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18. 주일예배설교(요한복음 강해 62)
요한복음 17장 22절~26절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3)
■ 산 정상에 오르면 산의 모든 것이 보입니다. 정상에 오르기 전에는 부분적으로 보이고 단편적으로 이해되던 것이, 정상에 오르고 나면 전체가 보이고 온전히 이해됩니다. 당연하지만 놓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정상만이 최고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르는 동안 만나는 구체적인 부분도 의미가 있습니다. 오히려 정상에 섰을 때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7장을 이해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설명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17장의 클라이맥스-정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가 온전히 이해됩니다. ‘아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데는 오늘 본문에 도착하기까지 만났던 모든 기도 내용이 전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르기 전에 만난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자들’을 멸망하지 않게 보전해주십사 하는 부탁의 기도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 당신이 떠나고 나면 세상에 남겨지게 될 믿음의 자녀들끼리 하나가 되게 해주십사 하는 부탁의 기도셨습니다.
이 부탁에 이어 오늘 본문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의 기도는 지금까지 드린 기도를 더욱 강력한 사실관계를 드러내심으로 들어주실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기도입니다. 무엇일까요? 본문으로 가보죠.
■ 이해하시다시피, 요한복음 17장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남아 있게 될 우리, 그런데 평범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향한 수많은 악의 도전 가운데 살아야 하는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기도는 간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보다 강력한 입장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당장 22절과 23절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긴장하고 조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곡히 부탁하신 것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입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게 해주셔야 할 근거로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를 요청하셨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요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부-성자-성령 삼위가 하나로 있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느 누구도 덤빌 수 없습니다. 어느 것도 이 세분의 하나 됨의 관계를 흩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덤빌 수 없고, 흩을 수도 없도록 우리를 하나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세상은 긴장하고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로 붙잡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면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3절 후반절입니다.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그런데 세상이 우리에 대해 긴장하고 조심할 수밖에 없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22절 상반절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은 무엇인가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얻게 될(된) 영광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얻은 만왕의 왕으로서의 영광입니다. 하나가 되는 순간부터 이 영광을 예수님과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가 되는 순간 세상은 긴장하고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 됨은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 됨은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 됨과 같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 됨은 ‘낮아짐’, ‘비움’, 그리고 ‘가난해짐’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 됨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삶이 ‘낮아짐’, ‘비움’, 그리고 ‘가난해짐’이셨습니다. 이러한 삶이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하나 됨의 비결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 됨도 ‘낮아짐’과 ‘비움’, 그리고 ‘가난해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 이 악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내어주신 영광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비움’으로 충만해지고, ‘가난해짐’으로 부요해지는 역설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역설의 은혜를 24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이 누리시는 영광, 즉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비움’으로 충만해지고, ‘가난해짐’으로 부요해지는 영광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이는 곧 우리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하나가 되지 않을 이유를 찾고 이에 대한 변명을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 이제 우리는 우리가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이 정도의 이중 장치로는 안심 못 하십니다. 그래서 삼중 장치를 하십니다. 25절과 26절입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삼중 장치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알게 하는 것입니다. 헷갈리시죠?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 다른가?’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과연 다를까요? 아닙니다. 같습니다.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해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존재성과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동춘이 이동춘이라는 이름으로 이해되고 존재가 증명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삼중 장치는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알게 함으로 우리가 믿음에 단단히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25절과 26절에서 볼 수 있는 개념은 ‘알게 함’과 ‘안에 있음’입니다. ‘믿게 함’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그러나 ‘안에 있음’이 ‘믿게 함’입니다.
좀 어렵지만, 이해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제자들을 떠나게 될 때를 대비해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대제사장의 기도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떠나시니 악에 노출된 상태에서 믿음을 견뎌내야 할 제자들이 몹시 염려되어 보전을 부탁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26절에서 보다시피,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모순이지 않습니까? 제자들 안에 계신다는 것 아닙니까? 떠나시기에 염려되신다면서 제자들 안에 계신다니? 모순이죠?
아닙니다. 모순이 아닙니다. 26절을 다시 보시지요.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알게 한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있게 하려 한다는 것은 ‘믿게 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신앙상관법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상관성이 있습니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믿기 때문에 더욱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될수록 믿음이 깊어집니다. 그리고 믿음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을 알고 싶은 거룩함이 더 커집니다. 이렇게 믿음의 크기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거룩한 상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커지고 싶다면 하나님을 아는 수고를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깊어지면서 믿음이 커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 우리 안에 있는 <설교 성경공부>와 <오늘의 하늘양식>이 이 거룩한 경험을 시켜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개인 기도시간>이 이 경험을 더욱 보탤 것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것이 깊어지면서 믿음이 커지는 것을 경험할수록 더욱 강화시켜야 할 삶이 있습니다. ‘하나가 됨’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이들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성격과 배경과 경험과 이해와 지역과 국가와 교파와 신념과 성(性)이 달라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 안에서 하나가 돼야 합니다. 싸우지 말고 하나가 돼야 합니다. 환대와 화해와 평화가 삶에 나타나야 합니다. 이는 세상이 드러내는 저주와 폭력과 분열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기성을 핑계로 시작한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한다는 것이 녹녹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해 보는 일들이 비일비재할 테니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명령하신 ‘서로 사랑’입니다. 더욱이 믿음의 사람들끼리의 ‘하나 됨’은 피해서는 안 되는 절대명령이십니다. 이 명령에서 예외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를 위해 예수님이 당신의 영광을 우리와 공유하신 것입니다. 만왕의 왕의 영광을 공유하셨으니 훗날 디모데후서 2장 12절의 약속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그렇습니다. 참으십시다. 하나가 되려 할 때 방해하는 일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가 되고 싶지 않은 상대방의 태도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십시다. 그리고 사랑하십시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