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5년 도 딱 삼일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하루 두 끼 먹고 군것질을 안 하는 것만 하는데도 입시 생 마냥 힘듭니다. 리치 가이나 권태를 부러워할 일 1도 없어요. 결핍은 운동-일-공부하면 되는데, 권태는 참아야 하고 시간을 때워야 하는 일이 얼마나 대책 없고 어려운지 몰라요. 시간 죽이는데 영화만 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영화 <아포칼립토>를 20년 만에 새로 보았어요. 미장센이 몽한 적이면서 다이내믹 하고 신비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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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토 2016>라는 영화가“계시”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멜깁슨 이 양반이 크리스천이라 영화 안에 나름의 신학을 내포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그쪽은 이것저것 많이 엉성합니다. 왜 아포칼립토에 계시, 혹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를 사용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그렇고 아포칼립토도 리얼리티 하나로 흥행몰이에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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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패션>보다는 <아포칼립토>가 재미가 있습디다. "마야가 멸망한 것은 가뭄 때문일까? 정복자 스페인의 황금 욕심에 의해서일까." 영화<아포칼립토>는 약탈당한 작은 부족의 젊은 남자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마야문명은 아직까지 수수께끼투성입니다. <아포칼립토>는 해가지지 않는 영국을 필두로 한창 전 유럽이 식민지 정보 시대로 떠들썩했던 15세기 유럽에서 고착상태를 면치 못했던 스페인이 마야 정복으로 인해 황금시대를 열었던 계기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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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문명은 내부에서 붕괴되기 전까지 정복되지 않는다." 는 윌 듀란트의 어록으로 이 영화가 시작되는 것은 아마도 감독의 의도일 것입니다. 오래된 문명의 멸망은 정해진 길을 걷듯이 도시와 문명인이 타락해가면서 개인의 영생을 위해 신에게 인신제물을 바치는 사악한 제사를 행하는데 이것은 로마제국의 멸망과 같은 폐단이 줄을 잇는다는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잔인한 죽음의 의식. 목이 잘리고 피가 제단에 뿌려지는 컷은 이사야에서도 언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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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현 교수의 말에 의하면 바빌로니아인들이 아이들을 바위에 부닥쳐 죽일 때 아이의 눈망울과 만나지 않으려고 눈을 가렸다고 하더이다. 으윽, 등골이 오싹합니다. 주인공 '표범 발'에 의해 문명의 멸망이 예언되고 그의 운명처럼 미지의 문화를 정복하려는 스페인의 함대가 닻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도시로 끌려온 그들은 일부 노예로 팔려가고 젊은이들은 태양신에게 올릴 신전으로 향하는데 왜 표범 발의 운명이 스페인 함대와 연결이 되는지 관객들은 의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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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포칼립토'의 '표범 발'은 아내와 아이들을 구해내고 멸망에서 살아남아 종족을 보존시키는 위대한 가장이며 노아의 방주 같은 존재라는 명제 하에 영화를 보자는 의도일까? 만약 그렇다면 멜깁슨은 "표범 발"을 예수의 모형으로 설정하는 셈입니다. 오랜 가뭄으로 인해 마야는 황폐화되고 있을 때, 잔인한 전사로 구성된 침략자들이 마을을 습격하여 부족민을 학살하고 포로로 끌고 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표범 발'은 이 혼란 속에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깊숙한 우물에 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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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 분만 시퀀스는 압권입니다. 눈앞에서 부족민을 이끌던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운명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표범 발”은 살아남아 아내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는 개기 일식으로 구사 일생 하는가 하면, 활과 창에서도 살아남고 늪 속에서 기어 나와 마침내 복수를 가져다준다는 예언을 성취합니다. 멜 깁슨은 영화의 리얼리즘을 위해 마야 인을 대상으로 캐스팅을 했고 100% 마야 어를 사용해 영화를 찍었다 네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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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문명은 멕시코, 과테말라, 베리즈,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로 시대적 연도는 B.C 2400년도부터 15세기까지입니다. 예술과 수확에 능란하고, 자신들만의 문자를 사용했으며, 천문학과 숙련된 농업기술, 기술자, 건축가들이 있었기에 마야인들의 문명은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부유하고 풍족했었다고 전해집니다. 잔인무도한 홀케인 전사. 제사장의 심복들의 인간 사냥은 태양신을 숭배하면서 노쇠해진 태양을 젊게 하기 위해 젊은이들의 피를 제단에 바치는 종교의식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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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의 심장을 꺼내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방법으로 문명을 유지시킨 것은 아마도 공포정치의 효시가 아닐까, 홀케인 전사의 리더인 '큰 늑대'는 '표범 발'이 탈출하다 죽여 버린 그의 아들에 대한 복수로 불타올라 영화 내내 '표범 발'을 죽이기 위해 숨 막히는 추격 신을 보여줍니다. 그냥 사단의 두목답게 어찌나 빠르고 강한지 멧돼지 사냥 덫에 걸려 죽을 때 박수를 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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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의해 죽어갔는지 잠이 다 번쩍 깹니다. 큰 늑대, 제발 멈춰!, 주여, 나의 무지와 잔인한 종교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의 후손들과 사냥 터를 축복하시길, "A great civilization is not conquered from without until it has destroyed itself from within)."(윌 듀랜트)
2.
