기
측우기는 비의 양을 재고자 만든 천문기기로 1441년(세종 23년)에 만들었다.
이것은 지금 남아있는 측우기 중 가장 오래된 금영측우기를 본떠 1988년 11월에 만들었다.
수표
수표는 청계천과 한강에 설치해 하천의 물높이를 재던 기기로
1441년(세종 23년)에 처음 만들어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나무가 썩어서 나중에는 돌로 만들었다.
이것은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서울 청계천 수표를 본떠 1988년 11월에 만들었다.
풍기대
풍기대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잴 때 쓰는 바람 깃발을 세워 놓던 받침대이다.
이것은 18세기에 만든 창경궁 풍기대를 본떠 1996년 11월에 만들었다.
천문관측 기기를 모두 둘러보고 세종대왕릉으로 향한다.
영릉 재실
천문관측 기기를 보고 왕릉쪽으로 조금 올라오면 새로운 재실 건물이 있다.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종9품)과 령(종5품)등이 지내던 곳이다.
제향을 지낼때는 제관들이 제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였다.
이 건물은 2006년과 2017년 발굴조사 결과와 조선후기의 문헌인 영릉보토소등록과
춘관통고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2018년에 착공하여 2020년에 복원하였다.
구 재실
연못(연지)
홍살문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성하였다.
이 때 오른쪽에 세종을 위해 미리 석실을 만들어 놓았다가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이후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 능서면 왕대리로 천장(옮김)했다.
금천교
*왕릉의 금천교(禁川橋)는 돌다리는 말 그대로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시내라는 뜻으로,
금천교 건너편은 특별한 영역, 즉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표현한 것이다.
세종대왕릉의 천장(무덤을 옮김)에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종의 사후 조선 왕조에 일대 피바람이 몰아치고 문종은 즉위한 지 겨우 2년 만에 죽는다.
아들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영월 땅에 유배되어 죽는다.
왕자 여섯도 죽임을 당하는 등 왕가에서 골육상쟁이 끊이지 않았다.
곧바로 이런 환난은 세종의 묘를 잘못 썼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결국 예종 1년(1469) 세종의 묘를 파내보니 수의마저 썩지 않은 채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홍살문
풍수지리에 의하면 세종의 묘는 매우 좋지 못한 자리로서
왕가의 화를 자초했다는 것이 공인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종은 개장할 묘소를 지금의 서울 땅에서 40킬로미터 이내에서 찾도록 했는데
이때 지관이 천거해 천장한 곳이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는 천선강탄(天仙降誕)형,
또는 신선이 앉아 있는 선인단좌(仙人單坐)형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영릉이다.
어로와 향로(御路 . 香路)
이 자리는 원래 충희공 이인손(1395~1463)의 묘택이 있던 곳이다.
이인손은 세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윤(仲胤) 호는 풍애(楓厓)이며,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손자이자 형조참의를 지낸 이지직(李之直)의 아들이다.
현재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은 둔촌 선생이 있었던 곳이라 해 붙은 이름이다.
둔촌은 충목왕 3년(1347) 문과에 급제한 뒤 정몽주, 이색 등 당대의 거유들과 교유했다.
또한 영의정 이극배(李克培, 1422~1495),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1427~1465),
좌찬성 이극돈(李克墩, 1435~1503), 좌의정 이극균(李克均, 1437~1504)의
아버지이기도 한 이인손의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원래 이인손의 묘가 있던 이곳 왕대리는 세종대왕릉이 옮겨지면서 이장하였다.
현재 이인손의 묘는 여주 능서면 신지리 새미실마을의
북쪽으로 뻗어 내린 북성산의 나지막한 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정자각과 세종대왕릉(영릉,英陵)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과 그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봉이실 합장릉으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정자각
이인손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일러주는 내용을 유언으로 쓰는
조건으로 묘택의 세부 사항을 알려주었다.
첫째는 묘택 앞을 흐르는 개울에 절대로 다리를 놓지 말 것이며,
둘째는 재실이나 사당 등 일체의 건물을 짓지 말라는 것이었다.
