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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잘 알고있으면서 그책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세계 중국3대기행문 중 하나라는
표해록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표해록은 무었일까요?.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어 제주에 파견되었던 최부가 1년후 1488년
부친상을 당해 제주에서
고향 나주로 건너오다 서남해바다에서 표류하며 겪었던 이야기가 담겨진 책입니다.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했던 배는 중국 남부해안에 정박 강남과 산둥지방을 거쳐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한후
조선으로 향하게됩니다.
장장 6개월에 걸친 긴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의 현장 기록입니다.
표해록을 통해 통해 우린 동아시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관료앞에서도 꼳꼳했던 조선선비의
기개를 볼 수있습니다.
또한 위험한 상황속에 내몰린 모험이야기를 통해 일본과 한국 중국의 관계는 물론 당시 아시아의
경쟁구조와 당시까지만해도 베일에 가려져있던 중국 강남지역의 화려한 문명과 대운하의 쓰임새
또한 자세히 만나게 됩니다.
연합뉴스 | 황윤정
최부의 '표해록' 답사기 펴낸 서인범 교수
"조선 선비 최부의 '표해록'(漂海錄)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해양 문학 작품이다."
'표해록'은 조선 성종 때 제주도 지방관인 최부(1454-1504)가 부친상을 당해 고향인 나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중국에 표류했던 일을 기록한 여행기다.
최부 일행이 중국 강남 지역에서 베이징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8천800여리(3천200km)에
이르는 여정 동안 겪은 일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기'와 더불어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힌다.
최부의 흔적을 더듬어 간 답사기 '명대의 운하길을 걷다'를 펴낸 서인범 동국대 사학과 교수는
"최부는 지금으로부터 520여 년 전 우연이긴 하지만 중국 강남 지역에 간 최초의 조선 선비이며
그가 쓴 '표해록'은 중국 3대 기행문으로 꼽힐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라면서
"그가 거쳐 간 길을 직접 가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2009년, 서 교수는 배낭 하나 둘러매고 항저우부터 베이징까지 최부가 거쳐 간
명대 조운로(운하길)를 직접 답사했다.
중국 명대(明代)를 전공한 서 교수에게 표해록은 "보물"과 같은 작품이다.
"당대의 시대 상황과 조운로의 모습을 이토록 잘 보여주는 책은 없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무엇보다 '표해록'은 '캐리비안의 해적' 못지않게 재밌다"면서
만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다를 건너가는 부분이 특히 재밌다.
고래를 보고 놀라는 장면, 도둑을 만나 죽을 뻔한 이야기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표해록'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의 순간에도 꿋꿋함을 잃지 않는 최부의 올곧은 성품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바다에서 파도가 너무 거세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일행이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자고 했지만
조선 유학자인 최부는 국가가 용인하지 않는 신에게는 절대 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반대합니다."
서 교수는 앞으로 '표해록'의 마지막 여정인 베이징에서 압록강까지를 답사할 계획이라면서
"이 길을 걸었던 조선시대 연행사(燕行使)들의 이야기도 책에 함께 담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유허비 올라가는 길
금남 최부선생 유허비.
錦南 崔溥 先生 遺墟碑.
전남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산43-1.
최부 선생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곳으로 추정된다
최부 선생은 조선 전기 즉1454년(단종2)부터1504년(연산군10)까지 살았던 사대부이자 관료였습니다.
아버지는 진사 최택(崔澤)이고 어머니는 여양(驪陽) 진(陳)씨로 알려져 있으며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초시를 거쳐25세(1478년, 성종9) 때에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습니다.
선생은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당시 대유(大儒)로 평가받는 김종직(金宗直)과 사제관계를 맺었고,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같이 공부하였습니다.
이로서 선생은 사림의 계보 즉 영남사림의 맥을 이어받은 호남사림의 선도자가 되었지요.
1487년에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종5품) 등으로 승진하였고, 9월에 제주지역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전남 나주시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의 사적비
이듬해인1488년 정월에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제주에서 귀향 중에 풍랑을 만나 남중국에 표류하였습니다.
북경을 거쳐 요동을 지나 6월4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때의 표류와 중국 견문과정을{표해록}이라는 책으로 엮어 임금에게 진상하였답니다.
그렇지만 왕명에 의하여 책을 진상하였다 고는 하나, 상중(喪中)에 한가롭게 기행문이나 쓰고 있었던 것은
명교(名敎) 에 어긋난다고 여겨져서,
최부 선생은 분상(奔喪)을 마친 후에 다시 관직에 복귀하는 문제로 논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40세(1493)에 이르러서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 정5품), 홍문관 교리(정5품)로
관직에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크게 가뭄이 들자 수차(水車)제조법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중국을 여행했을 때 수차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것을 직접 보고{표해록}에 기록하였는데,
아직 수차를 이용한 농업에 대해 무지했던 당시에는 혁신적인 농업기술의 발전을 꾀한 것이지요.
