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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묵상글 들 ( 사순 2주 월요일-자기 됫박만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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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순 2주 월요일-자기 됫박만큼
사순 2주 월요일-2009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같은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에게 존댓말 하는 분에게 막말할 수 없더라고요.
어떻게 해서든 잘해 주려는 분에게는 무심할 수 없고요.
대부분 나는 지지리도 복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인복이 많다고 하는 분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자기는 별로 해준 것이 없는데 운이 좋아
주위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뜻으로 겸손하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주위에 많은 것이
사실은 그분이 모두에게 잘 해주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삶을 잘 들여다보면
별로 해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좋은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옆에 있는 제가 볼 때 뭔가 있기만 하면 그저 주려고 하고
그것도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저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것을 줬는데도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해야 계속 줄 수 있지요.
많이 줬다고 생각하면 더 주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많이 주고, 받지는 못했다고 생각하면
더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섭섭한 마음까지 들 테니까요.
생각해 보면 이치가 그렇습니다.
조금 주었는데도 많이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됫박, 그 사람의 통은 그 정도로 작은 것입니다.
반대로 많이 주었는데도 적게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됫박, 그 사람의 통은 그 정도로 큰 것입니다.
한 되가 크다는 사람이 있고 한 되는 작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되가 크다는 사람은 통이 작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은 통이 그 정도니
받는 것도 최고로 많이 받아야 한 되밖에 못 받겠지요!
한 되가 작다는 사람은 통이 큰 사람이니 받는 것도 그만큼 많이 받겠지요.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이 관계가 혹간 깨질 수도 있습니다.
많이 주었는데도 그만큼 되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짠돌이기에 그럴 수도 있고
상대가 그럴 능력이 못되기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북한을 위해서 일을 하다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퍼주기만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고
좋은 뜻 가지고 하다가도 너무하다 싶어 그만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주었다고도 생각지 않고 되받을 기대도 하지 않고
계속 돕는 통 큰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관계에서는 되질해준 대로 받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우는 그의 되가 나보다 작기에 그대로 되받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되가 우리의 되보다 훨씬 크시기에
큰 되로 되돌려 주십니다.
우리의 되가 작아서 더 이상 못 받지
하느님께서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는 말씀대로 넘치게 되돌려주십니다.
자비도,
용서도.
그러니 우리도
자비의 됫박,
용서의 됫박을 크게 키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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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사순 2주간 월요일.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많은 병 중에 '홧병'이 있습니다. 홧병은 보통 감정의 기복이 심한 경우에 잘 나타난다고 합니다. 또한 가족 간의 갈등, 대인과의 갈등, 억울한 감정이 심화될 때 홧병으로 이어지고 결국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우울증, 가슴앓이, 만성 스트레스 등 신체적인 병으로 발전합니다. 홧병의 치료는 안타깝게도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기 전에는 별다른 치유방법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한해 동안 11만 5 천여 명이 치료를 받았다니 울화통 터지는 일이 많은가 봅니다. 마음을 키워서 화를 다스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일을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가 이미 용서를 받았고 앞으로도 용서를 받아야 할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마음의 품이 커질 것입니다.
성직자의 어려운 점을 농담 삼아 얘기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 “너무 직선적이야”하고, 지적하지 않으면“너무 타협을 하는구만!”하고 말합니다. 강론을 할 때 원고를 보고 하면,“너무 딱딱하고 재미없어”하고 원고 없이 하면,“왠지 깊이가 없는 것 같애”하고 말합니다. 여러 예화를 들면 “성경말씀은 도대체 하질 않는구만!”하고 예화를 안 하면“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인기 끌려고 그러는구만!”하며 부자와 가까이 하면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하고 너무 귀족적이야!”하고 말합니다. 이래저래 한 소리 들으니 성직자가 고집스러워지나 봅니다.
누구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자기의 역할에 관계없이 좋아라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꾸중을 듣는다든지 비판을 받게 된다면 아무래도 기분이 상하며 마음에 화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그는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바른 인생길 알려는 사람은 훈계를 달갑게 받고 미련한 사람은 책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잠언12,1). 상대의 비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충고로 그를 구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받기 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넓고 깊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국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지만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혜택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는 이웃을 비판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교부 푀멘은“비판과 험담의 주제에 있어서는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마음속에서 파헤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분별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과 험담하는 입은 스스로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구에게 충고를 하려거든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고 아프게 하였다면 그 사람이 악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보다 약해서 악의 세력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지요. 악의 세력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선한능력이 크게 드러나게 되고 악의 세력은 발붙일 곳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그렇다고 선한사람이라도 그를 우상처럼 섬기지는 마라.”'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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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사순 2주 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부정의 지침이요, 소극적인 지침입니다.
뒤의 둘은 ‘용서하고 베풀어 주어라’는 긍정의 지침이요, 적극적인 지침입니다.
