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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에 문을 연 아리마 온천은 12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일본에서 오래된 온천 중
하나로 땅을 파는 기술이 없었던 시대부터 온천수가 나왔습니다. 마을 어디에 가나 온천수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일본의 고서에 등장할 만큼 역사적으로 많은 권력자가 이곳의
온천을 즐겼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아리마 온천을 좋아하는 부인 네네와 함께 자주
방문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대부분의 온천탕의 내부입니다. 남녀구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아리마온천의 수호신으로 유명한 도센신사의 기원에 의하면 원천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아득히 먼 신화시대의 오나무치노미코토와 스쿠나히코나노미코토라는 두 신이었다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 두 신이 아리마를 방문했을 때, 세마리의 상처 입은 까마귀가 물구덩이
에서 몸을 씻고 있었는데, 몇일이 지나자 그 상처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보고 그 물구덩이가
온천인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 후 온천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준 이 세마리의 까마귀만이 아리마에서 사는 것이 허락되었
다고 하여, ‘아리마의 세마리 까마귀’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아리마온천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제34대 조메이천황(593~641년), 제36대 고토쿠천황
(596~654)의 무렵으로 두 천황의 방문이 계기가 되어 아리마라는 이름이 일약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서기의 ‘조메이기’에는 631년 9월 19일부터 12월 13일까지 86일 동안
조메이 천황이 아리마 온천에 들러 목욕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어 그 사실을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온천물을 마실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석일본기에 의하면, 고토쿠 천황 역시 아리마온천을 사랑해 다이카개신이 있고 2년 후인 6
47년 10월 11일부터 82일간 좌대신(아베노쿠라하시마로)과 우대신(소가노이시카와마로)를
비롯한 여러명의 측근들과 함께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리마온천의 太閤의 湯을 선전하는 포스타
‘아리마온천사화’에 의하면, 조메이 천황과 고토쿠 천황의 여러번의 행차에 의해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아리마 온천이었지만, 그 후 점차 쇠퇴해 갔다고 합니다. 이것을 다시
부흥시켜 아리마 온천의 기반을 잡은 사람이 바로 명승 교키입니다.
아리마 온천의 골목길인데 정겹습니다.
수제 구두와 신발을 파는곳입니다.
이곳에도 조그만 신사가 있습니다.
아리마 온천의 妬泉源입니다. 샘물이 솟구쳐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온천물을 식혀서 각 료칸이나 온천장으로 보내지는 곳입니다.
온천의 기반을 잡은 사람이 바로 명승 교키입니다.
교키는 쇼무천황(701~756)의 투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연못을 만들고 개천을 파고 다리를
가설하고 법당을 짓는 등의 일에 그 역량을 발휘하여 큰 업적을 남긴 고승입니다.그러한
교키가 어느날 오사카 평야의 북쪽에 위치한 이타미시의 고야에서 큰 못을 파고 있었을 때,
한명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교키에게 ‘저는 몸 전체에 심한 종양이 생겨, 수년간
고통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리마의 산간에 온천이 있다고 하는데
그 온천이 병에 상당히 좋다고 합니다. 저를 제발 거기로 데려가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머리를 땅까지 숙여 간청해 왔습니다. 가엽게 생각한 교키는 그 사람의 소망을 이뤄주고자
아리마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것 저것 소망을 이야기하는 그 사람의 청을
말하는 대로 다 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희안하게도 그 사람은 황금색의 장엄한 부처의
모습이 되어 자줏빛 구름을 타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아리마 온천의 역사
이곳은 관광객들이 무료로 족욕을 할수 잇게 만든 곳입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족욕으로 피로를 풀고 있습니다.
킨노유 온천장 앞에 완구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만쥬를 파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줄서 있습니다.
이곳은 긴노유 온천장입니다.
교키는 감탄한 나머지, 여법경을 베껴 써 그것을 샘의 바닥에 묻고 사람의 키와 같은 크기의
약사여래상을 조각하여 한 채의 법당을 세운 후 거기에 불상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키에게서 덕을 느낀 약사여래가 일부러 그러한 행동을 하여 교키로 하여금 온천을 열게
하고 아리마 발전의 초석을 닦게 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키가 이곳에
법당을 건립한 후 370년간, 아리마는 상당히 번창하였다고 합니다.
헤이안시대에 들어서면서 아리마 온천이 각종 문헌에서도 여기저기 등장하면서 많은 문인과
천황 그리고 중신들이 아리마를 방문했다고 하며, 세이쇼나곤(헤이안시대 중기의 여류 문학
가)도 그녀의 작품 마쿠라노노시에서 ‘온천이라면 나나쿠리 온천, 아리마 온천, 나스 온천,
쓰카사 온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당시에 이미 이세의 사카키바라 온천
과 대등하게 아리마온천이 천하 3대온천의 하나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대가 흘러 1097년, 천재지변이 아리마를 덮치게 되었습니다. ‘온센지절 연기(緣起)’에는
‘호리카와 천황 원년에 아리마에 홍수가 발생하여 사람과 집이 모두 쓸려내려가고 온천도
파괴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이 대홍수 이후의 95년간의
아리마는 거의 폐허상태였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심하게 폐허돼 버린 아리마를 구한 것이 바로 닌사이라고 하는 승려인데, 겐페이 전쟁(다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의 싸움)에서 다이라 가문이 멸한 직후 지금으로 말하자면 나라의
요시노에서 온 닌사이가 아리마의 재흥을 달성하였습니다.
