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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장소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중요하다고 보고 있지만 사실상 그다지 가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집회하는 장소, 소위 "예배당"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 지방에 교회가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사역자와 말씀을 전하는 집회 외에 집회하는 장소 곧 보통 말하는 예배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집회 장소가 없으면 교회가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떤 건물 밖에 "00교회"라고 간판을 붙이지만 사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합당한 것이 아니며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건물은 00교회의 집회 장소일 뿐 00교회가 아니다.
우리의 집회 장소에는 주소가 있지만 우리의 교회는 주소가 없다.
내가 상해(上海)를 떠나려 할 때 어떤 형제는 나에게 우리 교회의 주소를 어떻게 써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교회는 연락처가 있어도 주소가 없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00동 00번지를 교회의 연락처라고 말할 수 있을 뿐 교회 주소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땅에 교회는 연락처가 있을 뿐 주소는 없다.
성경에서 교회는 집회 장소를 가리켜 말할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오순절 후 첫 번째로, 교회라는 두 단어를 성경은 어떻게 말했는가?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가 주의 영을 시험하므로 죽었을 때 성경은 "온 교회와 이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 하니라"(행 5:11)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교회는 살아있는 것이고 하나의 단체이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18장 17절에서 주님은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이것 또한 교회가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교회는 살아있는 하나의 단체이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집회소가 아니다. 어떤 지방에서든지 믿는 이들의 단체가 있을 때 곧 교회가 있는 것이다.
교회는 집회소가 아니라 한 무리의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믿는 이들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집회소가 있는가 없는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또한 성경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 반드시 집회소가 있지는 않았다. 유대인들에게는 전적으로 율법을 선포하고 읽으며 듣기 위한 회당이 있었다. 당시 사방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고 또한 유대 교민이 있는 지방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만일 기독교 안에도 회당이 필요했다면 사도들은 도처에 다니면서 회당을 건축했을 것이다. 사도들 자신은 다 유대인 이었고 그들의 습관은 회당을 건축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어떤 회당도 건축한 일이 없다. 당신은 성경에서 이것을 찾아 볼 수 없다. 사도들은 어떤 장소를 거룩하게 분별한 일이 없다. 유대인들에게 회당을 세우는 규정이 있었지만 사도들은 그런 규정 하에서도 그런 것을 개의치 않고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집회소를 건축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특별히 주의할 만한 점이다.
또 한 면으로 그들은 도처에 다니면서 사람들을 위하여 집회소를 짓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은 이런 문제를 특별히 관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반드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거룩히 분별된 어떤 장소가 있어야 하는 것은 유대교이다.
기독교는 성지가 없다. 신약의 성전은 건물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고 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곧 하나님의 영적인 궁전이다. 신약의 성전은 영적이므로, 교회 집회소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집회소는 사용하기에 편리한 것으로 족하다. 이제 우리는 신약 성경 안에 집회장소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기로 한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그분의 집회는 여러 번 산에서 있었다. 세 번의 가장 중요한 강론 중 두 번이 산에서였다. 한 번은 천국의 실제를 말하는 소위 말하는 팔복산(八福山)에서 말씀하셨다. 한 번은 예언에 관한 것을 감람산에서 말씀하셨다. 또 한 번은 천국의 외형을 먼저는 해변에서, 그것에 대한 해석의 시작을 배에서 하셨고, 후에는 집 안에 들어가셔서 말씀하셨다. 마지막 날 저녁에 주님은 사람의 집, 곧 큰 다락방에 가셨다. 교회는 첫 번째로 모여서 만찬을 그 큰 다락방에서 가졌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 두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것은 집 안에서였다(요 20:19, 26). 이것이 그들의 집회 장소였다.
