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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
누가복음 2:1~20
요절:“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누가복음 2:11~12)
오늘은 기독교회의 오랜 명절인 크리스마스 성탄절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날은 참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경축해야 할 가장 기쁜 날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큰 문제들을 해결하실 구원자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죄의 결과인 저주와 죽음과 죽은 뒤의 심판과 지옥의 영원한 형벌 아래 떨어지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죄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온 온갖 저주 곧 질병과 기근과 전쟁과 슬픔과 삶의 근심과 불안과 고통 역시 모든 인간에게 무거운 짐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은 눈물과 슬픔과 두려움과 깊은 절망의 포로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에 “응애” 하고 울면서 태어난 후에 이 숙명적인 굴레에서 한 사람도 벗어날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슬픔과 고통과 저주받은 절망적 상태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죄를 사해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고 저주 대신에 축복을 사망 대신에 영생을 고통과 슬픔의 세상 대신에 영원한 행복과 기쁨과 평화와 영광의 나라를 상속받아 영원히 살 수 있는 나라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 곧 그 품속에 거하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자 작정하시고 때가 차매 보내셨으니, 그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이 성탄절 명절은 세상의 모든 이들이 크게 기뻐하며 감격하며 마음을 다하여 아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려야 하는 가장 기쁜 날이 분명한 것입니다. 곧 온 인류와 온 세상의 가장 경사스런 날이요 우리 각 사람이 가장 행복하고 기뻐해야 할 날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예수님을 몰랐을 때에 성탄절만 돌아오면 거리에 캐롤 송이 울려퍼지고 산타 클로스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등 분위기에 들떠서 공연히 마음이 설레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알고 나서는 정말 왜 우리가 이 성탄절에 기뻐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 성탄절에 인류와 모든 생명과 온 세상의 운명이 바뀌었으며, 특히 예수 믿게 된 우리의 운명이 참으로 극적으로 영광스럽고 복되게 바뀌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마땅한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살펴볼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특별히 그가 베들레헴의 여관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강보에 싸여 소나 양과 염소의 여물통인 구유에 뉘어 있게 된 일과 그 후의 애굽의 고생살이를 하신 일들을 통하여 영적인 교훈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그 정혼자 요셉이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지시한 바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사람의 인구 조사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실 팔레스타인 유대인들도 시리아 총독의 지시 아래 각자의 고향으로 가서 호적에 등록을 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이미 천사 가브리엘의 말대로 처녀였던 마리아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출산할 때가 가까웠으나 요셉과 마리아가 태어나서 살던 갈릴리 나사렛 동네로부터 베들레헴까지는 직선 도로가 약 110km요 요단강 동편 땅 평지로 돌아가는 경로를 택하면 약 150km 정도가 더 되는 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때는 겨울이요 험하고 높은 고지를 오르내리는 지형인데다가 이미 산일이 가까운 마리아가 무거운 배를 가지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거의 이레에서 열흘 정도나 걸리는 먼 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이렇게 베들레헴까지 여행하는 수고를 감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육신의 모친 마리아와 보호자 요셉은 깨닫지 못했겠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종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예수님 태어나기 전 7백년, 8백년 전에 예고하시기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가 5:2)
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그 공권력에 영향을 끼쳐서 섭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마리아의 정혼자 요셉을 이끌어서 만삭인 가운데라도 베들레헴으로 여행와서 호적 신고를 하게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과 보호자로 마리아와 정혼자 요셉을 택하셨는데 그들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먼 길을 여행올 때에도 나귀라도 타고 평안히 올 수 있는 돈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여관 방에서 호적 등록자들이 몰려든 그 때에 여관이 붐비는 중에라도 비용을 좀 들여서 방을 하나 얻어서 아이를 낳을 돈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출산을 앞두고 여행객 손님들이 여관에 끌고 오거나 타고온 말이나 소와 양들을 쉬게 하는 마굿간, 외양간에서 출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방 하나도 얻지 못한 채 결국은 그 마굿간 한쪽을 정리하고서 그곳에서 마리아가 진통 끝에 우리 구주 예수님을 낳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하여 준비한 강보에 싸서 예수님을 눕혀 놓을 장소가 없기에 소와 양들의 먹이통인 구유를 깨끗이 정리하고 지푸라기를 