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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한학교으뜸교육 원문보기 글쓴이: 백한진
황연옥 작가 ‘화진포의 성’ 소설연재/부제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9
‘화진포의 성’ 1~37회까지
황연옥 작가 ‘화진포의 성’ 소설연재/부제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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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아동문학가이신 황연옥 권사님은 강원고성신문에 전기소설 <화진포의 성>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이어서 올려둡니다.^^(‘화진포의 성’ 38~42회까지)
화진포의 성 [38]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38]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12월 30일(목) 10:31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닥터 홀이 버버그 여사의 유산을 결핵요양원 건립 후원금으로 받게 되었대요!”
이 소식은 밀물처럼 퍼져 나갔다. 자금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요양원을 지을 대지를 구입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셔우드는 부동산 매매에 일가견이 있는 조선인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은 팔려는 땅이 나와 있는 곳을 알려주고 직접 셔우드 부부를 데리고 가서 보여주기도 했다.
마침내 이상적인 장소를 발견했다. 그곳은 셔우드의 집 뒤에 있는 반대편 경사진 곳이었다. 요양원 자리는 입지적으로 공기가 좋고, 해가 잘 들며, 방풍이 잘 되는 곳이 좋다. 갑자기 응급환자가 있을 수 있기에 병원과도 그리 멀지 않아야 했다.
그 곳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어 방풍이 잘 되었고 남향이라 따뜻한 햇볕을 쪼일 수 있었다. 앞쪽에는 황해의 섬들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왔다.
“땅을 살 때 조선 사람의 명의로 구입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주위에서 지인들이 좋은 권고를 해 주었다. 신실한 조선인 친구들에게 땅 구입하는 것을 맡기고 셔우드는 잠시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마침 장마철인 우기라 병원이 한산하였고 학교도 방학이라 휴양처가 있는 원산해변으로 가기로 했다.
원산에 도착해서 별장을 손질하고 집 안팎을 청소하는 동안 맥컬리 댁에 머물렀다. 집에 얹어 구입한 보트에 페인트를 칠하고 ‘Chamie’ 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선말로 ‘재미’라는 뜻인데 이 보트는 친구들에게 많은 재미를 안겨주었다. 서울에서 사귄 친구들도 원산해변으로 휴가를 와서 이 보트를 이용하곤 했다. 친구들은 셔우드가 휴양처를 원산으로 정한 것을 무척 기뻐했다.
별장지하실에 임시진료실을 만들어 놓고 마을 주민들에게 휴가를 온 의사들이 교대로 진료를 해 주었다. 진료를 하며 조선인 중 상당수가 결핵에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핵에 감염된 조선인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해 주지 않으면 후에는 가족은 물론 선교사 가족들도 감염될 것이기에 조선인 환자들의 치료가 시급했다.
돛단배를 타고 강풍에 휘말리기도 하며 원산에서 즐거운 추억과 휴식을 선물 받고 은혜로운 집회를 마지막으로 휴가가 끝났다.
해주로 돌아오자 병원에는 소위 ‘여름병’으로 불리는 병에 시달리는 어린이 환자들이 많았다. 채 익지 않은 과일을 먹어서 배탈이 난 경우였다. 장티브스와 이질도 발생해 병원 일손이 바빠졌다. 해주구세병원은 ‘이질을 잘 치료하는 병원’이라고 소문이 나서 일본인들도 공립병원에 다니다가 이 병원으로 옮겨왔다. 셔우드가 런던의 ‘열대약학학교’에서 배웠던 치료법이 조선인 환자들에게 효과가 있었다.
병을 치료하다가 한 가지 이상한 수수께끼를 발견했다. 똑같은 방법으로 치료했지만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 비해 회복이 대단히 늦었다. 연구시설이 없어 그 이유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지는 못했지만 고추가루를 넣은 ‘김치’가 효과를 보는 것 같았다. 매운 성분은 아메바 균이 내장에서 서식하기도 전에 매운맛이 물리적인 작용을 하여 균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실제로 권유를 받아들여 김치를 먹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매우 좋은 효과를 보였다.
병원에는 신경정신병 환자들도 적지 않았다.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고통을 받고 있기에 안타까웠다. 처음 이런 환자를 받을 때는 비교적 치료될 가망성이 있는 환자들만 받았다. 나중에는 치료하기 힘든 환자들도 받기로 했다. 결국 기독교 선교사 본연의 봉사정신과 열정으로 모든 환자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발전했다.
어떤 환자는 놀랄 정도로 빨리 완치되어 의료진을 기쁘게 했다.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낫도록 최선을 다했고 쇠로 살을 지지는 따위의 비위생적이고 잔혹한 ‘무당치료법’에서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셔우드는 병원 의료진들에게 환자의 마음에 편안함을 주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신 말씀을 늘 묵상했다.
병원이 ‘죽는 장소’가 아니라 ‘병을 낫게 하는 곳’이라는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경정신과 환자들의 입원 수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를 수용할 여건이 되지 않아 더 받지 못하고 돌려보낼 때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프고 착찹했다. 그들의 절망과 고통을 알고 있기에 셔우드는 안타까움으로 몸을 떨곤 했다.
“결핵 요양원 건립 허가를 내 줄 수 없습니다. 우리 도시에 결핵 환자들을 우글거리게 할 수는 없지 않소.”
요양원을 지을 대지구입 허가를 받으러 시장실을 방문했다. 조선 친구들은 땅 주인과 좋은 가격으로 흥정을 끝낸 후였다. 그런데 이런 장애에 부딪히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시장은 계속 다른 이야기를 덧붙였다.