오순절 열흘 전에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모였다. 그들은 만찬의 설립과 성령의 강림을 상관하지 않고 다만 다락방에서 모였다. 그 후 삼천 여명이 구원을 받았는데 그들은 어떤 때에는 사람들의 집에 분산되었고 때로는 성전을 빌려 함께 모였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수가 많았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이 집 저 집에서 모였고 함께 모일 필요가 있을 때에는 부근의 광장이나 성전에서 모였음을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지방에 갔을 때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 모일 수 있는 곳에서 모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많으면 여러 집으로 나누어 모일 수 있다. 이것은 교회가 한 곳에 모일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필요하다면 한 곳에 모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많고 또 특별히 모여야 한다면 성전을 빌거나 다른 공공장소를 빌릴 수 있다. 그러나 보통 때에는 여러 가정에 서 나누어 모일 수 있다.
오순절 후 사도들이 풀려난 후 [신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행 4:33). 그들은 그 신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그들이 모인 곳은 무슨 예배당이나 복음당이 아니라 신자들이 있는 곳이었고 신자들의 집이 곧 집회 장소였다. 어떤 정식 건물이 있어야만 집회소인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있는 장소가 곧 집회장소이다.
사도시대에 사람들이 많을 때 그들은 때때로 솔로몬의 행각에 모였다(행 5:12). 이것은 그들 전체가 모이는 장소이다. 당시 성전부근에 큰 광장이 있었는데 교회 인수가 많을 때 그들은 이런 장소에 모였다. 당시 높고 뾰죽한 예배당은 없었다. 당시의 교회는 인수가 많을 때 솔로몬의 행각처럼 빈 장소를 찾아서 그들의 집회 장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파하기를 쉬지 않았다(행 5:42). 그들은 일반적인 집회를 믿는 이들의 집에서 가졌고 인수가 많을 때에는 공공장소를 빌렸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행 12:5). 여기서 당신은 예루살렘에 있는 전체 교회가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의 인수가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한번은 삼천, 또 한 번은 오천 명이 구원 받았으므로 도합 만 명 이상이 될 것이다. 그들은 한 장소에 모인 것이 아니라 각 가정에서 나누어 모였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교회라고 말한다. 그들이 가정에서 나누어 모였다. 근거가 어디 있는가? 우리는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온 후 아마 생각해 보고 마가라 불리 우는 요한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간 것을 본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행 12:12). 온 교회가 다 한 곳에 모인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물질적인 집회소가 없었다. 그때 인수가 많았기 때문에 집회소를 지을 필요가 있었다면 사도들은 벌써 그들을 위하여 집회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런 필요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집에서 기도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 집에서 기도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어떤 집으로 가는 것이 좋은가를 생각해 보고 마가의 어머니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의 교회 집회 장소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한 지방에서 교회 인수가 많지 않을 때 장소가 충분히 크다면 한 곳에 모일 수 있다. 만일 인수가 너무 많고 장소가 또 충분히 크지 않다면 가정에서 나누어 모일 수 있다. 때로는 공공장소를 빌려서 전체가 모일 수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 함께 모이고 나누어 모이는 방법이다.
