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여공중우일미(譬如空中雨一味)에 : 비유하면 공중에서 내리
는 비는 한 맛이지만
수기소우각부동(隨其所雨各不同)이나 : 비로 적실 것을 따라서 같지 않나니
기피우성유분별(豈彼雨性有分別)가 : 어찌 비의 성품에 분별이 있으랴만
연수물이법여시(然隨物異法如是)인달하야 : 사물이 다르므로 연(然) 그러나 수물(隨物)이라, 사물이 다른 것을 따라서 법도가, 이치가 그와 같다.
한 나뭇가지에 있다 하더라도 남쪽 가지 북쪽 가지 끝쪽 가지 중앙에 달린 사과가 다 맛이 다르다. 그 맛도 해마다 다르다. 한 밭에 있더라도 그 감자가 전부 다 맛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다.
중생도 똑같다. 똑같은 동일법성이라 하더라도 자기의 업에 따라서 마음을 크게 쓰는 사람, 쪼잔하게 쓰는 사람 그렇게 산다.
저는 잔글씨를 하도 많이 보다 보니 이제 마음이 쪼잔해져 버렸다. 어릴 때는 마음이 이만큼 안 작았다. 그래 요즘은 붓글씨나 쓸까 싶다. 큰 글씨나 쓸까, 아니면 간판집에나 취직할까 싶기도 하고, 잔글씨를 많이 보면 사람이 쪼잔하게 되는 것은 확실하다.
*
여래법우비일이(如來法雨非一異)라 : 여래의 법비도 비일이라. 십력이니 뭐니 계속 나왔지만 여래의 법비도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이런 경우는 기신론이나 금강경 같은 데도 잘해 놓았지만 열반경에 사구백비(四句百非)로써 잘 정리해 놓았다.
구체적으로 ‘하나다, 다른 것이다’ 같은 경우, 하나라고 하는 것은 ‘아뢰야식에 우리의 중생 성품이 아무리 못난 중생이라도 마음이 부처님과 똑같다는 것이 하나다. 그렇지만 중생을 부처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은 중생은 한 번도 생각을 끊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다른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아뢰야식은 각(覺)과 불각(不覺)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부처님의 법우(法雨)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하나라고 했을 때는 부처님과 동일법성이고, 동일법성을 이야기할 때 화엄경에는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한다.
‘여기에서 문수보살이 게송을 읊었는데 시방의 모든 문수보살이 동시에 발성했다’ 많이 보셨을 것이다.
왜 동시냐? 동일법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현보살이 비로자나여래장신삼매에 들어갔는데, 시방의 모든 보살이 동시에 비로자나여래장신삼매에 들어갔다’
‘뉴욕에 사과가 익으니까 서울에도 사과가 익더라’ 라는 말도 이런 뜻이다.
평등적정이분별(平等寂靜離分別)이나 : 평등하고 고요하여 분별심이 없건마는
연수소화종종수(然隨所化種種殊)하야 : 교화할 바 갖가지가 교화할 바의 다름을 따라서
자연여시무변상(自然如是無邊相)이로다 : 자연히 그와 같이 그지 없도다.
하늘에 달이 뜨면 그 달은 늘 하나다. 그런데 매일 같은 달이 하나도 없다. 제가 볼 때는 항상 보름달인데 어떤 사람은 초승에 보면 초승달이다, 그믐에 보면 그믐달이다, 상현달이다, 하현달이다, 라고 한다.
달은 매일 다른데 또 매일 같은 달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할 때, 이치만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늘 같다. 무리(無理)이기 때문이다. 이치가 없기 때문에 똑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현실, 사실에 따라서는 같은 사람도 늘 그 사람이 아니다.
이치는 저혼자 바깥으로 못 나오니까 사(事)를 통해서 내려온다. 어릴 때는 젖먹다가 늙어서는 꼬부랑해서 이마빡이 쪼글쪼글해져서 걸어다닌다.
‘주름진 사람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은 이(理)를 보고 하는 이야기다.
‘가가 가가 아니다’ 하는 것은 사(事)를 보고 하는 이야기다.
이치라고 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해서 불생불멸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여래출현품에서는 진여자성의 이(理)를 굉장히 강조한다.
*
비여세계초성시(譬如世界初成時)에 : 비유하면 세계가 처음 이루어질 때
선성색계천궁전(先成色界天宮殿)하며 : 형상세계, 색계천이 먼저 생기고
차급욕천차인처(次及欲天次人處)하며 :다음에 욕심세계, 다음에 인간
건달바궁최후성(乾闥婆宮最後成)인달하야 : 건달바 이렇게 차차 거칠게 이루어진다.
능엄경에서는 지수화풍공견식(地水火風空見識)이라고 7대(七大)를 이야기한다. 그때도 제일 거친 것을 이야기하자면 지(地) 땅이다. 고체덩어리 이것이 좀 보들보들 유연해지면 물과 같은 사람이 된다. 참선을 오래 하면 그렇다. 남의 그릇에 맞춰 줄 수 있는 성품이다.
땅은 지가 똥그랗게 제 고집을 피우고 있으니까 인간이 안 된다. 너무 고집스러운 사람은 삿되다.
물과 같이 되었다가 물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면 불과 같다. 불은 형체는 보이는데 잡으면 만져지지는 않는다.
불보다 더 부드러운 것은 무엇인가? 느껴는 지는데 볼 수는 없는 것이 바람이다.
세주묘엄품에 주풍신(主風神) 주화신(主火神) 주수신(主水神) 해서 잘 써놓았다.