또한 조선왕조실록 에는1497년(연산군3) 최부가 3정승과 이조·호조· 예조판서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불의를 보고 바르게 직언(直言)하는 사대부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엿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연산군조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로 세칭 훈구파의 세력에 밀려
사림파의 거두들과 함께 유형(流刑)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로 단천에서 10월24일 참수되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蛇足:'무오사화'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웃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린
김해김씨 삼현파의 증시조라 할 수 있는 탁영 김일손(당시 사관) 은 참형되고,
김종직의 묘를 파헤쳐 시신을 가르는 이른바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수많은 유생을 죽이거나 유배 보낸 사건.
무도한 연산군의 횡포에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한 최부, 그의 최후에 대해 역사는
그냥 입을 다물지는 않았습니다.
실록 연산군 10년 10월25일의 기사에서 사관(史官)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부는 공렴정직하였고 경전과 사서(經史)에 박통(博通)하고 문사(文詞)에 넉넉하였다.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고 말하고는
"죽임을 당하자 조정이나 재야의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는 말로 애통함을 기록하였다.
전남 나주시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의 금남 최부 선생과 부친의 묘소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 부친의 상을 당해 풍랑이 심한데도 배를 띄워
집으로 향하다 표류하게 됐습니다.
죽은 뒤에도 부친 옆으로 가고 싶다고 생전에 유언, 유허비는 출생지에,
사적비와 묘소는 부친의 묘소에,
그러나 두 곳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통정대부 사간원 사간이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왕명을 직접 받는 도승지였음도 알 수 있습니다.
금남 최부 선생 기념사업회 '닻' 올려
2013년 7월 20일 창립총회서 강원구 회장 선출 사업 본격화
세계 3대 기행문 꼽히는 ‘표해록’ 재조명 추진도
강원구 회장은 “중국 절강성의 관리들은 최부 선생에 대해 모르는사람이 없으며 유적지를 만들려고
하고 있으나 선생의 고향인 나주에서는 동강면 성지촌에 조그만 비석 하나가 고작이고,
무안군 몽탄면 묘지에는 무안군의 노력으로 성역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표해록은 조선 지식인의 눈에 비친 15세기 중국사회(명나라)를 담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으며
동방견문록과 함께 세계 3대 기행문으로 꼽히고 있다.
당시 성종은 최부에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여러 곳의 사지(死地)에 다니면서도 국위선양을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고 칭찬하며 옷 한 벌을 하사했다는 것.
특히, 그가 중국에서 보고 기록한 수차 농사법은 당시 조선에서 가뭄 극복법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한편, 나주시는 지난 2008년 6월 최부 선생이 표류하다 처음으로 중국땅을 밟은
절강성 린하이(臨海)시 도저(桃渚)진에 한중 민간우호를 상징하는 사적비를 건립한 바 있다.
당시 나주시는 이 사적비 제막을 계기로 양국간의 우호교류 확대와 중국에 최부 선생을 알리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아직까지 이렇다할 활동이 없었던 것.
기념사업회는 중국에서 ‘효’의 상징으로 추대 받고 있는 최부 선생이 돌아가신 지 509년째인 올해,
기념사업회 창립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의 우호교류 확대는 물론
최부 선생의 업적과 표해록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는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표해록 요약]
최부는1487년 11월 1일 전라도 해남을 떠나 다음날 제주 조천관(朝天館)에 도착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이듬해1월30일 부친상(父親喪)의 소식을 전해 듣고, 윤1월3일 제주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거센 풍랑 때문에16일까지 표류하게 되었으며 결국 중국 태주부 임해현(臨海縣) 우두외양(牛頭外洋)에 도착하였다.
이후 최부를 비롯한 총43명의 일행은 왜구(倭寇)로 오해받아 고초를 받았지만, 조선의 관리임이 확인되어 북경까지 호송되었고
다시 요동을 지나 의주를 거쳐 귀국하게 되었다.
{표해록}에는 이러한 최부일행의 표류와 여정을 아주 세밀하게 기록되고 있어서, 당시 제주의 풍속과 서해 바다의 정황
그리고 중국 내 운하와 그 주변의 풍광 등이 묘사되었다.
이와 같은 기록된{표해록}은 몇 가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제주의 풍속과 서해바다에 대한 내용이다. 최부가 귀향하기 위해서 탄 배는 관용선박이 아니라
제주 수정사 승려의 개인 배이다. 또한 여기에 승선한 뱃사람들은 대체로 제주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이나 대화내용을 통해서 제주의 풍속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주에서는 여자의 활동이 활발하다고 알고 있다. 이 책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즉 제주에서는 여자가 태어나면 부모에게 효도할 자식이라 생각하고,
사내애가 태어나면 곧 바다에 나가 고래나 악어에게 잡아먹힐 것이라 하여,
아들보다 딸을 귀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제주사람들의 기질까지도 기록하고 있어서 민속학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한편 서해바다에서 표류 중에서 목격한 고래를 묘사하고 있다.
