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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사탕]
2010. 12.
시나리오
청포도 사탕 Grape Candy
각본/감독_ 김희정 Kim Hee-Jung
1-파도 치는 절벽 끝
날이 흐리다. 파도도 거세다.
절벽 아래 파도를 보고 있는 두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 주위엔 아무도 없다.
파도만이 이들을 집어 삼킬 듯이 움직이고 있다.
파도를 바라보는 겁에 질린 선주의 표정과 경이롭게 바라보는 소라의 표정.
소라가 순간 선주를 향해 뒤 돌아 본다.
슬로우의 느낌으로.
무언가를 묻는 듯한 표정.
선주, 질문을 외면하듯이 뒤 돌아 절벽 위 난간으로 걸음을 옮긴다.
엄청나게 울려 대는 파도소리 그 위로
제목 뜬다
청포도 사탕
2-아파트, 욕실 _아침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선주의 얼굴이 보인다. 선주는 손빨래를 하고 있다.
욕조에 받아놓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지훈: (밖에서) 쭈~ 늦겠다. 왠 아침부터 빨래야? 추워 죽겠는데…
선주는 이미 출근할 차림으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스타킹에 물이 튀어 스타킹을 벗는 선주, 세면대를 잡고 벗다가 미끄러질 뻔 한다.
깜짝 놀라 소리 지르는 선주, 이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미지/
온동장에 있는 수돗가에서 양말을 벗고 씻다가 넘어질 뻔 하는 체육복을 입은 어린 선주.
옆에 서 있던 누군가 선주를 잡아준다.
그 아이를 향해 웃어 보이는 선주, 이때 옆에서 누군가 선주에게 물을 뿌린다.
선주: 아, 차거!
3-지훈의 차 안
운전석 옆에 앉은 선주의 얼굴이 보인다.
갑자기 운전하는 지훈의 손을 와락 잡는 선주.
지훈: 아 차거~
선주: (웃음) 아, 따듯해~
지훈: 왜 안 하던 짓을 해? 아침에 늦는 거 싫어하잖아.
선주: 응, 모르겠네. 그냥 빨래가 하고 싶었어.
지훈: (창 밖을 보며) 추위가 안 가신다. 그냥 봄 기다려서 식 올릴 걸 그랬나 봐.
선주: 난 괜찮아. 하루라도 빨리 해야지.
지훈: (장난기 있게) 왜? 내가 도망갈까 봐?
선주: 도망 갔단 봐!
지훈: 그렇게 내가 좋아?
선주: (웃으며) 징그러~
지훈: (엉뚱하게) 그래, 나도 자기만큼 좋아~
선주: 벌써 삼십대야 우리, 언제까지 애가 아니라구. 애기도 가져야 하구.
선주, 얘기해 놓고 살짝 지훈의 눈치를 본다.
지훈: 넌 어떻게 우리 엄마랑 똑 같은 말을 하냐?
(느닷없이) 저녁에 스테이크 먹고 들어가자. 갑자기 땡기네.
선주: (반색하며) 오늘 저녁? 시간 돼?
지훈: 응, 내일부턴 계속 야근해야 돼. 새 장편 데드라인도 정해졌고.
당분간 너 사랑하는 약혼자 얼굴 보기 힘들어질 거다.
선주: 난 오늘이 야근인데… 괜찮아 은지씨한테 부탁해야겠다.
선주, 웃으며 지훈의 팔에 얼굴을 기댄다.
선주: 근데 이번엔 작가가 누구야?
지훈: 은소라라고, 요즘 잘 나가는 작가야.
선주: 은소라?
이때 지훈의 차 옆으로 아이를 태운 차가 지나가는데 네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창에
얼굴을 대고 선주를 향해 웃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창에 아이가 만든 입김이 번진다.
그 모습을 보고 절로 웃음이 나는 선주.
4-은행 휴게실 안_ 아침
선주와 통통한 체구의 은행동료 은지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있다.
선주는 거의 다 입은 상태로 옷 매무새를 만지고 있고, 은지는 이제 막 입는 중인데 영 속이
안 좋은 얼굴이다.
선주: 무슨 술을 또 그렇게 마셨어?
은지: 아휴~ 말도 마. 고등학교 때 제일 친한 애가 잠깐 한국에 들어 왔거든.
영지라고 왜 내가 말 안 했나? 은지, 영지 이름 땜에 친해졌다고.
암튼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어쩔 수 없었어.
곧 호주 들어가봐야 한다고 해서 환영주 겸 이별주 겸 그렇게 마셨지.
선주: 호주? 친구가 거기 살아?
은지: 응, 워킹비자 받아서 일하러 들어 갔다가 거기 남자 만나서 결혼했어..아니 했었어.
선주, 은지를 본다. 은지 웃옷을 팔에 끼다 말고 선주에게 돌아서서
은지: 그러게, 내가 걔 가자마자 결혼 한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일하러 간 거지 결혼하러 갔냐고? 불 같은 사랑이네 죽고 못 사네 하더니
결국 일년도 못 되서 이혼하는 거 봐.
은지, 선주를 똑바로 보며 심각하게
은지: 근데 말이야, 참 이상한 건 영지말로는 걔 이혼하고 나서 일주일 동안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더래. 너무 충격적이라서 그런 건지
아무튼 처음엔 자기가 이혼한 사실도 왜 그 영화 같은 거 보면 화면이 까매지는 거
그런 거처럼 까맣게 기억이 안 나더란다..
선주: 그게 가능해?
은지: 글쎄, 전혀 아무 기억이 없대. 그것도 일주일이나.
선주: 그래? 그런 일도 있구나…왠지 소설 같다.
은지: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더라고!
은지 나머지 치마를 갈아 입으며
은지: 사실 걔 호주로 정한 것도 다 내가 정해 준거거든, 아웃백이 그렇게 가고 싶은데
난 못 가니까 걔가 나라 고민 할 때 내가 적극 민 건데 에이, 속상해서!
내 책임이 크다.
선주: 그게 뭐 자기 책임인가?
은지: 그래도, 그런 기분이 들어. 아후, 머리야~
선주: 어쨌든 술을 좀 줄이셔.
은지: (정색을 하고) 안돼!
선주, 은지를 보면
은지: 줄이는 건 안돼. 끊어야 돼.
선주: 맨날 그 소리. (시계를 본다) 과장님 오시기 전에 얼른 들어가자.
은지: 아휴~ 누가 에프엠 아니랄까 봐, 못 말린다. 아직 시간 안 됐어.
선주: 나 먼저 간다.
선주, 나간다. 은지, 툴툴거리며 따라간다.
5-은행창구
선주가 대학신입생으로 보이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듯한 여자고객을 상대하고 있다.
선주의 얼굴은 친절하고 상냥하다.
선주: 신분증이랑 통장 좀 주세요.
여자, 가방 안에서 통장을 찾는데 잘 안 찾아지는지 허둥지둥 가방 안의 물건을 끄집어 내기
시작한다. 선주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 어디 갔지’ 중얼거리는 여자.
선주: 천천히 찾으세요.
화장품지갑에서부터 핸드폰, 노트와 책 한 권도 따라 나오는데 선주는 그 책을 유심히 본다.
은소라 단편소설집 ‘이어 달리기’. 여자는 겨우 통장을 찾아 선주에게 내민다.
선주, 친절하게 통장을 받는다.
선주: (친절한 관심) 그 책 재밌어요?
여자: (명랑하게) 예? 아, 볼 만해요. 아직 다 못 읽었는데 여자들이 이해할 만한 그런 얘기들이에요.
선주: 연애얘기 같은 거요?
여자: 아니오, 학창시절 얘기 뭐 그런 거요.
선주, 여자의 얘기를 들으며 통장과 신분증을 보며 일을 처리한다.
여자: 저, 제 이름으로 현금카드 처음 만드는 건데 기분이 쫌 이상해요.
선주: 그래요? 축하해요.
선주, 서랍에서 포장되어 있는 머그컵을 꺼내 여자에게 내민다.
선주: 원래 사은품으로 드리는 건데 특별히 드릴게요.
여자: 우와~ 고맙습니다.
뜻밖의 선물에 아이처럼 웃는 여자를 보며 웃어 보이는 선주.
6-출판사 율
커피를 사 들고 도넛을 입에 물고 들어오는 지훈, 박팀장이 자기 책상에서 지훈을 부른다.
박팀장: 밥 맛있게 먹었냐?
지훈: 먹고 있잖아요.
박팀장: 그런 도너츠가 밥이 되냐? 그러니까 나랑 꽁치찌게 먹자니까.
지훈: 지겹지도 않아요? 일주일 내내!
박팀장: 넌 커피가 일주일 내내 마신다고 질리디?
지훈: (딴청) 바빠서 들어가요~
박팀장: 참, 너 결혼선물 갖다 놨다, 네 책상에.
지훈: 뭐 벌써요?
박팀장: 낮에 진영엄마가 시내 나온 김에 실어왔어.
지훈: 아휴~ 또 형수네 가게서 뽀리쳤죠?
박팀장: 뭔 상관이야? 좌우간 제수씨가 좋아한다는 걸로 갔다 놨어.
지훈: 암튼 감사요~
박팀장, 손으로 꺼지라는 시늉을 하면 지훈 키득거리며 자신의 데스크로 간다.
책상 앞에는 샤갈의 ‘생일’그림이 넣어져 있는 액자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누군가 그 그림을 유심히 보고 있다.
긴 파마머리 여자의 뒷모습. 지훈, 그 여자의 뒷모습을 살펴본다.
여자가 뒤 돌아보면 지훈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인다.
7-김밥집_ 점심시간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뭐가 좋은지 깔깔거리며 김밥을 먹고 있다.
옆자리에는 선주가 40대인 김과장과 동료 은지와 점심을 먹고 있다.
김과장: 쟤네는 뭐가 저리 좋대니?
은지: 저 때는 구르는 낙엽만 봐도 웃는대잖아요.
김과장: 좋을 때다. 쟤네는 교복만 입고 안 춥나?
은지: 신경 좀 끄시죠, 그러다 오해 사요~
김과장: 오해는 무슨 개뼈따귀같이.
은지: 과장님! 그 개뼈다귀 라는 말 저한테만 하시죠?
김과장: 아, 댁이 그런 말 듣게 하잖아.
은지: 으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김과장: (선주에게 친절하게) 결혼준비는 잘 돼 가?
선주: 예, 뭐. 그냥 천천히 하고 있어요.
은지: 천천히~ 무덤으로 갈 준비를 하고 계시는군.
김과장: 오은지씨는 왜 맨날 삐딱해? 무덤이라니? 결혼도 안 한 사람이.
은지: 전요. 돈 많이 모아서 세계일주 하면서 살 거에요, 독신으로다가!
(선주에게) 자기도 늦기 전에 다시 잘 생각해 봐. 응?
선주: 난 세계일주보다 결혼이 더 좋은데?
은지: 야~ 치사하다.
김과장: 괜히 심심해지니까 그러지? (은지에게) 왜 베스트 프랜드가 시집을 간다니까 배 아파?
은지: (살짝 약 올라서) 아니 과장님은 왜 베프끼리 밥 먹는 자리에 눈치 없이 끼고 그러세요?
김과장: 왜 이래~ 나도 가끔은 김밥이나 떡볶이 같은 게 먹고 싶을 때가 있다고,
아저씨라고 맨날 해장국만 먹으러 다니는 거 아니거든.
김과장 웃는다. 은지가 물을 가지러 일어난다.
여고생들이 밥을 다 먹고 일어나 선주 옆을 지나가다가 선주를 친다.
여고생: 죄송합니다~~
옆의 친구들이 킬킬거리며 웃는다. 선주, 나가는 여고생들을 쳐다본다.
그 중의 한 명이 빨간색 물방울 무늬가 있는 머리띠를 하고 있다.
김과장: (선주 접시에 빼져 있는 당근을 보며) 근데 이대리는 당근 안 먹나 봐?
선주, 쑥쓰럽게 웃는다.
은지가 물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온다.
은지: 남은 당근은 원래 제가 먹는데요, 오늘은 속이 안 좋아서 패스했어요~
8-회의실 안
소라가 회의실 창 밖을 보며 담배를 피고 있다.
동그런 눈에 풍성한 갈색 곱슬머리를 한 소라는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띠는 스타일이다.
거기에다 뭔가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왠지 차가워 보이는 소라의 얼굴.
소라는 생각에 잠긴 체 엄지 손톱으로 자신의 눈썹을 문지른다.
이때, 지훈의 핸드폰이 울린다.
소라는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재떨이에 담배를 끄다가 지훈의 핸드폰을 본다.
액정에는 ‘우리 쭈’ 라고 표시되어 있다. 잠시후 전화는 끊어진다.
지훈이 자판기 커피를 들고 들어 온다.
지훈: 여깄습니다~ 자판기커피라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소라: (커피를 받으며) 전화 오는 거 같던데.
지훈: 아, 그래요? (전화기를 들어 확인하고 주머니에 넣는다)
소라: 누구 전화에요?
지훈: 예? 아~ (웃는다)
소라: 애인?
지훈: 뭐, 그런 셈이죠.
소라: 왜 말을 흐려요? 그런 거면 그런 거지, 그런 셈은 뭐야? 남자들 가끔 그러더라.
지훈: 하하 미인 앞에선 그러죠 남자들.
소라: 그런 거 별루에요. 매력 없어.
지훈: (소라의 얼굴을 보며) 은작가님은 참 말씀을 대놓고 하세요. 그렇게 안 생기셨는데.
소라: 역시 생긴 거 보고 판단하는구나~
지훈: (농담으로 받아서) 예, 저 겉모습 보고 사람 판단하는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은작가님이랑 작업하죠.(웃음) 근데 은작가님 작품은 의외로 작가님보다
좀 더 부드러운 거 같애요.
소라: (지훈을 보다가) 부드러워요?
지훈: 예?
소라: 애인 말이에요.
지훈: 아~ 예, 착해요. 그럼 작품 얘기할까요?
지훈, 노트를 펼친다. 소라, 커피를 마시며 지훈을 보다가
소라: 착하면 재미없지 않나? 착하다는 것처럼 애매한 말이 없는 거 같애.
