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박사학위논문 구두시험후 심사교수님들과)
독일 튀빙겐대학 유학과 나의 신학의 학문형성
내가 잊지 못할 은인 세분이 있어 나의 독일 유학생활은 성공적으로 시작되었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들이셨다. 먼저 한분은 나의 독일어를 가르쳤던 독일인 베로니카 선생이시다. 그는 한국 세검정에서 호만에움이라는 독일어 학원의 독일어 회화 선생님이셨다. 이 학원이 설립되기까지는 독일인 호만이라는 분이 나주 비료공장의 기술자로 오셔서 가난한 학생들을 모아 독일어를 가르치면서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유학을 가서 훌륭한 학자가 되고, 사회저변에서 작고 큰일을 담당하는 훌륭한 인재를 양육하셨다. 그중에 한분이 김규철 원장이신데 호만에움이라는 독일어 학원을 창립하셔서 어학교육을 통하여 유학생들을 많이 배출하여 공헌하신바 크시다. 내가 이 학원에 첫 입학을 한 것은 1981년이었고, 특히 베로니카 선생님을 따르게 된 것은 매 시간마다 친하게 가르쳐 주셨고 발음도 교정하여 주셨으며, 인간적으로 서로 식사에 초대해 주셨고, 독일의 음식문화와 정보를 상세하게 안내해 주셨다. 힘든 나의 목회생활을 하면서 잘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어학실력을 독일어에 자신감을 갖게 하고, 독일어를 배우는 데는 여간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었지만 독일에 호감을 갖게 하여 독일 유학의 꿈을 실현시켜주었다. 그럴 때마다 독일어를 이해하는 데는 베로니카 선생님의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선생으로서 보다는 일상 친구처럼 거의 매일 수업이 끝나면 같이 식사하고 차 마시면서 나의 독일어 실력은 늘어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독일 음식을 가르쳐 주겠다고 우리 부부를 마포에 세 들어 살던 자기 집으로 저녁을 초대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때 바깥 날씨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던 매서운 어느 한국의 겨울 날씨였다. 우리 부부는 조그만 감귤을 사가지고 베로니카 집에 들어서니 통나무 한옥 집의 문간방에 세 들어 사는데 방바닥은 연탄이 꺼져 차갑기만 하고, 창호지를 바른 들창문은 구멍이 뚫려 찬바람이 세차게 신혼부부의 침실을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독일식 빵에 딸기 쨈을 발라 커피 한잔을 곁들어 내 놓는 데 김치찌개에 습관 들여온 나는 넘어가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촛불이 달구어 오면서 매섭게 몰아치는 찬바람이 내 몸에 어느새 녹아내리며 확 쏟아지는 울음은 가난한 이 신혼부부를 동정해서가 아니고 어렵게 사는 이 부부의 순박한 온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받은 한 달의 월급봉투를 아내 몰래 책상위에 얹어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마음이 홀가분하고 기쁜지 – 성탄 찬송을 부르며 아내를 포옹하니 영문도 모른 아내가 “당신 갑자기 왜 실성거리냐”고 말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 유학을 하여 튀빙겐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에도 북부 독일 필데쉬타트가 그의 고향인데도 먼 거리를 마다 않고 남쪽 튀빙겐까지 오셔서 지도해주시고 격려해주신 고마운 분이셨다. 우리는 방학이면 오고 가고 편지도 교환하고 “나도 이제는 독일 사람이 되어 가는 구나”하고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학기가 끝나 가는 나에게 북부독일에 계시는 베르니카 선생께서 북부 독일로 나를 초대해 주셨다. 독일 북부 어느 작은 시골 기차역에 오후 6시쯤 도착하니 온통 안개가 자욱이 끼어 마치 꿈나라를 헤매는 듯 참으로 아름다운 독일 시골 역 풍경이었다. 벌써 그녀는 벤냐민이라는 사내아이를 낳아 잘 키우고 있었는데 벌써 나이가 7살이었다. 그런데 마중 나온 베로니카는 어느 독일남성을 데리고 와서 자기 남자 친구 한스 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자초지종을 물으니 자기 한국 남편과 이혼하고 그 남편은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불란서로 갔고 한 학기에 한 번씩 아들 베로니카를 면회하기 위해서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주의를 주는 것이다. “한국식으로 남자 친구하면 정부로 생각하는데 이 남자친구는 정부가 아니고 결혼하자고 끊임없이 구애하며 쫓아다니는 홀아비”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리하며 강직하고 일방적이어서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사는 집에 도착하였다. 저녁을 독일식 살라드에 빵과 따뜻한 커피를 들고나니 어느새 나도 “독일음식에 푹 배여 가는 구나”하고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데 잠자리가 문제가 아닌가 안방과 거실뿐인 이 집에서 어떻게 베냐민과 베로니카, 그리고 그녀의 남자 친구 한스와 잠자리를 할 것인가? 나도 어느새 한국식으로 다같이 자면 될 것을 독일식으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먼저 베로니카가 제의를 해오는 것이다. 