고래의 모습은 정약전(丁若銓)이 쓴{자산어보(玆山魚譜)}(1814)에 기록된 흑산도 앞 바다의 고래와 일치하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서해에서 흔치않았다고 생각하는 고래의 존재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두 번째는 한반도의 서남단에서 남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구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사실 최부는 표류기간 내내 일기상태와 바람의 방향 그리고 바다의 빛깔을 정확하게 기록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바다의 빛깔은 중국 송나라때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 (高麗 圖經)} (1123)에 나온
"백수양(白水洋)· 흑수양(黑水洋)"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그 정확성이 돋보인다.
대체로 고대 한중 간의 항로 중 황해남부사단항로는{고려도경}에 기록된 대로 중국의 명주(지금의 항주)에서
북쪽으로 갔다가 다시 동북쪽으로 항진하면 흑산도에 이른다.
최부에 의하여 기록된 당시의 풍향과 일기를 분석하면,
난파된 배의 진행방향이{고려도경}의 항로와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조건만으로도 한반도와 남중국간의 이동이 가능하였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는 것이며,
{표해록}은 그것을 실증하는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
세 번째는 최부와 같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기본소양과 자부심을 알 수 있다.
{표해록}을 보면 최부가 조선시대의 문사(文士)임을 자부하는 대목과 사림으로서의 흐트러짐이 없는 태도가 엿보인다.
먼저 표류 중인 윤1월12일 하산(下山)이라는 섬에서 관음불을 자처하는 해적 임대(林大)를 만나게 되어 노략질을 당하였다.
여기에서 잠깐 최부가 해적을 만나는 장면을 살펴보자.
처음에 임대는 해적의 모습을 하지는 않고 최부를 도와주는 뱃사람이었다.
그러나 밤9시경에 갑작스럽게 무리를 이끌고 최부일행이 탔던 배에 쳐들어와서 금품을 요구했다.
그러나 표류당한 배인 까닭으로 약탈할 물건이 별로 없자 해적들은 최부의 옷을 벗기고 손을 뒤로 묶은 후
거꾸로 매다는 등 폭력을 행사하며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 와중에서 최부가 관리임을 증명하는 인수(印綬)와 마패(馬牌)를 빼앗기자,
거꾸로 매달린 채로"배안에 있는 물건은 모두 빼앗아 갈 수 있으나 인수와 마패는 곧 나라의 신표(信表)로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으니 돌려주시오"라고 말하며 관리의 도를 지켜내었다.
또 칼로 어깨를 내리치며 부상을 입히면서 금품을 요구하는 해적 임대에게
"몸을 저미고 뼈를 부술 수 있지만 어찌 금은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등,
바로 죽음 자초할 수 있는 말 한마디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와 같이 최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도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조선의 관리임을 내세우며
당당한 태도를 보여, 결코 비례(非禮)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도적을 만나기 전 주변으로부터 상복(喪服)을 벗고 관복(官服)을 입어
위엄을 나타내라고 권유를 받았지만, 예(禮)가 아니라며 따르지 않았다.
또한 남중국에 도착해서 왜구로 오인되어 고초를 겪을 때 그리고 중국 관리 앞에 나아가 본인이 조선의 관리임을 밝힐 때
역시 항상 상복을 입고 있어서 가례(家禮)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한 것은
그가 성리학을 깊숙이 이해하고 실천적으로 따르는 조선의 문사임을 표현한 것이다.
네 번째는 방대한 양의 중국 풍토기록을 알 수 있다.
최부가 중국에 도착하여 바로 항주로 옮겨지고 다시 운하(運河)를 따라 북경으로 가는 동안,
때로는 배와 말을 갈아타고 지나간 길의 주변정황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최부가 운하를 지나가면서 재미있는 풍경이 있어 언급하고자 한다.
3월2일 신안역(新安驛)이라는 곳을 지나 여량홍(呂梁洪)이라는 호수를 지날 때였다.
운하의 물 흐름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지세와 원래 존재했던 강의 흐름에 따라 자주 변하였다.
이때 북경으로 가는 최부일행의 진로와 운하의 물흐름이 반대였다.
최부일행은 배를 타고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곳을 통과할 때는 인력(人力)으로는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최부일행이 탔던 거룻배를 소10마리가 물의 흐름과 반대로 끌어 올라갔다고 한다.
또 이튿날에는 서주(徐州)를 지나면서 인부100명이 운하의 양쪽에서 최부가 탔던 배를 끌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기록되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표해록}에서 여러 차례 목격된다.