지훈: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요? 착하면 착한 거로 그냥 단순하게 보면 좋잖아요.
하긴 작가시니까 다른 관점으로 보시겠지만…
지훈, 소라의 얼굴을 본다. 소라, 지훈을 보다가 느닷없이
소라: 오늘 저녁에 뭐 해요?
지훈: 오늘요? 오늘 저녁요?
소라: (싱긋 웃으며)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좋잖아요. 안 그래요?
지훈, 소라를 당황한 얼굴로 쳐다본다.
9-레스토랑_ 저녁
선주가 허겁지겁 들어온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리에 앉는 선주, 다행히 늦지 않았다는 얼굴.
/시간 경과/
선주가 메뉴를 보며 앉아있다.
지훈에게서 문자가 온다. 선주, 문자를 열어보면
;갑자기중요한회의! 쏘리쏘리! 젤비싼거시켜먹어!
선주, 얼굴이 어두워진다. 일어서려는데 종업원이 와서 물을 따라준다.
어색한 미소로 종업원을 보는 선주, 거절하는 것에 익숙치가 않다.
/시간경과/
선주가 혼자 샐러드를 먹고 있다.
샐러드에 들어있는 당근을 하나하나 골라내는 선주.
그때 울리는 선주의 진동 벨소리.
선주, 지훈인가 하고 보는데 아니다. 실망한 얼굴.
선주: 응, 은지씨? 저녁먹지 지훈씨랑. 아, 그 서류는 과장님한테 드렸는데…
응, 그래 고마워.
선주, 전화를 끊고 포크를 들다가 다시 내려 놓는다.
접시엔 먹다 만 샐러드와 한쪽에 모아진 당근이 남겨져 있다.
선주 외투를 챙겨 일어선다.
10-아파트, 욕실_ 다음날 아침
지훈이 면도크림을 바르고 면도를 하고 있다.
선주는 문간에 서서 거울을 통해 지훈의 얼굴을 보며 얘기를 듣는다.
선주: 전화로 할 수도 있잖아, 문자가 뭐야 문자가?
지훈: 쏘리! 정말루 미안! 그래서 젤 비싼 거 시켜 먹었어? 거기 스테이크 죽이잖아~
선주: 저 봐. 저렇게 대충 넘어가려고 하고.
지훈: 한번만 봐 주라~~ 전화할 상황이 아니었어.
선주: 그렇게 정신이 없어?
지훈: 그게 이번에 내가 처음으로 장편 내는 거 총 책임자잖아, 좀 일이 많아.
나한테도 좋은 기회고. 은작가꺼 이번에 계약했거든 그래서 부산으로
취재도 가야 되고. 그래서 회의도 많은 거고.
선주: 부산?
지훈: 응, 거기 사는 사람 취재해야 되거든. 은작가 혼자 간다는데 은작가가
운전을 못하니까 회사에선 아무래도 경비대고 하느니 작가 편의도
봐 줄 겸 나보고 같이 갔다 오라고 하는 거지.
선주: 그 은작가라는 사람은 외국에서 살다 왔다며 왜 운전을 못해?
지훈: 미국 쪽이 아니라 유럽 쪽이걸랑, 그리고 운전을 못 할 수도 있지, 뭐.
세상 사람들 다 운전해야 되나?
지훈, 면도를 다 마치고 선주를 향해 웃어 보이며 선주에게 키스하려는데 선주, 지훈을 밀친다.
.
지훈: (애교있게) 왜 그래? 자기땜에 면도도 했구만~
(선주를 끌어 안으며) 어때? 잘 생겼지?
선주: 또 그런다.
지훈: 뭐?
선주: 또 딴 소리라고. 이제 준비할 거도 많은데 부산에 갔다 오면 나 혼자 어쩌라는 거야?
지훈: 금방 갔다 와.
선주: 얼마나?
지훈: 한 이 삼일 정도?
선주: 그게 금방이야?
화가 치미는 선주, 옆에서 지훈은 눈치가 없다.
선주: 어제 회의 때 은작가도 있었어?
지훈: 은작가? 아니 그 사람은 자기 집에서 소설 써야지. 작가가 회의에 와서 뭐 해?
우리 팀 사람들끼리 회의하고 회식한 거야.
지훈, 옷을 챙겨 입더니 가방을 들고 나갈 준비를 한다.
선주: 일요일인데도 출근해?
지훈: 편집시안을 오늘까지 끝내야 돼, 자긴 집에 있을 거야?
선주: 나도 나갈 거야, 뭐 살 거 있어.
지훈: (신발을 신으며) 또 뭐 사게? 어머니도 계속 뭐 보내 주시는데 또 필요한 게 있어?
선주: 있어, 그런 게. 같이 가 줄 것도 아니면서.
지훈: 늦겠다, 갔다 올게.
선주: 지훈씨, 잠깐
지훈, 나가다 뒤 돌아본다.
선주: 안방에 곰팡이 폈어. 어떡해?
지훈: 곰팡이? (곰팡이가 뭔지 잠깐 감이 안 오는 얼굴 그러다가 손목시계를 보며)
갔다 와서 얘기하면 안돼? 늦었는데.
선주: 알았어.
지훈 나가버리고 선주는 혼자 남겨진다.
11-서점
아름다운 작가 은소라의 소설집이라고 쓰여진 ‘이어달리기’책 표지가 보인다.
그 책을 집는 선주의 손.
선주는 책을 집어 들어 펼쳐 본다. 표지 안에 찍혀 있는 작가 사진의 얼굴은 썬그라스와
손으로 가려져 있는데 선주는 얼굴을 들여다 보더니 왠지 아는 얼굴인 듯 당황한다.
서둘러 사진 밑 작가소개를 보는 선주.
‘은소라. 부산에서 출생. 20대를 프랑스와 캐나다 등지에서 체류. 2008년 한국으로 돌아 와
단편소설 <이어 달리기>로 한나래 신인작가상 수상. 현재 장편소설 ‘귀향’ 집필 중’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데 책 종이에 손을 벤다. 손가락에 금새 피가 베어 나온다.
선주, 난처한 얼굴로 피를 보다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낸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런 선주를 힐끗 쳐다보고 간다.
주위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는 선주.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가다가 뭔가를 보고 놀란다.
선주가 보는 곳에는 은소라 사인회 배너가 걸려있다.
책표지와 달리 은소라의 얼굴이 자세히 보인다.
풍성한 파마머리의 이국적인 아름다운 얼굴.
선주는 아는 얼굴인지 한참을 배너를 보며 그렇게 서있다.
/이미지/
울고 있는 어린 소라의(곱슬한 머리와 큰 눈이 소라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얼굴 위로 들리는 목소리;
너, 여기서 뭐 해?
12-버스 안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선주가 차창 밖을 보고 있다. 멍한 표정.
버스 바닥에 뭔가 밟혀서 보는 선주, 사탕 껍질이다.
그 위로 들리는 버스기사의 거친 목소리.
버스기사: 뒤로 타요, 뒤로! 앞문 고장 났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돼?
선주 버스 앞을 보면 기사의 불친절한 얼굴과 크게 들리는 라디오소리.
뒷문으로 하교 길의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왁자지껄 수다를 떨며 우르르 버스에 탄다.
순간,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표정의 선주, 다시 뒤를 돌아보면 여학생들이 우르르 뒷좌석으로
몰려가는 게 보인다.
버스는 출발하고 창 밖으로 어떤 여학생이 버스를 향해 달려 오는 게 보인다.
멀어지는 여학생의 모습. 그 위로 겹쳐지는 그림.
/이미지/
교복차림으로 정신 없이 뛰어가는 어린 선주. 울고 있었던 걸까?
13-아파트, 낮
샤갈의 ‘생일’그림이 아파트 벽에 세워져 있다.
라디오를 틀어 놓은 선주.
라디오에서는 낮은 목소리의 남자 디제이가 곡 설명을 하고 있다.
디제이: 브람스의 레퀴엠은 그 출발점부터 카톨릭의 그것과는 달랐는데요. 가톨릭의 레퀴엠이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한다는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의 근본 사상은 죽음에 의해 남겨진 사람,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자 하는 것으로 오히려 주관적인 것이었습니다.
선주가 라디오를 들으며 짐들이 가득 차 있는 안방에 서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짐을 찾기
시작한다.
우선 벽에 놓여져 있던 지훈의 장난감 박스를 옮기고 자신의 짐을 뺀다.
선주가 지훈에게 말한 대로 한 쪽 벽 구석에 곰팡이가 슬어있다.
디제이: 자 그럼 여기서 베를린 필하모믹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브람스의 도이치 레퀴엠을
들어보시겠습니다.
레퀴엠이 흘러 나온다.
선주, 자신의 짐 상자를 발견한다. 상자를 열어 뭔가를 찾는다.
그리고는 깊숙이 들어 있던 사진 몇 장을 꺼내본다.
그 중 한쪽 귀퉁이가 접혀진 사진을 보는 선주.
사진 안에는 중학교 시절의 선주와 여은이가 체육복을 입고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들어있다. 선주, 접혀진 부분을 펼쳐 보는데 펼쳐진 부분엔 곱슬머리에 빨간 물방울 머리띠를 한 동그란
눈의 소라가 활짝 웃고 있다.
그 위로 들리는 목소리
‘이거 얼마예요?’
/이미지/
문방구 앞에서 여은이 빨간색 물방울 머리띠를 들고 문방구아저씨에게 가격을 물어보고 있다.
선주가 뒤에서 그런 여은을 보고 있다.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14-소라의 집
라디오를 켜 놓았는지 레퀴엠이 여기에도 흐른다, 그 위로 울리는 전화벨.
침실 바닥에는 여기저기 메모지와 A4 크기의 백지들로 가득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는 소라. 맨발에 밟히는 종이들.
전화는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
; 은소라의 집입니다. 메모를 남겨 주시면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15-아파트_ 늦은 밤
소파에서 졸다가 지훈이 들어 오는 소리에 깨는 선주.
선주: 왜 이렇게 늦었어?
지훈: 아직 안 잤어? 회의 끝나고 블로거들 오프모임 있다고 얘기 안 했나?
술 좀 마셨어, 조금!
선주: 전화기는 왜 꺼져 있어?
지훈: 헤헤 밧데리지, 뭐. 아, 씻을래. 담배냄새 엄청 난다. 인간들이 어찌나 펴 대던지!
나, 내일도 일찍 출근해야 해.
선주: (욕실로 들어가는 지훈의 뒤통수에 대고) 무슨 일요일에 모임이야? 출근도 할 사람이.
선주, 지훈이 벗어 둔 웃옷의 냄새를 맡아본다.
담배냄새가 진동한다. 코를 찡그리는 선주.
지훈, 욕실에 들어 갔다가 놀래서 나온다.
손에 아기 신발을 들고서 선주에게 묻는다.
지훈: 이거 뭐야?
선주: 아, 그거. 엄마가 보내 줬어.
지훈: 너무 성급하신 거 아니야?
선주: 뭐, 이쁘기만 한데. 자긴 안 예뻐?
지훈: 너무 작아서 좀 그런대.
선주: 애기 꺼니까 당연히 작지.
지훈: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난 분명히 얘기했다, 전에도.
선주: 뭐?
지훈: 결혼하고 얼마간은 우리끼리만 살자고, 너도 동의했어 분명히.
선주: 이상해 정말, 왜 애기얘기만 나오면 항상 그렇게 민감해?
지훈: 또 시작할래?
선주: 알았어, 씻기나 해.
지훈, 다시 욕실로 들어 가고 선주 신발을 들고 만져 본다.
아기신발을 들고 소파에 앉는 선주.
지훈의 양복주머니에서 뭔가가 집혀 꺼내 보면 청포도사탕 봉지다.
사탕을 보다가 지훈에게 묻는 선주.
선주: 이거 뭐야?
지훈: (욕실 안에서) 뭐?
선주: 사탕.
지훈: 아, 그거 식당에서 주던데?
선주: 봉지째?
지훈: 뭐라구?
선주, 욕실 문 앞에 가서 얘기한다.
선주: 봉지째 주더냐구?
지훈: 어, 누가 내 주머니에다 집어 넣었나 봐. 근데 오랜만이지 않냐, 청포도 사탕?
선주, 사탕 봉지를 만지작거린다.
선주, 사탕껍질을 까서 입 안에 넣어본다.
선주의 볼이 사탕 때문에 불룩하다.
사탕을 이리저리 굴려 보다가 깨물어 버리는 선주. 아삭 소리가 난다.
그 위로 들리는 소리.
; 누가 지금 사탕 먹어?
/이미지/
사탕을 먹던 선주는 입을 다물고 선생님 눈치를 본다. 그 옆에서 손 드는 여은.
선생님: 정여은 너야?
여은: 아니오! 화장실 다녀와도 되요?
선생님: 빨리 갔다 와
16-소라의 집
크게 들리는 음악소리.
소라가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는데 춤이라기 보다는 점프 중심의 움직임에 가깝다.
이때 전화벨이 울린다.
소라는 마치 못 들은 듯 춤만 춘다.
17-출판사 율
지훈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전화기를 붙잡고 있다.
전화기 밖으로 소라의 음성사서함 소리가 들린다.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때 박팀장이 땅콩을 먹으며 지훈의 책상으로 온다.
지훈, 전화를 끊고 컴퓨터를 본다. 박팀장이 지훈의 책상 끄트머리에 앉는다.
박팀장: 뭐하냐?
지훈: 또 바이러스 먹었나 봐요, 죽겠네~
지훈, 컴퓨터를 보며 짜증스러워 한다. 지훈, 박팀장을 힐끗 보며.
지훈: 아, 맨날 왜 남의 책상에 앉으세요? 일하는데.
박팀장: 내 맘이야.
지훈: 여기 회사에서 엄연히 내 공간은 이 책상 하나 밖에 없거든요,
침범하지 말아 주세요.
박팀장: (못 들은 척 버티고 앉아서) 은작가 건은 잘 진행되고 있지?
지훈: (컴퓨터와 씨름하며 건성으로) 그렇죠, 뭐.
박팀장: 그 은작가 참 사연 있어 보여 왠지.
