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땅에서 가마르조바!
서 영 복
며칠 전 벼르고 벼르던 영화 한편을 감상하였다. 사상 최초의 선교사인 바울의 최후가 그려진 영화이다. AD 67 년경의 실제 이야기이지만 영화로 각색된 것이니 어느 정도 픽션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게 얼마나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던지 엔딩자막이 올라가고도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관객들이 모두 나가고 맨 뒷자리에 있던 남편과 나는 극장 직원의 재촉을 받고서야 텅 빈 객석을 보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밤길에 20여분이 걸리는 거리를 남편도 나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할 말을 잃고 무거운 마음으로 걸어왔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극심한 박해 앞에서 하나뿐인 목숨까지도 내어주며 믿음을 지켰다.
그 당시의 기독교 신도들은 잡히는 즉시 길가의 기둥에 산채로 묶여 매달린다.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화형에 처해지는데 이는 야간에 가로등을 대신한다.
하지만 바울의 동역자인 의사 누가는 원수의 딸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을 때 그를 위해 기도하고 치료하여 집정관인 모리스부부의 딸을 살려준다.
지난달에 우리는 약 2주 일정으로 코카서스쪽 여행을 다녀왔다. 약간은 생소하고 낯선 곳으로의 여행. 떠나기 하루 전날 갑자기 어지러움 증이 생겼다. 경유시간까지 합하여 열여섯 시간이 넘는 비행이 걱정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행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나는 온갖 비상약에 링거까지 맞으며 대비를 하고 출발했다. 역시 타고난 여행체질인지 고맙게도 두주일간의 여행을 무사히 잘 마쳤다. 코카서스산맥의 남쪽에 있는 나라들이다. 이들은 카스피해와 흑해의 사이에 있고 러시아와 터키, 이란의 사이에 있는 나라들인데 어떤 여행사에서는 신이 선택한 “거룩한 땅”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국토의 40%가 목초지인 아르메니아에서는 눈을 돌리는 대로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에덴동산처럼 소와 양들이 평화롭게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국경근처인 코비랍에서는 노아의 방주가 표류 끝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다는 아라랏산이 보였다. 해발 5천 미터가 넘는 산인데 아르메니아인들의 영산으로 불린다. 산꼭대기 쪽은 연중 하얗게 눈이 쌓여 있어 유럽 쪽의 순례자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성지로 일 순위란다. 어렸을 때 성경동화로 자주 듣던 노아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멀리서 보아도 마음이 순수해지는 듯 했다.
대 홍수가 끝나고 노아는 아라랏산이 있는 지역에 정착하였다. 포도나무는 지구상에서 노아가 최초로 심기 시작하였다는데 지금은 500여 종류나 된다고 한다. 그래서 포도 생산량이 많을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뿌리를 노아의 셋째 아들이라고 믿는 이들의 포도사랑은 끔찍하리만큼 각별하다. 실제로 우리나라 포도보다 세 배 이상 당도가 높다고 한다. 덕분에 와인의 맛도 특별하다. 하도 자랑을 하기에 포도로 만들었다는 40도 이상의 보드카마저 혀끝으로 맛을 보았다.
성경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는 여러 번 등장한다. 이 나무는 신이 내리는 행복과 풍요의 상징이다.
이곳 코비랍에는 수도원이 지어져 있는데, 그 일화가 감동이다. 성 그레고리는 당시 아르메니아 왕에 의해 이교도라는 이유로 14년간이나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다. 하지만 왕이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성 그레고리를 불러 그가 믿는 신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여 병이 낫게 되었다. 그로 인해 티리다테스 3세 왕은 개종을 하게 되었고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나라가 되었다. 현재에도 95% 이상의 국민이 기독교인이다.
바울 영화에서 바울도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처참하게 마지막 순교를 당하였다. 코비랍 수도원을 돌아보면서 안타깝게 처형되던 바울이 생각났다. 여러 수도원 마당에 이따금 보여지는 ‘하치카르’가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그것은 돌을 깎아서 만든 십자가 비석인데, 아르메니아의 문화적 상징이라 했다. 하지만 하치카르는 나를 곳곳에서 바울을 만나게 해주며 나의 모태신앙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했다.
국민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가마르조바 (안녕하세요?)를 미소와 함께 나눈다. 이곳에서는 자국민과 외국인의 다툼이 있으면 경찰이 달려와 무조건 외국인 편을 들어준다고 한다. 아무리 외국인이 잘못을 했어도 자국민이 양보하고 보살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니, 참 괜찮은 나라이다.
엊그제 영화관에서 만났던 사도 바울 덕분에 코카서스 그 거룩한 땅에서 “가마르조바?”하며 함박웃음으로 주고받던 아이들과의 시간들, 그 따뜻했던 사람들을 더욱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마르조바!” (20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