광주 이씨 문중은 이인손의 유언을 그대로 지켰다.
이후 이인손의 친자 5형제와 종형제 3인을 합해 '팔극조정(八極朝廷)'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승, 판서가 가문에서 쏟아져나왔다.
정자각 아래에서 본 세종대왕릉
그러나 후손들로서는 이인손의 묘택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양반 체면에 다리도 없는 냇물을 신발 벗고 건너야 하는 것은 물론,
멀리서 온 자손이 잠잘 곳도 없이 모이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등 제사를 지낼 때마다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자
문중 회의에서 유언에 반해 재실을 짓기로 결정했다.
옆쪽의 왕릉 오르는 길에서 본 세종대왕릉
한편 예종의 명으로 여주와 이천 쪽으로 세종의 천장 자리를 보러 나온
지관 안효례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비를 피할 곳을 찾는데 산자락 아래 조그마한 건물이 보였다.
광주 이씨 문중에서 지난해에 세운 재실이었다.
그는 그곳을 향해 달렸는데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 때문에 냇물이 불어 섣불리 건널 수 없었던 것이다.
세종대왕릉
낙담하여 두리번거리던 그는 아래쪽에서 돌다리를 발견하고 냇물을 건너
재실에서 소낙비를 피했는데, 소낙비가 그치자 주위를 돌아본 안효례는 깜짝 놀랐다.
그곳이 바로 자신이 찾아다니던 천하의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소낙비를 피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묘택의 묘비를 보니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것이었다.
고민하던 그는 산도(山圖)를 그려 예종에게 이인손의 묘택이 이미 자리 잡고 있음을
고하면서 세종의 묘로 추천했다. 그 자리는 군왕의 묘택으로서는 적합하지만
정승의 묘택으로는 과분하다는 설명도 첨언했다. 그때 그곳이 바로 이곳 영릉이다.
공중에서 본 세종대왕릉
수라간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능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丁’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불렀으며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다.
정자각 앞으로는 박석을 깐 향로(香路)와 어로(御路)가 있고, 향어로 맨 앞에는 홍살문이 놓인다.
정자각 좌우로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대칭으로 놓여 제례에 필요한 준비를 할 수 있다.
물론 본격적인 준비는 홍살문 밖에 있는 재실에서 이루어진다.
수복방
영릉앞 비각
표석 비(碑)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현왕후 부좌 (앞면)
세종 장헌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은 홍무 30년(정축년 1397) 4월 10일에 탄생하여
영락 16년(무술년 1418)에 왕위를 물려 받았다. 경태 원년(경오년 1450) 2월 17일에
승하하여 (같은해) 6월 광주 헌릉 서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성화 5년(기촉년 1469) 3월 6일에 여주 서북성산 자좌(북)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재위는 32년 나이는 54세이다. 명나라에서 장헌의 시호를 내렸다.
왕비 선인제성 소현왕후 심씨는 홍무 28년(을해년 1395) 9월에 탄생하여
영락 16년(무술년 1418)에 경빈에 책봉되었고 얼마 있다가 공비로 진봉되었다.
선덕 7년(임자년 1432)에 왕비로 호칭을 고쳐서 봉해졌고,
정통 11년(병인년 1446) 3월 24일에 승하하였다. (같은해) 7월헌릉 서쪽언덕에
장사지냈다가 기축년(1469) 3월 6일에 대왕릉과 같은 언덕에 이장하였다.
나이는 52세이다.
숭정기원 후 118년(을축년, 1745)에 세우다. (뒷면)
*영릉 비각 표석은 영조 21년(1745)에 세운 것으로
표석 앞면의 글은 조상경이 썼고, 뒷면의 글은 이학이 썼다.
세종대왕릉(영릉)과 효종대왕릉(녕릉)은 700m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를 잇는 오솔길은 짧지만 아늑한 솔숲사이로 난 흙길이라 정감이 있고,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이라 가볍게 걷기에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