바람기운은 더 부드럽고 땅기운은 딱딱하고 물기운은 조금 물컹하고 불기운은 보이는데 만져보면 만져지지 않는다. 바람기운은 보이지도 않은데 느껴지기는 하고, 바람보다 더 부드러운 것은 공(空)이라고 한다. 공대(空大) 공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공보다 더 부드러운 것을 불교경전에는 견(見)이라고 한다. 견대(見大) 견보다 더 부드러운 것을 우리는 식(識)이라고 한다. 유식(唯識) 식(識)인데도 꿈에도 보이고 망상도 보이고 다 보인다. 그 식대(識大)를 초월한 것을 심(心)이라고 한다.
심은 심인데 진심(眞心)을 무심(無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마음하고 생각하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몸을 자기라고 하기도 하고 이름표 계급장을 떼놓으면 계급장을 자기라고 하기도 한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 안 돼서 그렇다. 오온개공이 안 되면 일단 첫발자국 분별심을 끊지 못한다.
여기서도 그런 순차대로 다 써 놓았다.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불교경전은 무조건 순서대로 써놓았다.
눈은 저 뒤에 해운대 장산까지 여기서 바라보이니까 눈이 제일 먼저 안(眼)으로 나온다. 귀는 장산의 소리는 안 들리지만 금정산의 개 짖는 소리나 지나가며 빵빵거리는 자동차 소리는 듣는다. 냄새는 이 방안에서 누가 방귀 뀌는 냄새는 나지만 길가에서 방귀 뀌는 냄새는 안 나타나니까 냄새를 못 맡고, 말씀 나온 김에 물 한 잔 먹겠다. 맛은 어떤가? 혓바닥을 대야되고 냄새는 요만큼이라도 떨어져 맡아지는데 설(舌)은 요기까지 딱 붙여야 된다. 몸은 꼬집어 뜯어야 된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인데 우리는 흔히 눈코입귀라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눈코입귀라고 함부로 이야기 안 한다. 눈귀코입이라고 이야기한다.
불교에서는 순차대로 눈귀코입이다. 바라밀도 그 순차대로, 계정혜(戒定慧)도 순차대로 섭심위계(攝心爲戒)요 인계생정(因戒生定)이요 인정발혜(因定發慧)다.
불교경전은 임상실험이 다 끝나고 나서 고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보시 지계 인욕 정진 고대로, 순차대로 써 놓았다.
일심(一心)에서는 본래 순차가 없는 것이지만, 중생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철저한 순서에 의해서 한 계단 한 계단 밟도록 해놓은 것이다.
여기도 색계, 욕계, 건달바 이렇게 착착 써 놓았다.
저 뒤에 가도 이것이 또 나온다.
*
여래출현역여시(如來出現亦如是)하사 : 여래출현도 역여시하야
선기무변보살행(先起無邊菩薩行)하며 : 그지없는 보살행을 먼저 이루고
차화락적제연각(次化樂寂諸緣覺)하며 : 다음에 고요함을 즐기는 연각이요
차성문중후중생(次聲聞衆後衆生)이로다 : 그다음에는 성문이라. 보살 연각 성문을 흔히 삼승이라고 한다.
화엄경에서 이런 가르침이 이렇게 있는 것은 일승 가르침인데 일승동교(一乘同敎)라고 한다. 같을 동(同)자.
그런데 저는 사상이 일승동교가 아니다.
일승별교(一乘別敎)만 좋아한다.
지난번 문수지남도찬(文殊指南圖讚) 그림을 드릴 때도 해설해 놓은 것은 일승별교를 가지고 했다.
일승별교는 해석이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서 법성게를 할 때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이러한 까닭으로 수행자가 본래 면목을 깨달을 것 같으면,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이라’ 일반적으로 90% 나 99% 사람들이 ‘망상을 없애지 아니하면, 쉬지 아니하면 필부득이라 반드시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것은 삼승의 해석이다.
일승별교에서의 해석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파식망상이라 망상을 쉴 수가 없구나, 필부득이라 정말 쉴 수가 없구나 왜? 본래 망상이 없기 때문이다, 시고행자환본제라 이러한 까닭으로 수행자가 본래 면목으로 돌아갔다면 망상을 쉬고 싶어도 쉴 망상이 없다’ 이렇게 해석한다.
보리(菩提) 본무수(本無樹)요
명경(明鏡)이 역비대(亦非臺)라
본래(本來) 무일물(無一物)인데
하처(何處) 야진애(惹塵埃)냐
‘본래 없는데 어디서 망상이 일어났다는 말이냐, 헛소리 하고 있어, 그거 꿈이야.’
‘어젯밤에 스님이 제 꿈에 막 나타나던데요? 대만 가니까, 이번에 대만 좀 다녀왔습니다.’
‘니 꿈에 간 것은 내 아니다.’
지 꿈꿔 놓고, 어떤 때는 부처님이 오실 때도 있다. 부처님이 오신 것이 아니고 누가 그 꿈을 꾸었는가?
부처님이 가실 때도 있다. 가고 오는 것은 부처님이 아니고 지 생각이 가고 온 것이 확실하다.
여기서 여래의 출현함도 그와 같아서 그지없는 보살행을 먼저 이루고 그다음에는 고요함을 즐기는 연각이고 그다음에 성문들, 나중에는 중생을 이룬다.
부처님, 여래의 출현은 본래 오고감이 없지만 중생의 수준을 따라서 맞춰준다는 것이다.
*
제천초견연화서(諸天初見蓮華瑞)하고 : 모든 천신 연꽃의 상서로운 것을 처음 보고
지불당출생환희(知佛當出生歡喜)하나니 : 지불당 부처님께서 마땅히 출생하시리라 환희하더니
수연풍력기세간(水緣風力起世間)하야 : 물의 인연과 바람의 힘으로 풍력으로 세간이 생기고
궁전산천실성립(宮殿山川悉成立)이로다 : 궁전과 산과 강이 모두 다 생겨났더라.
