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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桓國)의 역사-사라진 7199년
한인 한웅 단군의 역사에 대해 몇글자 적어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시조를 단군이라 알고 있으며 일제의 날조된 역사관에 의해서 그나마도 신화로서만 단군임금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역사의 도적행위나 마찬가지인 일인들이 우리의 역사를 왜곡시켜 우수한 자기들이 우매한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시키기 위해 그리 만들었을 뿐이다
더구나 불과 2천여년밖에 안되는 고주몽 박혁거세 온조마저도 신화로 여기거나 아득한 원시시대처럼 느끼게 만들었으면서 같은 연대의 중국사나 서양사에 나오는 인물들은 실존인물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금의 우리 국사교육이 이런 사고를 고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제1의 숙명적인 과제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아래의 단군에 대한 글은 단기 4319년(서기1986년) 11월 고동영이 우리의 고대서인 "단기고사, 한단고기, 규원사화" 등을 토대로 "단군조선47대"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바 그 중에 일부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여기에 옮겨 본 것이다
우리나라는 나라명이 桓國(한국)이며 파내류산 즉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미르고원이나 천산을 말한다 바로 그 산아래서 천해의 동쪽까지 즉 지금으로 말하자면 천해는 바이칼호이며 그 동쪽이라함은 만주와 지금의 우리나라를 말한다
남북 오만리 동서 2만리에 걸쳐있었다 여기에는 모두 12나라 아홉족속 즉 九桓이 살았다 즉 이들이 모두 한국사람들인 것이다
그 때는 법과 명령이 없어도 모든 삶은 이치에 맞도록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공적인 일을 결정할 때 그를 대표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어 12나라 아홉족속이 다 모여 桓仁을 桓花로 둘러쌓인 곳에 앉히고 높이 임금으로 추대하여 드디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桓花는 槿花 즉 지금의 산수유꽃을 말한다
그때가 BC7199년의 일이었으며 그후 桓仁시대가 열리며 BC3899년 까지 7세 역년 3301년을 이어왔다
혹자는 역년 63182년이라 하나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자세히 알수는 없는 일이다
제1세 安巴堅 桓仁
제2세 赫 胥 桓仁
제3세 古是利 桓仁
제4세 朱于襄 桓仁
제5세 釋提壬 桓仁
제6세 邱乙利 桓仁
제7세 智爲利 桓仁
이때에 “우주의원리”를 밝힌 天符經은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다음에 나라를 세우신 桓雄天皇이 배날나라를 세우면서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鹿圖文으로 옮겼으며 이 천부경은 伏羲씨가 지은 桓易의 모체이며 여와와 주양을 거쳐 주나라때 周易이 되었다
또한 녹도문은 현재 경남 남해군 낭하리 계곡과 만주 길림성 경박호 선춘령과 부오소리의 암석에 그 때 새겨놓은 것으로 보이는 글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桓國의 마지막 임금때 사람은 많아지고 물자가 부족해 삼위산과 태백산에서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할 수 있다고 여겨 지위리 한인의 아들인 한웅을 천거하여 “弘益人間”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天符印 3개를 주며 3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고 무리들이 桓雄을 임금(天皇)으로 추대하고 나라이름을 倍達이라 하였다
