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인 1860년대 우리나라는 대내외적으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어요. 왜 그랬냐고요? 안으로는 외척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백성의 삶이 말이 아니었고, 밖으로는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 야욕이 물밀듯이 밀려오며 조선 사람들을 위기에 빠지게 했어요. 이러한 시절에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두 계보의 사상이 있었으니, 하나는 전통 체제를 더욱 굳건히 만들고자 했던 위정척사이고, 다른 하나는 개화만이 살길임을 주장하며 문호 개방을 서둘렀던 개화사상이에요.
이들 사상은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측면에서는 입장이 같았어요. 하지만 주체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한 해법은 상이하게 달랐어요. 척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선의 기존 가치관인 성리학 중심의 전통 체제를 고수하려 했어요. 반면에 개화사상가들은 하루라도 빨리 서양 근대 기술 문명을 받아들여 서양 나라들과 대등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척사파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이항로 · 기정진 · 최익현이 있었으며, 개화사상을 대표하는 사람들로는 박규수 · 유홍기 · 김옥균 등이 있었어요. 이런 여러 사람 중 양대 세력을 대표하면서도 역사의 라이벌이라 부를 만한 맞수가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이번 시간 주인공 최익현과 유길준이에요.
최익현과 유길준은 나이로 보아서는 라이벌이 될 수 없어요. 척사파의 거두 최익현이 유길준보다 무려 스물세 살이나 많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라이벌인 이유는 조선 말기의 대립적인 두 사상, 위정척사와 개화사상을 대변하는 인물이자 을미개혁(1895) 당시 ‘머리카락을 자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놔두고 치열하게 난상 토론을 벌인 당대 최고의 논객이기 때문이에요.
위정척사사상의 상징, 최익현
최익현은 위정척사운동의 시조 격인 유학자 이항로 밑에서 공부를 한 사람으로 서양 문물의 수용에 반대하며 일제 침탈에 맞짱을 뜨는 일에는 언제나 최선봉에 섰던 유학자예요. 그가 성리학을 공부하던 시기는 세도정치가 한창 기승을 부렸던 19세기 전반으로 이 당시 조선은 내적으로는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의 원성이 극에 달해 있었고, 외적으로는 서양 각 나라가 조선을 삼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요. 이러한 시대에 최익현은 성리학 공부에 최선을 다하여 23세 되던 해인 185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어요.
철저한 성리학자이자 대쪽같은 선비였던 그는 출세보다는 정의감에 불타서 불의를 보면 몸을 사리지 않고 직언을 하고는 했어요. 집권자였던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자 유학자의 입장에서 그 부당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1876년 일본의 강요로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위기에 놓이자, 대궐문 앞에서 이를 저지하기 위한 데모를 벌였어요. 또한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이에 극구 반대하며 단발령을 시행하려 한 유길준과 치열한 논리 대결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우리 외교권을 일본이 강제로 빼앗아 가자, 최익현은 을사오적 처단을 강하게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구국 항일 투쟁의 최일선에서 국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어요.
을사조약?
제2차 한 · 일협약, 을사늑약으로도 불린다. 이 조약의 핵심 내용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허락을 받아야만 다른 나라와 외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찬성을 표한 박제순 · 이지용 · 이근택 · 이완용 · 권중현은 이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불린다.
하지만 말이에요, 일본은 자신들이 그려 놓은 로드맵대로 조선 땅을 야금야금 침범해 왔고, 급기야는 1907년에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며, 군대까지 해산시켜 버렸어요. 이때 최익현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직접 자기 손으로 일본 놈들을 우리 땅에서 쫓아내려 순창에서 싸움을 준비했어요.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온 부대는 일본군이 아닌 대한제국 관군이었어요. 최익현은 ‘차마 우리 민족끼리 싸우는 일은 하지 못하겠다’고 탄식하며 자진하여 무기를 내려놓고 의병 부대를 해산시켰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눈엣가시 같던 최익현을 대마도로 유배시켰으며, 최익현은 일본 땅에서 난 음식물은 일절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에 단식투쟁을 하다가 한 많은 일생을 마쳤어요.
개화사상의 아이콘, 유길준
한편 유길준은, 최익현이 위정척사의 길을 한창 걸어가던 시절인 1860년대 후반 개화사상 전파에 여념이 없던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며 개화 공부를 막 시작한 열혈 청년이었어요. 중상적 실학사상가인 박지원의 손자였던 박규수는 그때 당시 이미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으나, 그는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향후 우리나라 개화파를 이끌어 갈 재목들인 오경석 · 유홍기 · 김옥균 · 서광범 · 박영효 등을 길러 냈어요.