“당신이 매입하려고 하는 대지는 이미 우리가 공원 조성을 하려고 계획한 정부 소유의 소나무 숲 옆이오. 그 곳을 결핵 환자들이 어슬렁거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시장님, 해주에는 결핵 환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공공장소에서 상당히 많은 병균을 퍼뜨리고 있어 위험합니다. 요양소를 지어 환자를 격리시키면 일반인들에게 전염될 걱정은 없어 오히려 해주 시민의 건강이 안전합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병균이란 거 지어낸 말이 아니오? 도대체 병균을 본 사람이 있단 말이오?
병균을 현미경으로 보여주겠다고 해도 그들은 당치 않는 말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계속 “안된다!”는 말뿐이었다. 셔우드는 또 한 번 심한 좌절감에 휩싸였으나 결핵 환자들을 살릴 요양원를 지어야 한다는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 결핵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20명에 한 명 정도라면 조선은 5명 중 한 명이 결핵 환자였고 활동력이 강했던 병균이었다. 비위생적으로 일하는 도시의 근로자들은 가장 좋은 감염원이었다. 서민들의 주택은 초가집으로 불결하였고 창문이 없이 굴속같이 막힌 구조여서 햇볕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결핵환자들 중에는 치료도 받지 않고 불치병으로 생각하고 비관해 스스로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니 요양원 건립은 치료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이라는 목적에서도 절실히 필요했다.
결핵 요양소라는 이름이 부담스러울 듯하여 ‘결핵환자 위생학교’라는 이름을 붙일 계획이었다. 이 ‘결핵환자 위생학교’는 환자의 치료는 물론 전염병 예방을 포함한 일반적인 의료상식을 가르칠 예정이었다. 환자들이 완치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배운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게 될 것이니 병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은 당연했다.
선교위원회 허락을 받았고, 버버리 여사의 유언에 따라 요양원 건립자금도 확보되었는데 소년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셔우드는 좌절했고 밤이면잠이 오지 않았다.
신앙심이 강한 조선인 신자들은 그런 셔우드를 위해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었다. 셔우드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인간적인 힘만 믿고 일을 성취시키려 했던 자만심을 깨닫게 해 주었다.
회심 기도 중 어느 날, 불현듯 해주에 와서 만났던 도 경찰국장 사사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일본인 친구들의 힘을 빌리는 일은 달갑지가 않아 한 번도 부탁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사사키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셔우드는 면회를 신청했다. 사사키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방문을 해 주신 용건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전염이 확산되고 있는 시점에서 요양원 건립을 추진하게 된 경위와 진퇴양난인 현재 상황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셔우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다른 대지를 찾아보시지요. 적당한 곳을 찾은 다음 허가를 신청해 보십시오. 그러면 별일 없이 순조로울 겁니다.”
사사키는 조언만 해 주었을 뿐 약속을 해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신중한 태도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을 가다가 벽에 부딪혔을 때 돌아가는 방법을 사사키에게 배운 셈이다.
새로운 장소를 찾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새 대지는 처음에 구입하려 했던 곳에서 수백 미터 거리에 있었다. 남향에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었으며 아래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요양원 대지로는 좋은 위치였다.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아 왕래하기도 불편하지 않았고 너무 가깝지도 않아 도시의 매연을 피할 수 있었다. 땅 주인도 팔고 싶어했다. 이번에는 시장과 시의원들이 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대지구입을 허가해 주는 것을 보고 사사키가 도와주었음을 짐작하고 감사했다.
‘아, 드디어 조선에 결핵요양원을 지을 수 있게 되었구나!’
1928년 3월이었다. 굽이굽이 험한 산길을 가듯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에 셔우드는 울컥하였다. 남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지만 어릴 때부터 꿈꾸어 왔던 일들이 놀랍게도 현실로 다가옴을 느끼며 셔우드는 진심으로 두 손 모아 감사기도를 드렸다.
화진포의 성 [39]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39] / 삽화 윤광자 화가
2022년 01월 13일(목) 16:00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해주구세병원(노튼 기념병원)의 소문은 좋게 퍼졌다.
외국인 방문객들과 후원자들이 점점 많아졌다. 사촌인 에밀리 해스킨(Emily Haskims)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설교를 통해 병원 직원들과 환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고 병원 일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후일 시간을 내어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의 제약회사 파크 데이비스(Park Ddvis, 현재의 화이자)같은 제약회사 판매원들도 찾아 왔는데 그들은 세일즈를 넘어 좋은 후원자가 되었다.
“여보, 울버턴 여사가 우리를 후원해 주기로 한 3년이 다 되어가네요.”
전에 선교위원회 사무장 디펜스 박사가 병원을 방문했을 미국에 돌아가 울버턴 여사에게 선교후원을 연장해 줄 것을 부탁드렸는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고심하던 매리언은 유려한 필체로 현재의 병원 사정을 알린 후, 선교후원을 3년만 더 연장해 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런 시기에 운산에 있는 ‘동양연합광업회사’에서 우리를 그곳 병원 담당의사로 와 달라는 서신을 보내 왔다.
“우리 광산 담당의사인 닥터 파워(E. L. Power)가 건강상의 이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어 사직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닥터 홀 부부를 우리 병원 담당의사로 모시고 싶습니다.”
광산에서는 보수를 지금보다 두 배의 좋은 조건을 제시했고 선교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선교에 필요한 의약품과 다른 물품을 무료로 제공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셔우드는 고심했다. 이 요청을 수락하면 안정된 환경에서 오래 일할 수 있겠지만 결핵요양원 건립의 꿈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어찌해야 합니까? 어서 요양원을 지어 저 불쌍한 결핵환자들을 격리 수용해서 치료해야하는데 그 길이 열리지 않고 있습니다!’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낭보가 날아왔다. 뉴욕의 울버턴 여사의 편지가 온 것이다. 앞으로 5년을 더 후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자신의 나이가 76살이라 그 후는 책임을 질 수는 없다고 했다. 셔우드 부부는 감동하며 서로 얼싸 안았다. 결핵요양원 건립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으로 알고 울버턴 여사에게 진정이 담긴 감사의 편지를 썼다.