*
여래숙선대광명(如來宿善大光明)으로 :여래께서 지난 세상 선근의 큰 광명이
교별보살여기기(巧別菩薩與其記)하시니 : 보살의 근기를 잘 지혜롭게 분별하시어 수기를 주시고
소유지륜체개정(所有智輪體皆淨)하야 : 지혜의 풍륜이 모두 청정하다. 저 앞에서 대지풍륜이라고 나왔었다. 청정하다는 것은 집착이 딱 끊어졌다는 말이다.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지우개로 지우려고 달려드니까 영가 현각스님이 답답해서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이라고 했다.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 마라, 부처를 구하려고 하지 마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각능개시제불법(各能開示諸佛法)이로다 : 제각기 부처님 법을 열어 보이도다.
*
비여수림의지유(譬如樹林依地有)하며 :허공은 어디 기댈 데가 없다. 더이상 갈 데가 없다. 토파비불착(討巴鼻不着)이로다, 라고 한다. 비유하면 나무의 숲은, 나무는 땅에서 의지해서 있고
지의어수득불괴(地依於水得不壞)하며 : 땅은 물을 의지해서 있고
수륜의풍풍의공(水輪依風風依空)호대 : 물은 바람을 의지해서 있다. 아까도 이야기했던 지수화풍 그렇게 보시면 되겠다.
단단한 것이 조금 그렇게 그렇게, 바람은 또 허공을 의지해서 있지만 그러나 허공은 더이상 의지할 것이 없다.
이 허공이 무엇인가? 여래다.
열반경에 이렇게 나온다. ‘이 세상에 갖은 비유가 있다. 그러나 부처님을 비유로 설명할 수는 없다. 굳이 한 가지 비유로 설명할 수 있는 가능한 비유가 있다면 허공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오직 설명이 가능한 비유가 있다면 허공만은 허용하겠다. 열반경에 그렇게 나온다. 허공하고 비슷한가 보다.
앞에서 말했지만 시식할 때 고혼청(孤魂請)을 할 때 늘 부르는 것이 있다.
약유욕지불경계(若有欲知佛境界)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取)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碍)
60 화엄경에선 그 구절이 네 구절이 아니고 오온으로 해서 여덟 구절로 나온다.
80화엄경에서는 4구절로 나오는데 60권 화엄경에서는 그 구절이 더 치밀하게 자세하게 여덟 구절 오팔이 40자로 나오고 팔십 화엄경은 28자로 나온다.
사십 자, 스물여덟 자 60 화엄경이 더 치밀하게 잘 되어 나온다. 혹시 참고하실 분들은 60 화엄경 보왕여래성기품(寶王如來性起品)을 보시면 된다.
우리가 그것을 또 바꿔서 시 운율에 맞춰서 약인욕식불경계(若人欲識佛境界) 그렇게 한다.
원본은 약유욕지불경계(若有欲知佛境界)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取)
그 대목을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 가서는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어떤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고 하는가? 여기 나오는 것이 법계성품이 공한 것을 관하라, 이 말이다. 법계의 성품이 마지막엔 공하지 않은가.
기신론 같은 데서는 법계 성품이 공한 줄 알고 보시를 하라,
공한 줄 알고 계율을 지켜라, 공한 줄 알고 인욕을 하라, 참을 것도 본래 없는 줄 알고 참아라, 수행할 것도 본래 없는 줄을 알고 정진하라,고 한다.
그것을 완전히 승화시켜 놓은 것이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이나 화엄경 십지품(十地品) 제7원행지(遠行地)다.
거기에 자세하게 나온다.
‘수행할 것 없는데?’
‘수행할 것 없으니까 열심히 수행해야지.’
‘그 사람 안 오겠는데?’
‘안 오니까 기다려야지.’
‘중생 말 안 듣겠는데?’
‘말 안 들으니까 계속 말해야지.’
억지 같지만 그것이 다음 마지막 대목 때문에 그렇다.
이기허공무소의(而其虛空無所依)인달하야 :이기허공(而其虛空)은 무소의(無所依)라, 여기에 밑줄을 긋겠다. 별표를 한 백 개 쳐놓아도 된다. 아까 이야기 한 내용들이다.
‘진심은 본래 없다’는 대목이 이 구절 ‘허공은 의지할 곳이 없다’는 내용이다.
*
일체불법의자비(一切佛法依慈悲)며 :일체 불법은 자비를 의지했고, 이것은 삼매를 의지한다. 제정신을 차려서, 삼매를 의지한다. 자비롭다고 하는 사람은 탐진치가 끊어졌기 때문에 아주 자비로워진다. 아니면 위선이다.
자비부의방편립(慈悲復依方便立)며 : 자비는 좋은 방편을 의지하고 있다. 자비로운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방편을 써서 남을 도와주려고 한다. 무자비한 사람, 자비가 없는 무자비는 편법을 사용한다. 어떻게 하든지 법을 이용해서 남을 골탕먹인다.
방편의지지의혜(方便依智智依慧)대 : 뒤에 줄을 긋겠다. 지의혜(智依慧) 방편은 지혜를 의지하고, 반야바라밀 다음에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방편바라밀이다.
흔히 방편바라밀을 세속에 쓸 때는 방편바라밀을 쓴다고 하고, 진짜 출세간에 쓸 때는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출세간이 완성되면 정처(靜處)에서 힘을 얻었으면, 요처(譊處)에서 시장바닥에 가서 써먹는 것을 방편바라밀이라고 한다.
방편은 지혜를 의지한다.
그다음 대목을 육조스님은 이렇게 해놓았다.
금강경 서문에서 지(智)는 지혜라고 하는 것은 혜(慧)를 의지한다 해놓았다.
지혜(智慧)라고 묶어서 쓸 때도 있지만 구분을 하자면 지는 무엇이고, 혜는 무엇인가?
지(智)는 작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하나, 엄지손가락 새끼손가락의 작용을 이야기할 때 지(智)라고 한다.
혜(慧)는 무엇이냐? 손 전체를 혜라고 한다.
