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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국이 살던 집 상량에 붙어 있는 “입춘독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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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리 주민들 강의영(86세), 최종순(82세), 김계석(80세), 고종찬(78세), 윤순자(73세), 김형자(72세). |
신흥리에서 들은 전설은 힘센 장사와 관련된 이야기와 서운산과 관련된 전설이다.
힘센 장사와 관련된 이야기도 서운산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포도밭이 되어버린 마을 앞 논 물고에 있던 쪽다리에 얽힌 이야기다.
그 쪽다리는 굉장히 커서 혼자서는 들 수 없는 돌이었는데 어떤 장사가 그 돌을 서운산에서 칡으로 멜빵을 해서 메고 와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재미난 것은 이 장사가 서운산에서 그 돌을 메가지고 오다가 중간에 대변이 마려웠는데, 그 돌을 내려 놓으면 다시 못 멜것 같아서 멘 채로 대변을 보고 왔다는 것이다.
그 장사가 메고 온 돌은 경지정리할때까지도 있었는데 경지정리하면서 사라졌다고 했다.
그 장사가 언제적 사람인지, 신흥리 사람인지도 주민들의 기억으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신흥리에서 산모퉁이를 돌면 사갑이다.
이 이야기는 사갑에서 들은 장사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또 마을 앞의 경지정리가 되지 않은 곳에는 바닥에 자갈이 있고 그 중심에 어린아이크기만한 자연석이 서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의 표현으로 보아 단순히 자연석일 가능성도 있지만 청동기 시대의 유적인 ‘선돌’일 가능성도 있어 보이지만 더 이상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활쏘기에서 이겼지만 샘을 못찾아 서울(수도)이 되지 못한 좌성산
신흥리에서 들은 또 다른 이야기는 서운산과 관련된 이야기다.
여기서 언급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신흥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서운면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서운산을 서운산이라고 하지 않고 ‘좌성산’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마을 주민 박종옥(78세)씨가 “이 근방 사람들은 다 안다”면서 아무렇지 않게 해준 이야기 두가지인데 모두 ‘서울(수도)’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는 좌성산에는 샘이 100개가 있어서 서울(수도)이 들어선다고 했는데, 99개의 샘은 찾았지만 100번째 샘 하나를 찾지 못해 서울(수도)이 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샘을 ‘원통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서운산뿐만아니라 행정구역상 입장에 속해있지만 서운산처럼 마을에서 빤히 보이는 ‘위례산’과도 관련된 이야기인데 아주 단편적이다.
“위례산과 좌성산이 활싸움을 했는데 위례산이 저서 서울이 못되었다”는 것이다. 이 위례산은 천안의 일부 향토사학자 등이 꾸준히 “백제의 초기 도읍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산이다.
그런데 우연하게 신흥리 주민 입에서 이 위례산과 서울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
다만 위레산이 이긴 것이 아니라 졌다는 것이고 그래서 서울(수도)이 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전설 한 토막을 들을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역사를,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제주 고씨의 집성촌
이러한 전설과 선돌로 추측되는 자연석의 존재는 신흥리의 역사를 멀리 선사시대로 끌어올릴 수 있고, 초기백제와 관련시킬 수도 있고, 삼국시대의 전쟁과 관련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짐작일 뿐이다.
신흥리와 관련한 발굴조사는 서운~안성간 도로 확포장공사와 관련해 이루어진 바 있다.
신흥리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한 이 발굴조사의 결과는 2011년 발행된 “안성신흥리 유적”에 수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주거지와 토광묘 등 19기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연대는 조선중기 이후라는 것이 보고서의 판단이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약 60여년 전 신흥리는 50-60호 가량 되었는데 그 중 가장 많았던 것이 제주 고씨로 열댓 집 가량 되었다고 한다.
고현수 전 서운농협 조합장에 의하면 제주고씨가 신흥리에 처음 들어온 시기는 고현수 조합장의 12대조때라고 한다.
미양면 고지리에서 소개한 고몽룡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천석꾼 고종국
신흥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근현대 인물이 고종국(高鍾國)이다.
고종국은 1940년 동아일보 안성소개판에 소개된 당시의 안성의 유지(有志)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고종국씨는 천석꾼 소리를 들을 정도의 큰 부자로 30리 인근 땅은 모두 소유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고, 멀리 충북 백곡에도 땅이 있어 말 타고 다니며 사냥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재산이 많으면서도 동네사람들에게도 잘해서 인심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흥리 두레에도 일정하게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 주민들의 이야기다.