요양원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아 초조하게 기다리던 1월의 어느 날이었다. 감리교 본부 웰치 감독한테서 전보가 왔다. 2~3개월만 운산에 있는 미국금광으로 가서 환자를 진료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닥터 파워가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고 광산 병원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셔우드 홀 내외를 해주구세병원으로 돌아오게 해 주고 병원의 재정 손실도 없도록 배려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엄동설한에 아기 월리엄을 데리고 북쪽 추운지방으로 가는 일이 주저되기도 했지만 병원 일을 닥터 김에게 잠시 맡기고 금광회사에 가서 환자들을 진료하기로 했다.
셔우드는 지금까지 동양에 진출한 구미기업들에 대해 별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질 못했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서로 경쟁하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사례를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선입관은 운산에 도착하여 말끔히 해소되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모두 셔우드 내외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운산은 만주 국경에서 약100킬로미터에 있는 조선의 최북단 지역으로 겨울엔 영하 24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지방이었다. 운산의 ‘동양연합광업회사’에 서양 직원들이 40여 명있었고 복지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셔우드는 소년시절에 어머니와 운산광업소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는 종업원들이 혼자 와 있었는데 여러 해가 지나자 광산이 발전되었고 광산회사에서는 유능한 기술자들이 필요했다. 이 벽촌에 그들을 데려오려면 병원시설을 만들어 가족을 데려올 수 있게 해야 했다. 학교교육은 저학년 어린이들은 현지에서 미국인 선생에게 배우고 고학년이 되면 평양 외국인학교로 보내 교육을 시켰다. 회사에서는 매년 1만 5천 달러를 병원비로 사용하였고 모든 진료는 무료였다.
근무시설이 좋고 보수도 많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므로 선교할 기회가 많은 이 회사의 청빙제안을 거절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해주 결핵요양원 건립을 생각하면 복지시설이 좋다고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병원의 시설은 훌륭했다. 온갖 종류의 좋은 수술기구들이 진열장 안에 잘 보관되어 있었고 값비싼 미국산 의약품과 의료품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매리언은 수술실의 밝은 램프를 보고 몹시 부러워했다. 셔우드는 일본산 의약품만 보다가 효능 좋은 미국산 의약품을 보며 해주병원에도 이런 약을 쓰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진료실과 의료품을 보여주던 지배인은 두 의사 부부가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무척 기쁜 표정을 짓더니 해주로 돌아갈 때 수술용 램프와 주사바늘을 선물하겠다고 하였다.
미국에 가서 치료받고 있는 닥터 파워는 시골실정에 맞게 인정미를 가진 현대판 의사였다. 광산 사람들이 왜 그를 좋아했는지 곧 알게 되었다. 그는 미국사람이든 조선 사람이든 차별하지 않고 친절했고 성심껏 진료했다. 환자들을 사랑했고 그들도 닥터 파워를 사랑했다.
이 유능한 의사가 병이 나서 진료를 계속 할 수 없게 되자 의사를 구하려 해도 이곳에서는 좋은 미국인 의사를 구할 수 없었다. 닥터 파워가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고 있을 동안 셔우드 부부가 임시로라도 그의 자리를 대신해 주게 되어 마을 사람들이 이들 부부를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던 것이다.
닥터 파워는 매리언에게 흥미 있는 병증을 하나 발견했으므로 후에 자기가 조선에 돌아오면 그 환자를 수술할 때 보조해 달라고 말했다. 메리언은 닥터 파워가 속히 건강을 회복해서 돌아오길 기다렸다. 경험 많은 외과의사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환자들과 가까워지려는 데 어느새 광산병원에서의 2개월이 지났다. 닥터 파워는 회복되어 약속대로 병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러 유익한 경험과 물질적 혜택을 준 광산회사에 감사드리며 셔우드 부부는 해주로 돌아왔다. 무엇보다도 추운지방에서도 아들 월리암이 별 탈 없이 잘 지내준 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저 혼자로는 치료하기 힘든 환자들이 많이 밀려 있습니다.”
해주에 돌아오니 닥터 김이 반색을 하며 말했다. 전보다 준비가 더 잘 된 상태에서 병원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아, 여보 매리언! 드디어 요양원 건축허가가 나왔어요!”
1928년 3월, 셔우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매리언을 불렀다. 운산에서 해주로 돌아온 지 며칠 후였다. 셔우드는 춤추듯 기뻐하며 감사기도를 드렸다. 허가서에는 어린 시절 평양에서 친구였던 도지사 루터 박(Luther Park)의 서명이 있었다.
또 다른 기쁜 일이 있었다. 이종사촌 에밀리 해스킨스가 약속대로 병원에 도움을 주려고 다시 가족들과 함께 해주에 왔다. 마침 기공식을 하려고 할 때에 그들의 가족인 로버트 월리엄스 목사가 기공식 예배를 드려주고 함께 첫 삽을 떴다.
결핵요양원이란 이름을 쓰지 않고 ‘결핵환자 위생학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내 아들 셔우드, 그동안 참 수고 많았네!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야 그 꿈을 이루게 되었네!”
어머니 로제타 홀이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 정초식(건축 기초공사 후 모퉁이에 머릿돌을 설치해 공사착수를 기념하는 서양식 의식)을 해 주었다. 셔우드는 어머니가 참석해서 정말 기뻤다. 어린 시절부터 꿈 꿔왔던 셔우드의 꿈을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잘 알기 때문이다. 기공식을 마치고 어머니는 여자의과대학 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갔다.