이래서 배날나라는 BC3898년부터 BC2334년까지 18세 역년 1565년간이다
제1세 桓雄 居發桓 :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인간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360여가지 일을
風伯 雨師 雲師에게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였으며
역법을 만들어 일년을 365일로 정하였으며
곰족의 딸을 황후로 받으며 혼례법을 제정하고
그 외 여러 가지 복식 제도등을 만들었으며
공수와 두열이라는 음악이 있었고
계산할 때 쓰는 算木이 있었다
제2세 桓雄 居佛理
제3세 桓雄 右耶古
제4세 桓雄 慕士羅
제5세 桓雄 太虞義 : 黙念 淸心 調息 保精의 장수법 터득
아들 12명중 막내아들 太皞가 바로 伏羲씨로 天河에서 卦圖를 얻었는데
이것이 바로 河圖이며 洛書와 함께 桓易의 이치가 되었으며
八卦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제6세 桓雄 多儀發
제7세 桓雄 居 連
제8세 桓雄 安夫蓮 : 우리의 시조인 高矢씨의 후손인 小典에게
지금의 중국 섬서성 기산현 서쪽에 있는 姜水에서 군사를 감독하였고
그의 아들이 神農씨로 의약의 체계를 세웠으며
물물교환 제도를 만들어 생활이 편리해졌다
제 9세 桓雄 養 雲
제10세 桓雄 葛 古
제11세 桓雄 居耶發
제12세 桓雄 州武愼
제13세 桓雄 斯瓦羅
제14세 桓雄 慈烏支 : 蚩尤天皇이라고도 하며 창과 투구등 쇠병기를 만들었으며
12제후의 나라를 합병하였다
중국 軒轅과 전투를 하여 이겼으며
도읍을 지금의 중국 절강성 항주 근방에 있는 靑丘로 옮겼다
망나니인 헌원이 치우천황을 뵈러 가는 길에 사람이 되라는 말과 함께
자부선인에게 삼황내문경을 받았으며 이것이 노자로 이어져
도교의 기초가 되었으며 헌원은 지금도 도교의 개조로 숭배받고 있다
@. 현재 월드컵축구시합시 붉은악마들이 입거나 쓰고 나오는 셔츠와 가면의 문양이 바로 치우천황의 얼굴 모습이며 머리에 2개의 뿔을 달고 응원하는 것도 치우천황의 뿔인 것인바 이는 창과 투구 등 쇠병기를 만들어 쓰고 전쟁을 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그 모습을 그린 형상으로 알고 있으며 실지로 그런 모습을 한 것은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제15세 桓雄 蚩額特
제16세 桓雄 祝多利
제17세 桓雄 赫多世
제18세 桓雄 居弗檀 : 檀雄이라고도 하며 그의 아들 단군 왕검이 단군조선을 건국하였다
이때가 BC2333년의 일이다
단군왕검은 배달나라 18세 거불단 환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곰족의 왕녀이다
BC2370년 5월2일 寅時에 태어나 성장하여 河伯의 딸과 결혼하여
扶婁 扶蘇 扶虞 夫餘 이렇게 4아들을 두었다
九桓의 백성들이 BC2333년 10월3일 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왕검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나라를 연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0월3일을 개천절로 정한 것이다
도읍을 새로운 땅이라는 뜻을 가진 지금의 중국 할빈의 완달산에 있는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이름을 “檀”이라 하였으며 이 아사달을 후세 사람들이 왕검성이라고 불렀다
이런 단군조선은 BC2333년부터 BC238년까지 47세 역년 2096년간이다
제1세 檀君 王儉 : BC2311년 도읍을 송화강가로 정하고 이름을 平壤이라 하였다
BC2283년 강화도 정족산에 삼랑성을 마리산에는 塹城檀을 만들었다
BC2266년 도산회의에서 중국의 태평성대를 말하는
요순시절의 순임금이 회대의 제후를 감독하게 하였다
BC2241년 3월15일 세상을 뜨다
제2세 檀君 扶婁 : BC2238년 도량형의 표준을 정했으며 물건 가격을 통일시켜 모두 편리하였다
