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선우 單于
고구려가 신나라에 우호적이지 않고 적대시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조선의 맥통 脈通을 이은 받은 부여는 반농반목 半農半牧의 국가다.
그런데 고구려는 국시 國是가 ‘다물’ 多勿이다.
다물은 고토회복 故土回復이란 뜻이다.
단군조선의 옛땅을 되찾는다는 건국 목표 建國 目標가 선명한 국가였다.
단군조선 때에는 석기시대의 원시적인 原始的인 영농 營農임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많지 않아, 생산성이 낮아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부여의 동명성왕 해모수 단군이 조선의 예족을 구심적 求心點으로 부여를 건국하고, 선진 철기 기술을 앞세워 주변의 부족들을 통합하여 동북아 東北亞 최강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만주 평원과 하천의 일부 지역은 조선시대의 영농을 답습하였으나, 주변의 초원과 산악지역은 목축을 주 생산 기반으로 삼았다.
조선에서 이탈된 부족들을 아우르며 세력을 팽창시켜 태평성세 太平盛世를 이루게 되자, 귀속된 주변 부족민과 더불어 다스리는 백성의 무리도 기하 급속도로 늘게 되었다.
팽창하는 인구수에 비례하여 생산력이 뒤떨어져, 주거 환경이 열악해지고 식량이 부족해지니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강성하였던 부여도 지방 호족들에 의하여 여러 갈래로 나눠지기 시작하였다.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러한 사태를 눈여겨보는 통찰력이 뛰어난 한 인물이 나타난다.
부여의 고주몽 왕자다.
한정된 토지의 농사과 기존 목축만으로는 백성들의 민생고 民生苦를 해결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주몽 왕자는 거대한 웅지 雄志를 펼친다.
추모성왕 고주몽은 우여곡절 迂餘曲折 끝에 드디어 고구려를 건국한다. 그리고. ‘다물’을 건국이념 建國理念으로 정하고 기치 旗幟를 높이 올린다.
다물 多勿이 건국이념이라면 전쟁은 불가피 不可避하다.
아니, 다물은 전쟁을 하겠다는 선전포고다.
선조의 땅을 침략한 국가 즉. 조선의 영역을 침범하고 그 영토를 점령. 관할하는 부족이나 나라를 향하여, 정복 征服의 칼을 휘두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는 국가의 기반 자체가 약탈경제 掠奪經濟였다.
부족한 물자를 주변국을 침략하여 약탈로 보충하는 흉노족과 별반 차이가 없는 나라다.
아니, 고구려는 사실 흉노다.
흉노의 근원지가 고구려다.
근원인 뿌리나 본질이 흉노와 같다.
생활방식이나 여러 관습, 전통. 종교적인 신앙심과 국가 운영체계까지 같은 국가였다.
같은 단군의 후예들이다.
위. 촉. 오가 싸우는 삼국지 정사 正史를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 연의’에는 나오지 않는 사실 史實이다
조조의 위나라와 고구려 사이, 영정하와 조선하 부근에 공손연이 지배하고 있는 ‘오환 烏桓’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당시,
중원의 남쪽, 장강 長江에서는 촉한 蜀漢의 대군 大軍을 그 유명한 전투인 ‘이릉대전’에서 패퇴시켜 그 후유증으로 촉한의 황제 유비가 백제성에서 사망하게 만든 오나라의 손권이 있었다.
야망이 큰, 오 吳의 손권 황제는 위 魏의 조조를 견제하기 위하여 오환 지역이 필요했다.
영정하 부근의 오환 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며, 남북 南北 양 방면에서 위나라를 포위, 압박할 수 있는 주도권을 쥐게 된다.
그래서 손권은 단독으로 오환를 치려니, 지리적인 여건과 여러 가지 애로 隘路 사정이 겹쳐, 만만치 않았다. 그러므로 오환의 동쪽 방면을 지배하고 있던 거대한 고구려와 협공을 하기로 전략을 구상한다.