셔우드는 요양원 건축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한정된 예산으로 원하는 건물을 지어 줄 건축업자를 만나기가 어려웠다. 기도하던 중에 우연히 중국인 업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죽은 아내를 기념하는 뜻에서 이익을 남기지 않고 건축해 주겠다고 했다. 계약서 첫 구절에 주일에는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 업자 또한 주님이 예비하신 분이었다.
일을 맡은 사람들은 모두 열심이었다. 셔우드는 만주 방식의 침실을 병동에다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소년시절(1910년) 어머니를 따라 만주횡단여행을 할 때 본 것으로 방의 한 부분을 침대모양으로 높게 만드는 것이다.
높이 쌓은 침대 돌 밑으로 부엌 아궁이를 만들어 불기와 연기가 침대를 데워주고 굴뚝으로 나가게 하는 방법이다. 침대 밑에는 여닫는 문이 있어서 더운 날은 그 문을 닫으면 불기와 연기가 바로 굴뚝으로 빠져나간다. 취사용 화력으로 방바닥과 침대를 따뜻하게 하는 이 방법은 난방과 통기의 효과가 있다. 침대가 있어 간호사들도 허리를 굽히지 않아 허리가 덜 아플 것이다. 콘크리트에 조선의 매끈한 기름종이로 바르면 따뜻하고 바닥에 틈이 없어 벌레도 접근하지 못해 위생적이다.
의료진들에게는 편리하고 환자들에게 위생적인 시설을 만들어주려고 주야로 골몰하던 어느 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닥터 홀, 성난 군중들이 공사장으로 몰려온다고 합니다.”
화진포의 성 [40]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40] / 삽화 윤광자 화가
2022년 02월 25일(금) 08:43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외국인 악귀들이 우리 조상의 묘소를 훼손했다!”
공사장에 급히 도착해보니 성난 군중들이 살기가 등등한 모습으로 모여 있었다. 험악한 몸집의 고함소리, 손에 든 돌멩이로 금시라도 셔우드를 공격할 것 같았다.
그들을 진정시키고 이야기를 들어 보니 불량한 사람들이 큰 잘못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인 업자는 요양소 건물을 돌을 사용하여 짓겠다고 설계하고 돌을 많이 사들였다. 여러 사람들이 돌을 팔려고 가져 왔는데 이 중에서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 묘소 앞에 있는 상석을 훔쳐 와서 깨뜨려 판 것이다.
셔우드는 사건의 전모를 들으며 아찔했다. 조선인들은 조상의 묘소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묘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 지내는 상석을 훔쳐 왔으니 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직접 가서 살펴보니 글씨가 새겨진 석판들이 돌무더기에 섞여있었다. 이 돌들을 중국인 업자들에게 팔아먹은 불량자들은 벌써 도망가고 없었다. 가져온 상석들도 이미 여러 조각이 나서 주인에게 돌려 줄 수 없었다.
셔우드는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깨뜨린 상석은 산소에 원상태로 복귀 해주고 위로금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돈만 아는 사람들의 몰염치한 일이지만 미리 막지 못한 잘못을 거듭 사과했다. 군중들은 셔우드의 정중한 사과에 마음이 풀렸는지 원상태로 잘 복귀해 달라고 말하고 노여움을 풀고 돌아갔다.
‘아, 이런 사실을 건축이 완공된 후에 알게 되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발견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결핵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려면 일광욕실이 필수이다. 적외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셀루 글라스(cellu-glass)라는 특수한 재료를 썼다. 자외선 투과유리(vita)를 사용하면 적외선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지만 셀루 그라스는 내구성도 강하고 값이 저렴하여 환자들이 쓰기에 부담이 없다. 퇴원해 집으로 돌아가서도 요양소에서 배운 방법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셔우드는 조선인들이 외국인처럼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단지 그들에게 서구의 지식을 배우게 해서 자신들의 생활방식에 이용하게 해주고 싶었다.
‘동양과 서양의 좋은 점들을 취사선택하여 자기의 것으로 활용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도…….’
건축자금이 넉넉지 않아 중앙관과 병동사이에 연결된 일광욕실을 하나 밖에 지을 수 없다. 더 필요한 공간은 건축 비용을 줄이기 위해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짓기로 했다.
중국인들은 돌을 다루는 일에 능숙하고 조선인들은 흙과 목공일에 우수한 재능이 있었다. 그 인부들을 다룰 때 소년시절, 어머니의 병원 짓는 감독을 했던 일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경험은 평생의 유익한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에서 ‘간호’라는 개념은 비교적 새로운 개념이었다.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이 1903년 마거리트 에드먼드 양이 해외여성선교회의 후원으로 평양에서 처음으로 간호사 양성소를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조선어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없었다. 어느 학식 높은 조선 어르신이 선교사들을 위해 간호원(看(덧말:간)護(덧말:호)員(덧말: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이 말은 병자를 보호하고 돌봐준다는 뜻이었다. 1906년에는 쉴즈(E. L. Shields) 양이 서울 세브란스에 간호사 양성소를 만들었는데 이때도 에드먼드 양이 도와주었다. 그렇게 하여 평양과 서울, 두 곳에 간호학교가 생겼으나 간호사 수가 많이 모자랐다. 당시 조선의 관습은 여자를 교육시켜 모르는 남자나 여자의 병을 수발들게 하는 직업은 나쁜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양원 병동에는 침대 두 개마다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이 사용할 독립된 부엌이 하나씩 있도록 설계해야 했다.
병원 건축에 관한 제반 문제도 신경을 써야했지만 의료품과 의약품의 구입하는 일에도 심려를 기울여야했다. 셔우드는 이 물건들을 관세 없이 통관 시킬 수만 있다면 많은 경비를 절약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통관 교섭을 시작했다. 의료기구와 용품은 일본 관리의 담당이었고, 의약품은 조선관리가 담당했다. 이 두 통관 절차를 허락 받기위해 명함도 일본 글씨와 한자 한글을 함께 쓴, 두 개의 명함을 만들었다.