닌사이는 나라의 요시노에 있었던 고겐지 절의 승려였습니다. 어느날 구마노곤겐을 방문했
을 때, 꿈에서 시사를 받게 되는데, 그것이 ‘아리마의 산간에 온천이 있는데 요즘 심하게
황폐해져 가고 있으니 가서 부흥 시켜라’ 라는 메세지였습니다.
닌사이는 삼가 그 뜻을 받아들였지만, 아리마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마노곤겐(부처의 화신)에게 여쭈어 보니, ‘뜰에 있는 나무의 잎사귀에 거미가 있을 것이다.
그 거미줄이 쳐진 곳을 따라서 가거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눈을 떠 뜰에 나가
보니 정말로 꿈에서 말씀한 그대로였습니다. 닌사이는 거미줄을 따라 아리마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나가노 마을에 있는 니혼마쓰에 이르렀을 무렵, 거미줄이 없어졌습니다. 마침 그 때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닌사이 앞에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 닌사이를 산정까지 안내해 주고는
나무 잎사귀 한장을 던지며 ‘이 잎이 떨어지는 곳이 바로 영지(靈地)이다’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곧바로 그 가르침에 따라 잎이 떨어진 곳을 찾아가 보니 거기에 교키가 만든 온천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 원천을 준설하고 쇼토쿠 시대의 홍수로 부터 1세기에 달하
는 때를 거쳐 아리마온천의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온천의 부활과 함께 닌사이는 야쿠시지 절을 보수하여 12보(승려의 숙박시설)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미나모토노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열기 1년 전인 1191년의 일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2보의 관리는 닌사이가 요시노로부터 데리고 온 가와카미, 요다씨 등 다이라
가문의 생존자였다고 합니다.
현재, 아리마에 보(坊)라는 자가 붙은 여관이 많은 것은 시대의 흐름을 따른 것이거나 그것을
본떠 이름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후 수백년의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되었으며, 무라마치 시대와 전국시대의 혼란기에도
목욕을 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세상의 혼란도 아리마의 번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닌사이가 아리마의 재흥에 성공하고 300여년이 지난 무렵 다시 평화로운 보양의 땅에
동란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1528년에는 대화재에 휩싸여 초토화 되었으며, 1545년에는
젠푸쿠지 절 뒤의 오치바야마 산에 성을 가진 미요시소잔세이초를 미키성의 성주 벳쇼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와 그 여파로 아리마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1576년에도 큰
화재가 발생하여 아리마는 다시 일어설 여유도 없이 괴멸적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한편, 아케치 미쓰히데, 시바타 가쓰이에 그리고 오다 노부타카를 차례로 격파하고 천화통일
의 기반이 어느 정도 잡힌 1583년, 히데요시가 아리마를 찾아와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쌓인 심신의 피로를 천하에 그 이름이 유명한 아리마 온천에서 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히데요시가 아리마 온천을 이용한 최초의 기록입니다. 그 후로도 히데요시는
여러차례 아리마를 방문하였다고 하며, 아리마에 대한 여러가지 원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히데요시의 업적 중 특필할 만한 것은 1597년에 시작된 대규모의 보수공사입니다. 이 공사의
직접적 계기는 전년 긴키지역 전체를 덮친 후시미 지진으로, 건물이 입은 피해도 상당히
컸지만 그 보다도 지진이 발생한 이후로 온천의 온도가 급상승하여 열탕이 되어 버린 것에
있었습니다. 온천의 치유 효과를 잘 알고 있었던 히데요시는 말 그대로 영단(과감한 결정)을
내려 아리마 온천의 근본적인 보수공사에 착수하였습니다.
히데요시의 공사 이래 350년간 아리마초(아리마초는 1896년에 유야마초에서 아리마초로
개칭되었습니다.)는 단 한번의 원천 보수공사도 없었으며, 이는 그 당시의 히데요시의 과감한
결단이 그 후의 아리마의 번영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공사가 완공된 1598년 3월 히데요시의 온천욕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만 거친 비바람으로
취소되고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몸져 누워 그 해 8월 18일 세상을 달리한 탓에 히데요시는
결국 그 성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에도시대에 들어서면서 아리마는 더욱 번영하게 되었으며, 에도시대의 아리마는
막부의 직할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지금처럼 각 여관 안에 온천탕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에 원천탕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온천 치유욕을 위해 온 손님들은 모두 이 원천탕까지 가야했었습
니다. 뿐만 아니라 온천의 용출량도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한편, 히데요시가 찾아오면서
원천의 본격적인 보수공사로 인해 온천으로서의 인지도가 높아지게 되었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늘어났지만 당시의 목욕 풍경을 살펴보면 지금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고 합니다.
이 당시의 목욕탕이라는 것은 원천탕으로 남북으로 7간, 동서로 3간 정도의 건물이 1채
있었을 뿐이며, 그 안에 설치된 욕탕도 남북으로 2조(6.06m), 동서로 1조(3.03m) 정도의
크기로 중앙에 판으로 된 칸막이가 있어 둘로 나뉘어져 있는 정방형의 욕조였다고 합니다.
남쪽은 ‘이치노유’ 북쪽은 ‘니노유’라고 불렀으며, 깊이는 둘 다 3척 7,8촌(약 30cm)`정도
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닌사이가 건설한 12보는 히데요시의 대보수공사를 통해 20보로 늘어났으며, 이 20보는
순수 여관으로서 기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치노유에 10보, 니노유에 10보가 각각 배속되어,
각 보에서 2명의 유나(옛날 온천 여관의 하녀)가 배속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온천 치유욕을
위해 찾는 사람들의 증가에 함께 보의 아래에 ‘고야도(小宿)’라는 숙사가 만들어지는 등
숙박시설도 점차 충실히 갖추어져 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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