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蒼巖 李三晩 (1770-1847)
조선 후기 서예가. 자는 윤원(允遠), 호는 창암(蒼巖). 본관은 전주(全州).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당대 명필이었던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는데 글씨에만 몰두한 나머지 가산을 탕진, 포(布)를 누여가면서 글씨에 열중하였다. 글씨 배우기를 청하는 자에게는 1점 1획을 한 달씩 가르쳤으며, 병중에 있을 때 벼루 3개에 먹으로 구멍을 내겠다는 결심으로 하루 1000자씩 글씨를 썼다 한다. 특히 초서를 잘 써, 그 글씨를 창암체라 했다. 전주 제남정(濟南亭)의 액(額)이 그의 글씨였으나 갑오개혁 때 소실되었고, 유필로 하동칠불암(河東七佛庵)의 편액(扁額)과 전주판(全州板)의 칠서(七書) 등이 있다.
18세기 후반 전북서단에 신화적인 존재가 출현하였는데 그가 바로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이다. 창암은 완주지역에 기거하면서 일세를 풍미한 서예가였다. 창암은 혹독한 수련으로 그에 관한 고사가 여러 가지가 전해질 정도로 예술적 경지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창암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역대의 서법을 통해 독특한 자신의 서체를 창출한 대가로서, 혹은 조선 후기에 성행한 서론가로서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창암은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로 지칭되는 추사에 비길만한 인물로 칭송받고 있다. 추사가 북학의 한 계통으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직접 수용하고 그것을 한국에 뿌리내리고자 했던 개혁적인 유학파 인물이었다면, 창암은 이에 반하여 혹독한 자기 수련과 공부로 조선의 고유색을 드러낸 국내파 지식인이었다.
창암 이삼만(1770~1847)의 경우 모필(毛筆)과 함께 남들이 쉽게 시도하지 않은 갈필(葛筆·칡뿌리) 죽필(竹筆) 앵우필(鶯羽筆·꽤꼬리털)과 같은 특이한 도구나 옷감을 가지고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것은 예술에 있어 주목되는 도구와 재료의 확장인데 이는 창암 글씨의 소탕(疏宕·탁 트이고 거칠음) 수경(瘦勁·마르고 굳셈)한 맛을 내게 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창암은 글씨를 씀에 있어 인품·고법(古法)·극공(極工·온 힘을 다 바쳐 공부함) 통영(通靈·신령스러운 경지)등의 네 가지를 강조한 것도 남다르다. 특히 하루 천자쓰기로 벼루 세 개를 구멍 냈다고 전하는 창암의 극공의 결과는 ‘필결’에 집필법 운필법 영자팔법(永字八法) 결구법 등의 학서론으로 정립되어있다.
16,17쪽을 보니 "석전(石田)"황욱선생에 대해서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이건? 아니 호가 석정이 뭐야? 어디서 많이 들은사람이야기다 했더니만 부안에서 태어난 시인 신석정? 석전을 석정이라고 크게 오타나온것걸 아주 당당하게 써놓았더군요 그걸 트집잡아 끝까지 읽어보니 아니 희수 [喜壽]에 초대전? 요즘 사람들은 뭘좀 했다하면 명함이 우선이고 나잘났다 온동네방네 명함뿌리는게 유세인데 옛 어른들의 모습에서 저도 다시한번 고개숙여지고 자숙하게 되었습니다 전라북도는 예로부터 곡창지대여서인지 음식문화와 예술의 고장으로 발전하여 많은 예술인들을 배출하고,
심지어 다방,이발소에까지 동양화,서예작품이 기본으로는 10여 작품이 걸려있는게 당연한걸로 알아요 우리집에도 동양화 몇작품은 그림이라도 본다지만 뜻모를 서예작품 대작이 안방에 2,거실에 2,식탁옆에 1개가 걸려 있어요 ㅎㅎㅎ
재미있는건 후손들이 욕심부리지않고 기념관,박물관등에 기증한다는것에 이의를 두지요 동양화가 벽천 나상묵선생도 김제에 기념관건축 개관후 개인소장 모든작품을 시에 기증했어요 오늘저녁 7시 지방방송 논평에서 이런말을 했어요 적십자회비,헌혈,불우이웃돕기성급이 전국에서 1위라구요 제가봐도 전북사람들은 욕심이없고 한박자느리게 사는사람들같아요 좀 어리숙하게 멍청한듯 ㅎㅎㅎ 아래 이많은 사람들이 전북출신 서예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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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립미술관에서 도청에서 만든 도보 1월호 "얼쑤전북"이라는 책자를 가져왔습니다
16,17쪽을 보니 "석전(石田)"황욱선생에 대해서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이건? 아니 호가 석정이 뭐야?