먼저 일본 관리를 찾아가 의료품을 관세 없이 통과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고마움을 모른다고 많은 불평을 하며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당신과 나는 조선을 도우려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가 셔우드의 말에 동조를 하였다. 천연두 퇴치 등 일본의 위생 보건 활동에 대한 공적을 높이 치하하고 통관을 허락해 달라고 공손하게 부탁 했더니 그 관리는 숨을 크게 몰아쉰 후 서류에 ‘무관세 통관’이라는 관인을 찍었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이번에는 의약품을 담당한 조선인 관리를 찾아갔다. 조선인 관리는 품위도 있고 덜 의례적이었다. 인본인 관리처럼 긴장한 목소리도 아니고 사무실 옆방에 방석을 깔고 앉게 한 뒤, 찾아 온 용건을 물어 분위기도 편안했다. 일본에 대한 불만을 한 참 터뜨린 그 관리는 의외의 말로 셔우드를 놀라게 했다.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비싼 서양 의약품을 수입합니까? 우리 조선 의약품은 오래전부터 효능이 입증 되었습니다. 이를 테면 호랑이발톱, 표범담즙, 뱀으로 만든 약들 보다 효능이 좋은 것을 어디서 구한답니까?”
셔우드는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 태연하게 말했다. 자신도 서울에서 태어났고 조선에서 자라 그 같은 효능을 알고 있으나 이 약품들은 치료효과와 용도가 다르니 조선 사람들의 병 치료를 위해 통관시켜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였다. 결국 그 조선 관리도 서류에 ‘무관세 통관’이라는 관인을 찍었다.
‘휴, 이제 하나하나 해결이 되어 가는 구나!’
셔우드는 관청을 나오며 긴 숨을 내 쉬었다.
요양원 건축공사와 그에 필요한 부수적인 일들이 차근차근 이루어져 갔다. 때 마침 어머니 닥터 로제타의 오랜 숙원사업인 여자의학교 설립의 꿈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1928년 9월 4일 조선에서 최초로 경성여자 의학전문학교가 설립 된 것이다. (이 병원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다.)
로제타가 설립한 이 학교의 교수진이나 직원들은 모두 무료봉사를 자원하였다. 훗날 학교가 계속 발전하여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자 조선 사람들 스스로 경제적인 지원을 맡아주었다.
요양원 건물은 그해 9월에 완성되었다. 셔우드는 구불구불 휘어진 푸른 소나무 숲속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요양원 건물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멀리 앞 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고기잡이배들의 평화로운 모습은 환자들이 휴식하고 병을 회복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이루어 주셨음을 알았고 그 감동은 말로 표현 할 수 가 없었다.
‘해주결핵 요양학교’의 공식 개교식은 1928년 10월 28일로 정했다. 이 학교의 봉헌식은 웰치 감독의 후임으로 조선에 온, 제임스 베이커 감독이 맡아주기로 했다. 노블 목사, 빌링스 박사를 비롯해서 도지사 루터 박, 일본 관리 대표로 온 사사키 경찰국장 등 많은 내빈들과 함께 셔우드와 메리언도 나란히 개원 축하테이프를 끊었다.
닥터 김이 요양원 건립경위를 발표하였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오(Oh. K. S)학장은 요양원이 조선에서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 일인지 연설했고, 베이커 감독은 해주남산에서 시작한 이 요양소를 1885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사라락 호숫가에 결핵요양소를 세운 트뤼도 박사의 요양소와 비교해서 연설했다. 결핵으로 고통 받는 조선의 결핵 환자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막이 열리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닥터 에스더 박 같이 그렇게 큰 뜻을 가지고도 비참하게 목숨을 잃는 일이 없길 바랐다.
환자들이 기본적인 생활용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요양원 상점의 선반에 일회용품을 진열했다. 해주 시장이 이것을 보고
“아하, 의료품이나 일회용품을 여기서 구입할 수 있으니 환자들이 시내로 나오지 않아 시민들에게 전염을 예방하게 되는 군요.”
셔우드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제야 그들이 자신의 뜻을 조금씩 이해 해 주는 것 같아 기뻤다. 현재 완성된 동쪽 건물과 같은 모양으로 지어질 별관 건물은 토목기사로 만주 신천에서 선교사로 있는 에드웬 캠벌이 설계하기로 했다. 본관 건물도 그가 설계한 것으로 앞으로 지어질 부수적인 건물에 대한 청사진도 제시했다. 별관 한 채를 짓는데 약 8백 달러의 건축비가 필요한데 별관이 지어지면 입원실로 쓰고 입원비로 왜래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해 줄 계획이었다.
처음 3주는 세 명의 여성 환자가 입원했는데 한 달이 지나자 전국에서 입원하겠다는 사람들이 쇄도하여 입원실이 부족하였다. 11월이 지나자 난방비로 운영비가 계속 적자가 되었다. 겨울은 지낼 난방비 걱정을 하고 있는데 가뭄 속에 단비 같은 반가운 소식이 왔다.
화진포의 성 [41]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41] / 삽화 윤광자 화가
2022년 03월 07일(월) 09:38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미국에서 난방비 후원금이 도착했습니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 요양원 환자들을 춥지 않게 하려고 밤을 새워가며 미국의 친지나 친구들에게 난방비 후원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 난방후원금을 보내 준 것이다. 때마침 평양의 선교기관에서 난방기구가 들어왔는데 크기가 맞지 않아 요양원에서 필요하다만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추위가 오기 전에 난방문제가 다 해결되었다.
어느 날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데 뜻밖의 방문객 해주 시장이 진료실로 왔다. 요양원 설립을 반대했고 선교 사업이 ‘해주의 적’이라고 말하던 그가 요양원에 온 것이다.