지훈: 무슨 사연요?
박팀장: 넌 어려서 몰라. 예쁜 것만 보일테지 네 나이땐.
지훈: 고리타분하게 나이타령 하는 거 보니 팀장님도 늙다리 맞네요.
박팀장: (동요없이) 회사 오다가 길에서 어떤 여자를 봤는데…
지훈: 뭐야~ 팝콘이에요? 왜 그렇게 얘기가 튀어?
박팀장: (여전히 동요없이 자기 톤 그대로) 애를 안고 울고 있더라.
지훈: 왜요?
박팀장: 나도 모르지, 왠지는. 근데 맘이 좀 그렇더라. 거, 말이야~
왠지 인생이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대.
지훈: 인생이 어떤데요?
박팀장: (땅콩을 먹으며) 아니, 대낮에 대로에서 애를 안고 여자가 울고 있으니까 말이야.
남자인 나로서는 여자의 마음을 백 년을 가도 알 수 없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거기다 진영이 엄마도 저런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참 그 뭐랄까?
지훈: 왜, 형수님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박팀장: 내가 왜 미안하냐?
지훈: 맨날 술 먹고 늦게 들어가고 휴일에도 일하러 나오면서 그럼 안 미안해요?
박팀장: 그거야 그렇지만 난 좀 더 거시적인 걸 얘기하는 거거든.
지훈: 박팀장님은 거시적인 거 참 좋아해요~
박팀장: 인생은 크게 봐야 된다~
지훈: 아, 참~ 삼국지 그만 보시고 집에나 좀 일찍 들어 가세요!
박팀장: 너나 남 얘기 그만 하시고 일찍 일찍 들어 가세요~ 누가 널 보고 결혼 앞 둔
새신랑이라고 하겠냐?
지훈: (컴퓨터를 보며 성질을 낸다) 아, 진짜 또 엎어야겠네.
박팀장: 야~ 살살 해라~
18-소라의 집
방바닥에 깔려 있는 종이더미 위에 소라가 대자로 누워 있다. 숨을 헐떡인다.
소라, 잠시 무슨 생각을 하다가 옆에 잡히는 대로 펜을 들어 종이에 뭔가를 쓴다.
책상 옆에는 신문기사를 스크랩 해 놓은 게시판이 보인다.
대형사고로 가족을 잃은 가족들 인터뷰 내용.
큰 글씨로 ‘희생자 어머니-그때 사과만 안 깍여 먹여 보냈어도 우리 아이는 살아 있을텐데…’
‘애통한 부정- 딸아이가 죽은 후 내 삶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등등
19-아파트
열어놓은 창 사이로 바람이 불어 와 커튼을 흔들거리게 한다.
선주, 바람이 하는 짓을 보고 있다.
엄마: 그래서?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너 거기 있니?
선주가 스카이프로 엄마와 통화를 하고 있다가 잠시 딴 생각을 했다..
선주: 어, 엄마 그래서 이번엔 못 간다고,.
엄마: 뭔 일이래니? 너 혼자라도 오면 안 돼?
선주: 안돼, 지훈씨랑 준비할 거도 많고.
엄마: 그럼 어쩌니? 난 이번에 너희 오면 선물 줘서 보내려고 했더니.
선주: 선물은 결혼식 때 주면 되잖아. 어차피 얼마 안 남았는데.
엄마: 그게 말이야. 아휴, 하필이면 날이 겹쳐서, 이쪽 아빠 쪽 회사에 큰일이 있어서
아무래도 짬을 내기가 어려울 거 같아서…
선주, 표정이 굳은 체 아무 말도 안 한다.
엄마: 선주야, 얘? 거기 있니?
사이
선주: 딸 결혼식이 짬을 내서 오는 데야?
엄마: 엄마도 아는데… 너도 알다시피
선주: (말을 끊으며) 뭘 알아? 내가 뭘 아는데? 엄만 항상 그런 식이야.
항상 나보다 다른 사람 일이 중요하지.
엄마: 엄마 말 좀 들어 봐, 왜 다 듣지도 않고 화를 내. 그리고 다른 사람 일이라니?
엄연히 네 새아빠 일이야, 남들이 들으면…
선주: (말을 끊는다) 엄마가 그 아저씨한테 하는 거 십 분의 일이라도 아빠한테 했어 봐.
둘이 그렇게 째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그리고 그렇게 혼자 죽어버리는 일도 없었을 거고!
엄마: 선주, 너! 네 아빠가 나한테 한 일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
근데 네가 나한테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
더군다나 죽고 사는 건 사람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도 아니구.
사이
엄마: 선주야, 듣고 있니?
선주, 통화종료를 클릭해 버린다.
심호흡을 하는 선주. 눈을 감는다.
한쪽 귀를 막고 우우대는 소리를 듣는 선주, 진공관처럼 웅웅대는 주변.
20-은행 안_ 다음 날 아침
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은행 안에서는 개점 전 직원교육을 하고 있다. ‘고객을 성심 성의껏 모시겠습니다’ ‘고객을 가족처럼 모시겠습니다’ 등 여러 가지 문구들을 반복해서 외친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그 안에서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 하는 선주의 입 모양이 보이고. 슬로우의 느낌으로.
21-화장실 안
화장실로 들어오는 은지
화장실 안에선 선주가 거울을 보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은지: 왜 그래?
선주: 응?
은지: 어디 아파?
선주: 아니 귀 한쪽이 웅웅거려서…
은지: 왜 그러지? 이비인후과 가 봐.
선주: 좀 하루 이틀 보고. 날씨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
은지: 그러게, 비가 많이 오네. 선주씨 오늘 시간 어때?
선주: 시간? 왜?
은지: 오늘 비 오는데 같이 파전 먹으러 갈래?
선주: 또 술 마시려고?
은지: 아니야, 그냥 비 오는 날은 파전이나 부침개 먹는 거잖아 원래. 잘 하는 집 알거든.
엄청 맛있어, 주인도 좋고.
선주: 다음에. 오늘은 예식장 들러서 하객들 메뉴 고르기로 했어.
22-예식장 안 식당
선주가 음식을 앞에 놓고 이것 저것 맛을 보고 있다.
앞에는 사무를 담당하는 예식장 사람이 서류를 들고 메모를 하고 있다.
선주: 그럼 여기 있는 한식 A로 할게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너무 짜지 않게 해주세요.
선주, 다시 귀가 웅웅거리는 거 같아 말을 멈춘다.
예식장 직원이 선주에게 뭔가를 묻는데 선주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23-택시 안
보슬 보슬 내리는 비를 피해 택시를 타는 선주, 택시 룸 밀러에 앙증맞은 토끼인형이 걸려있다.
선주는 도로변을 보는데 선주의 눈에 한 가족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옆에 서 있는 남자.
우산도 받치지 않은 채 그들은 뭔가 언쟁을 하는지 언성이 높다.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남자 지겹다는 듯이 등 돌려 휙 가 버린다.
여자, 아이를 안은 채 힘겹게 남자를 쫓아 간다.
택시기사는 차를 움직이고, 선주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멀어져 가는 가족을 눈으로 쫓는다.
기사: 손님. 손님!
선주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기사를 보면
선주: 네?
기사: 손님 전화 울리는 거 아니에요?
선주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다. 선주 전화를 받는다.
/인서트/
싸이렌을 울리며 병원으로 들어가는 응급차.
24-병원 응급실 안
선주가 병원 응급실에 황급히 뛰어 들어온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응급실 안에서 지훈을 찾는데 어디에도 없다.
이때, 소라가 물을 들고 들어오다가 선주를 본다.
소라: 혹시 김지훈씨 찾아 오셨어요?
선주, 소라를 보고 놀란 듯 멈춰 선다.
25-병원 내 카페
이제 비는 어느 정도 그쳐 간다.
선주가 창 밖으로 카페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소라를 본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소라를 한번씩 쳐다보고 지나간다.
소라는 이 병원에서 잘 볼 수 없는 스타일의 인물인 것이다.
담배를 피던 소라가 선주 쪽을 향해 뒤 돌아 본다.
소라를 보고 있던 선주는 얼른 얼굴을 돌린다.
/시간경과/
소라는 커피를 마시며 선주를 본다.
선주는 불안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선주: 연락이 늦네.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은데.
소라: 어차피 엑스레이 찍고 한다니까 가 봐야 소용없을걸. 별로 다치지도 않았는데. 뭐.
선주: 같이 있었어?
소라: 아니, 전화가 왔길레.
선주: 전화?
소라: 간호사말로는 최근 통화내역에 있으니까 병원에서 걸었다는데. 별 거 아니래.
금방 깼어. 잠시 충격으로 그런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된대.
선주: 괜히 신경 쓰이게 했네…
호출기 삐삐소리가 난다.
옆에서 샌드위치를 먹던 인턴이 호출이 들어오자 급히 일어선다.
카페 안은 기다리는 환자 보호자와 휠체어에 앉아있는 환자들, 끼니를 때우는 인턴들로
어수선한 분위기다.
소라: 몇 년 만이지? 십오년, 십육년 됐나?
선주: 그렇게 됐나?. 우리 지훈씨 통해서 같이 일 한다는 작가얘기는 들었었는데
넌지는 정말 몰랐어. 은작가라고 하니까.
소라: 성만 바꿔서 써. 필명 같은 건데. 어차피 너무 흔한 느낌이니까 원래부터도 별로였어.
선주: 그렇구나…
소라: 나 바로 알아 보겠던?
선주: 응, 너야 뭐 워낙에 튀는 얼굴이잖아.
소라: 튀는 얼굴?
선주: (당황하며) 어렸을 때랑 얼굴이 하나도 안 변했으니까 그렇다고.
소라, 담배를 한 개피 꺼내 테이블에 톡톡 친다.
소라: 넌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왠지 우리가 언젠간 다시 만날 거 같았어 느낌에.
선주: 그래? 신기하네.
소라: 내 책 안 읽어봤지?
선주: 어, 그게 요즘 책 읽을 시간이 없었어. 좀 정신이 없어서. 결혼준비 하느라.
소라: 결혼해?
선주: 어. 지훈씨가 얘기 안 해?
소라: 아니, 언제?
선주: 삼십 일 좀 넘게 남았어.
소라: 재밌네. 날짜를 세고 있나 보다. 대개가 한 달 뭐 그렇게 말하지 않나?
선주: (어색하게 웃는다) 어, 그냥 버릇이 됐네.
소라: 그래서 행복해?
선주: 행복? 글쎄 우린 그냥 자연스러운데…
소라: (혼잣말처럼) 자연스럽다?
선주: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활발하게) 넌 근사해졌다. 정말 작가 분위기가 나는데..
소라: 넌 어때? 무슨 일 하니?
선주: 아, 나? 은행 일 해. 평범하지, 뭐.
소라 다시 담배를 톡톡 치다가 주머니에 넣는다, 담배가 몹시 피고 싶은 눈치다.
선주, 그런 소라의 손을 보고 있다.
소라: 난 네가 내 책 읽으면 나한테 연락 할 거라고 생각했어.
선주: 그래? 무슨 얘긴지 궁금하다.
소라: 우리 얘기야.
선주: 우리?
소라: 너, 나, 그리고 여은이, 정여은.
흔들리는 선주의 얼굴.
마치 봉인 되어 있던 숨겨진 이름이 맞지 않은 타이밍에 튀어 나온 듯한.
이때, 선주의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선주 다급히 전화를 받는다.
26-지훈의 차 안
선주가 차를 운전하고 있고 옆 좌석엔 목 보호대를 한 지훈이, 뒷좌석엔 소라가 앉아있다.
소라: 여기서 세워주면 돼.
지훈: 골목까지 들어가도 되는데.
소라: 아니에요. 담배도 사야 되고.
선주: 그래, 그럼. 오늘 고마웠어.
지훈: 그래요, 은작가님 다음에 맛있는 거 살게요.
소라, 차에서 내린다. 지훈, 손을 흔들어 보인다.
떠나는 선주의 차.
지훈: (갑자기 긴장이 풀렸는지 퍼진다) 아, 목 아퍼.
선주: 언제 집까지 와 봤어?
지훈: 응? 아, 저번에 한번 데려다주느라고. 근데 신기하다. 너랑 동창이라니. 반가웠겠다.
선주: 별로 안 친했어.
지훈: 그래? 그래도 인연인가 보다, 너희. 이렇게 다시 만나고.
(차가 덜컹거리자 갑자기 목이 아픈지 목을 만지며) 아야~
선주: 많이 아파? 속상해 정말. 좀 조심하지 그랬어.
지훈: 재수가 없어서 그래, 걔네가 와서 박는데 무슨 수로 피하냐?
선주; 어쨌든 부산 가는 건 무리야 그러니까 가지 마 부산.
결혼식 전에 멀리 가는 거 안 좋고 더군다나 이런 사고도 있었잖아.
지훈: 그게 내 맘대로 되냐, 일인데?
선주: 정말 일 때문에 가는 거야?
지훈: 무슨 소리야?
선주: 순수하게 일 때문에 가는 거냐고?
지훈: 그럼 일 땜에 가는…(선주를 본다) 뭐야? 왜 자꾸 묻는 거야?
선주, 대답 없이 입술을 꼭 문 체 운전만 한다.
지훈: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선주: 남자작가였어도 네가 이럴까? 그렇게 아픈 몸을 끌고 갈 거 같냐고?
지훈, 한숨을 쉰다.
지훈: 너, 또 시작이야?
선주, 말이 없다.
지훈 답답하고 목도 아프고 화가 치민다.
지훈: 너희 아버지가 그랬다고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선주: (반사적으로) 그 얘기 꺼내지 말라고 그랬지?
선주의 표정이 심각하다.
그때 마침 끼어드는 차에다 대고 클랙션을 세게 울리는 선주.
지훈 아차하는 얼굴로.
지훈: 알았어, 그건 내가 잘못 꺼냈는데 네가 이상하게 의심을 하니까 그렇잖아.
선주: 나한테 뒤집어 씌우지 마. 너 편한 식으로 해석하지도 말고.
지훈: 너야말로 네 식대로 해석하지 좀 마. 가끔 너 되게 예민하게 구는 거 알아?