깔고 그 위에 우리 구주 예수님을 강보에 싸서 자리에 눕혀 놓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었다는 사실을 세 번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에 그 사실을 말하고, 11절에서 천사들이 그 밤중에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그것이 구주의 표적이라고 강조해주고, 16절에 그 목자들이 베들레헴 시내로 달려와서 불이 켜진 마굿간에서 구유에 눕혀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서 천사들의 증언대로 그가 곧 온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천사들의 증언을 전하고 크게 기뻐하며 찬양하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이후에 이스라엘의 분봉 왕이었던 헤롯 대왕이 동방 박사들이 방문하고 베들레헴에 그리스도가 탄생하였다는 소식을 알고서는 태어난 그리스도가 머잖아 자기와 자기 가문의 정치적 경쟁자가 될 것을 예상하여 그를 찾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님의 보호자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천사가 밤중에 나타나 헤롯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 죽이려고 하니 빨리 애굽으로 피신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들은 곧장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낯설고 물 설은 이국 땅 애굽에서 얼마 동안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의 경비는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면서 드린 선물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천사가 애굽에서 아기 예수님을 돌보던 마리아와 요셉에게 또 현몽하여 아기를 찾는 헤롯이 죽었다고 말해주고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하여 고국으로 돌아와서 유대인들의 감시가 좀 느슨한 북부 변방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돌아와 조용히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길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살해 위기를 맞이했고 먼 이국 땅의 나그네가 되어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변방인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났던 것입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우리나라로 보면 조선 팔도의 함경도 지방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외된 지방입니다. 그곳에서 보호자 요셉은 목수의 일을 하면서 예수님과 그 이후에 여러 자녀들을 먹여 살리느라 바빴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라신 그 가정은 좁은 방안에 아이들이 많아 늘 분주하고 가장 되었던 요셉은 늘 목수 일에 바빴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에 첫째 아들의 입장이었던 예수님은 요셉을 도와 목수의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 시절을 지내고 요셉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명실공히 그 가정의 가장이 되어서 어머니 마리아와 육신의 동생들을 기르는 일에 힘을 다 쏟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어 대중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라고 비하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당시 목수는 천대받는 직업 중에 하나였습니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하여 땀 흘려서 일해야 하는 그런 하층 직업이 목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시어 구유에 누우신 그 날부터 시작하여 이 땅에서 공중 사역을 본격적으로 나서신 그 날까지 늘 가난 속에서 사시는 고달픈 생활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에 그에게 몰려든 대부분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가난하고 병들고 고달픈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매우 친근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종교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세리는 당시 유다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권력인 로마 제국에 세금을 갖다 바치는 민족 반역자 집단으로서 유대인들이 다 미워하는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요 죄인은 그 당시에 가난과 망국의 설움 속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던 소녀들이 거리에 나서서 술을 팔고 몸을 파는 기생들로서 이들도 역시 지옥에 떨어질 사람들로 치부되어 아예 사람 취급을 받지 않던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반 평민들조차 그들하고는 상종을 하지 않으려 하였을 만큼 배척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조선 시대 백정들과 같은 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들까지도 너그러운 품으로 품으셨습니다. 그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올 때 다 용서해주시고 품어주시고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 권력을 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무리들은 자기들을 ‘하늘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율법을 모르고 먹고 사는 데 바뻐서 안식일 규정의 그 까다로운 규정들을 지킬 수 없었던 일반 민중들은 ‘땅의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아예 결혼도 서로 안 시키고 식사도 함께 하지 않고 말도 섞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천시하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기꺼이 밥도 같이 먹고 얘기를 나누고 세리 중에 마태 같은 사람을 자기 열두 제자로 삼았으며, 그의 제자 중 대부분을 갈릴리의 비린내 나는 물고기 시장의 어부 출신인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같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부터 