“시장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시장은 주위를 살피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셔우드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닥터 홀 선생님, 우리 아들 때문에 왔습니다. 아이가 요즘 기침을 많이 하는데 혹시나 결핵에 걸리지 않았는지 진찰해 주십시오. 저 … 만약 결핵에 걸렸다면 여기에 입원시켜 치료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장은 두려운 목소리에 면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진찰 전인데요. 만약 결핵에 감염 되었다면 정성을 다해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진찰을 하는 동안 시장은 안절부절 하며 몹시 초조해 하였다.
진찰 결과 시장의 아들은 예상대로 결핵에 감염되었으나 다행히 초기였다.
“입원실이 많이 부족하지만 아드님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시장 아들은 요양원 규칙에 잘 따랐고 치료에 좋은 반응을 보여 상당히 효과가 빨랐다. 얼마 후, 통원치료를 할 만큼 좋아졌다. 셔우드는 퇴원 후에도 소년이 완치 될 때까지 정성껏 돌봐주었다.
“선교사 선생님께서 옛 감정을 잊어버리고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니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몇 달 후, 시장은 지역 유지들의 야유회에 셔우드와 요양원 의사들을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병든 동포들의 생명을 살려주는 요양원 건립을 반대 했던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자신들이 도울 수 있는 일은 적극 돕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반대하였던 요양원 도로확장 허가를 해주었고 도로건설에 보태 쓰라고 135달러를 희사하기까지 했다. 많은 분들이 사랑의 기부금을 보내왔다. 감동의 물결이었다.
요양원 입원환자들에게 병을 완치시키는 과정을 이해시키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기침을 안 하고 얼굴 혈색도 좋아져 병이 나은 것처럼 보여도 결핵균이 잠복해 있어 언제 재발 될지 모른다고 말해도 다 나았다며 집으로 가고 싶어 했다.
그런 환자 중에 대표적인 환자가 ‘형’이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 형이가 요양원에 처음 왔을 때는 중환자였다. 높은 열과 심한 기침, 매일 한 컵이나 되는 가래를 토해냈다. 다행히 왼쪽 폐는 정상이었다. 치료효과가 좋고 회복도 빨랐다. 체중이 늘고 기력도 회복하여 본인도 새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하였다.
형이는 향수병에 걸려 퇴원하겠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수고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고 만류했지만 그는 끝내 고집을 부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몇 달이 지난 후 병이 재발해 다시 입원시켜 달라는 연락이 왔지만 입원실이 없어 기다리는 사이에 그는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이 같은 일들은 비일비재 하였다.
그렇게 죽어가는 환자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아파하는 셔우드에게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요양원에서 농장을 만들어 운영하면 회복기의 환자들이 무료하지 않고 소득도 생길 것이다. 위생교육과 현대식 영농방법을 교육한다면 완치하고 고향에 돌아가 현대식 영농기술자가 될 것이다. 농장뿐만 아니라 모범 촌락을 만들어 환자들이 깨끗한 주택에서 계몽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주면 금상첨화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극적으로 요양원에 인접한 곳에 3만평의 비옥한 과수원 땅을 구입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 이 과수원을 운영하던 젊은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아 아들을 생각나게 하는 과수원을 처분하고 싶어 했고 아주 싼 가격으로 사라고 요양원에 제의를 해 왔다. 마침 해롤드 윌리스 무어를 추모하는 기념으로 유용하게 쓰라고 보내온 돈이 있어 농장을 마련할 땅을 사게 되었다.
1929년 겨울, 서쪽 건물과 여성 전용 별채를 지을 후원금이 선물처럼 마련되었다. 이 여성 전용관은 어머니 닥터 로제타와 그 친구 분들이 보내준 소중한 후원금으로 지어졌기에 여동생 이름을 따서 ‘에디스 마거리트기념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미경이나 엑스레이 촬영기계, 단체 일광욕을 시키는 최신식 의료기구들이 기부에 의해 도착 될 때마다 셔우드 부부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이 요양원은 조선 사람들의 생명을 사랑하는 분들의 정성으로 만들어 진 ‘사랑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핵 위생학교’로 시작한 해주 결핵 요양원은 조선의 결핵환자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장소로 변하고 있었다. 조선의 재력가 중에 결핵병이 든 환자가 요양원에서 병이 완전히 나은 후 별채를 지어 기증하는 일도 있게 되었다.
셔우드 부부는 어느새 5년의 임기가 끝나 안식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침 운산 미국금광에 의사로 있는 닥터 어니스트 이바스 부부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의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식년 동안 병원을 돌봐 주겠다는 것이었다.
셔우드 부부는 감사하며 병원과 요양원을 사교성 많고 활달한 닥터 이바스와 직원들에게 맡기고 1930년 6월 해주를 떠났다.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해 뉴욕으로 갔다.
미국에 도착하니 슬픈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큰 힘이 되었던 후원자 울버턴 여사가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애도의 마음으로 추모를 드리고 새로운 사촌 그레이스 해스킨스를 찾아갔다. 그녀는 선교사 생활비 일부를 후원하겠고 자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빙엄턴 테버너클 감리교회에 후원을 부탁하겠다고 하여 가슴이 뭉클하였다.
셔우드는 필라델피아에서 대학원에서 결핵학 연구로 명성이 있는 ‘헨리 핍스 연구소’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매리언은 뉴욕의 대학원에서 외과진료에 대한 특별한 연수를 받게 되었다. 공부하는 틈틈이 여러 교회를 방문하여 선교활동에 대한 보고와 강연을 시작했다.
어느 날 강연이 끝나자 한 신사가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미국결핵협회’ 뉴욕본부에서 재직하고 있는 필립 제이콥스(Philip.P. Jacobs)였다. 제이콥스는 ‘대중에게 결핵을 잘 알려주는 방법’ 이라는 제목으로 본부에서 강연을 준비하는데 셔우드에게 관심이 있으면 참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도움이 될 두 사람을 소개하고 소개장까지 써 주었다.