차는 성수대교 위를 건너가고 있다.
차 안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게 어둠 속에 아름답게 빛나는 도시의 불빛들.
그 위로 삐하는 엘렉트릭 소리가 난다.
27-이비인후과 안
방음이 된 갇힌 방에서 선주가 기계음을 듣고 있다.
소리가 나는 쪽의 손을 들어 올린다.
28-진료실 안
젊은 의사가 진찰표를 보고 있고 선주가 그 앞에 앉아 있다.
의사: 그래프로 봐서는 별 문제 없으신데요. 신경성 아닐까 싶네요.
선주: 저기…
의사: 네?
의사, 여전히 그래프를 보고 있다.
선주: 그래도 계속 한쪽에서 웅웅대는데요?
의사: 예, 그러다가 그치기도 하고 그래요.
워낙에 몸이라는 게 심리적인 것과 관련이 있거든요.
요즘 스트레스 받으시는 거 있으셔서 그럴 수도 있고 너무 걱정하실 거 없을 거 같네요.
선주, 의사 책상에 올려진 야구선수 피규어를 본다.
선주: (의사에게) 이런 게 왜 좋으세요?
의사, 뜻밖의 얘기에 놀라서 그제서야 선주를 쳐다본다.
의사: 아, 그거요? 제가 동호회가 있어서요. 취미생활이죠, 뭐.
선주: (갑자기 자신이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아서) 예, 제 친구도 좋아하길레 궁금해서요.
의사: 아, 예. (웃으며) 혹시 저희 동호회 회원이실지도 모르겠네요 친구분이.
29-아파트
목에 보호대를 한 지훈이 프라모델을 두 개 정도 테이블에 올려 놓고 스탠드로 조명 각을
맞추고 있다.
테이블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로보트들이 어지러이 널려져 있다.
지훈은 디지털 카메라로 조심스럽게 각을 잡아 찍는다.
열중해 있는 모습의 지훈.
현관 문 코드 찍히는 소리가 들리고 선주가 들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지훈: 왔어?
선주: 일찍 들어왔네, 왠일이야?
지훈: 목도 안 좋고 해서 조퇴. 그리고 엄마가 약 다려 놨다고 가져 가라고 해서
분당 들렸다 왔어. 엄마 집에 갔다가 옛날 녀석들을 찾아냈거든.
다 끝나 가, 우리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선주, 힘없이 들어선다.
지훈: 근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선주, 가방을 놓고 욕실로 들어간다. 선주의 뒤에 대고
지훈: 쭈~ 어디 아파?
30-욕실 안
선주가 세면대 물을 틀어 손을 닦는다.
갑자기 욕실 불이 꺼졌다가 금새 다시 켜진다.
지훈: (장난스럽게 밖에서) 쭈~ 왜 그래? 아직도 화 안 풀렸어?
지훈이 밖에서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는 모양.
선주: 하지 마. 머리 아파.
지훈: (밖에서) 에이, 재미 없어.
지훈이 다시 자기 자리로 가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는 선주.
암흑
그 속에서 들리는 소리.
담임선생님 목소리: 이름은 이소라라고 하고 전학 왔으니까 잘 해줘라. 저쪽에 자리 비었으니까 그리로 가서 앉아.”
걸음 옮기는 소리.
걸상을 끌어다 앉는 소리.
쉬는 시간 벨소리.
아이들이 우당탕 나가는 소리.
여은의 목소리: 선주야, 우리 소라랑 같이 밥 먹자, 그래도 되지? 왜 싫어?
선주, 그 소리를 잊으려는 듯이 세수를 한다.
31-은행 안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
복사기에서 복사 종이가 복사 되는 중이다.
복사기를 무심히 보고 있는 선주.
정신을 차려 보면 은행 안이다.
선주, 복사한 서류를 챙겨 자리로 돌아오면 어느새 소라가 선주 앞 의자에 앉아 있다.
선주, 소라를 뜨악하게 쳐다본다.
소라: 유니폼 잘 어울리는데?
옆 자리에서 일하던 은지가 소라를 힐끔거리고 본다.
32-은행 앞 커피전문점
선주: 나 여기서 일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소라: 내가 알 데가 한 군데 밖에 더 있니?
소라, 가방에서 자신의 책을 꺼내서 내민다.
소라: 직접 주고 싶었어, 너 일하는 거 보고 싶기도 했고.
선주, 책을 받는다.
선주: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고마워. 영광이다 작가한테 직접 책을 다 받고.
소라: 그런 얘긴 안 해도 돼.
어색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선주.
선주: 부산에 간다면서?
소라: 응, 거기 서점에서 싸인회가 하나 잡혔어.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내가 부산 가는지?
선주: 지훈씨 회사에서 경비 대서 간다고 지훈씨가…
소라: 응? ‘이어 달리기’는 다른 출판사야. 싸인회는 그쪽에서 준비하는 건데?
김지훈씨가 뭔가 착각했나 본데? 물론 양쪽으로 경비 받으면 나야 좋지만.
짐짓 놀래는 표정을 감추는 선주.
33-은행휴게실
선주가 소라가 준 책을 꺼내 본다.
책 표지 안에는 ‘1994년 가을, 소녀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라는 문장만 적혀있다.
선주 그 문장을 물끄러미 보다가 책을 사물함 안에 넣어버린다.
몸짓이 거칠다.
34-고깃집 앞
은지가 술에 취해서 선주의 부축을 받으며 나온다.
그 뒤에 김과장 등 다른 동료들이 나온다.
동료들은 2차를 갈 분위기다.
식당 앞에는 지훈이 차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
선주, 지훈을 발견하면 지훈, 다정하게 손을 들어 보인다.
은지: (목소리가 커졌다) 2차 가요, 2차!
선주: 은지씨 괜찮겠어?
은지: 괜찮아, 괜찮아. 과장님 2차 쏘세요!
김과장: 나, 참 오은지씨 2차를 갈 수나 있겠어? (차 앞에 서 있는 지훈을 발견하고)
어? 이대리, 새 신랑이 모시러 왔나 봐?
선주: 아, 네. 그럼 전 먼저 가 볼게요.
김과장: 그래, 먼저 가 봐.
은지: 야! 이선주 어딜 간다 그래?
옆에 김과장이 은지를 부축한다. 은지, 부축을 뿌리치며
은지: 나도 지훈씨 안단 말야.
은지, 지훈에게 다가가 인사한다.
은지: (얌전하게) 안녕하세요?
지훈: 아이쿠~ 은지씨 많이 드셨나 보네?
은지: 아니에요. 하나도 안 취했어요!
은지, 지훈의 팔을 잡고 김과장과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서 소개 시킨다.
선주는 은지가 하는 짓을 쳐다보고 있다.
은지: 여긴 김지훈씨, 이쪽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김과장!
김과장: 어허, 김과장이라고 부르는 거 보니 이제 시작하시는구만.
은지: 그럼 김과장을 김과장이라고 하지 박과장이라고 할까?
옆에서 일행들이 웃는다.
지훈: (웃으며) 인사가 늦었습니다. 김지훈이라고 합니다.
김과장: 아휴~ 신랑이 잘 생기셨네~
김과장, 지훈이 내미는 손을 잡더니 기분이 좋아서
김과장: 아휴, 반가워요! 같이 2차 가시죠, 제가 살 테니.
은지: 가요, 지훈씨!
은지, 갑자기 지훈의 팔짱을 낀다. 지훈, 술 취한 은지가 재밌는지 웃는다.
선주는 옆에서 당황해 한다.
35-맥주집
정작 2차를 부르짖던 은지는 졸고 있고, 김과장만 지훈과 얘기하느라 신이 났다.
옆에서 선주는 못마땅하다.
김과장: 와~ 그 유명한 파워 블로거셨구나. 이거 영광입니다.
지훈: 영광이라니요.
김과장: 영광이죠. 저도 맛집 블로그 하나 쓰고 있긴 한데
지훈: 아, 그러세요?
김과장: 아휴, 별 거 아니에요. 근데 참 부지런해야 되더라구요, 업뎃 자주 안 되면
그나마 찾던 방문객들도 확 줄고 나름 신경 쓰여요.
지훈: 그래서 전 그냥 일기처럼 편하게 올려요. 재밌어요, 아무래도 제가 출판 쪽에
있으니까 대중들 취향을 읽는 통로 구실도 하구요.
김과장: 아, 출판 쪽에 계시는구나~ (선주와 지훈을 번갈아 보며)
그런데 둘이 어떻게 알게 됐나? 서로 일도 다른데. 혹시 선?
지훈: 아니오. 제가 한때 여기 은행 사보 일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봤죠.
9월의 우수사원이라서 인터뷰했던 게 인연이 됐어요.
한마디로 제가 첫 눈에 반했습니다. 하하!
지훈, 선주의 어깨를 감싼다. 선주 그런 지훈을 어색하게 쳐다본다.
김과장: 우와~ 우리 은행이 여러 좋은 일 하네, 자~ 한잔 하시죠.
지훈, 김과장과 건배를 하고 옆에서 졸고 있는 은지의 잔도 같이 부딪친다.
은지, 졸다가 깨서 건배 건배 하며 술을 마신다.
선주: (사람들에게 안 들리게 지훈에게만) 목도 아프다며 이제 그만 마셔. 집에 어떻게 갈래?
지훈: 괜찮아, 어차피 자긴 술 안 마셨으니까 자기가 운전하면 되잖아.
은지: (끼어들며) 무슨 얘길 그렇게 해, 둘이서만!
지훈: 하하, 은지씨 얘기하죠. 그만 졸고 한잔 하세요.
김과장: 아휴~ 술도 잘 마시고 너무 맘에 든다, 자 건배!
김과장을 필두로 또 건배 분위기, 다들 얼큰히 취했고 선주 혼자 멀쩡하다.
시간이 너무 더디 가는 듯한 느낌으로 앉아있는 선주.
지훈이 화장실을 간다고 일어선다.
지훈이 양복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가는 뒷모습을 보는 선주.
36-아파트_ 밤
선주, 지훈을 부축해 들어 온다. 지훈 노래를 흥얼거리며 소파에 쓰러진다.
지훈은 선주가 일어서려니까 선주를 못 일어나게 끌어 안는다.
선주, 지훈의 팔을 풀고 일어나 지훈의 양복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통화내역을 열어보는 선주.
최근 통화내역에는 은작가가 적혀있다.
통화시간 5분 13초.
선주, 나지막이 되뇌인다.
선주: 5분 13초…
37-아파트 욕실 안_ 다음 날 저녁
선주가 욕조 안 물 속에 누워있다.
욕실 밖에서 지훈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훈: (밖에서) 아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되요. 위에서도 어차피 부산이 배경이면
이번에 자료조사 차 같이 에스코트해도 되겠다는 판단이구요….
제가 애 쓸 게 뭐 있나요? 예, 그럼 6시 정도에 댁으로 모시러 갈게요. 네.
지훈, 전화를 끊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선주, 욕조에 미끄러지듯이 온 몸을 담근다.
물 안에서 눈 뜨고 있는 선주의 얼굴이 보이고 그 위로 지훈의 콧노래가 웅웅대며 들린다.
38-거실
선주가 타월로 머리를 말리며 욕실에서 나온다.
지훈이 여행가방에 자신의 짐을 싸고 있다.
지훈: (짐 가방 안을 보다가) 그게 어딨더라?
지훈, 욕실로 들어 가 물건을 찾는다.
지훈: (욕실 안에서) 참, 어머니가 전화하셨어, 아까 낮에.
선주, 아무 말이 없다.
지훈, 세면도구 손가방을 챙겨 나오며
지훈: 걱정하시던데, 또 싸웠어?
선주, 대답 안 하고 옆에서 지훈의 옷가지를 바르게 접어둔다.
지훈: (부드럽게) 화 나면 말 안 하는 버릇 좀 고치셔, 말을 해야 알지.
지훈, 다시 욕실로 들어간다.
선주, 소파에 놓여져 있는 옷가지를 지훈의 가방에 넣다가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은소라 소설집 ‘이어 달리기’를 꺼내 본다.
책을 펼쳐 보면 맨 앞 장에 ‘김지훈씨께, 재미있는 작업 기대하며. 작가 은소라 드림’이라고
쓰여 있다.
선주는 글씨를 천천히 들여다 보다가 앞 장을 찢어서 구겨 자기 주머니에다 넣는다.
그리고 책을 소파 위에 있는 쿠션 밑에 안 보이게 밀어 넣는다.
지훈이, 욕실에서 면도기를 챙겨 나온다.
선주: 우리 파전 먹으러 갈래?
지훈: 파전? 갑자기 왠 파전?
선주: 응, 파전 좋아하잖아. 은지씨가 잘 하는 데 안대.
우리 며칠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좀 서운하잖아.
지훈, 면도기를 가방에 넣는다.
지훈: 다음에 가면 안될까?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해서 말야.
선주: 몇 시에 출발인데?
지훈: 6시.
선주: 내가 깨워줄게.
지훈: (조금 자신 없이) 그래도 돼?
선주: 왜? 나 못 믿겠어?
지훈: 아니 자기 시간 정확한 거 아는데 못 믿긴. 미안해서 그러지,
쭈~ 내가 부산 갔다 와서 더 잘해줄게.
선주: 잘해 주는 것도 계획 세워서 하니?
지훈: 에이, 쭈! 쏘오리!
지훈, 선주를 안는다, 선주 살며시 지훈을 피하며
선주: 뭐 빠진 거 없나 잘 살펴 봐. 대충 챙기지 말고.
지훈, 가방 안을 대충 휙 보더니 가방을 닫는다.
39-파전집
선주, 지훈, 은지가 자리에 앉아 있고, 은지의 어머니가 큼지막한 파전을 내온다.
지훈: 우와~ 맛있겠다.
선주: (은지에게) 잘 아는 집이라는 게 자기 집이야?
은지: 헤헤
선주: 왜 얘기 안 했어? 알았음 뭐라도 사 오는 건데.
은지: 뭘 사 와? 맛있게 먹고 가면 돼.
지훈,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은지: 그렇게 항상 찍어요, 먹기 전에?
지훈: 예, 제 블로그가 나름 방문자가 많아서요, 좋은 사진도 많이 갖춰야 되요.