BC2231년 토지제도인 정전법 시행과 토지대장을 만들어 세금의 기틀을 잡았다
BC2229년 신지 귀기가 七回歷과 邱井圖를 만들었다
칠회력이라 함은 일곱신에게 제사 지내는 주기로
천신 월신 화신 수신 목신 금신 토신을 말하며
요즘의 일주일인 “일월화수목금토”요일을 말하는 것이며
구정도는 지금의 지적도를 말한다
제3세 檀君 嘉勒 : BC2181 을보륵이 국문정음인 지금의 한글의 모태가 되는
“加臨土” 38자를 제정하여 소통이 잘 되도록 하였다
지금의 한글과 흡사하여 한글을 세종대왕이 창제했다는 뜻은
이 가림토를 조금 변형하여 새로 정비하였음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BC2180년 동양사학의 원조인 倍達留記를 편찬하였다
제4세 檀君 烏斯丘 : BC2137년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왕으로 봉했다
후에 그의 자손들이 몽고족이 되었다
10월 태백산에서 하느님께 제사 지내고 선약(인삼)을 얻었다
BC2133년 조개껍질로 만든 圓孔貝錢을 만들었다
제5세 檀君 丘乙 : BC2087년 감성관이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기를 만들어 천도와 맞게 하였다
제6세 檀君 達門
제7세 檀君 翰粟
제8세 檀君 于西翰
제9세 檀君 阿述 : BC1980년 매년 8월1일을 정기회의 날로 정하여 민권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제10세 檀君 魯乙 : BC1950년 임금의 자문기관 설치
BC1949년 고시제도 도입
BC1946년 신원함 설치 민원해결
BC1893년 천문대 축조 감성관을 둠
제11세 檀君 道奚 : BC1891년 종교개혁을 실시 종교의 중흥시대를 열었음
BC1879년 곡식을 찧는 그릇과 띠풀로 지붕을 만들었으며
배를 만들어 무역이 트였으며 농사를 절기에 맞추어 짓도록 하였음
BC1864년 만국박람회개최
BC1854년 기계를 만드는 작청을 설치해 현상을 걸어
발명을 한사람에게 상을 주었다
예를 들면 자명종 진천뢰 측우기 등 26점
제12세 檀君 阿漢
제13세 檀君 屹達 : BC1767년 입법 사법 행정으로 나눈 지방자치제 실시
BC1763년 독서 활쏘기 등을 가르키는 법정학교를 설립해
학생인 國子郞을 뽑았으며 사람들은 이를 天指花郞이라 불렀다
제14세 檀君 古弗 : BC1680년 쇠로 子母錢이라는 돈을 주조했다
BC1670년 국립대학 설치
BC1666년 인구조사를 하니 1억8천만명이었다
제15세 檀君 伐音
제16대 檀君 尉那
제17세 檀君 余乙 : BC1535년 고수노가 政法原論 38질을 바침
BC1533년 日蝕이 있었음
제18세 檀君 冬奄 : BC1480년 고수노에게 國史 18권을 편찬하게 함
제19세 檀君 縱年 : BC1433년 국문서당을 세움
BC1426년 조개로 貝葉錢을 주조함
BC1420년 공창을 설립 종이와 옷감을 생산하였음
BC1410년 송화강가에 조선소를 설치했음
BC1391년 황운갑이 지남차와 목행마를 발명하였음
BC1385년 목아득이 우주원리론을 저술하였음
BC1382년 지이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을 저술했음
제20세 檀君 古忽 : BC1341년 共工 을홀이 九桓의 지도를 만듬
제21세 檀君 蘇台
제22세 檀君 索弗婁
제23세 檀君 阿忽 : BC1206년 군관학교를 설립해 병학을 가르쳤다
BC1183년 토지제도인 井田法을 가르침
제24세 檀君 延那 : BC1152년 조대원이 정치원론 10권을 바쳤음
제25세 檀君 率那
제26세 檀君 鄒魯 : BC1024년 의학원을 세워 백성들에게 가르침
BC1005년 위문국이 정치론 28권을 저술함
제27세 檀君 豆密
제28세 檀君 奚牟
제29세 檀君 摩休 : BC925년 왕문이 예부터 있어온 神篆이 번거로워 새로운 글을 지었음
제30세 檀君 奈休 : BC880년 부분석이 정법원리론을 저술하였음
제31세 檀君 登屹
제32세 檀君 鄒密 : BC837년 3월 日蝕이 있었음
제33세 檀君 甘勿 : BC816년 황선문이 유황발사총을 발명하였음
BC813년 감물산 아래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지냈음
BC812년 순길이 장생불로단을 만듬
BC804년 고삼도에게 현인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물으니 그 방법은