그래서 육조스님은 혜시지체(慧是智體)요 지시혜용(智是慧用)이라, 금강경 서문에 그렇게 해놓았다.
혜라고 하는 것은 빗자루로 마음을 깨끗하게 쓸어서 본래 청정무구한 쪽으로 간 것을 혜(慧)라고, 혜명(慧明)이라고 한다.지혜가 환하게 혜가 밝았다고 하는 그것은 본체다.
거기에서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잎사귀가 돋아나면 그것은 작용이 일어났지 않은가? 그것을 지(智)라 한다.
지시혜용(智是慧用)이라. 지는 혜의 작용이다.
혜시지체(慧是智體)라 혜는 지혜의 체다.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니다. 제 얘기라면 안 따라오셔도 되는데 육조 혜능스님이 금강경 서문에 그렇게 말씀을 해 놓았다.
제가 하도 ‘제 얘기 아닙니다’ 하는 것은 ‘영 시원찮은 게 시커먼 게 앉아서 뭐하노?’ 이럴까 싶어서 옛날 어른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은 제 피부가 자세히 보면 백옥같다.
업장이 두꺼운 분들이 저를 보고 시꺼멓다고 한다.
그다음 넘어간다.
방편은 지혜를 의지하고 지혜는 혜를 의지한다. 그래 나무가 뿌리와 줄기가 있는 것은 근간이다. 그것이 나무의 본체라면, 잎사귀가 붙었다, 꽃이 졌다, 피었다, 열매가 달렸다, 이것은 전부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조금 더 밀고 들어가면 난초가 있으면 난초를 자라게 하는 기운 자체를 이실(理實)이라고 하고 이체(理體)라고 한다. 진리의 체(體), 원리의 체(體), 근본의 체(體)다.
그 체로부터 이(理)가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사실로 통해서, 현실로 통해서 잎사귀가 나오고 꽃이 나오는 모습이 사(事)다.
그런 것이 사(事)이고 이(理)다.
흔히 체용(體用)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사(理事)라고도 한다.
체(體)와 이(理)가 무르녹아 있는 입장을 부처님이라고 한다.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것, 언행일치하는 사람을 부처님이라고 해서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이라고 한다.
이사(理事)가 그런데 중생은 어떤가? 겉 다르고 속 다르고 수박 종자들이 많다. 토마토 종자보다는 수박 종자가 많다.
부처님은 무르익은 토마토 같다면, 중생들은 보통 안쪽에 아집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어서 겉으로 포장을 많이 한다. 몇 꺼풀 베껴 내야 한다.
무애혜신무소의(無礙慧身無所依)다 : 걸림 없는 혜신은 마지막에 나왔다. 허공이 의지함이 없듯이 마지막에 무애혜신이라고 하였다. 심무가애(心無罫碍) 무가애(無罫碍)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이 바로 이 뜻과 똑같다.
걸림 없는 지혜의 신체, 본체나 혜신(慧身)이 바로 불신(佛身)이고 법신(法身)이다. 그것이 일어나면, 출현해 버리면 성기(性起)가 된다.
인연 따라 일어나면 연기(緣起)가 된다.
혜신은 의지할 데 없도다. 그다음 세 꼭지 남았다.
*
비여세계기성립(譬如世界旣成立)에 : 비유하건대 세계가 이루어진 뒤에는
일체중생획기리(一切衆生獲其利)하나니 : 여러 종류의 중생들이 이익을 얻나니
지수소주급공거(地水所住及空居)와 : 땅에 사는 사람은 땅에 살고 물에 사는 사람은 물에 살고
이족사족개몽익(二足四足皆蒙益)인달하야 : 허공에 사는 사람들은 허공에 산다. 두 발 가진 또 네 발 가진 중생들을 다 이익하게 한다.
*
법왕출현역여시(法王出現亦如是)하사 : 법왕의 부처님께서 여래 출현도 그와 같아서
일체중생획기리(一切衆生獲其利)하나니 : 여러 종류의 중생들이 이익을 얻나니
약유견문급친근(若有見聞及親近)이면 : 보는 이나 듣는 이 친근히 하면
실사멸제제혹뇌(悉使滅除諸惑惱)로다 : 모두 다 번뇌 의혹을 소멸케 하도다.
이것을 ‘약난생(若卵生) 약태생(若胎生) 약습생(若濕生) 약화생(若化生) 약유색(若有色) 약무색(若無色) 약유상(若有想) 약무상(若無想) 약비유상(若非有想) 비무상(非無想) 아개영입(我皆令入)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 금강경에는 해놓았다.
그다음은 여래출현의 다함없음을 맺는 대목, 마지막 게송이 되겠다.
마. 總結無盡
如來出現法無邊이어늘 世間迷惑莫能知일새
爲欲開悟諸含識하야 無譬喩中說其譬로다
여래가 출현하는 법 그지없거늘
세간은 미혹하여 알지 못하니
모든 중생 깨우치려고
비유할 수 없는 데서 비유를 설하였도다.
*
총결무진(總結無盡)
*
여래출현법무변(如來出現法無邊)이어늘 : 여래께서 출현하는 법 그지없거늘
세간미혹막능지(世間迷惑莫能知)일새 :세간은 미혹하여 알지를 못하니
위욕개오제함식(爲欲開悟諸含識)하야 :모든 중생을 깨우치려고
무비유중설기비(無譬喩中說其譬)로다 : 비유를 도저히 할 수 없는데, 할 수 없이 여래출현이라는 것을 비유로써 설명했다, 이렇게 해놓았다.
무비유중에 설기비로다, 비유할 수 없는 자리에서 비유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에 미륵보살하고 석가보살이 같이 정진을 하시다가 미륵보살이 밀렸다.