은지: 와, 저도 주소 알려 주세요.
지훈: 별로 재미없으실텐데, 주로 로보트장난감 위주거든요.
은지: 재밌겠는데요~
은지 어머니: 요즘엔 그래서 음식 앞에 두고 사진 찍는 사람이 많더만.
지훈: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어머니, 한 잔 받으세요.
은지 어머니: 아휴, 난 술 못해, 이 장사하면서 술 마셨으면 술꾼 됐게?
지훈: 와, 신기하시네. 은지씨는 술 엄청 잘하던데요?
은지 어머니: 쟨 지 아빠 닮아서 그런거고.
옆 테이블에서 아주머니 부르자 어머니 일어선다.
지훈, 은지 잔에 막걸리를 따른다.
선주: (은지에게) 여기 화장실 어디야?
은지: 어, 나가서 오른쪽 건물 2층.
일어서는 선주.
은지: (선주 뒤에다) 열쇠 가져가야 돼~
선주, 열쇠를 들고 나간다.
40-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닦는 선주, 얼굴을 들어 거울을 본다.
거울은 한편이 깨져서 거미줄처럼 갈라져 있다.
깨진 거울 때문에 선주의 얼굴 한 편이 갈라져 보인다.
41-가게 앞
선주가 가게 안을 들여다 보면 지훈과 은지가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가게에 들어가려다 말고 멈추는 선주.
사이
선주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고 있다.
신호가 가는 소리를 심호흡을 하고 듣는 선주.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린다.
선주: 여보세요? 소라니? 집에 있었네. 나 선준데…
/이미지/
집에서 여은에게 전화 거는 어린 선주.
선주: 여보세요? 여은이니?
여은: 응,
선주: 집에 있었네?
42-소라 집 안
소라, 집 전화를 끊고 생각에 빠진다.
소라는 창문을 연다.
창문을 열고 창 밖을 보는 소라의 뒷모습 위로 남녀의 신음하는 소리가 겹친다.
마치 이웃집에서 들리는 소리인 듯 소라는 주위를 둘러본다.
43-아파트 안_ 밤
소파에서 지훈과 선주가 섹스를 하고 있다.
바닥에는 성급히 벗었는지 옷가지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다.
선주는 지훈이 자신의 몸을 애무하는 동안 자신의 머리 밑에 깔려 있는 쿠션 밑에 밀어 놓았던 소라의 책을 살며시 소파 밑으로 밀어 넣는다.
지훈이 열중해서 선주의 입을 찾아 키스하며 중얼거린다.
지훈: 사랑해~
키스하는 중에도 선주의 눈빛은 의심으로 가득하다.
44-아파트 안_ 다음 날, 이른 아침
지훈은 소파 밑 이부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고,
선주는 살며시 자신의 가방을 들고 아파트를 빠져 나온다.
45-소라 집
소라가 창 밖을 보며 담배를 피고 있다.
창 밖으로 눈에 익은 지훈의 차가 도착하는 게 보인다.
차를 보는 소라의 얼굴. 배낭을 매고 집을 나선다.
문을 잠그는 소라,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소라, 잠시 소리를 듣다가 그대로 문을 잠그고 나온다.
계속 들리는 전화벨 소리.
46-집 앞
소라, 작은 배낭 하나만 매고 집 앞에서 나온다.
소라, 뒷좌석의 차문을 열려는데 잠겨져 있다, 선주 아 참 하며 문을 열어준다.
소라 뒷좌석에 앉는다.
선주: 오래 기다렸어?
소라: 아니, 별로.
선주: 그럼 갈까?
차 시동을 켜는 선주. 소라는 선그라스를 낀다. 선주 라디오를 킨다.
소라: 운전하는데 미안한데 난 좀 자둘게.
선주: 그래, 그럼.
선주, 라디오의 볼륨을 조금 낮춘다.
선주는 룸밀러로 눈을 감고 있는 소라를 본다.
47-달리는 차
이른 아침이라 도로에 차는 별로 없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이 이어지고 있다.
48-휴게소
소라가 잠에서 깨서 창 밖을 본다.
선주는 운전석에 없다.
아침에 길을 떠난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휴게소 안으로 들어 간다.
소라가 차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는데 라이터가 없다.
담배를 태우는 지나가던 젊은 남자 둘이 보인다.
소라 그들에게 불을 빌린다.
선주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차로 오다가 남자들에게서 불을 붙이는 소라를 본다
‘고마워요’ 라고 말하는 듯한 소라의 입모양.
남자들 지나가고 선주는 소라를 본다.
이때, 한 남자가 아쉬운 듯 소라를 돌아 본다.
그 남자를 놓치지 않고 보는 선주.
선주: 깼어? 이거 마셔.
선주, 소라에게 잔을 내민다. 소라, 잔을 받아 든다.
소라: 여기 어디야?
선주: 응, 얼마 안 왔어. 커피생각이 나서 첫 휴게소에서 섰지. 시간은 충분한가?
소라:(커피를 마시며) 어, 시간은 괜찮아. 4시에 싸인회니까.
선주: 그럼 갈까?
소라: 나, 화장실 좀.
소라, 화장실 간다.
선주는 그제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열어본다.
지훈으로부터 부재중전화가 여럿 와 있다.
아예 전원을 꺼버리는 선주.
49-차 안
차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창 밖을 보고 있는 소라.
선주는 룸미러로 소라를 보다가 말을 건넨다.
선주: 근데?
소라 선주를 쳐다 본다.
선주; 왜 핸드폰이 없어?
소라: 별로 필요 없어서.
선주: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너랑 연락하려면 불편하지 않겠니?
소라: 집전화도 있고, 이메일도 있는데 뭐.
선주: 나라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다, 핸드폰 없는 삶이란.
소라: 한번 없이 살아 봐, 자유롭고 좋아.
들고 다니면서까지 물건에 구속되고 싶지 않아.
선주: (웃으며) 넌 예술가니까 괜찮겠지만 난 안돼.
소라: 예술가?
선주: 아니야?
소라, 피식 웃는다.
소라: 넌 결혼준비도 바쁠텐데 주말 이렇게 보내도 돼?
선주: 괜찮아. 지훈씨가 너무 걱정하길레. 혹시 나 땜에 불편한 건 아니지?
소라: 김지훈씨는 괜찮아?
선주: (당황하며)어, 괜찮지. 그때 다친 게 좀 아픈가 봐.
소라: 교통사고 후유증은 조심하는 게 좋아. 창문 열고 담배 펴도 돼?
선주: 어. (선주 창문을 내려 준다)
아무 표정 없이 담배를 피는 소라.
선주는 짐짓 명랑하게 행동하려고 한다.
선주: 아, 오랜만에 나오니까 좋다~
50-부산_ 도로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들어서니 차가 많아진다.
정체된 차 행렬 속에서 차가 더디게 간다.
51- 차 안
선주: 저기…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 외국에서 혼자 살려면 무섭지 않니?
소라: 무서울 거 같애?
선주: 그게,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난 외국에서 사는 거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
더군다나 혼자서는.
소라: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다 비슷해. 생활 패턴도 살다 보면 거기가 어디건 비슷해져.
아마존 정글이나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는 게 아니고서는 도시에서 사는 삶은
어디나 다 비슷한 거 같애, 내 경험으론.
전에 말이야, 한번은 룸메이트가 케냐친구였는데 정말로 초원을 그리워하더라,
자연 없이 그렇게 사는 게 그들에겐 형벌이더라구.
도시에서 자란 우리랑은 정말 달라.
선주: 그러니? (웃으며) 난 잘 상상이 안 간다.
소라: 뭐가?
선주: 그냥 케냐 룸메이트 친구가 있다는 것도 그리고 핸드폰 없이 사는 삶도 다.
소라: 다 어떻게든 살게 되어 있어.
사이
선주: 그럼 글이 안 써지고 그럴 땐 어떻게 하니?
소라: (선주를 보다가) 미친 듯이 춤을 춰.
선주: 진짜?
고개를 끄덕이는 소라.
선주 다시 말을 이을 게 없다.
소라의 대답들은 다 선주가 상상하는 카테고리 밖에 있다.
소라: (문득 생각난 듯) 너, 아직도 당근 안 먹니?
선주: 어? 그걸 기억해?
소라: 너, 김밥에 있는 당근 빼 놓고 먹었었잖아. 그걸 또 여은이가 먹고.
선주: 그랬었나? 역시 소설가라서 그런지 너 기억력 좋다.
소라: 그럼 그때, 체육대회 기억나?
선주: 체육대회?
소라: 기억 안 나? 여은이랑 우리 셋이 매일 방과 후에 계주연습 했었잖아.
선주: 그래 그랬던 거 같다.
소라: 그럼 그때, 체육대회 때 지진 났었던 거는 기억나?
선주: 지진?
소라: 기억 안 나? 그때 결승점 앞에서 땅이 흔들거렸었어.
우리 셋이 손잡고 바닥에 엎드렸던 거, 기억 안 나?
선주: 그런 일이 있었어? 체육대회는 기억 나는데 지진은 모르겠는데…
소라: 너, 이상하다. 그런 큰 사건이 기억이 안 나? 그때 네가 바톤 떨어트렸었잖아.
선주: 내가? 무슨 소리야? 바톤 떨어트린 건 너지.
소라: 너야. 지진도 기억 안 난다면서 그건 기억 나니?
선주, 기억을 해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라: 지진 있고 나서 여은이가 죽음에 대해서 많이 얘기했던 게 생각 나.
도대체 죽음 뒤엔 뭐가 있을까 라고 계속 궁금해했었어.
/이미지/
흔들리는 여은이의 얼굴. 조금씩 흔들거리다가 많이 흔들거리는.
그 위로 들리는 소라의 목소리.
소라: 조심해!
이때, 갑자기 앞 차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선주의 차도 급정거를 한다.
선주: 부딪칠 뻔 했다.
다시 앞차가 움직이자 선주의 차도 움직인다.
소라, 차 창 밖을 본다.
소라: 봤어?
선주: 뭐?
소라: 살쾡이 같은 게 차에 치였는지 피를 흘리고 바닥에 뻗어있어.
선주: 아, 고속도로에선 자주 볼 수 있는 일이야.
소라: 인간들이 뚫어놓은 길 때문에 애꿎은 짐승들만 죽는구나, 산을 뚫어서 길을 만드니…
선주, 룸밀러로 뒷좌석에 앉은 소라를 본다.
/인서트/
도로에 죽어서 널부러져 있는 살쾡이 한 마리.
52-태종대 주차장
소라와 선주가 주차장에 차를 두고 내린다.
소라: 높이까지 올라가야 되는데 힘들면 여기 있어도 돼.
선주: 괜찮아.
소라: 그나저나 많이 달라졌는데?
53-태종대 산책로
산책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는 두 사람.
소라는 먼저 가고 있고, 선주는 그 뒤를 따라가는 형상.
길이 꽤 길게 이어져서 땀이 난다.
산책로 끝에 난간이 없는 절벽이 이어진다.
절벽 쪽으로 주저 없이 내려 가는 소라.
선주는 그런 소라의 모습을 보고만 있다가 뒤 따라 절벽으로 간다.
너무 절벽 쪽으로 다가가는 소라의 모습이 위태로워 소라를 부르는 선주.
선주: 이소라.
소라가 선주를 돌아본다.
슬로우의 느낌으로. 소라의 미묘한 표정.
선주: 안 무서워?
소라: 예전엔 이런 산책로도 없었어.
선주: 파도가 엄청나다. 떨어질 거 같애.
소라: 역시 자연이 제일 무서워, 경이롭고. 어디에 있어도 여기 바다가 자꾸 생각 났었어.
둘은 발 아래 흩어지는 파도를 본다 그리고 느낀다..
파도소리가 우렁차다.
선주: 야, 파도소리가 마치 천둥 치는 소리 같은데? 굉장하다~
사이
소라, 선주를 똑바로 쳐다본다.
소라: 나, 너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선주: 뭔데?
소라: 그 날 말이야, 우리 중학교 때 그 사고 있던 날. 왜 수돗가에 안 나왔니?
여은이랑 우리 셋이 수업시간 삼십 분 전에 수돗가에서 만나기로 했었잖아.
왜 안 나온 거야?
선주, 소라를 쳐다 본다.
그게 무슨 말이지? 라는 듯한 느낌, 멍한 느낌, 현실감각이 안 느껴지는.
선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소라: 또 기억 안 난다고 할 거야? 그때 분명히 약속을 해 놓고 너희 둘 다 안 나왔었어.
파도소리와 함께 선주의 귀에서는 웅웅대는 소리가 심해진다.
선주: 어지러워, 그만 내려가야겠어.
소라: 기억 안 나는 척 좀 하지 마. 이제 다 지난 일이야, 그러니까 얘기해 봐. 너니?
네가 여은이한테 나랑 만나지 말자고 한 거야?
선주: (웃으려고 애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니까.
소라: 넌 왜 자꾸 피하려고만 해? 난 오늘은 알아야겠어,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순 없다구!
순간 선주의 귀에는 소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소라의 입 모양만 보인다.
여전히 들리는 웅웅대는 소리.
선주: (중얼거린다) 안돼… 뭘 어쩌자는 거야?
소라: 이제 여은이한텐 물어볼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말해줘야겠어.
선주: (중얼거린다) 제발 그만해.
소라: (선주의 말이 파도소리 때문에 안 들린다) 뭐라구?
선주, 구토감과 함께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발이 미끄러진다.
캭 소리 지르는 선주, 자리에 주저앉는다.
소라, 선주에게 다가온다.
소라: (걱정스럽게) 괜찮니?
선주: (겁 내며) 가까이 오지 마!
소라 멈칫한다.
선주: (주저앉은 상태로) 제발 부탁이야.
소라, 선주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주저앉은 선주를 볼 수 밖에 없다.
소라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둘의 다리 밑으로 소용돌이치는 파도의 모습이 그들을 덮칠 것처럼 위협적이다.
54-정은의 집 안
앞의 파도소리가 너무나 컸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은의 집 안은 절간같이 조용하게 느껴진다.