가까이 하여 그 겸손함을 보고
멀리하여 그 신용을 보며
갑자기 물어 그 말재주를 보며
급히 주어 어떻게 처리하는 가를 보며
난을 말하여 그 용맹을 보며
술에 취하게 하여 그 태도를 보며
색을 시험하여 그 몸가짐을 보며
재물로써 시험하여 그 청렴함을 보며
글을 통하여 그 학문을 보며
말로 물어 그 변론을 보며
잡사람과 같이 있게 하여 그 절개를 관찰하는
11가지가 구비되면 비로서 현인이라 할 수 있다
충북 괴산땅 박달산에 있는 감물왕국이 바로 이 단군님께서 치세를 하였던 것이며
그 산 정상에 있는 감물왕국비가 지워져 있으니 다시 글자를 새겨야 할 것 이다
제34세 檀君 奧婁門
제35세 檀君 沙伐 : BC765년 日蝕이 있었음
제36세 檀君 買勒 : BC699년 초나라사람 오자도가 목면종자를 가지고 입국
BC687년 채저명이 정치형법서를 전하였음
BC680년 오경박사 우문충이 토지를 측량하여 지도를 만들고 遊星說을 저술했음
BC675년 우세숙이 성리학과 심리학을 저술함
BC650년 손숙문이 의학과 화학을 저술함
제37세 檀君 麻勿 : BC642년 쇠로 方孔錢을 주조함
제38세 檀君 多勿
제39세 檀君 豆忽 : BC525년 8월에 日蝕이 있었음
제40세 檀君 達音 : BC507년 윤복지가 도덕경을 저술함
BC500년 진개가 치국요람을 저술함
제41세 檀君 音次 : BC488년 공상의가 종교론을 저술함
제42세 檀君 乙于支 : BC469년 철인 이일선이 천리경을 저술함
BC467년 백호돈이 지리학과 광물학을 저술함
제43세 檀君 勿理 : BC454년 장자학이 논리학을 저술함
제44세 檀君 丘勿 : BC423년 日蝕이 있었음
BC421년 최화덕이 동물학과 식물학을 저술함
BC416년 서백원이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의 사상의학을 저술함
BC410년 국학박사 황운원이 백과서를 저술함
BC408년 유종득이 理財學을 저술함
BC405년 적우순이 심리학을 저술함
제45세 檀君 余婁 : BC393년 법률을 개정하여 대동률령 공포
BC385년 곽태원이 양생론을 저술함
BC382년 마자은이 이기일원론을 저술함
BC369년 장소부가 의학대방을 저술함
BC367년 홍문선이 태학조문을 저술함
BC357년 조문휴가 자본론을 저술함
제46세 檀君 普乙
제47세 檀君 高列加 : BC274년 소정국이 건축학을 저술함
BC271년 구노선이 種樹學을 저술함
BC265년 신원함 설치 민원해결
BC248년 10월1일에 日蝕이 있었음
BC239년 해모수가 군사를 일으켜 북부여를 세움
BC238년 임금이 유약하여 제후들의 난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는 단군 조선을 넘어 기원전 약7199년 이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이칼호 동쪽 드넓은 지역을 다스리며 용맹을 떨쳤으며 갖가지 법과 학문 등이 꽃을 피웠으며 갖가지 기술들이 발전하여 국민들이 편리하게 살만한 그런 태평성대가 47세 단군때에 이르러 급격히 쇠약해져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워 BC239년에서 BC58년까지 6대 역년 180년을 이어갔으며
그 사이 부여임금의 딸인 동신성모 파소의 아들인 박혁거세가 13살 때 왕으로 뽑혀 신라를 건국했으며
이후 고주몽이 북부여를 이어받아 단군조선의 북쪽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뒤를 이어 온조가 단군조선의 땅인 황하와 회하를 중심으로 한 중국대륙 동쪽에다 백제라는 나라를 세워 삼국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7천 누백년의 역사를 없애고 작금 우리의 교육은 여기서부터 역사라 하였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상으로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았으니
이 글을 보시는 산님들 우리 역사의 허구성을 잠시나마 한번쯤 뒤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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