2025년의 끝자락, 결핍보다 권태가 더 버겁다는 고백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습니다. 배고픔은 견딜 수 있어도, 의미 없는 시간은 견디기 어렵다는 말처럼요. 시간을 “때운다”는 표현이 이미 이 영화 감상의 출발점을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소비하는가, 아니면 영화에 잠시 몸을 숨기는가? <아포칼립토>는 그런 의미에서 시간을 죽이기보다는, 시간을 쫓기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숨 돌릴 틈 없이 달리고, 피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서사는 권태와는 정반대의 감각을 관객에게 강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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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토(Apocalypto)’가 “계시, 드러남,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이라는 점에서 멜 깁슨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글쓴이의 말처럼, 그 신학은 매끄럽다기보다 거칠고 직관적입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마찬가지로, 그는 사유보다 육체적 리얼리티를 앞세웁니다. 멜 깁슨에게 ‘계시’란 깨달음일까, 아니면 파괴 그 자체일까? 새로운 시작은 누군가의 멸망 위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문명의 멸망은 외부인가, 내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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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듀란트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선택은 노골적입니다. “위대한 문명은 내부에서 붕괴되기 전까지 정복되지 않는다.” <아포칼립토>는 마야 문명을 낭만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시화된 문명, 종교 권력, 공포 정치를 집요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 제사를 통해 태양을 연장하려는 행위는 신앙이라기보다 체제 유지를 위한 폭력입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순간, 그 문명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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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글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표범 발’을 노아 혹은 예수의 모형으로 읽는 시도입니다. 가족을 우물에 숨기고, 끝까지 살아남아 혈통을 이어가는 존재. 그는 도시의 문명이 아닌, 자연과 가족을 택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 해석 역시 질문을 남깁니다. 표범 발은 선택받은 구원자인가, 아니면 우연히 살아남은 생존자인가? 그의 생존이 신의 섭리라면, 스페인 정복자의 등장은 또 다른 ‘계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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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스페인의 함대는 구원도, 심판도 아닌 채 그저 도착합니다. 그 모호함이 오히려 불길합니다. 송병현 교수의 인용과 함께 언급된 고대의 사례들은 한 가지 사실을 환기합니다. 종교는 인간을 위로해 왔지만, 동시에 가장 잔인한 도구이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신앙은 언제 인간을 살리고, 언제 인간을 죽이는가? 우리는 과연 ‘큰 늑대’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아니면 형태만 바꾼 같은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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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토>는 문명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추격전입니다. 아무도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문장은, 결국 이렇게 바뀌어 읽힙니다. 우리는 운명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지만, 어디로 달릴지는 선택할 수 있다. 권태의 끝에서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든 이유가, 어쩌면 바로 그 질문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달릴 것인가, 멈출 것인가. 문명 안으로 갈 것인가, 가족과 자연 쪽으로 갈 것인가.
No one can outrun their destiny.
아무도 그들의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다.
When the end comes, not everyone is ready to go.
종말이 왔을 때, 모두가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Takes out the fear residing deep inside our hearts.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공포를 없애라.
2025.12.28.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