정은이 화장을 하고 있다. 이어서 옷 매무새를 다듬고 정리한다.
정은은 30대 중반으로 단정하고 침착해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으로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흐른다.
초인종 소리. 조금 놀라는 정은, 누구지 하는 기분으로 문을 연다.
문 앞에는 20대 후반의 대학원생 동훈이 서 있다.
정은: 네가 왠 일이니?
동훈: 이거
동훈이 화집을 내민다.
동훈: 운 좋게도 헌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했거든요.
동훈이 내민 건 독일화가 프리디리히 화집.
정은이 화집을 받는다.
동훈: 전에 찾으셨잖아요.
정은: 학교에서 줘도 되는데.
동훈: 방학이잖아요.
정은: 너는 논문 때문에 나오잖아.
동훈: 교수님 핸드폰 항상 꺼져 있고 또 언제 오실 지 몰라서요.
정은; 그래, 어쨌든 들어 와. 먼 데까지 왔으니까.
정은이 문을 열고 화집을 두러 거실 안쪽으로 들어간다.
동훈은 오토바이 헬멧을 옆에 끼고 들어 온다.
동훈: (안을 둘러보며) 어디 나가시는 길이세요?
정은: 응, 뭐 마실래?
부엌 안 쪽에서 정은이 음료수 잔에 주스를 따른다.
동훈: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시내까지 가려면 먼데..
정은, 음료수를 따르다 말고 잠깐 멈칫한다.
음료수를 들고 테이블로 돌아오는 정은.
동훈은 장식장에 있는 사진을 보고 있다. 장식장 위에는 액자 하나만 놓여져 있다.
여은이 체육복 입고 선주, 소라와 함께 찍은 사진.
정은: 이거 마셔.
동훈: (사진을 보며) 여기 가운데가 동생이죠? 교수님이랑 닮았어요.
정은, 동훈을 보다가 액자를 동훈의 손에서 빼서 다시 장식장 위에다 올려 놓는다.
동훈 그런 정은의 뒷모습을 본다.
정은; 금방 나가봐야 돼.
동훈: (음료수를 마시며)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정은: 버스 타고 가면 돼.
동훈: 왜요? 오토바이 무서우세요?
정은: 얼른 마셔. 나가자.
동훈: 교수님…. 제가 싫으세요?
정은, 동훈을 본다.
동훈의 표정은 진지하다.
정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정은: 미안한데, 먼저 나갈래? 옷을 다른 걸로 갈아입어야겠다.
동훈, 정은을 보다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동훈 문 앞에서 뭔가를 말하려는데 정은이 먼저 입을 연다.
정은: 그리고 다음부턴 먼저 전화를 했음 좋겠어.
동훈: (정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네…
동훈, 헬멧을 끼고 정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정은 살짝 미소 지어 보이며 문을 닫는다.
밖에서 오토바이 시동 켜는 소리가 들린다.
정은 생각을 떨쳐버리듯이 입고 있던 원피스의 단추를 풀어 원피스를 벗는다.
슬립차림의 정은, 욕실로 간다.
55-부산의 한 서점
소라의 싸인회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있는 풍경.
소라가 서점 직원들과 얘기를 하고 있다.
선주, 뒤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다.
뒤 늦게 온 어떤 젊은 남자가 소라에게 사인을 부탁한다.
소라 젊은 남자에게 사인을 해 준다.
남자: 너무 예쁘세요.
소라: 고마워요.
남자: 이런 말 기분 나쁘실지 모르지만 혼혈같아요.
소라, 남자를 본다. 그리고 살며시 웃는다.
소라: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남자, 책을 받고도 자리를 못 뜨고 소라를 보고 있다.
선주, 그런 남자를 본다.
56-부산역_ 오후
지훈이 기차에서 내린다, 전에 없이 무거운 표정이다.
57-횟집_ 화장실
거울을 보는 선주, 미묘한 표정 ‘내가 여기서 지금 뭐 하고 있지?’ 뭐 그런.
그러다가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다.
정은이 화장실 칸에서 나오다가 손을 씻고 있는 선주를 힐끗 쳐다본다.
선주 얼굴을 들어 정은을 보면 정은 세면대 물을 튼다.
선주, 화장실을 나온다.
58-횟집_ 저녁
소라가 작은 수첩에 뭔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다.
선주가 소라가 있는 자리로 와서 앞에 앉는데 소라는 집중하느라 선주의 기척을 못 느낀다.
선주, 그런 소라를 유심히 본다.
저쪽에서 들어오는 정은, 소라 쓰던 걸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정은: 미안, 늦었네요.
소라: 안녕하세요, 언니? 연락 드렸던 이소라에요.
정은: 안녕하세요? (선주를 보며) 아까 화장실에서 봤죠?
선주, 자리에서 일어선다.
선주: (당황해서) 안녕하세요?
소라: 정은언니 기억 안 나?
선주의 표정,
암흑.
그 위로 들리는 소리.
여은의 목소리: 선주야, 우리 언니 방 보여줄게, 좋은 거 되게 많다.
계단 올라가는 발자국 소리.
그릇 깨지는 소리.
횟집 주방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선주의 놀라는 얼굴.
정은: (소리 나는 쪽을 보며) 이 집이 유명하긴 한데, 좀 정신이 없네.
소라: 이렇게 불쑥 연락 드려서 놀라셨죠?
정은, 살짝 미소 짓는다. 잔잔한 호수 같은 그런 미소.
소라: 언니, 그때 미대생이었는데 지금도 그림 그리세요?
정은: 아니, 그냥 학생들만 가르쳐요.
정은: 뭐 먹을래요? 이 집이 복국을 잘 하는데.
메뉴 판을 보는 세 사람.
/시간경과/
정은이 얘기를 하면서 앞의 소금통 후춧통을 정돈한다. 열을 맞추듯이.
선주는 정은의 동작을 눈 여겨 본다.
왠지 정은의 표정과 달리 정은의 손동작은 불안하다.
정은: 부산엔 무슨 일로?
소라: 예, 싸인회가 있어서요.
정은: 아~ 싸인회는 잘 끝났어요?
소라: 네.
정은: 바쁜데 이렇게 기억해주고 들러줘서 고마워요.
소라: 아니에요.
이때, 옆 상에 앉아 있던 대 여섯 살 먹은 여자아이가 사과 한 알을 들고 정은의 근처로 와서
정은을 본다.
정은: 어머, 너 몇 살이니?
아이, 대답 없이 멀뚱히 정은을 본다.
정은: 사과 맛있겠다~
아이, 사과를 들고 기우뚱하더니 사과가 바닥에 떨어지자 울음을 터트린다.
당황하는 정은.
옆 상에서 아이 엄마가 와서 애를 어른다.
59-횟집 앞
소라와 선주가 앞에 서 있고 정은이 계산을 하고 나온다.
소라: 잘 먹었습니다.
정은: 뭘요, 그럼 난 저쪽에서 버스 타고 갈게요.
소라: 언니, 같이 타고 가시죠.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정은: 아니 괜찮아요. 집이 시내에서 떨어져 있어서 오래 걸리는데.
소라: 괜찮아요.
소라, 선주를 쳐다보면 선주는 멀뚱히 서 있다가 겨우 ‘네, 그러세요’ 한마디 한다.
60-차 안
소라가 뒷좌석에 타고 정은이 앞 좌석에 탔다.
61-시골 길 _밤
어두워 진다. 어쩐지 정은이 집 가는 길을 잘 찾지 못한다.
허둥대는 느낌으로 이쪽이 아닌가 라며 혼잣말을 한다.
정은: 미안해요, 내가 차로 다니질 않아서.
선주: 예, 괜찮아요.
해는 저물어 가고 차는 헤매고, 선주는 길을 찾으려고 애쓰고 소라는 지도를 본다.
선주는 정은의 불안해 하는 옆모습을 살짝 본다.
62-정은의 집 앞
겨우 집을 찾아서 서는 차.
정은: 괜히 실례가 많았네요. 가는 길은 찾을 수 있겠어요?
선주: 예,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소라: 언니, 그럼 또 연락 드릴게요.
정은, 집 앞에서 차가 떠나는 걸 기다린다.
63-차 안
정은이 집 앞에 서 있는 모습을 헤드라이트가 비추다가 떠난다.
정은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앞에 그대로 서있는다.
소라: 왜 안 들어가지? 무슨 할 말이 있나?
선주, 운전을 하면서 굳어진 얼굴로 소라에게 묻는다.
선주: 너, 왜 여은이 언니 만나는 거라고 얘기 안 했어?
소라, 선주를 쳐다보다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소라: 그게 큰 문제야?
선주: 그래도 내가 알고 만나는 게 중요하지 않아?
소라: 어차피 네가 김지훈씨 대신 온 자린데 그게 뭐 그렇게 문제가 되니?
선주, 할 말이 없다.
소라: 너, 솔직히 말해 봐. 김지훈씨는 네가 여기 온 거 알고 있어?
선주, 대답이 없다.
64-어두운 길을 달리는 차.
숲 속으로 들어섰다. 속수무책.
차는 어둑한 곳에 다다르고, 차의 라이트만으로 의존할 만큼 사방은 깜깜하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차 앞을 스윽 지나간다.
동물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무엇.
/이미지/
씬 51에 나왔던 여은의 얼굴이 다시 반복된다.
흔들리는 여은이의 얼굴. 조금씩 흔들거리다가 많이 흔들거리는.
65-차 안
비명을 지르는 소라. 선주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다.
선주가 핸들을 급하게 돌리는데 차는 무언가에 부딪친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소라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본다.
소라는 선주가 괜찮나 보는데 선주는 넋이 나간 듯이 벌벌 떨고 있다.
소라: 괜찮니?
소라, 선주의 얼굴을 살펴보는데 이마에서 피가 나고 있다.
소라, 놀라서 선주의 이마를 살펴본다.
소라 급하게 티슈를 찾아 선주의 피를 닦으려는데 선주가 소라의 팔을 뿌리친다.
소라, 놀래서 멈칫한다.
소라: 가만 있어 봐, 피 나잖아.
소라, 피를 닦으려는데 선주 소리친다.
선주: 그냥 놔 둬.
소라: 왜 그래?
선주: 도대체 왜 여길 오자고 한 거야?
소라: 뭐?
선주: (감정이 폭발한다. 말을 하다 보니 더 흥분되는) 도대체 왜? 난 이해할 수가 없어.
이제 와서 여은이 언닐 만나서 어쩌자는 건데? 왜 나까지 끌어들여서 이래?
도대체 왜? 넌 정말…
선주, 하려던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흥분해서 차 문을 열고 나간다.
소라, 선주의 행동에 놀라다가 따라 나간다.
66-숲
선주, 화가 나서 숲 쪽으로 걸어간다.
자신의 화를 어떻게 할 수가 없는지 무척 흥분해있다.
선주 자신도 자신이 내는 화의 정도에 놀랄 지경이다. 언제 이렇게 화를 내 본 적이 있던가?
소라, 선주를 급하게 따라간다.
소라: 이선주. 거기 서.
선주, 계속 걷는다. 소라, 뛰어가서 선주의 팔을 잡고 돌려 세운다.
선주: 이거 놔
소라: 왜 이래? 이러다 길 잃어버려. 그만 가!
선주: 제발 놔 둬 좀. 내가 알아서 하니까 좀 놔 두라고.
소라, 돌아서 가려는 선주의 팔을 꽉 잡는다. 선주 발버둥친다.
크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선주: 놔. 네가 뭐라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손 대지마!
소라, 선주의 팔을 잡은 손을 놓는다.
선주 앞으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소라 쪽으로 몸을 돌려서 소리 지른다.
선주: 왜 내 인생에 갑자기 끼어드는 거야? 넌 중학교 때도 그랬어.
너만 없으면 난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 같애!
소라: (기가 막히다) 내가 끼어 들었다고?
선주: 그래, 넌 언제나 이런 식이야. 다 네 걸로 만들어야 속이 풀리지.
그렇지만 난 아냐. 난 네가 끔찍해.
선주, 소라를 증오에 찬 눈으로 보다가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숨이 가쁜 걸음으로.
소라, 선주를 보다가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차 쪽으로 내려간다.
선주는 가는 소라를 보다가 다시 숲 쪽으로 들어간다.
손을 들어 이마의 피를 만져보는 선주, 끈적끈적한 느낌에다 피 냄새가 비릿하다.
그 덕분에 현기증이 나는 선주. 얼마 안 가 어느 나무 밑에 주저 앉는다.
숲이라 무척 춥게 느껴진다. 입김이 나오는 걸 보는 선주.
선주, 하늘을 올려다 보면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지나가면서 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밤하늘엔 밝은 달이 떠서 선주를 비추고 있다.
선주는 잠시 숨을 고르며 앉아있는다.
67-숲, 차 근처
소라가 차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담배를 피고 있다.
차는 어느 나무를 들이받고 서있고,
크게 부딪치진 않았는지 다행히 앞부분만 조금 찌그러져 있다.
위쪽에서 차 있는 쪽으로 내려오는 선주의 모습이 보인다.
소라, 선주를 보며 담배를 핀다.
선주가 차 근처로 왔다.
소라: (담뱃불을 끄며 나지막이) 차는 다행히 크게 이상은 없는 거 같애.
선주, 소라를 쳐다본다.
선주: 너도 봤어?
소라: 뭘?
선주: 뭔가 차 앞을 지나갔잖아.
소라: 글쎄? 들짐승 같은 거 아니었을까?
아까 고속도로에서 본 것처럼 살쾡이 같은 거.
선주: (중얼거리듯) 사람 같았는데…
소라: 뭐라고?
선주: 아니야, 아무 것도.
소라, 선주에게 티슈를 건넨다.
선주, 머뭇거리다가 티슈를 받아 이마의 피를 닦는다.
다행히 피는 멈춘 듯 하다.
다시 차에 타는 선주와 소라.
68-차 안
선주, 차의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선주, 자신의 떨리는 손을 꼭 마주잡아본다.
소라, 선주를 보다가
소라: 이리 나와.
선주, 소라의 말이 이해가 안 된다.
소라: (부드럽게) 운전석에서 나오라구. 내가 운전 할게.