유길준은 김옥균 등과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함께 공부하며 개화에 눈뜨게 되는데, 그가 일본의 비약적 발전상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은 조사시찰단 단원으로 일본에 가면서부터였어요. 일본이 개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크게 발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조선 정부는 1881년에 일본의 서구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발전상을 살피기 위해 비밀 사절단을 파견했어요. 이 사절단의 이름을 ‘조사시찰단’이라 하지요. 어윤중이 이끈 사절단 일행은 일본 각지의 근대 문물을 4개월 동안 시찰하고 돌아왔는데, 함께 갔던 유길준은 귀국하지 않고 홀로 일본에 남아 약 1년간 신학문 공부를 했어요.
또한 1883년에는 미국에 파견하는 친선 사절단인 보빙사에도 단원으로 참가하여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서구 문물의 진수를 살피고 역시 이때도 사절단 전원이 귀국할 때 홀로 남아 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학교인 더머 아카데미에서 신학문을 공부했어요. 학비를 조선 정부가 대 주었기에 유길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 미국 유학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유길준의 유학 생활은 1884년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 때문에 중단되고 말아요. 정부 지원이 끊겨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길에 올라야만 했어요. 이때 유길준은 바로 귀국하지 않고 유럽 각지를 여행한 후에 동남아시아, 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에야 인천항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왔어요.
귀국 후 유길준의 신세는 처량했어요. 갑신정변의 주동자들과 친했다는 이유로 가택 연금이 되어 1892년까지 무려 7년여간 집 안에만 갇혀 살아야 했어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시절의 여유로움이 글쓰기에 전념하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자신이 여행했던 미국 · 영국 · 프랑스 등의 정치와 사회상을 정리해서 책으로 엮어 낼 수 있었어요. 이 책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 서양 기행문집인 『서유견문』이지요.
왕의 머리카락을 잘라라!
드디어 유길준에게 뜻을 펼칠 기회가 주어졌어요. 갑오개혁(1894)이 추진되자, 그는 물 만난 고기가 되어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며 정치의 전면에서 강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어요. 을미사변(1895)으로 들어선 을미 내각에서는 내부대신이 되어 단발령을 반포하는 데 앞장서며 본인이 직접 왕세자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버리기까지 했어요. ‘아니! 감히 신하가 차기 임금이 될 제2인자의 머리를?’이라고 의심을 품을 수도 있지만, 이 사실은 한 치의 거짓도 포함되지 않은 진실 그 자체예요. 그는 왕과 세자가 그럴 수는 없다고 반발했음에도 개혁 의지를 온 국민에게 전파하기 위한 상징적 수단으로 왕세자의 머리카락을 본인이 직접 나서서 잘라 버렸어요. 이러고도 부작용이 없었냐고요? 물론 있었지요.
유길준의 개혁 운은 여기까지였어요. 일본과 손을 잡고 개혁에 나선 세력들의 무리수에 염증이 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 1896)해 버리자, 친러 세력이 득세하며 유길준은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그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어요.
그런데요, 일본에서 살아 보니 일본 정부의 조선 땅 정복 야욕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어요. 이때부터 그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국땅에서 홀로 고군분투했어요.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 외교권을 뺏기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해 애썼으며, 1907년에는 고종 황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왕의 자리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하자 이 또한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어요.
그의 일본에서의 활약은 새로 임금이 된 순종 귀에까지 들어갔어요. 순종은 유길준의 과오를 용서해 주며 귀국하게 했어요. 이후 그는 흥사단을 조직하고 계산학교를 설립하여 국민 계몽운동에 주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를 설립하여 민족 산업 발전에도 힘을 쏟았어요.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1910년 허망하게 무너지며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어요.
유길준은 나라를 잃은 자괴감에 허탈한 마음이 너무나 컸어요. 그래서 일본이 주는 남작 지위도 거절한 채,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14년 한 많은 일생을 마쳤어요. 그의 유언은 ‘평생 아무런 공도 이룬 것이 없으니 묘비를 세우지 말라’였어요. 목표는 같았으나, 처방전은 각기 달랐던 두 사람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던 시기에 최익현과 유길준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어요. 특히 을미개혁 때 유길준은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있으면서 단발령 시행에 반대하는 최익현을 자기 손으로 유배 보냈어요. 하지만 말이에요, 그들은 둘 다 자기들이 하는 일이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따라서 둘은 지향점은 같았으나,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이 달랐기에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대립만 했던 거지요.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은 개화와 보수가 대립했던 우리나라 근대화기의 슬픈 자화상이라 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