나와 벤냐민은 안방에서 자고 베로니카와 한스는 거실에서 같이 잘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걱정하는 것은 나인데 거침없이 말하는 베로니카가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걱정하지 말라는 뜻은 한국식은 같이 자면 여자는 남자에게 굴복 당하지마는 독일은 같이 자도 여자가 거부하면 로 건드리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이 되어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많은 긴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그녀의 남자 친구 한스도 무뚝뚝하긴 하지만 많은 진실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특히 나의 박사학위논문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신학전공이 아닌 그가 어떻게 이렇게 신학전공 하는 사람들보다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독일은 기독교가 국교(Volks Kirche)이니까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 교육과 예전의식에 관습 되어졌으니 국민들은 자연히 신학적 지식이 풍부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세계 많은 민족들이 일치를 위해서 어떻게 하나를 지향하여 정체성을 확보해 나갈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성과 자연의 피조성에서 그리고 신의 기록된 말 속에서 믿음과 체험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은 각자 고유의 문화공유 속에서 보편적 일치를 이루어 가야한다는 것이다. 한스는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고 나는 많은 부분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나를 위해서 걱정을 하는 것이다. “학위를 마치고 가족식구를 데리고 어떻게 갈 것인가”고 묻는 것이다. 잠시 우리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한스는 조금 기다리라고 하더니 밖으로 나간지 20분 후에 신문뭉치에 싼 두툼한 돈 뭉치를 내 놓았다. “이것이면 충분히 뉴욕을 거쳐 당신이 원하는 서울까지 갈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받아본 뭉치 돈 앞에 벌벌 떨고 있는 나에게 한스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독일에서 독일어로 논문을 쓴 것은 큰 사건이니 하나님이 너를 보호해 준 것이다. 신이 나를 통해 당신에게 선물을 준 것 같구나! 갚을 생각 하지 말고 당신도 돌아가서 이와 같이 남을 돕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나는 기차에 오면서 한스가 나에게 베풀어 일련의 일을 생각을 했다. “혹시 베로니카와 나와의 사이를 연인으로 착각하고 이것 먹고 떨어져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교감이 내 마음을 괴롭혔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는 껄걸 웃으면서 “왜 당신은 꼭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느냐”고 꼬집었다. 옛날에 베르니카에게 당신도 생활비를 주었지 않느냐고 회고시키려 했다. 그렇다 아내의 말대로 그것은 되갚음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되갚음이 아니라 독일 어느 순박한 사랑의 주인공 한스 라는 친구의 선물이다. 집에 와서 뭉치 돈을 풀어 세어보니 자그마치 2500불이었다. 이것으로 충분히 한국으로 돌아갈 우리 식구들의 비행기 표가 되는 것이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부질없는 걱정을 한 나에게 하나님이 준비하신 크신 은혜가 여기서 발생할 줄이야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 나의 삶과 신앙 그리고 학문 형성은 5-4)에서 계속됩니다.
베로니카 선생님과 한스님의 도움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돕는 천사였네요. 후곡교수님의 글은 개인에게 역사하시는 신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회를 거듭할수록 후곡교수님의 글은 흥미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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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비료공장에 기술자 이신 호만씨가 나주에 학교도 설립하여 졸업생을 독일로 유학시켰는데 나도 그 학교를 나와서 유학은 못가고 군 제대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81년에 2년을 독일에 곳곳을 다니면서 향상교육을 이수한 기회가 있었는데 글을 읽으니 감회가 새롭군요.. 독일 현지 어학원에 만하임에서 여선생이 생각나기도 하구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히시며 독일 유학까지 가셔서 학문을 닦고 익히셨네요.휼륭하십니다.늘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위 금식 님
인연이 깊습니다.
그런 일이 있어셨네요.
주님의 은혜와 앞선 예비하심이 감사 할 따름입니다.
碧泉 위윤기 그 때가 겁없었나봐요.. 수업이 없을 때 기차여행으로 이태리랑 폼페이 여행.. 베네룩스여행 등과 동독안에 있는 서베르린에서의 교육이랑 독일 도시들을 열심히 다니며 배우고 구경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