선주: 무슨 말이야? 너 운전 못하잖아? 지훈씨가 너 운전 못 한다고…
소라: 이 상태론 너, 운전은 무리야.
선주, 어쩔 수 없이 운전석에서 나온다.
소라가 운전석에 앉아 차의 시동을 건다.
시동이 걸리자 소라 잠시 심호흡을 깊게 하더니 차를 출발시킨다.
69-어두운 숲 속
소라가 운전하는 차가 그 사이를 달린다.
70-차 안
운전석 옆에 앉은 선주가 소라를 힐끗 쳐다본다.
소라가 선주의 시선을 느끼고 선주를 힐끗 보며
소라: 전에 한번 사고가 난 적이 있었어. 교통사고. 그 이후로 운전을 안 하는 거야.
운전은커녕 앞 좌석에도 못 앉아, 그 덕분에. 그 사고의 기억이 아직도 너무 생생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 하찮게 느껴졌었어, 내가.
선주, 소라를 힐끗 쳐다본다.
소라: 그때 앰블란스에 혼자 실려가는데 쫌 외롭더라. 누가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어. 그 와중에도 혼자 죽기는 싫었나 봐…
프랑스에서였는데 덕분에 반 년 동안 병원에서 글 많이 썼다. 할 일이 없어서.
그런데 그 즈음에 여은이가 나오는 꿈을 꿨어. 날 슬프게 쳐다보는 그런 꿈.
너무 진짜 같아서 깨고 나서도 한참을 그 눈빛을 느낄 수가 있었어.
슬프게 날 보는 여은이의 눈빛. 그 꿈이 단편을 쓰게 만들었어…
그리고 왠지 이렇게 여은이 언니를 만나는 게 큰 숙제처럼 느껴졌었어.
네가 이해할 지 모르겠지만.
선주: (나직하지만 강한 음성) 이해가 안 돼, 아니 이해할 수 없어.
소라: 참 이상하다…
소라, 선주의 이마에 난 상처를 힐끗 본다.
소라: 난 네가 나보다 여은일 더 많이 기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너흰 각별했으니까.
널 만나면 왜 여은이가 그렇게 날 봤는지 알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선주, 외면하듯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본다.
차창에 선주의 얼굴이 비춰 보인다.
71-정은의 집 앞
선주의 차가 정은의 집 앞에 선다.
집 앞에는 정은과 지훈이 서 있다.
소라에게 인사하는 지훈.
선주, 지훈을 본다.
72-정은의 집 안
소라와 정은이 들어온다.
73-차 앞
선주와 지훈이 얘기하고 있다.
선주는 지훈을 보자 이 모든 상황 뒤에 자기 편을 만난 듯이 왠지 안심이 된다.
지훈: 이마는 왜 그래?
선주: 시내로 가는데 길을 잃었어. 그런데 뭔가가 휙 지나가는 거야. 그게 뭔지 모르겠어.
너무 무서웠어. 지훈씨, 우리 지금 서울 가자.
지훈; 지금? 이 늦은 시간에?
선주: (애원하듯이) 조심해서 가면 되잖아, 지금 가자.
지훈: 그게 무슨 소리야? 너답지 않게.
선주: 말 그대로야, 왜 내 말을 안 들어? 내가 가고 싶다잖아.
지훈: 결국 이럴 거면서 그러니까 누가 너보고 이런 일을 벌이래?
선주, 지훈을 쳐다본다. 왜 이 사람은 내 기분을 몰라줄까 왜 내 얘기를 안 들어줄까
그런 심정으로 지훈을 본다.
그러나 지훈은 지훈대로 기분이 상해있어 선주의 기분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말은 하면 할수록 이상한 곳으로 흘러간다.
지훈: 그리고 대체 왜 아무 말도 없이 네 멋대로 행동하니?
내가 여기까지 찾아 오면서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알아?
선주: (지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 때문에 내려온 거야, 아님 소라 때문에 내려온 거야?
지훈: (답답하다) 그게 뭐가 중요해, 지금?
선주: 대답 해.
지훈: (소리 지른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선주; (단호하게) 나한텐 중요해.
지훈: (한숨을 쉬며) 정말 중요한 게 뭔지나 알아? 내가 이번 일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지
얘기했지? 난 네가 내 일을 이렇게 망치는 게 싫어.
선주: 망친다구?
지훈: 자긴 착하잖아. 난 네가 착해서 좋았어, 한번도 네가 날 이런 식으로 속이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선주: 난 착하지 않아, 네가 착각한 것 뿐이야.
지훈: 착각? (화가 폭발한다) 착각이라구? 너 지금 그게 나한테 할 말이야?
넌 미안하지도 않니? 어떻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니?
넌 네가 잘 한 거 같애?
선주 피식 웃는다.
지훈 선주가 웃자 화가 치민다.
지훈: 너, 지금 웃음이 나와? 내가 웃겨?
선주, 대답이 없이 지훈을 똑바로 쳐다 볼 뿐이다.
지훈, 그런 선주의 태도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어쩔 줄을 모른다.
지훈: 내가 여태껏 알아 온 이선주가 이런 사람이었어? 대체 너 정체가 뭐야?
선주, 지훈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지훈 선주를 잡고 선주는 그런 지훈을
뿌리치느라 서로 치고 받는 형상이 된다.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선주. 지훈 역시 흥분해서 선주를 잡고 놔 주질 않는다.
소라와 정은이 선주의 비명에 놀래 집 앞에 나와 본다.
소라가 둘의 몸싸움을 말린다.
정은은 어찌할 바를 몰라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겨우 멈추는 두 사람.
소라: (단호하게) 지훈씨, 오늘은 그만 가세요.
지훈, 소라를 보다가 선주를 보는데 선주는 정은이 이미 정은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 가고 있다.
74-욕실 안
선주의 얼굴이 보인다.
선주가 욕실에 앉아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있다.
정은이 차를 끓이는지 부엌에서 나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고, 소라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정은: (off) 갔어?
소라: (off) 예,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온대요. 선주는요?
정은: (off) 욕실에
소라: (off) 언니, 밴드 같은 거 있어요?
웅웅거리는 소리, 선주 귀를 막는다.
암흑
그 위로 들리는 소리
여은; 너희에게 꼭 할 말이 있어. 오늘은 집에 일찍 가야 하니까 내일 아침에, 수업 시간 삼십 분 전에 여기서 보자.
여은이가 달려가는 소리.
선주: 여은아!
여은: 내일 봐~
75-이층 방
계단을 올라가는 세 여자.
정은이 선주와 소라를 이층 방으로 안내한다.
이층의 작은 방은 마치 누군가 살고 있는 것처럼 꾸며져 있다. 소녀의 방.
소라와 선주가 방을 둘러본다.
샤갈의 ‘생일’ 그림액자가 방에 걸려있다.
그림을 보는 선주.
선주의 이마엔 밴드가 붙여져 있다.
정은이 자리를 깔아준다.
정은: 불편하겠지만 둘이서 여기서 자야겠다. 그럼.
정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한다. 소라, 정은에게 말을 건넨다.
소라: 언니, 아까 아래층에서 봤는데 여은이랑 저희 사진이 액자에 있던데요?
그런데 다른 사진은 아무 것도 없던데…
정은: 그게 왜?
소라: 아니 좀 이상해서요.
정은; 뭐가?
소라: 언니한테도 다른 삶이 있을 거 아니에요?
정은: 다른 삶이라?
침묵
소라: (조심스럽게) 언닌 왜 서울에서 살 지 않아요? 혹시 그 사고 때문인가요?
정은: 글쎄… (화제를 바꾼다) 벌써 12시가 다 됐네. 이제 자야지.
정은이 일어선다. 소라도 따라 일어서며
소라: (절실하다) 언니, 저 사실 언니 때문에 부산에 온 거에요.
정은, 소라를 돌아본다.
정은: 나 때문에?
소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언니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어요.
선주; 너 왜 그래?
정은: 무슨 기분? (낯설게) 뭘 알고 싶은 거야?
소라: 언니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은: (차분하게 말을 자르며)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글 쓰는 사람이면 이렇게
맘대로 찾아와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얻고 싶은 것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해?
선주: (소라에게) 이제 그만 해.
소라: (지지 않고) 그때! 언닌 왜 부모님과 함께 이민을 가지 않은 거죠?
그때 여은이가 얘기해 줬어요, 이민을 간다고.
그리고 자세한 얘기를 하려던 거였는데…
정은: (마음 속에서 뭔가가 무너진다) 여은이가 그런 얘길 했어? 우리 집이 이민 간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소라.
정은, 무언가 심한 동요를 느낀다.
정은; 우리 집은 이민을 가려고 한 적이 없어. 생각해 보면 여은인 항상 그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였어…. (이어서 어렵게 말을 꺼낸다)
엄마가 암 진단을 받고 시한부로 몇 개월 남긴 상태였거든. 아빠나 나나
엄마 일에 신경 쓰느라 여은일 챙길 여력이 없었는데 그러던 중에
그 사고가 난 거였어.
사고 전 날(여기서부터 말을 잇기가 어렵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잇는다)
내가 여은일 많이 혼냈어. 철이 없다고. 엄마는 곧 죽을 거라고 그런데
넌 왜 그걸 모르냐고… 아직 애였는데 그 아이한테 끔찍한 말을 했었어.
소라, 선주는 숙연하면서도 놀라는 마음으로 정은을 본다.
정은: 난 그 사고가 있던 날, 여은이와 함께 죽었어.
여기 너희가 보고 있는 건 껍데기에 불과해.
정은의 얼굴 그 위로
암흑
그 위로 들리는 소리
여은; 너희에게 꼭 할 말이 있어. 오늘은 집에 일찍 가야 하니까 내일 아침에, 수업 시간 삼십 분 전에 여기서 보자
여은이가 달려가는 소리.
화면 천천히 밝아지면 과거의 장면들이 하나씩 보여진다.
76-여은의 집 _과거
여은: 선주야, 우리 언니 방 보여줄게, 좋은 거 되게 많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도 보여줄게.
선주: 넌 언니 있어서 좋겠다.
여은: 응, 우리 언닌 곧 유명한 화가가 될거야.
이층으로 뛰듯이 올라가는 여은과 선주.
77-언니 방 _과거
선주에게 샤갈 화집을 보여주는 여은.
샤갈의 그림 ‘생일’을 함께 보며 웃는 둘.
여은, 선주에게 청포도사탕을 건넨다.
선주 사탕을 받고 껍질을 까서 먹는다.
여은: 난 있잖아, 포도는 싫은데 청포도사탕은 맛있더라.
선주: 난 포도 맛있는데.
여은: 응, 울 언니도 내가 이상하대. 못 먹는 게 있을 수도 있지 뭐, 그치?
선주: 응. 나도 당근 싫어.
여은: 그래, 맞아 너 당근 김밥에서도 빼고 먹잖아.
선주: 응, 맛이 너무 이상해.
킥킥 웃는 여은.
78-중3 교실, _과거
15살 여자아이들.
담임선생님이 전학생 한 명과 교실에 들어온다.
시골에서 온 듯한 촌스러운 아이, 그러나 얼굴만은 정말 예쁘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에 눈망울이 크고, 날씬하다.
칠판을 지우고 있던 여은이 소라를 본다.
지우개를 털고 들어 오던 선주는 여은을 보다가 여은이 쳐다보는 소라를 본다.
소라는 바닥에 눈을 내리깔고 담임 옆에 서 있는다.
여은과 선주는 자신들의 자리로 가서 앉는다.
칠판에 ‘이소라’ 라고 쓰는 담임.
담임: 이름은 이소라라고 하고 전학 왔으니까 잘 해줘라.
저쪽 자리 비었으니까 그리로 가서 앉아.
CUT TO;
쉬는 시간 벨소리가 울리자 담임은 나가고 아이들은 매점 가느라 정신이 없다.
도시락 가방을 들고 여은이 자리로 오는 선주.
여은: 선주야, 우리 소라랑 같이 밥 먹자, 그래도 되지? 왜 싫어?”
어색한 어린 선주의 표정.
79-문방구 _과거
문방구 앞에서 여은이 빨간색 물방울 머리띠를 들고 보고 있다.
선주가 뒤에서 그런 여은을 보고 있다.
80-하교길 _과거
여은, 소라와 집에 가는 길. 선주의 운동화 끈이 풀렸다.
선주가 앉아서 끈을 묶는 사이 여은과 소라는 먼저 앞으로 가고 있다.
끈을 묶다가 손 잡고 걸어가는 여은과 소라를 낯설게 쳐다보는 선주.
소라의 머리에는 여은이 들고 있던 빨간색 머리띠가 둘러져 있다.
마치 모르는 아이들 같은 느낌 그리고 홀로 남겨진 기분.
81-수돗가 _과거
온동장에 있는 수돗가에서 양말을 벗고 씻다가 넘어질 뻔 하는 체육복을 입은 어린 선주.
옆에 서 있던 여은이 선주를 잡아준다.
여은을 향해 웃어 보이는 선주, 이때 옆에서 소라가 선주에게 물을 뿌린다.
곧 이어 물싸움이 되서 난장판이 된다.
82-체육대회 _과거
반팔 체육복을 입고 달리는 선주 열심히 달려 여은에게 바톤을 넘긴다.
그러나 바톤은 여은의 손에 닿지 못하고 운동장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여은이 뛰다가 멈춰 서서 그런 선주를 쳐다본다.
선주를 보는 여은의 얼굴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선주, 이상하다는 듯이 여은의 얼굴을 보는데,
그러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는 듯 땅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거에 휩쓸려 옆에서 지켜보던 소라도 바닥에 엎어진다.
두려운 얼굴로 서로의 손을 꼭 잡는 여은, 선주, 소라.
83-중학교 운동장 수돗가 앞 _과거
여은; 너희에게 꼭 할 말이 있어. 오늘은 집에 일찍 가야 하니까 내일 아침에,
수업 시간 삼십 분 전에 여기서 보자”
여은이가 달려간다.
선주: 여은아!
여은: (뒤 돌아 보며) 내일 봐~
소라와 선주는 서로를 쳐다 본다.
소라; 여은이네 이민 간대.
선주; 누가 그래?