“한 분은 미국의 큰 신문사인 <노스 아메리칸>의 편집자인 미첼 핫지스(Leigh Mitchell Hodges)이고, 한 사람은 에밀리 비셀(Emily P. Bissell) 양인데 이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씰 아이디어를 미국에 소개한 주인공들입니다.”
크리스마스 씰은 지금 결핵협회의 주 수입원이고 연 5백만 달러나 모금 되며 씰 운동은 미국의 결핵 환자들을 감소시키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다.
셔우드는 제이콥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뛰었다.
‘아! 이 크리스마스씰 운동을 조선에서도 펼칠 수 있을까?’
며칠을 골똘히 생각하며 월밍터에 사는 비셀양을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연히 셔우드가 월밍터 교회로 강연을 하러 가는 일정이 잡혀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어떻게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 할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우리 집 근처에 작은 결핵요양원이 하나 있었어요. 운영자금란으로 항상 허덕여 요양원 문을 닫아야할 지경에 이르렀지요. 어느 날 제이곱 리스라는 분이 기고한 글을 읽고 <노스 아메리칸>의 핫지스 씨를 찾아가 이 아이디어를 전해드려 성사가 되었지요.”
그 글의 내용은 덴마크의 한 우체국 직원이 편지를 배달하다가 우표를 보고 착안한 것을 쓴 글인데 결핵환자를 돕는 씰을 만들어 카드에 우표와 함께 붙여 보내면 작은 돈으로도 결핵예방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는 착안이었다.
이 착상은 덴마크 국민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어 전국에 번졌다. 그 결과 요양원은 문을 닫지 않게 되었고 덴마크는 결핵으로 인한 사망률이 전 세계에서 제일 낮아졌다. 비셀 양은 그 기사를 핫지스 편집장에게 전하였고 이 기사가 큰 호응을 얻어 미국에서도 크리스마스 씰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셔우드는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설레었다. 조선에서도 크리스마스 씰 발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씰 디자인, 인쇄방법, 보급에 대한 강의를 모두 듣고 당시 발행되고 있는 여러 나라의 씰도 거의 다 수집했다.
“셔우드, 어느새 안식년 휴가가 끝나고 있어요. 빨리 조선으로 돌아가 새로 배운 의술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싶어요.”
매리언의 말에 셔우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에 빨리 돌아가고 싶어 지름길이라는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육로를 택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화진포의 성 [42]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42] / 삽화 윤광자 화가
2022년 03월 31일(목) 10:06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안식년이 끝나고 조선에 빨리 돌아가고 싶어 지름길이라는 대륙을 횡단하는 육로를 택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1931년 가을, 베를린에서 간단한 소지품을 구입한 후 소련으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소련은 경제가 어려워 옷감이 부족해 짧은 치마를 입었고 한 덩어리의 빵을 사기 위해 긴 행렬의 줄을 선 모습이 보였다.
레닌그라드 역은 삭막하고 황량했다. 도난 사고도 많아 잠시라도 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련 땅에 도착하여 사람들이 웃는 얼굴을 만나보지 못했다.
여행경비를 현찰로 많이 가져가지 말라는 여행사 직원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잘못이었다. 지갑의 현금도 거의 바닥이 났다. 시베리아 평원을 지나 영국인 여행자 두 명을 사귀었다. 그들은 우리를 조선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지켜 준 천사였다.
만주에서 러시아 루블로 돌려받은 여행 경비를 소련관리에게 모두 빼앗겼고 설상가상으로 여권에 문제가 생겨 매리언과 월리암은 소련 변경에 남아야 한다고 하였다. 모스크바 관리들이 실수하여 매리언과 월리엄의 여권에 도장을 찍지 않은 것이었다. 소련 관리들은 막무가내로 두 모자를 남겨두고 셔우드만 떠나라고 했다.
다급해진 셔우드는 여행국에 있는 친구가 생각났다. 그에게 연락하여 상황을 말하고 여권에 도장을 찍지 않은 것은 소련관리들의 실수라고 했다. 여행국 친구가 와서 자초지종을 듣고 이 모든 사실을 상부에 보고 하겠다고 했더니 그들의 태도가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한바탕 말씨름이 끝나자 그들은 마지못해 만주로 가도 좋다고 하였다.
영국인 친구들은 국경선을 통과했는데 셔우드 가족이 오지 않아 사고가 생겼는지 알아보려고 소련 경계로 들어오려다 경비병들이 막아 엉거주춤한 상황에서 셔우드를 보고 소리쳤다.
“빨리 표를 사세요! 빨리요! 시간이 없어요!”
“아, 표를 살 돈이 모자라요!”
키 큰 영국 사람이 돈을 꺼내 주어 겨우 3등석 기차표를 끊어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얼마 후 알게 되었지만 그 때 그 기차를 놓쳤으면 아주 큰일을 당할 뻔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것이다. 만주 사변은 1931년 9월, 일본이 중국 둥베이 지방을 침략한 전쟁으로 중일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그 기차를 마지막으로 소련과 만주를 연결하던 기차는 한동안 운행되지 못했다. 기차를 지키고 있던 군인들은 그날 밤 많은 사람들을 총살하려고 했고 영국인 친구들은 기차를 탄 후에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이 몹시 어두웠었다. 셔우드 가족을 1등석으로 불러 차를 마시자고 했는데 만일의 경우 밖을 내다보다가 매리언과 월리엄이 놀랄까봐 커튼이 있는 1등석으로 오게 하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은 때론 생사를 같이 하는 형제 같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만주의 중심지 목단(지금의 선양)에 도착하니 거리마다 일본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다리가 폭파되고 뒤로 오는 기차는 모든 운행이 정지되었다. 강심장인 매리언도 이번 일에 놀라서 한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구사일생의 어려움을 헤치고 열차는 평양으로 달렸다. 선교사 쇼 목사에게 마중을 나와 달라고 전보를 쳤는데 평양역에 쇼 목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무사히 도착하게 해준 고마운 영국친구들에게 사례하고 깊은 감사를 전했다.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여러 번의 위기를 모면하고 돌아오자 전쟁터에서 살아 온듯 감사했다.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주변 모든 사람들을 천사로 보내주시는 도우심의 손길을 느꼈다.