사도행전 13장에서 14장에 왔을 때 안디옥에 또 다른 시작이 있었다.(앞부분은 예루살렘의 노선이다). 사도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바울은 밖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올 때 어디에 가서 모였는가? 바울이 그곳에 "이르러 회중을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였다"(14:27, 원문참조). 여기에서 중요시 한 것은 집회소가 아니라 회중이다. 이 집회 장소는 아마 임대한 것이 아니면 형제의 것일 수 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드로아에 이르러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저희에게 강론할 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여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루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행 20:7-12). 여기서 당신은 그들이 모인 장소가 삼층루 였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창에 걸터앉은 사람도 있었다. 드로아에서 그들의 집회는 매우 정식적이지 않은 것 같다! 오늘날 아름답고 휘황 찬란한 모든 예배당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건물을 주의 하게 한다. 그곳은 돈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무슨 광고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드로아에서 믿는 이들이 모일 때 그들은 삼층루에서 모였고 또한 창에 걸터앉은 사람도 있었다! 사실 이것이 더 집회 장소답다. 오늘날 사람들이 집회 장소에서 한 줄씩 한 줄씩 질서있게 앉아 하는 집회는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교회의 집회 장소는 매우 단순하다. 그 안에 사람들은 창에 걸터앉을 수도 있고 마리아와 같이 땅에 앉을 수 도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집회는 지나치게 정식적이다! 우리는 누각의 제도를 회복해야한다. 누각 아래는 장사하는 곳이고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며 누각 위는 비교적 가정적이다. 마지막 저녁만찬은 누각위에서 있었고 오순절 날 성령의 강링 하심도 누각 위에서였다. 여기서의 집회도 또한 누각 위에서 이다. 어느 때 사람들로 하여금 누각 아래 앉게 하는가? 누각 아래에서는 공경함이 좀 있지만 거리감이 있다. 누각 위에서는 조금은 멋대로 이지만 친밀함이 있다. 원칙상 하나님은 우리가 누각 위에 모이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정식적이지 않고 서로가 더욱더 가정의 분위기 안에 있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가정의 분위기가 있는 곳에 함께 모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정식적인 집회소에 대한기록이 없다. 성경 안의 집회 장소는 어떠한가? 교회는 정식 집회 장소가 없이 늘 사람의 집에서 모였다. 성격은 여러 차례 교회가 사람의 집에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그들(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롬 16:15,원문참조).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골 4:15).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네 집에 있는 교회"(몬 2). 그러므로 신약의 성경에는 [집에 있는 교회]가 최소한 세 개 있다. 집에 있는 교회란 무슨 뜻인가? 이는 교회 인수가 많지 않고 형제의 집도 크지 않으므로 그의 집에서 모였기 때문에 이런 교회를 00집에 있는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당시 사도 시대의 집회 장소는 반드시 정식 규모의 큰 회당이 아니었다(사역 안에서 필요한 전도하는 장소는 또한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처음부터 잘 시작해야한다. 당신이 어떤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은 사람이 생긴 후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듣고 구원받고 승리하는 것이 중요할 뿐 아니라 집회도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사역자가 그들을 대신하여 집회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일어나 집회해야 한다.
성경을 읽는 집회나 기도집회나 떡을 떼는 집회나 은사를 사용하는 집회를 다 그들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그들이 있는 지방의 교회가 그들의 집회 장소를 결정해야한다. 형제의 집에서 갖는 것이 제일 좋다. 집회장소를 한 집에서 갖든 혹 몇몇 집에서 갖든 그들 스스로 찾아야 하며 결정해야한다.
오늘날의 과오는 교회의 집회장소가 사역자가 빌어서 쓰는 장소라는 데 있다. 사람들이 구원 받을 때 사역자는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집회 장소를 구하는 책임을 지게 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그 사역자가 빌어서 쓰고 있던 집회 장소에 가입하게 하고 모이게 하였다. 이는 결국 지방 교회로 하여금 집회가 없게 하고 사역자들만 집회를 갖게 하였다. 동시에 이는 형제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참된 성질을 오해 하고 그들로 하여금 처음부터 교회 책임을 지고 영적인 일을 책임지는 것을 배우게 하지 않았다. 사실 지방교회 안에서 집회소의 필요성은 그리 크지 않다. 일반적으로 형제들의 집이라면 다 사용할 수 있다.