소라; …쫄면 먹으러 갈래?
선주; 누가 그러냐니까? 여은이가 너한테 말해줬어?
소라; 안 먹으려면 관둬라.
소라는 먼저 가려고 한다.
선주; 야! 이소라!
소라, 뒤를 돌아보며
소라; 너, 왜 그래? 왜 내 이름만 항상 성 붙여서 불러?
여은이한텐 정여은이라고 안 부르잖아.
소라의 의외의 말에 당황하는 선주.
84-그 날, 수돗가 _과거
다음 날, 등교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수돗가에서 여은과 선주를 기다리는 소라.
아이들이 하나 둘씩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점점 늘어나는데 여은과 선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85-그 날, 교문 앞 _과거
선주는 등교 시간에 맞춰 교문 앞에서 여은을 기다린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여은은 나타나지 않는다.
86-교실 안 _과거
교실 안이 웅성거린다.
소라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불안한 얼굴로 주위의 아이들이 떠드는 얘기를 듣는다.
여은의 자리는 비어있다.
여은이 자리 말고도 듬성 듬성 자리가 비었다.
담임선생님이 들어 와 출석을 부른다.
늦게 교실로 들어오는 선주.
선주가 여은과 함께 들어 오는지 반색을 하고 쳐다 보는 소라.
선주는 소라의 눈길을 피한다.
정여은과 몇 명의 아이들이 없다.
선생님들은 교무실로 모이라는 방송이 나오자, 담임선생님은 교실을 나간다.
선생님이 나가자 아이들은 삼삼오오 친한 아이들과 모여서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거 진짜야?
-그래 오다가 사람들이 얘기하는 거 들었어.
-어떻게 다리가 무너지냐?
-말도 안돼!
-16번 버스도 그 다리 건너오지?
-오지 않은 아이들이 다 16번 버스를 타는 동네 애들이야.
갑자기 누군가 울음을 터트린다.
울고 있는 아이 옆에서 위로하는 아이들.
소라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선주에게 다가간다.
소라: 어떻게 된 거야? 왜 여은이랑 너랑 수돗가에 오지 않았어?
우리 삼십 분 일찍 만나기로 했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선주: 모르겠어. 나는 모르는 일이야…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선주,
소라는 그런 선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여은의 책상서랍 안에는 여은이 즐겨 먹던 청포도 사탕 봉지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87- /화면/
브람스의 레퀴엠이 흘러 나오고
그 위로 텔레비전 화면이 오버 랩 된다.
(신문 기사의 사진이나 자료사진들로 오버랩 시킬 수도 있다)
끊어진 다리 위를 나는 헬기, 헬기에서 바라 본 성수대교 다리 모습.
뚝 끊어진 다리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철골이 드러난 상판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승용차, 널부러져 있는 버스.
끊어져 내린 다리 부분에는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수십 명의 경찰과 구조대원들이 희생자를
찾으려고 버스차체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다리 위에 서 있는 크레인, 구조요원들. 구경꾼들. 오열하는 가족들.
강 위에 떠있는 구조 선박들.
날이 저문 뒤, 끊어진 다리 위에 아슬하게 서있는 가로등 그리고 그 위에 걸려있는 보름달.
88-거리 _과거
교복 차림으로 달리는 어린 선주, 도망치듯 정신 없이 달리는 선주. 울고 있었던 걸까?
그 위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89-이층 방, 아래층_ 꿈, 기억
사탕껍질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는 선주.
거리를 달리던 꿈을 군 건지 옛 기억이 떠오른 건지 선주의 눈가에 눈물이 말라있다.
선주는 소리가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 와 본다.
정은이 청포도 사탕 봉지에서 사탕을 꺼내 그릇에 담고 있다, 괴이하다.
사탕껍질을 벗겨 사탕을 꺼내 입 안으로 집어 넣는 정은,
사탕을 어그적 어그적 씹어 먹는다.
그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크게 들려 자신의 귀를 막는 선주.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정은은 계속 사탕을 씹어 먹고 있고,
윗층에서 어린 여은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은: 언니, 내가 받을게!
어느새 어린 여은이 2층에서 밝고 명랑한 발걸음으로 내려 와 전화를 받는다.
선주는 여은의 모습을 보고 놀랜다.
그러나 여은은 선주의 존재를 못 느낀다.
어린 선주(off): 여보세요? 여은이니?
여은: 응,
어린 선주(off): 집에 있었네?
여은: 응. 오늘 피아노학원 안 갔어. 선생님이 감기 걸렸대.
어린 선주(off): 너네 언닌줄 알았다, 목소리가 너무 비슷해~
여은: (웃으며) 다들 헷갈려 해. 넌 이제 구별 할 때도 되지 않았니?
어린 선주(off): 그래서 맞췄잖아.
여은: (웃으며) 알았어, 근데 왜?
어린 선주(off): 응, 저기.. 내일 소라가 일찍 올 수가 없대.
그러니까 등교시간에 맞춰서 교문 앞에서 보자.
여은: 그래? 무슨 일 있대?
어린 선주(off): 아니 그런 건 아니구.
여은: 그래. 알았어.
어린 선주(off): 그래, 그럼 내일 봐.
전화를 끊으려는 선주, 여은 다급히 선주를 부른다.
여은: 선주야
어린 선주(off): 응, 왜?
여은: 저기…
어린 선주(off): 응?
여은: 아니야, 내일 만나서 얘기할게.
어린 선주(off): 그래, 잘 자.
여은: 안녕
여은, 전화를 끊고 잠시 정은 쪽을 보더니 다시 2층으로 뛰듯이 올라간다.
지금의 선주는 거실 한 쪽에 서서 이 모습을 다 보고 있다.
그 위로 들리는 정은의 목소리.
정은: (다급하게) 이리 좀 내려와 봐.
90-아래 층 현관
정은이 현관의 불을 키고 문을 열어 놓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놀라서 내려오는 소라.
정은: 세상에, 어디서 왔을까?
91-이층 방
선주는 위층에서 정은이 하는 말을 듣는다.
이미 옆 자리에 소라는 없다.
92-아래 층, 마당
아래층으로 내려 오는 선주.
현관에 서서 소라와 정은이 보고 있는 마당을 보면,
그곳엔 어디서 왔는지 고라니 한 마리가 마당의 풀을 뜯어먹고 있다.
안개가 낀 새벽이다.
정은이 자신도 모르게 고라니에게 다가간다.
정신 없이 풀을 뜯어먹는 고라니.
정은이 다가가자 고라니는 도망가지 않고 정은을 본다,
마치 사람처럼 잠시 정은을 응시한다.
자신을 보는 고라니를 보다가 정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정은: 안녕?
정은은 ‘안녕’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다.
정은의 울음소리가 커지자 고라니가 도망가듯 마당 저쪽으로 간다.
정은: 가지 마, 가지 마…
고라니는 정은이 움직이자 뛰듯이 마당 끝으로 달아난다.
주저앉아 우는 정은.
정은: 어떡해… 어떡해… 여은아, 미안해, 언니가 미안해…
무언가 마음 속의 무언가를 겨우 끄집어내듯이 쏟아내는 정은.
그런 정은을 소라가 가만히 끌어 안는다.
정은은 소라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는 듯이 발버둥치다가
소라가 더욱 꼭 끌어 안고 위로하자 천천히 잠잠해진다.
선주는 이 모든 것을 보고 서있다. 정은에게 차마 다가가지도 못한다.
이때 지훈의 차가 정은의 집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고라니는 차 소리에 놀라서 어느새 훌쩍 뛰어 마당 끝으로 사라진다.
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고라니.
반대편에선 지훈이 차에서 내려 이들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지훈은 이 광경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왜 추운 날, 저 여자들이 마당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지를.
그제서야 왠지 정신이 든 선주는 고라니가 사라진 마당 쪽으로 걸어간다.
처음으로 선주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걷잡을 수 없는 기분이 되는 선주,
그러나 고라니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선주는 당황스럽고 난처한 기분으로 그리고 어쩐지 동의를 구하는 기분으로
소라와 정은의 모습을 돌아본다.
더구나 선주는 더 이상 울음소리를 감출 수 없다.
지훈은 그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
태양이 천천히 떠오른다.
93-마당, 아침
마당에 세워 둔 차에 지훈이 시동을 걸고 있다,
소라가 선주에게 와서
소라: 잠깐만.
선주, 소라와 한 쪽으로 간다.
소라: 중학교 때 나 처음 봤을 때 기억 나?
선주, 고개를 젓는다.
소라: 여은이가 날 처음 본 게 아니야, 선주 너였어.
선주 소라를 보면
소라: 난 울고 있었어, 전학 온 날. 아이들이 혼혈이라고 놀려서 화장실에서 울고 있었어.
그때 네가 대걸레를 들고 들어 왔어.
/과거의 모습이 끼어든다/
대걸레를 들고 들어 온 선주, 울음소리에 화장실 문을 열어본다.
소라 양 팔에 얼굴을 파 묻고 흐느끼고 있다.
선주: 너 여기서 뭐 해?
선주의 목소리에 동그런 눈에 곱슬머리 소라가 겁에 질린 얼굴로 선주를 올려다 본다.
선주, 소라의 얼굴을 보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선주: 사탕 먹을래?
선주가 주머니에서 청포도사탕을 꺼내 소라에게 건네면 소라는 머뭇거리다가 눈물을 닦고
사탕을 받는다.
선주: 난 선주야, 이선주.
소라, 사탕을 만지작거리며 선주를 본다.
소라: 난 소라야, 이소라.
선주: 이소라? 어? 우리 이름 좀 비슷한 거 같지 않니?
소라 그제서야 선주를 향해 웃어 보인다.
화장실 밖에서 선주를 찾는 여은의 목소리가 들린다.
94-차 안
창 밖을 바라보는 선주의 얼굴 위로 들리는 소라의 목소리.
소라: 난 너랑 정말 친해지고 싶었어, 여은이보다 더, 선주 너랑. 난 네가 좋았어.
지훈의 옆자리에 앉은 선주는 창 너머로 소라와 정은을 본다.
손을 들어 보이는 소라. 선주 가볍게 인사한다.
떠나는 차. 둘 다 말이 없다.
95-거실
소라가 정은의 찻잔에 물을 따른다. 정은이 그 잔을 받는다.
소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다가 생각을 바꿔 담배를 탁자에 내려 놓는다.
정은: 담배 펴도 돼. 재털이 줘?
소라: 아니오… 이제 담배를 끊어야 할까 봐요.
정은: 왜 갑자기?
소라: (웃으며) 글쎄요,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요.
정은: 쉽진 않을텐데.
소라: 예, 쉽진 않을 거예요. 그래도 해 봐야죠.
정은, 소라의 얘기를 듣고 창 밖을 본다.
정은: 비가 올 거 같애.
소라: (창 밖을 보며) 그러게요.
창 밖을 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96-고속도로, 차 안
하늘이 어둡다. 그 밑으로 서울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표정 없이 표지판을 보는 선주. 차창으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빗방울을 보던 선주, 창을 열고 손을 내밀어 비를 느낀다.
잠시 후, 선주는 창을 닫고 지훈에게 말한다.
선주: (물기 없는 목소리) 우리 헤어져….
지훈, 선주를 힐끗 보다 다시 대답 없이 앞을 보고 운전만 한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주는 개의치 않는다.
선주: 생각해 보니까… (말을 하나하나 고르듯이 차분하게) 아주 잘 생각해보니까,
난 널 사랑했던 게 아니야. 그저 세상에 홀로 남겨지기가 싫었던 거야.
단지 그뿐이야.
지훈: (중얼거리듯) 다들 미쳤어.
신경질적으로 와이퍼를 작동시키는 지훈. 와이퍼 움직이는 소리만 들린다.
선주, 창 밖을 본다.
지훈의 차는 신호에 걸려 멈춰 선다.
선주, 갑자기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지훈은 놀래서 선주를 향해 소리지르지만 선주는 아랑곳없이 정체되어 있는 차 사이를
빠져 나간다.
지훈은 차 밖으로 나와 보는데 신호가 바뀌어 클랙션을 울리는 차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차에 탄다.
비를 맞고 걸어가는 선주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편해 보인다.
살짝 웃고 있는 거 같기도 한 표정.
길 끝에는 어두운 하늘 밑으로 복잡한 도시가 시작되고 있다.
97-환상
등교시간 전이라 교정에는 아무도 없다.
약속시간에 맞춰서 수돗가로 온 여은과 선주.
수돗가에 미리 온 소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여은은 빙그레 웃으며 선주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인다.
소라도 무슨 얘긴지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여은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데 정확히 무슨 얘기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때, 수업 벨 소리가 울리자 셋은 웃으며 누가 먼저 교실에 도착할 지 내기하며 뛴다.
찬란한 햇살 아래 밝게 빛나는 세 여자아이들의 뛰는 모습이 보이며
화면 어두워 진다
98-김밥집_ 여름
천천히 화면 밝아지면 텔레비전 화면에는 동물의 왕국이 나오고 있다.
사슴류의 동물들이 큰 눈망울로 화면을 응시하다가 무리로 뛰어 달린다.
식당에 켜 놓은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사슴 무리를 보는 선주.
선주는 은행원 유니폼을 입고 혼자서 김밥을 먹고 있다.
머리가 길었는지 조금 다른 모습이다.
김밥접시에는 김밥 두어 개와 선주가 빼 놓은 당근만 몇 개가 남겨져 있다.
이때 물을 따라 들고 은지가 자리로 온다.
은지: (선주가 남긴 당근을 집어 먹으며) 오늘도 무지 더울 거 같은데.
선주; 그러네.
은지: 어디 섬 같은 데로 휴가나 갔음 딱 좋겠다~
선주, 창 밖을 본다.
99-식당 앞, 거리
식당 밖으로 나온 선주와 은지는 식당 앞에서 잠시 태양의 광선에 눈을 찡그린다.
그러다 그들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직장으로 돌아가는 회사원들의 행렬 사이로 들어간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비슷비슷해서 그들은 금새 그 안으로 파묻혀 버린다.
햇빛 쏟아지는 서울 시내 한복판 그 풍경과 소음 위로
엔딩 크레딧 올라간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