이 책은15세기 당시 중국 운하주변의 풍경 뿐 아니라 운하를 운행하는 방법까지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한편 최부는 운하를 만들면서 쌓은 제방을 당(塘)·제(堤)·언(堰)·패(壩) 등으로 구분하였고,
제방의 수문 즉 갑(閘)에 대해서도 서술함으로써 중국 제방의 제도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운하를 가로지르는 홍교(虹橋, 무지개 다리), 석교(石橋), 목교(木橋), 지붕이 있는 다리 등
각종 다리 또한 그 형상을 실감나게 전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시스템인 포(鋪)·참(站)·역(驛) 등에 대해서도 창고의 존재여부까지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자세하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회의 거리를 묘사한 것이나,
당시의 시장인 집(集)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의 생활상을 세밀히 전하고 있다.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일반 백성의 신앙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각종 사찰이나 사묘(祀廟) 혹은 당시 중국 민간에서 널리 신봉되었던 관우묘(關羽廟)도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군사시스템인 위소(衛所)에 대해서도 그 명칭을 일일이 적시하고 있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호송 도중에 수차(水車)의 제도를 보고 그 내용을 자세하게 적은 것으로 말미암아 훗날 조선의 농업 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표해록}은 최부의 사람됨과 성리학자로서의 소양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인 셈이다.
게다가 한중간의 항로를 추적할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으며, 나아가15세기 명나라의 지방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조선의 사신이 중국에 다녀오면서 기록한 소위{연행록(燕行錄)}은 다수가 존재한다.
이 기록들은 대체로 의주에서 산해관(山海關)을 지나 북경에 다녀온 기록일 뿐이다.
그렇지만 최부의{표해록}은 연행록에 나오는 북경에서 의주에 이르는 중국을 동북지역을 기록한 것을 포함하여,
북경의 남쪽에서 항주에 이르는 남중국의 풍광을 정확하고 생동감있게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조선의 관리를 제외하더라도 전근대시대에 중국을 여행한 외국인은 부지기수(不知其數)이며,
그 여행을 밑천으로 작성한 기행문도 적지 않다. 그런데 중국 여행기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바로 마르코 폴로에 의해 발간된{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1299)과,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이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9세기)를 손에 꼽을 것이다.
{동방견문록}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마르코 폴로가1275년부터1295년까지 중국을 여행하고 귀국하여 작성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을 문맹(文盲)이었을지도 모르는 마르코 폴로가 직접 서술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한 다분히 서양인의 입장에서 동양에 대한 과장이 섞여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 엔닌이 저술한{입당구법순례행기}는9세기 당(唐)나라 때 지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얻을 수 있는 자료이다.
엔닌은 일본 헤이안[平安]시대에 살았던 승려이다.
그는 당나라의 밀교를 받아드린 구법승(求法僧)으로838년 양주(揚州)에 도착하여 여러 곳을 순례하고 답사한 후
846년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을 책으로 저술하였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엔닌의 이러한 구법행위와 수도였던 장안(長安)에 머물렀던 내용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한편으로는 당시 서해를 둘러싼 중국과 한반도에서 활발하게 해상활동을 전개하였던 신라인들 특히 장보고(張保皐)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을 소개하는2개의 명저는9세기와13세기의 중국의 실정을 풍부한 내용으로 자세하고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최부가 작성한{표해록}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마르코 폴로의 저작처럼 과장되지 않았고,
15세기 중국 명(明)나라의 실정을 아주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최부는, 회창폐불 당시 엔닌이 자신이 승려였음을 속이려고 한 것처럼 비굴하지 않고,
조선의 문사(文士)의 기개를 드러내며 결코 중국인들에게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두 여행기의 업적을 뛰어넘을 수 있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표해록}을 3대 중국 견문록의 반열에 올려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평가를 인정이라도 하듯 최부의{표해록}은 출간이래,
18세기 일본의 주자학자 청전군금(淸田君錦)에 의해{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번역되기도 하였고,
19세기에는 지암(止菴) 박씨부인(朴氏夫人)에 의해 한글 언해본이 나오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미국학자Meskill(1953), 일본학자 목전체양(牧田諦亮)(1986),
중국학자 갈진가(葛振家)(1992) 등 외국학자에 의해서도 꾸준하게 연구되고 있다.
이와 같이 국내외에서 공히 그 가치를 인정받은{표해록}은 최부가 지닌 사대부로서의 가치관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15세기 남중국의 상황을 생생하게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의 마르코 폴로라 칭송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표류와 중국을 여행하면서 보여주었던 조선 사대부의 기개와 자부심은
현재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되짚어야할 우리의 자세가 아닌가 한다.
<이상 '표해록'요약은 주성지(동국대 사학과 강사)님의 조선의 마르코폴로'최부(崔溥)'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