그래서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東川王에게 ‘연합군을 결성하자’는 서신을 보낸다.
손권이 보낸 그 서신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존경하옵는 고구려 ‘선우’께 삼가 글을 올립니다.>
‘선우’ 單于라니.
‘선우’는 함부로 사용하는 호칭이 아니다.
‘선우’는 흉노족의 왕중왕 즉, 초원의 황제를 칭하는 단어다.
그러니,
당시 동북아의 국가들은 고구려를 흉노로 여기고 있었다는 방증 傍證이다.
그것도 흉노족 중에서도 제일 높은 지위인 흉노의 맹주 盟主 ‘선우’로 호칭하고 있다.
흉노의 여러 부족을 모두 아우르고 거느리는 왕중왕 ‘선우’로 대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당시 고구려의 전성기 때는 단순히 만주벌판과 요동반도를 거점으로 하는 단순 국가(Nation)가 아니라, 중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 帝國(Empire)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직접 통치하는 영역은,
서 西로는 현재의 북경 부근부터 몽골초원 일부와 대흥안령산맥을 비롯하여,
북 北으로는 흑룡강 黑龍江을 경계로하여,
동 東으로는 사할린 바닷가 정도지만,
고구려 제국,
그 영향력은 고비사막을 포함하여 알타이산맥까지 미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흉노의 세력권 전부 즉, 동북아시아 전체를 '고구려 선우'의 위엄이 포호 咆號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광개토태왕의 비문에도 나타나 있다.
고구려의 19대 ‘광개토태왕이 서쪽으로는 소금이 나오는 염수까지 점령하였다’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염수는 소금이 나오는 호수라는 곳이다.
동북 아시아 만주에서 가장 가까운 내륙의 소금 산지는 요하의 최상류 서북단 西北端 적봉 赤峯 부근의 염라수 지역이다.
시라무렌 하 河의 서북단인 패려(대흥안령산맥)까지 점령하여 수많은 짐승을 노획물로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흥안령산맥 서쪽(현재 몽골지역)까지 점령하였다는 기록인데, 지금까지 이곳이 고구려영토라고 표기된 지도는 대한민국에서는 본 적이 없다.
우리 사학자들은 광개토태왕이 몽골의 패려 지역이나 염라수까지 한가로이 나들이 갔다 온 것처럼 여긴다.
우리 조상이 점령했다고 하면 점령지로 표기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린다.
그런데, 염라수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후, 단기간 내에 철수한 것이 아니다.
당시의 소금은 아주 귀한 시대였다.
바닷물을 이용하여 천일염을 생산하는 기술을 모르는 당시에는 육지의 천연 소금이 금만큼이나 소중한 자연산물이었다.
그러니 염수 鹽水지역은 고대에는 대단한 경제력을 가진 특수지역이었다.
그러니 광개토태왕은 그 멀리 요하 상류까지 원정을 단행한 것이다.
그런 중요한 염라수 지역을 점령 후에 순순히 포기할 군주나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고구려도 꾸준히 지배 관리해 왔던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고구려 제 2대 유리왕 22년에 이미 요서까지 진출하여, ‘신나라 왕망의 요서태수를 죽였다’라고 기록 되어있다.
고구려 초기,
당시에 이미 난하를 넘어, 서진 西進하여 영토를 확장했다는 엄연한 기록이다.
그러한데,
우리 사학계는 이런 사실은 감추고, 늘 얻어 터지는 기록만 확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영역이 이것 즉, 요하 끝이 서쪽 경계선이 아니다.
서쪽의 경계선을 확인하려면,
더 멀리,
아주 먼 거리를 박차 拍車를 가하여 서진 西進하여야 한다.
자~ 그럼, 채비를 단단히 갖추고 함께 달려가 봅시다.
* 그림 - 요하. 적봉. 난하
- 74. 원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