집회소의 필요성은 사역 안에 있다. 사역은 일할 장소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갓 믿은 형제들에게 당신이 빌어서 쓰고 있는 장소가 사역을 위한 것임을 지적해 보여 주어야 한다. 이것을 그들이 현재 이루고 있는 교회와 섞어 놓아서는 안 된다. 사역은 많은 때 응당 이러한 정식 장소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정에서 모이는 것이 더욱 좋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쓸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스스로 찾아내야한다. 만일 사람이 많고 장소가 넓다면 그런 가정이 한두 가정 더 있는 것이 좋다. 그들 스스로가 일어나 집회 장소를 구하는 데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평상시에는 그들이 가정으로 나누어서 모일 수 있고 만일 온 성의 믿는 이들이 한 곳에 모일 필요가 있고 한 곳에 모여서 교통하고 온전케 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면 매달 한 번 공공장소를 임대할 수 있다. 만일 힘이 닿으면 장기간 그런 장소를 빌릴 수도 있다. 어떤 때에는 특별집회가 있어서 모든 이가 비교적 장기간 한 곳에 모여야 한다면, 어떤 공공장소를 빌려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정상적인 집회는 항상 가정을 보통으로 삼아야 한다***.
교회가 형제의 집에서 모이는 것이 교회의 정규적인 방법이다.
오늘날 같은 웅장한 건물은 세상의 허영과 육체의 자랑에 속한 것이다. 집에 있는 모임을 가져야 한다. 집에 있는 모임에는 많은 유익이 있다. 만일 집에서 모인다면 모든 사람들이 더욱 자유스럽고 억압을 받지 않을 수 있고 모든 사람이 함께 영적인 일을 말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을 집회소로 데려온다면 그들은 다 질서 있게 되어 버리고 감각 없는 사람같이 되어 버린다. 이럴 때 결국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게 하는 경지에 이르고 수동적인 사람이 된다. 이것은 교회 집회가 아니다.
교회집회에는 마땅히 가정의 분위기가 충만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성령의 속박 외에 다른 속박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회에서 형제들이 질문하는 것조차도 금지된 것이 아니다(고전 14:35).
그리고 가정에서의 이런 집회는 형제들로 하여금 교회의 일이 그들의 일이고 또한 그들과 매우 가까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얼마나 많은 믿는 이들이 교회 일은 높고 큰 것이며 그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가? 그 이유는 웅장한 집회소가 있고 또 그 안의 사역자가 모든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집회가 가정에 있다면 이런 느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믿는 이들은 교회의 친근함과 영적인 책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가정에서의 집회는 이웃들로 하여금 그 가정이 주님을 믿는 가정임을 알게 한다. 또한 간증하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도 큰 유익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가기를 꺼려하지만 집에 오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집에서의 집회는 기독교의 물질적인 손실을 피하게 할 수 있다. 처음 삼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핍박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지하실에서 모이고 산굴에서 모였기 때문이다. 이런 집회 장소는 반대자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 고발하지 않는다면 반대자들이 그들을 찾을 수 없다. 오늘날 높고 큰 예배당은 너무나 찾기 쉽다! 그리고 그것이 파괴되면 믿는 이들은 즉시 흩어지고 교회도 즉시 파괴된다. 이것이 참으로 기독교인가? 과거에 그리스도들이 평상시에 모인 장소는 그렇게 크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주의 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그렇게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날의 예배당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하나님의 당초의 뜻이 아니다(사역을 위한 집회 장소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지방 교회가 집회장소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내 말은 ***가정의 모임을 교회의 본위적인 집회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적인 장소는 계속적인 집회 장소가 아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23절은 공공장소가 아닐 수도 있다. 가령 공공 장소가 있다 하더라고 이것에 근거하여 가정 집회를 취소 할 수 없다.
고린도 전서 14장 23절은 "온 교회가 함께 모여"라고 말한다. 교회가 한 곳에 모일 때가 있다. 오순절 때에 제자들은 한 곳에 모였다(행 2:1). 후에 그들은 때때로 솔로몬의 행각에서도 모였다(행 5:12).그러므로 믿는 이들이 한 곳에 모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많은 때 교회는 어떤 장소를 찾아서 한 곳에 모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가정의 냄새를 잃어서는 안 된다***. 항상 모여야 한다.
성경에는 오늘날 같은 정식집회소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론은 매우 간단하다.
각처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생길 때 그들로 하여금 즉시 집에서 집회를 갖게 해야 한다.