비사부불이 가만 보니까 미륵보살 본인은 똑똑한데 굉장히 똑똑해서 지금 도장 찍어줘도 곧 성불인가(成佛印可)를 할 만한데 그 따르는 제자들을 보니까 영 시원찮았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자들한테 얼마나 힘을 쏟는지 우리 어른 스님 같은가 보다. 제자들한테 힘을 쏟으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니 어른 스님 비유하면 안 되겠네, 석가보살은 좀 둔한데 제자들이 영리하다. 괜히 비유 잘못하다가 욕 듣겠다.
그러니까 가만 보니까 한 사람을 제도하는 것이 빠르겠는가?
여러 사람을 제도하는 것이 빠르겠는가?
여러 사람을 제도하려면 힘들잖은가?
둔한 석가보살만 제압해버리고 나면 제자들은 별로 신경을 안 써도 다 같이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래서 석가보살을 먼저 인가해 주었다.
석가를 인가해 줘야 되겠다 하는 기별이 오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기분이 좋다. 그래서 부처님을 향해서 찬탄하는 게송을 한다. 일주일동안 계속 한 가지 게송만 한다. 진실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한 가지만 한다. 막신일호(莫神一好)라 한 가지를 좋아하는 것보다 더 신나는 것은 없다. 막신일호(莫神一好), 오직 하나만 일념만년(一念萬年)이 되도록 하는데 그때 했던 게송이 무엇인가?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우리는 세 번만 하면 귀따갑다고 한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불하시고 난 다음에 얼마나 좋은지 그 게송을 일주일 동안 똑같이 한다.
너무 진실하니까 다른 말, 미사여구도 필요 없다. 우리가 요즘 부르는 ‘환희로워라’ 하는 노래 비슷한 것 있잖은가. 네 구절만 계속 돌아가듯이 하는 것이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이 수기를 받고 성불할 인연을 맺고 난 뒤에 처음으로 토해낸 게송이 보살인행시의 그 게송이다.
그 게송은 어느 법당에나 다 있다. 그런 게송을 보면 ‘야 사람이 화엄경 같은 것 80 화엄경 다 볼 필요 없네, 대방광불화엄경만 계속 죽을 때까지 하다가 가도 되겠네’ 이런 생각을 한다.
진실한 말은 하루종일 같은 말을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다.
천수경 같은 것, 물 같은 것, 이런 것은 별맛이 없다. 숨 쉬는 것, 산소 같은 것은 별맛이 없다. 진실한 것은 무상이고 무맛이니까, 계속 되뇌어도 경전 같은 것은 질리지가 않는다,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2. 如來의 身業
(1) 如來身業의 總明
佛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云何見如來應正等覺身고 佛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於無量處에 見如來身이니 何以故오 諸菩薩摩訶薩이 不應於一法一事一身一國土一衆生에 見於如來요 應徧一切處하야 見於如來니라
“불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의 몸을 보아야 하는가. 불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한량없는 곳에서 여래의 몸을 보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보살마하살은 한 법이나 한 일이니 한 몸이나 한 국토나 한 중생에게서 여래를 볼 것이 아니고, 모든 곳에 두루 하여 여래를 보아야 하느니라.”
그다음 대목은 부처님의 신업(身業)이다.
범행품(梵行品)에 보면 신업이라고 하는 것을 ‘열 가지 조건으로 관찰을 하라’ 하면서 그 열 가지 조건이 관찰이 되고 나서 나오는 마지막 게송이 그 유명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다. 여기 신업이 마찬가지겠다.
화엄경의 정행품(淨行品)은 승속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측간, 해우소를 가든지, 양치를 하든지, 길을 올라가든지 내려가든지 간에, 모든 사물을 살피고 세속적인 것을 살펴서 거기에 가장 합당한 향상일로(向上一路)로 걸어가야 된다,라고 이야기한다.
정행품에서 그런 게송을 하고 난 뒤에 그 믿음이 충족되었을 때 다음으로 전체가 일곱 자 박이 게송으로 된 현수품(賢首品)을 이야기한다. 화엄경 14권 중반부터 15권까지가 전부 현수품이다.
그리고 나서 범행품(梵行品)은 어떤 것인가?
범행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무엇을 부처님이라고 하고, 무엇을 법이라고 하고, 무엇을 승이라고 하고, 무엇을 계율이라고 하느냐, 이 네 가지 근본조건을 걸고 거기에 우리가 정삼업진언(淨三業眞言)하는 것처럼 신(身)이 뭐고 신업(身業)이 무엇이냐, 말이 무엇이고 말의 업이 무엇이냐, 생각이 무엇이고 생각의 업이 무엇이냐, 이렇게 여섯 가지 조건을 더 합쳐서 전부 열 가지를 두고 그 열 가지에 대해서 ‘그럼 과연 범행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를 이야기한다.
부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신구의 삼업에 계행까지 본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본무생(法本無生)이라, 법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 생겨진 바도 없다. 중생의 편법 따라서 생겨진 것일 뿐이다, 라고 하는 것을 범행품에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지일체법(知一切法) 일체법은 즉심자성(卽心自性)이라, 일체법이 전부 마음의 자성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성취혜신(成就慧身)하면, 이와 같이 알고 혜신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혜신(慧身) 여래출현을 제대로 이룰 것 같으면, 불유타오(不由他悟)라 남에게서 의지해서 깨달음을 빌릴 필요가 없다.’
불유타오라, 남을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인인(人人)이 전부 각자가 일승의 일심자리가 있다. 이것을 화엄경 범행품의 제일 마지막에 이야기한다. 그다음에 초발심시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초발심시변정각을 80화엄경에서는 초발심시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初發心時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그러니까 처음 마음을 발심했을 때가 바로 부처님의 정각을 이루는 것이다, 하는 대목을 범행품 말미에 하고 난 뒤에, 초발심공덕품(初發心功德品)으로 넘어간다.
그 대목을 생각하시면서 여래신업에 대해서 접근하시면 이해가 조금 편하실 것이다.