왕족의 가문이나 귀족 가문 혹은 바리새파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은 다 환경의 지배를 어느 정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이해의 폭도 달라졌을 것이고 교제의 폭도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마굿간 한쪽 구석에서 태어나셨고 그의 첫 잠자리가 바로 소와 양의 여물통인 구유 통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외국에 도망쳐서 생활하였고 돌아와서도 저 유대 사회의 가장 먼 변두리인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 촌 동네에서 쭉 생활하시면서 모양 없는 목수 일을 하시면서 30살이 되도록 그렇게 사셨으니, 예수님은 세상의 밑바닥 인생들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의 눈물에 함께 울고 그들의 웃음에 함께 미소 지으면서 그들의 염려와 근심에 함께 마음을 나누며 그들을 마음에 품고 사랑하며 살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때가 차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르셨을 때에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해주셨으며,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슬픈 자를 위로해주고, 죄에 눌린 자에게 죄 용서의 은혜를 선언해주시고, 조국을 잃고 분노와 실의에 빠지고 미래에 대하여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하는 그의 젊은이들에게 이 세상 나라보다 더 소망이 있는 공의와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를 소개해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은 이미 구약 선지자들의 여러 예언들 가운데 미리 예고한 바 있습니다. 한 구절만 읽어드리면, 이사야서 61장 1절 이하에서 이러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1~3)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몸에 내려오시더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고, 그 직후부터 예수님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여 죄를 짓게 만들었고 인간에게 저주가 찾아오게 한 원흉인 마귀와 영적 대결을 벌여 시험에서 이겨 물리치시고 가는 곳마다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를 고치고 마음에 상한 자들을 위로해주고 죄를 사해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살려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예언된 말씀처럼, 가난한 자의 벗이 되었고 마음이 상한 자의 위로자가 되셨고 갇힌 자, 슬픈 자,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렇게 행하신 주님의 사역의 열매에 대하여 그 당시 주류 종교인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대제사장들 부류의 종교 기득권자들은 기존 질서를 뒤엎는 사회전복의 불온한 사상을 가진 자로 여기고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태복음 9:12,13)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마음에 긍휼이 가득하여 그 당시에 외면당하고 비천히 여김을 받고 슬픔 중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고 근심을 덜어주고 용기와 희망을 갖고 살도록 격려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기 전부터 작정된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마음에도 딱 막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광야에서 내려주신 모세 율법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가나안 땅의 선민 공동체는 언제나 부유하고 넉넉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 뒤처진 자들, 병든 자들을 품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가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논과 밭을 추수할 때에도 논밭의 한쪽 모퉁이는 다 베지 말고 남겨두어서 가난한 자들이 와서 베어가도록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논밭에 버려진 이삭은 다 줍지 말고 버려두라고 하셨습니다. 포도원과 감람원과 같은 과수원에서도 열매를 다 따지 말고 남겨두어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들짐승과 날짐승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 중에서 고난과 연약과 가난과 질병으로 시달리는 이들을 돌보시고 그들까지도 하나님 백성의 복스러움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태어나신 날 냄새나는 짐승의 여물통인 구유에 그 고귀한 몸을 눕히신 그 첫날부터 시작하여 가난한 자들의 벗이 되고 고난 당하는 자들의 위로가 되고 세상의 실패자들을 다시 일으켜 주는 삶을 살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탄절을 맞이하여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기념하면서 성탄 정신을 본받아서 다음의 세 가지 삶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가는 삶을 살아갑시다.
첫째로,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마음을 두고 살아갑시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나마 가난한 집을 택하여 태어나는 첫날조차도 마굿간에서 소와 양과 말들의 냄새나는 가운데 차가운 공기 속에 그 몸을 말 먹이통인 구유에 뉘었습니다. 이처럼 그 고귀한 분이 자기를 낮추어 비천한 자리를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이 세상 살면서 높은 마음을 버리고 낮은 마음을 가지고 어떤 자리에 처하든지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로마서 12:16 말씀에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한 자, 버려진 자, 뒤처진 자들, 빚지고 갇힌 자들, 실패하고 넘어진 자들과 담을 쌓지 말고 그들에게까지 낮아져서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과 마음을 함께 나누는 자들이 됩시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됩시다.