어디서 많이 들은사람이야기다 했더니만 부안에서 태어난 시인 신석정?
석전을 석정이라고 크게 오타나온것걸 아주 당당하게 써놓았더군요
그걸 트집잡아 끝까지 읽어보니 아니 희수 [喜壽]에 초대전?
90세부터 득도의 경지에 올라 많은 작품활동?
요즘 사람들은 뭘좀 했다하면 얼굴알리는게 우선이고 나잘났다 온동네방네 명함뿌리는게 유세인데
옛 어른들의 모습에서 저도 다시한번 고개숙여지고 자숙하게 되었습니다
전라북도는 예로부터 곡창지대라서 그런지 음식문화가 발달하였고, 특히 예술의 고장으로 발전하여 많은 예술인들을 배출하였어요
(등따시고 배부르니 풍류를 즐겼겠지요ㅎㅎㅎ )
심지어 다방,이발소에까지 동양화,서예작품이 기본으로는 10여 작품이 걸려있는게 당연한걸로 알지요
우리집에도 동양화 몇작품은 그림이라도 쳐다 본다지만 뜻모를 서예작품 대작이 안방에 2,거실에 2,
식탁옆에 1개가 걸려 있어요 (뜻풀이해준게 있는데 이제 잃어버렸어요 ㅎㅎㅎ)
또한 재미있는건 후손들이 욕심부리지않고 기념관,박물관등에 기증한다는것에 이의를 두지요
동양화가 벽천 나상묵선생도 김제에 기념관건축 개관후 개인소장 모든작품을 시에 기증했어요
오늘저녁 7시 지방방송 논평에서 이런말을 했어요 적십자회비,헌혈,불우이웃돕기성금이 전국에서
1위라구요
제가봐도 전북사람들은 욕심이없고 한박자느리게 사는사람들같아요
좀 어리숙하게 멍청한듯 ㅎㅎㅎ
아래 이많은 사람들이 전북출신 서예가들입니다
"석정"이정직,"벽하"조주승,"창암"이삼만,"유재"송기면,"석전"황욱,"강암"송성용,"남정"최정균,"효산"이광열,"산민"이용,"설송"최규상,
"성재"김태석............. 너무많아 정리를 못했어요
생전에 강암선생을 뵈었고 돌아가실때 뵈었는데 3~4년전 일같더니만 벌써 올해 10년되었네요
장레식은 대단하였어요 만장이 수백장 휘날리고 선생의 문하생들 각계 외부인사등......
제일 기억나는건 mbc방송 인터뷰에서 아나운서가 자식농사 잘지었다고하니까 하신말씀
"저는 자식들이 담장너머로 나갈려고 할때 안으로 들여놓은것 밖에 한일이 없습니다" 라는말이 제일 기억에나요
첫댓글 창암 이상만 선생님의 글이 극공이네요. 힘있게 내려썼으면서도 함축미가 담겨져 있기도 하고(덕분에 유식해졌습니다. ㅎㅎ) 자식들이 담장너머로 나갈려고 할때 안으로 들여놓은 것 밖에 없다는 말씀, 새겨듣습니다. 얼쑤전북!!
미인님으로 인해 전주가 한없이 친근해져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들이 대를 이어 오는 곳이군요. 참 멋지신 분들이네요. 근데 미인님은 모르는 것도, 못하는 것도 아주 없으시군요.
미인님이 올리시는 글과 사진공부하면 자연스레 박식하겠어요. 얼쑤~~전북!!
(등따시고 배부르니 풍류를 즐겼겠지요ㅎㅎㅎ ) 그렇기도 하겠다 싶군요. 그래도 그들의 극공에 이르는 노력과 열정을 그 위에 더해야 하겠지요. 다재다능 박학다식하신 미인님 덕분에 앉아서 좋은 공부 많이 합니다.^^
과찬의 말씀을 하시는군요 모두다 제가 전주에서 살기때문입니다 맹모삼천지교 [ 孟 母 三 遷 之 敎 ]라는말에 비유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무튼 전주에서 살기때문에 주워들은 풍월로 말하는것 뿐입니다 아는것은 없구요 ㅎㅎㅎㅎ참 아침에 전북도청에 전화했어요 그랬더니하는말 그렇잖아도 저희들 반죽음 죽도록 혼났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