불유타오(不由他悟)라는 말은 서장(書狀) 같은 참선 책에서도 너무나 많이 알고 있고, 우리 임제종파 뿐만 아니라 조동종에서도 제일 종장이신 동산양개(洞山良价)화상의 과수게(過水偈)를 보더라도 ‘절기종타멱(切忌從他覓)이라 제발 다른 데서 찾지 말아라, 초초여아수(迢迢與我殊)라 나하고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이런 대목도 오도송에 써놓은 것이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신업(身業)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 무업(無業)이고 무신(無身)이라고 하는 것을 기본 개념으로 딱 잡고 들어가야, 앞서 말한 무거무래(無去無來)가 이해될 것 같다.
우리가 한문 배우려고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글 보려고 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 빨리 보겠다.
*
여래(如來)의 신업(身業)
*
여래신업(如來身業)의 총명(總明)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제보살마하살이
응운하견여래응정등각신(應云何見如來應正等覺身)고 : 어떻게
정각의 몸을 보아야 하는가? 보살들이 어떻게 부처님의 몸, 불신(佛身), 여래의 몸을 봐야 되느냐?
이런 대목은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에서 40가지로 질문을 한다. 그래서 1회차 설법에서 40가지 답을 한다.
설법을 9회로 나눠서 1회차는 소신인과(所信因果)라 한다. 2회차부터 7회차까지는 차별인과(差別因果)라 한다. 7회차 제일 말미에 와서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대목은 차별인과를 넘어서 평등인과(平等因果)다.
평등인과 중에서 평등인(平等因)은 제49권 보현행품(普賢行品)이고 50권부터는 평등과(平等果)로 넘어간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대목이다.
인과법은 소신인과(所信因果), 차별인과(差別因果), 평등인과(平等因果), 성행인과(成行因果), 증입인과(證入因果) 이렇게 다섯 가지가 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여래응정등각의 몸을 보아야 하는가? 이것은 1회차 소신인과에서 40가지로 질문했다. 거기에서 충분히 공부를 했는데도 우리가 잘 다가가지 못했다.
2회차에서 7회차까지에서도 또 40가지 질문을 한다. 여래의 몸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 어떤 것이 여래의 눈이고 손이고 발이고 마음으로 되어 있는가? 그래서 대답을 못 얻으니까 여기 여래출현품에서 맺음을 하고 정리를 한다.
그리고 난 뒤에 성행인과에 가서는 무려 200가지로 질문을 하고 2천가지로 답을 한다. 운흥이백문(雲興二百問)에 병사이천답(甁瀉二千答)이라고 한다. 이세간품(離二世間品)에서 200가지 질문이 오고 간다. 거기에서 답이 해결 안 되니까 마지막 입법계품(入法界品)에 가서는 60가지 질문을 하고 60가지 대응을 하면서 근본 법회와 지말 법회를 이끌어 나간다.
그 주제가 바로 다음과 같은 열 가지다.
여래가 무엇이냐? 법이 무엇이냐? 불법승이 무엇이냐? 계율이 무엇이냐? 몸이 무엇이냐? 몸의 업이 무엇이냐? 말이 무엇이냐? 말의 업이 무엇이냐? 생각이 무엇이냐? 생각의 업이 무엇이냐? 이것까지 범행품에서 잡아서 여기로 들어오면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라, 본래 한 물건도 없다, 이렇게 일승(一乘)쪽으로 대놓고 공부를 하시면 이해가 편하실 것이다.
불자(佛子)야 : 불자야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모든 보살마하살들이
응어무량처(應於無量處)에 : 마땅히 한량없는 곳에서
견여래신(見如來身)이니 : 여래의 몸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법안(法眼) 문익선사(文益禪師)는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불견여래(不見如來)니라, 만약에 모든 상을 상아니라고 하면 여래를 볼 수 없다’ 라고 소동파의 게송처럼 이야기한다.
‘모든 상을 상 아니라고 하면 부처님을 못 본다’라는 말을 뒤집어서 다시 이야기하면 ‘모든 법은 마음에서 비롯됐다, 그것이 바로 부처다’ 라는 이야기다.
*
금강경에서는 불견여래 대신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한다.
상이 아닌 것에서 부처님을 본다고 하는 것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눈에 띄는 모든 것,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라는 것은 색즉시공이다.
그런데 색즉시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즉시색이다.
공은 무엇인가? 오온이 공이다.
오온이 무엇이냐? 오온이 개공이다.
공이 무엇이냐? 오온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중생이 부처고 부처가 중생이다. 중생은 따로 저 혼자 독립할 수 있는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의지해서 나온다. 그런데 그것은 허망하게 의지해서 나온 것이다. 환법(幻法)이다. 그래서 입법계품(入法界品) 같은 경우도 마야 부인은 환생(幻生)이다, 라고 한다. 환생(幻生) 허깨비처럼 부처님을 낳았다.
중생의 눈높이에 맞춰서 여래의 생은 무생이 아니라 환생이다.
그러면 덕생동자 유덕동녀가 묘각을 이루고 미륵보살에게 소개할 때 그것은 어느 법이 되는가? 환주법문(幻住法門)이다. 환으로 머문다.
그러면 미륵보살이 깨친 것은 무엇인가? 몽환법문(夢幻法門)이다. 미륵보살의 유식(唯識) 있잖은가, 그것을 몽환법문이라고 한다.
환(幻)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원각경에서는 ‘지환즉리(知幻卽離)요 이환즉각(離幻卽覺)이라’ 이렇게 이야기한다.
*
그런데 지금 여기는 뒤집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소동파의 게송처럼 산색기비청정신이다.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이요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가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가
눈에 보이는 것이 촉목개법(觸目皆法)이라, 만목청산(滿目靑山)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다 부처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또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파상종(破相宗)에서는 없다고 하고, 유식(唯識)에서는 다 있다고 이야기한다.