둘째로, 고생과 고난을 겪고 무고한 일을 겪더라도 그 고난을 묵묵히 이겨내는 자가 됩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태어나자마자 마굿간에서 고생하셨고 살해 위협을 피하여 한밤중에 일어나 부모 품에 안겨 먼 타향 땅 애굽에서 고생하셨고 이스라엘의 외진 동네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 목수로서 손뼈가 굵어지는 고생살이를 평생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고난과 고생을 당하신 것은 그의 사명 완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끝없는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우리 구원과 상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고난과 고생은 만민의 구주로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그의 인격을 다듬어가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그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도 불완전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10 말씀에서 이르기를
“만물이 그를 위하여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라고 하였으며, 히브리서 5:8,9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가르쳐주는 사상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그 모든 고난과 역경과 핍박을 겪으신 것은 이유 없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그를 온전하게 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그를 빚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백성들인 우리들이 이 세상 사는 동안 주어진 고난들은 주님의 제자로서 온전해지기 위하여 꼭 필요한 일이요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순종을 빚어가는 과정이요 그리하여 우리를 통하여 또 다른 자들을 돕기 위한 인격과 신앙을 빚어가는 필수적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묵묵히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심으로 온전해지신 것처럼 우리도 인생의 여정에서 많은 고난을 겪을지라도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묵묵히 그 고난 중에 온전한 인격과 신앙을 빚어가는 성숙의 과정으로 삼읍시다.
셋째로, 섬김의 삶을 지향하며 살아갑시다.
예수님께서 저 높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떠나 이 낮고 냄새나고 춥고 죄악으로 얼룩진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세상에서 영광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리어 자기를 비어 종의 자리에 내려가 사람들을 섬기려 하였고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 주어 그들을 살리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최종 행로였던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도 그곳에 올라가 다윗의 보좌에 앉아 세상 가운데 떵떵거리면서 호령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곳에서 대제사장과 유대의 장로들에게 체포되어 이방인 로마 총독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토록 가르쳐주었건만 깨닫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기들도 한 자리 차지하고 떵떵거리는 영광을 누리길 갈망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불러놓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백성들을 섬기고자 하신 까닭입니다. 그는 자기를 온전히 버려 생명까지 내어주어 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시고 지극히 높여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만민들의 주가 되게 하시고 모든 무릎이 그에게 꿇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그 섬김의 정신을 본받아서 우리의 삶 전체를 다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헌신합시다.
오늘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본래 하나님이신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난 성탄절을 기념하면서, 그의 성탄 정신을 되새겨보고 있습니다. 많은 가르침과 삶의 모범이 예수님의 성탄에 관련되어 우리에게 주는 빛이 되겠지만, 오늘 우리는 세 가지의 교훈의 빛을 마음에 담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 모두 낮은 데로 찾아 내려오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면서 낮은 데를 살펴보고 낮은 데 처한 이들과 마음을 같이하며 그들과 우리의 삶을 나누도록 합시다.
또한 나면서부터 수없이 다가온 고난을 묵묵히 감내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온전해지신 것처럼, 우리도 인생의 순례길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에서 불평과 원망 없이 기꺼이 인내하면서 우리의 인격과 신앙이 더욱 온전해지도록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이겨나갑시다.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천상의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 지상의 사는 나날 동안 섬기고 살리는 삶을 사셨으니, 우리도 그 섬김의 삶을 본받아서 어느 곳에 있든지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항상 섬기는 자로 살아갑시다.
바로 이러한 삶이 세상에 태어나신 우리의 구주 예수님의 성탄 정신을 기리고 그 정신을 살아가는 우리의 합당한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