해주에 돌아오자 많은 사람들이 반가워했다. 닥터 이바스와 직원들의 노력으로 요양원에는 별채가 두 채나 더 세워져 있고 병원도 안정되어 있어 기뻤다.
‘이제 안식년 휴가 때 계획했던 크리스마스 씰 운동을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셔우드는 크리스마스 씰에 대한 의견들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타진해 보았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구에서는 성공할지 몰라도 조선에서는 절대로 가능성이 없다고 부정적으로 단정하기도 했다.
“너무나 서구적이라 조선 사람들에게는 생소합니다.”
“우표는 원래 외국 것이었는데 이제는 조선에서도 도시나 벽촌에 보편적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체국 통계에 의하면 신년카드를 보낼 때 팔리는 우표가 8만 달러가 넘고 매년 1만 달러 이상 증가 한다고 합니다.”
곧 서울에서 선교사 회의가 열리는데 셔우드는 그 때 씰에 대한 계획을 추진할 기회가 오리라 믿었다. 씰의 그림을 여러 가지로 도안 해 보았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정부로부터 크리스마스 씰 발행 허가를 받기 위해 평소에 친분이 있 있는 일본 관리 오다 야스마츠를 만났다. 그는 외무성에 근무하였고 영국담당이었는데 셔우드에게 협조적이었고 크리스마스 씰에 대한 생각도 긍정적이었다.
셔우드가 최초로 도안한 그림을 보여주자 그는 한마디로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씰의 그림을 조선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는 거북선 모양으로 고안했던 것이다. 현재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일을 고려하지 못했다.
“일본과 조선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도안을 새로 만들어 오시지요.”
오다 야스마츠는 점잖게 말했다.
셔우드는 씰의 도안을 서울의 남대문으로 바꾸었다. 남대문은 조선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그림이다. 이것은 조선의 방위를 나타내므로 남대문 도안은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라는 의미도 담았다.
드디어 첫 번째 씰 도안과 씰 캠페인에 대한 허가가 일본 관청에서 나왔다. 오다 씨가 성심껏 도와 준 덕분이기도 했다.
1932년 가을, 황해도 도지사를 찾아가 크리스마스 씰 보급에 대한 목적을 이야기 했다. 서양에서 소박하게 시작한 이 운동이 많은 결핵 환자들을 치료하고 결핵 퇴치의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지사는 이 운동을 후원해 주었다.
해주시청에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한 후 씰을 소개하고 크리스마스 씰 후원회를 만들었다. 도지사는 명예회장이 되고 셔우드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위원회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조선의료선교협회(Korea Medical Missionary Association )에 크리스마스 씰의 보급을 담당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선교병원 중 결핵병동을 가진 병원이 여러 곳 있었으나 전국 결핵협회는 아직 발족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씰 운동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보급 운동을 막 시작하려 할 때 관청에서 갑자기 허가 상에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며 바로잡을 때까지 활동을 정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가슴이 철렁해진 셔우드는 다시 도지사를 찾아갔다.
“아마 기술상의 문제가 있는 가 봅니다. 제게 맡기십시오. 제가 알아보고 해결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좋은 동기로 결핵환자들을 고쳐주려고 일하는데요.”
셔우드는 도지사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나오며 존경받을 참 멋진 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도지사의 노력으로 다시 허가가 나와 다시 보급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 고비를 넘었나 했더니 또 어려운 고비가 닥쳐왔다.
“그 미친 짓 같은 크리스마스 씰 사업을 왜 펼친다는 것입니까?”
“이 사업에 실패하면 누가 돈을 상환 해 준답니까?”
“당신은 그 것 말고도 병원, 학교, 요양원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이 많을 텐데 일을 자꾸 벌여 놓으면 어쩝니까? 이 일 때문에 의료선교 일까지 타격 받게 되면 당신 가족들은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조선인, 서양인 친구들까지 합세하여 크리스마스 씰 보급 운동을 반대하였다.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정신이 번쩍 들게 할 기쁜 소식이 있었다. 매리언이 임신을 한 것이다. 임신 중에도 매리언은 환자를 치료하였고 셔우드도 학교, 병원, 요양원 일과 틈틈이 크리스마스 씰 보급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32년 10월 8일 매리언은 둘째 사내아이를 낳았다. 여러 사람들이 축하해주고 월리엄은 남동생이 생겨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였다. 외할머니 이름을 따라 죠셉 케이틀리(Joseph Keightley)라고 이름을 지었다.
둘째가 태어나고 안정이 되자 잠시 중단했던 크리스마스 씰 캠페인에 다시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씰 위원회에서는 의사 3명, 목사 2명, 평신도 2명 모두 일곱 사람을 홍보대사로 임명하여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며 이 운동의 의미를 전달시키는 사명을 맡겼다. 이들은 모두 자원한 사람들이었다. 뉴욕에서 제이콥스는 크리스마스 씰의 보급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시간을 맞추는 것’이라고 하였다. 크리스마스가 돌아오기 전에 이 씰이 붙은 카드나 편지를 받아 보게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어려움 끝에 조선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이 남대문의 얼굴을 달고 1932년 12월 3일에 발행 되었다.
‘아, 드디어 조선에서도 크리스마스 씰로 결핵퇴치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