법상(法相)에서는 있다, 파상(破相)에서는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 이 대목은 법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든 보살들이 마땅히 한량이 없는 곳에서 여래의 몸을 보아야 하느니라.
*
하이고(何以故)오 : 왜냐하면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모든 보살들은
불응어일법일사일신일국토일중생(不應於一法一事一身一國土一衆生)에 :한 법이나 한 일이나 한 몸이나 한 국토나 한 중생에게서
견어여래(見於如來)요 : 여래를 볼 것이 아니고
응변일체처(應徧一切處)하야: 모든 곳에 두루 하여
견어여래(見於如來)니라 : 여래를 보아야 하느니라.
이것은 세주묘엄품에도 나오고 여래현상품에도 나오는데 여래현상품 게송이 집집마다 절집의 대웅전에 가면 걸려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불신이 충만해서 법계에 가득하다. 모든 중생 앞에 다 나타난다.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
인연 따라서 안 나타나는 데가 없다.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
그러나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청강유수에 천강월이라도 저 하늘의 달은 어떤 강에도 가본 적이 없다. 이항처차보리좌다. 보리수 아래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온다.
입법계품에서는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서 돌고 돌고 돌지만 불리문수사리족하(不離文殊師利足下) 문수사리 보살의 발밑을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제대선지식을 다 참방했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일승별교(一乘別敎)다.
밤에 누워서 꿈을 꾸는데 서울도 갔다가 미국도 갔다가 비행 도 탔다가 배도 탔다가 걷기도 하고 뚜드려 맞기도 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한 번도 잃고 얻은 적이 없다.
단지 침상에서 자고 있었다. 우리가 도서(都序) 같은 데서 자세히 배웠다. 꿈에 대해서 규봉종밀(圭峰宗密)이 잘 정리해 놓았다. 여래를 그렇게 봐야 된다는 대목이다.
염불에 이렇게도 나온다.
불신보변시방중(佛身普遍十方中)
삼세여래일체동(三世如來一切同)
삼세여래일체동을 야마천궁게찬품에서는
약인욕요지(若人慾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를 60 화엄경에서는 심조제여래(心造諸如來)라고 해놓았다.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었다, 심조제여래(心造諸如來) 이렇게 나온다. 그 대목이 바로 여기다.
삼세여래일체동(三世如來一切同)
광대원운(廣大願雲)이
항부진(恒不盡)한데
왕양각해(汪洋覺海)라
저 넓고 넓은 부처님의 바다, 화엄성해(華嚴性海)를 묘난궁(渺難窮)이라, 저 아득하고 일망무제 끝도 없는 무량무변한 바다의 세계를 정말 궁진하기가 다하기가 어렵구나.
광대원운(廣大願雲) 항부진(恒不盡) 왕양각해(汪洋覺海) 묘난궁(渺難窮)
(2) 如來身業의 十種譬喩
가. 虛空의 遍滿
佛子야 譬如虛空이 徧至一切色非色處호대 非至非不至니 何以故오 虛空은 無身故인달하야 如來身도 亦如是하사 徧一切處하며 徧一切衆生하며 徧一切法하며 徧一切國土호대 非至非不至니 何以故오 如來身은 無身故니 爲衆生故로 示現其身이니라
佛子야 是爲如來身第一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見이니라
“불자여, 비유하면 마치 허공이 모든 물질과 물질 아닌 곳에 두루 이르지마는 이르는 것도 아니고 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무슨 까닭인가. 허공은 몸이 없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몸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일체 처에 두루 하며, 일체 중생에게 두루 하며, 일체 법에 두루 하며, 일체 국토에 두루 하되 이르는 것도 아니고 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무슨 까닭인가. 여래의 몸은 몸이 없는 연고이니 중생을 위한 까닭에 그 몸을 나타내 보이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의 몸의 첫째 모양이니,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
여래신업(如來身業)의 십종비유(十種譬喩)
*
여래 신업에 대한 열 가지 비유다.
*
허공(虛空)의 변만(遍滿)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비여허공(譬如虛空)이 : 비유하면 마치 허공이
변지일체색비색처(徧至一切色非色處)호대 : 물질도 물질 아닌 곳에
비지비부지(非至非不至)니 : 다 이르지만 이르는 것도 아니고 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니 어떤 이유냐?
여기에는 줄을 긋겠다. ‘하이고오 허공은 무신고인달하야’
하이고(何以故)오 : 하이고오
허공(虛空)은 : 허공은
무신고(無身故)인달하야 : 몸이 없다.
법신(法身)은 무신(無身)이라 한다. 법신은 무신이고 허공도 몸이 없다.
허공이 두루 한데 두루 한 것을 시방신에 비유한 것이다.
*
여래신(如來身)도 : 여래의 몸도
역여시(亦如是)하사 : 이와 같아서 온갖 곳에 두루 하지만 허공이 두루 한 것처럼 모양이 형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총체적으로 잘 나타낸 것이다.
변일체처(徧一切處)하며 : 일체처에 두루 하면서
변일체중생(徧一切衆生)하며 : 일체 중생에 두루 하고
변일체법(徧一切法)하며 : 일체법에 두루 하며
변일체국토(徧一切國土)호대 : 일체 국토에 두루 하되
비지비부지(非至非不至)니 : 이르는 것도 아니요 이르지 아니하는 것도 아니니라.
화엄경을 조금 보다 보면 열쇠 하나만 딱 챙기면 바늘에 귓구멍이 뚫린 것과 같다. 바늘이 아무리 작아도 귓구멍이 뚫려 있어야 된다. 사람도 바늘구멍 같은 경전의 귀가 뚫려 있어야 된다. 그러면 조금 보기가 쉽다. 당달봉사가 되면, 눈뜨고 봉사가 되면 안 된다. 조금 난시가 있더라도 희미하게라도 봐야 된다. 경안이 있어야 된다.