사람이 적을 때에 한 집에서 모이고 많을 때에는 몇몇 가정에서 모인다. 한 달이나 2 주 만에 온 교회가 한 곳에 모일 때는 비교적 큰 장소를 빌릴 수 있다. 이것이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이다.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는 또 다른 종류이다. 그것은 교회가 책임지지 않고 사역자가 책임진다.
그러므로 집회 장소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지방 교회의 집회로서 가정을 근본으로 하는 집회 장소이고 또 하나는 사역자가 일하기 위한 사역자의 집회 장소로서 이는 교회 집회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사역자가 일하는 데 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로마에서 바울의 셋집을 구한 원칙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로마 교회가 세워졌고 로마에 집회를 하고 있던 형제들이 있었지만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지방 교회의 장소를 사용하여 사역하지 않고 지방 교회 외에 방을 구하여 사역한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따르도록 좋은 본을 남겨 두었다. 사역자가 한 지방에 가서 단 기간 머물 때에는 그 지방 교회의 접대를 받을 수 있다. 바울과 같이 드로아에서 팔 일밖에 머물지 않을 때에는 따로 집을 빌려 집회할 필요가 없다. 바울이 떠날 때 사역집회가 중단 되었지만 드로아의 형제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의 집회를 갖고 있었다.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에는 장기간 머물렀기 때문에 그 자신이 셋집을 구하여 그를 만나러 온 많은 사람을 접대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강론하였다. 만일 사역자가 한 지방에서 장기간 사역할 계획이라면 사역의 용도를 위하여 어떤 장소를 세내거나 집을 지어야 한다. 사역은 반드시 이런 방법을 취해야 하고 반면에 교회는 정식 집회장소가 필요하지 않다. 뮬러의 고아원 같은 경우에 오히려 몇 채의 집을 지을 필요가 있었던 것은 그것이 사역의 성질을 띠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가정의 성질로 모인 집회가 많다.
이제 이 세 가지의 문제를 우리는 해결 할 수 있게 되었다.
(1 )성경안의 교회는 오직 한 지방에서 자란 형제들이 일어나 감독이 되는 것이 있을 뿐 외지에서 사역자가 외서 그 교회를 다스리기 위하여 그곳에 머무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생길 때 사역자는 그 가운데서 교회를 책임질 장로들을 선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방에 있는 형제들은 장로가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성령의정상적인 방법임을 보아야 하고 외지에서 누가 그들의 지방에 요청되어 전적으로 교회의 책임을 지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2) 교회집회는 사역자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 있는 형제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은사대로 다른 형제를 섬기는 것이다.
이런 집회의 성질은 일방적이고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피차적인 것이다. 어느 때든지 사역하는 형제가 그곳을 지나갈 때 열흘이나 보름 동안의 특별 집회를 가질 수 있다. 보통 때 지방의 형제들이 함께 모이면 찬송이나 계시나 가르치는 말씀이나 방언 등등이 있으므로 서로 온전케 하고 피차 권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집회를 갖기 위하여 모든 사역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의 옮겨 부음을 얻도록 힘을 다하여 인도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린도전서 14장의 그런 집회를 가질 수 없다.
(3) 집회 장소는 정식적인 것이 아니라 가정적인 것이다.
사람이 적을 때에는 한 가정에서 모이고 많을 때에는 여러 가정으로 나누어 모일 수 있다. 한 곳에 모여야 할 때는 따로 공공장소를 찾을 수 있다.이렇게 사역할 때 교회가 자립하고 스스로 양육하고 스스로 전파하는데 문제가 전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한 지출이 없음으로 많은 돈을 절약하여 모든 헌금으로 가난한 믿는 이들의 쓸 것을 고린도 교회처럼 구제할 수 있다. 또는 빌립보 교회처럼 사역하는 사역자의 쓸 것을 도울 수 있다. 이럴 때 각 방면이 어떤 저지(沮止)를 받지 않고 다 자유로이 발전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