1940년 동아일보에 소개된 내용에 의하면 고종국은 당시 33세로 양정고보를 졸업했다.
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거만(巨萬)의 자산가이면서도 애향심이 많았다고 소개되어 있고, 동네에서 야학(夜學)을 설치해 문맹퇴치에도 공이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주민들 기억에 의하면 고종국씨는 해방되기 전 1944년 무렵 서울에 있던 집에서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입춘독립”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고택
지금 신흥리에는 고종국씨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경술년(庚戌年, 1910년)에 지은 집이다.
마을 주민들 기억으로도 모두 초가집일 때 유일하게 함석지붕을 했던 집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고종국씨의 먼 친척인 김형자(72세)씨가 수십 년 전부터 살고 있는데, 한눈에 보아도 잘 지은 집으로 비교적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문외한이 보아도 잘 지은 집으로 105년 된 집으로 보존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데 무엇보다도 상량문이 쓰여 진 곳에 한지에 써서 붙인 것으로 짐작되는 “입춘독립(立春獨立) 병술정월초삼일(丙戌 正月 初三日)”글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병술년은 1946년이다.
우리 풍속에 새해를 맞이하여 모든일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고 써서 붙이는데, 아마도 일제로부터 독립하고 맞이하는 1946년 정월에 독립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대문에 붙였던 것을 남겨 붙여 놓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가마니 공출 피해 새터 가서 산 사연
일제강점기와 관련해 신흥리에서 들을 수 있었던 재미나기보다 서글픈 이야기는 가마니 공출을 피해 인근 도림리 새터마을로 이사 가서 살았다는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안성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읽다보면 유난히 가마니 공출과 관련된 기사가 많이 나오고, 가마니 공출에 안성군민이 적극적으로 나서 목표를 달성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많이 등장한다.
이 기사를 접하면서 당시 식민지 조선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으리라 짐작했는데, 안성의 경우 그 정도가 심했음을 이번에 신흥리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옥용씨(82세)는 당시 가마니 공출량이 안성은 1인당 5장이었다면 입장은 가족당 5장으로 입장이 훨씬 적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출독촉에 견디다 못해 옆 동네 새터로 이사 가서 살기도 했다는 것이다.
똑같은 증언을 도림리 새터마을에서 만난 유추정(90세)할머니로부터 들을 수 있었는데, 새터에서 살다가 용등봉에 와서 살기도 했으나 가마니 공출 무서워 다시 새터로 이사 갔다는 증언이었다.
일제 강점기 안성의 역사와 관련해 곱씹어 볼 대목이다.
포도 농사로 부자되고
최근 신흥리의 역사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불탄동네”이야기다.
50대의 서운면 주민들도 기억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1969년 11월 동네에 거주하던 고물상 주민이 인근에서 폭탄을 수거해 팔려고 모아 놓았는데, 이것이 폭발해 많은 주민이 죽거나 다친 사연이다.
이 사건이후 신흥리는 “불 탄 동네”로 불리우기도 했다. 가슴아픈 이야기다.
뭐니 뭐니 해도 현재의 신흥리는 “포도마을”이다. 한때는 거의 모든 주민들이 포도농사를 지었고, 지금은 노령화 되어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재배면적에 있어서는 서운면에서 가장 넓다는 명실공히 포도마을이다.
전성기였던 80년대말, 90년대초에는 30명이상 주민들이 작목반을 구성해 하루에도 5톤 차 5대 분량의 포도를 밤 12시까지 작업해 출하했고 부자동네 소리 들었다는 것이다.
여러 회사와 자매결연을 맺었지만 그때뿐이라는 볼멘소리와 사갑들로 가는 제방길을 넓혔으면 하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일솜씨 좋고 두레솜씨 좋았던 억세다고 하지만 순박하고 단합 잘되는 신흥리 사람들의 그 멋진 솜씨와 전통이 살아 숨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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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경향신문에 실린 신흥리 화재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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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자(72세)씨가 살고 있는 집 구석구석을 안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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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유(69세, 사진) 전 마을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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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덕수(62세)씨가 마을 주민들의 대표적 교통수단인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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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현수전 서운농협 조합장이 마을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