혜안이고 불안이고 법안이 없다 하더라도 경안이라도 갖춰야 된다. 아니면 육안이, 잘못하면 눈을 일생동안 가지고 다녀도, 악세사리처럼 가지고 다니다가 죽어버린다.
하이고(何以故)오 : 하이고오 어찌한 까닭이냐
여래신(如來身)은 : 여래신은
무신고(無身故)니 : 무신고라. 허공도 무신인데 여래신은 몸이 없는 까닭이라.
우리가 무상게를 할 때 얼마나 많이 외우는가?
묘체(妙體)는 담연(湛然)하야 무처소(無處所) 산하대지(山河大地)가 현진광(現眞光)이라. 산하대지현진광은 바로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묘체는 담연하여 무처소라, 하는 것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위중생고(爲衆生故)로 : 중생을 위한 까닭으로
시현기신(示現其身)이니라 : 시현기신이다. 중생 때문에 이렇게 한다. 우리도 어른 스님 안 계시면 화엄경을 안 봐도 될텐데 그렇잖은가?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여래신제일상(是爲如來身第一相)이니 : 여래신은 제일상이라. 최고 으뜸이 여래신의 제일상이다.
열 가지 중에서 아홉 가지는 또 차차 이야기하고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모든 보살마하살이
응여시견(應如是見)이니라 : 응당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나. 虛空能現一切色
復次佛子야 譬如虛空이 寬廣非色이로대 而能顯現一切諸色이나 而彼虛空은 無有分別하며 亦無戲論인달하야 如來身도 亦復如是하사 以智光明普照明故로 令一切衆生으로 世出世間諸善根業이 皆得成就호대 而如來身은 無有分別하며 亦無戲論이니라 何以故오 從本以來로 一切執着과 一切戲論이 皆永斷故니라
佛子야 是爲如來身第二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見이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마치 허공이 넓고 형상이 아니지마는 일체 모든 형상을 능히 나타내면서도 그 허공은 분별도 없고 또한 부질없는 말[戲論]도 없느니라.
여래의 몸도 그와 같아서 지혜의 광명이 널리 비춤으로써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착한 뿌리의 업을 성취케 하면서도 여래의 몸은 분별도 없고 희롱의 말도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본래부터 모든 집착과 모든 희롱의 말을 아주 끊은 연고이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 몸의 둘째 모양이니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
허공능현일체색(虛空能現一切色)
*
허공은 상이 아니지만 모든 형상을 나타낸다.
*
부차불자(復次佛子)야 :불자야
비여허공(譬如虛空)이 : 비유하면 마치 허공이
관광비색(寬廣非色)이로대 : 넓고 형상은 아니지마는
이능현현일체제색(而能顯現一切諸色)이나 : 일체 모든 형상을 나타내면서도
이피허공(而彼虛空)은 : 그 허공은
무유분별(無有分別)하며 : 분별도 없고
역무희론(亦無戲論)인달하야 : 또한 부질없는 말도 없다.
*
여래신(如來身)도 : 여래의 몸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사 : 이와 같아서
이지광명보조명고(以智光明普照明故)로: 지혜 광명으로 보조명고니라. 우리의 일심(一心)을 보조라고 한다.
보조(普照)를 다른 말로 보명(普明)이라고도 하고, 대광명(大光明)이라고도 하고 광명변조(光明遍照)라고도 한다.
보조는 바로 비로자나 광명이다.
지광명보조명고로, 그와 같아서 지혜 광명이 널리 비춤으로써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그래서 보현보살이 보현삼매품(普賢三昧品)에서 삼매에 들어갈 때 바로 비로자나여래장신삼매(毘盧遮那如來藏身三昧)에 들어간다. 다른 삼매에 드는 것도 아니고 비로자나여래장이다. 우리 마음 속의 여래장을 비로자나여래장이라 이야기한다. 법신여래장이다.
그러니까 기신론 같은 데는 여래장법신(如來藏法身)이라고 이야기한다. 여래법신여래장(如來法身如來藏) 여래장법신(如來藏法身)까지도 이야기한다.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는가?
세출세간제선근업(世出世間諸善根業)이 : 세간 출세간의 모든 착한 뿌리의 업을 성취하게 하면서도
개득성취(皆得成就)호대 : 다 성취하게 하면서도
이여래신(而如來身)은 : 여래 몸은
무유분별(無有分別)하며 : 분별도 없고
역무희론(亦無戲論)이니라 : 희롱의 말도 없는 것이다.
허공은 분별이 없어서 어떤 색이라도 수용한다. 인물 안되는 사람은 허공에서 좀 빠져달라고 하는 소리도 없고, 별이 모났든지 붉었든지 파랗든지 간에 이 별 저 별 다 수용하는 것이 허공의 임무다.
또 부처님 지혜는 중생을 어떻게 하든지,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구분 없이 다 이롭게 하는 것이 부처님 지혜의 무분별이다. 그런데 지혜 무분별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아집에서 남을 재단하고 판단한다.
*
하이고(何以故)오 : 하이고오
종본이래(從本以來)로 : 종본이래로 본래부터
일체집착(一切執着)과 : 일체집착과
일체희론(一切戲論)이 : 일체희론이
개영단고(皆永斷故)니라 : 그것이 완전히 끊어진 연고이니라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여래신제이상(是爲如來身第二相)이니: 이것이 여래의 제 두 번째 몸이다.
부처님은 희론도 아니고 일체 집착도 없어져 버렸다.
일체 집착이 없어져버렸다는 것은 마지막 무명이 끊어졌다는 말씀이다. 그것을 누진통(漏盡通)이라고도 한다.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들은
응여시견(應如是見)이니라 :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
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_()()()_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_()()()_
나무대방광 불화엄경🙏🙏🙏🙏🙏
🙏🙏🙏
고맙습니다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그침없이 쏟아붓는 해설
환한 빛이 쏟아지는 듯...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