곧 <첫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는 것이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여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먼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0,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죄인임을 알아야 하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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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사순 제2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36-38: 남을 용서하여라.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자비는 훌륭한 덕으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덕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거룩한 이에게나 악인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다(마태 5,45 참조). 이 자비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37절) 남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무건만,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 바쁘다.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격도 없으면서 이웃을 단죄하면, 단죄받는 것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허물을 찾거나 들추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130,3)라고 고백한 시편 저자는 그래서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내세우며 다시 용서의 탄원을 드린다.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소서.”(시편 103,14) 그러니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하는 그대로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 7,2 참조).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 주고 정의와 용서와 은총으로 심판해야 한다.
이것은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일단 올바로 심판한 사람은 은총에 따라 용서해야 한다. 그러면 정의에 따라 심판받을 때, 은총으로 용서받을 자격을 지니게 될 것이다. 정의에 따르지 않고 자기를 위해 보복하려고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는 심판은 안 된다는 것이다. 심판하기보다는 훈계하거나 충고하라는 뜻이다. “용서하여라.”(37절) “주어라.”(38절) 용서하고 베푸는 것, 이것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한다. 그러므로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고, 가난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을 베풀고, 용서하며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자선을 받고 용서받으며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곳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 아낌없이 후하게 갚아주신다고 하신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라고 하셨다. 용서는 단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안에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바로 나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좀 더 자비롭게 용서를 베풀며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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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1)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는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35).” 라는 계명에 이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에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말씀을 합하면,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곧 ‘자비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완전함에 다가가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처럼 된다는 말은,
하느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간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는다는 뜻입니다.)
“너희도 하느님처럼 되어라.” 라는 말씀에서 레위기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19,2).”
이 말씀을 인용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베드 1,14-16).”
사실 하느님의 자비, 완전성, 거룩함은 하나입니다.
완전함과 거룩함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같은 것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자비’로 드러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요한 1서에 있는 다음 말로 합해집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완성하는 일이고,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일이고,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
완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반대로, 원수 같은 사람은 제외하고서,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을 하는 것이고, 즉 죄를 짓는 일이고(루카 6,32),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일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생활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다른 일을(다른 신심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아도 사랑만 하면 되는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만 내세우면서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기본 신심 행위들을 일부러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등
신앙인으로서 하게 되는 일들을 기쁨으로 하는 법입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감히 하느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가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탄의 첫 번째 유혹에 연결됩니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뱀이(사탄이) 한 말을(유혹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말이다.
2.너희가 그 열매를 따 먹으면
선과 악을 알게 되어서 하느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다.
3.하느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가면 하느님도 너희를 죽이지 못한다.
오늘날에도 사탄의 유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유혹은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서
하느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선과 악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되라는 유혹입니다.
(남을 심판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면,
그것은 하느님 행세를 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하는 것은 신성모독죄이고, 당연히 심판받을 죄입니다.
3) “남을 단죄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앙갚음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루카 6,27-31).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7-21).”
4) “...을 하지 않으면, 너희도 ...을 받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를 잘 받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신 분”입니다(루카 6,35).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남을 심판하고, 남을 단죄하고, 또 남을 용서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죄와 욕망과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비를 안 받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게 거부함으로써 용서를 못 받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는데도 우리가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려고 하시면서,
어떻게든 나를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하시는데, 내가 고집을 부리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내 발로 심판대로 간다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지옥으로, 또는 멸망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그쪽으로
쫓아내신 사람이 아니라, 자기 발로 그쪽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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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사순 제2주간 월요일 /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아버지가 자식들보다 다른 이들에게 한없이 자비롭다면 그 자녀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자식들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너그럽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의 어려움보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의 잘못은 그대로 넘어간 일이 없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은 어떤 일이든 용서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식인 내가 가져야 할 몫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에 나의 몫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칭송을 받지만, 나에게만은 정말 매정한 아버지입니다. 자식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부모가 되고, 자녀를 낳아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 간다면 조금이나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충분히 너그러웠고 누구보다도 자식들을 많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넘치도록 많은 것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아쉬워하였습니다. 그 자녀들도 아버지처럼 살아가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이 때로는 우리를 실망스럽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와 청은 잘 들어주시는 것 같은데 내 기도와 청에는 묵묵부답이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은총과 복을 넉넉히 주시지만, 나에게만은 고통과 아픔만을 주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은 일들을, 하느님께 넘치도록 받은 것들을, 그리고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옹졸한 사람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비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받은 사랑과 용서를 되새기고, 그분께 감사해야 합니다. 먼저 감사함을 찾으십시오.
- 최종훈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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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새벽을 열며.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빠다킹 신부님.
책을 읽다가 어떤 생각이 나서 뭔가를 찾으러 거실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기억이 되살아날까 싶어서 다시 사재로 되돌아갔지만 역시 생각나지 않습니다. ‘내 뇌가 퇴화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거실로 나가 두리번거립니다. 내 뇌의 퇴화를 인정할 수 없다며 이것저것을 보며 기억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저만 그럴까요?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한두 번은 이런 일을 겪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2~30대도 겪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주의가 산만해서 그렇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5~60대로 넘어가면 뇌가 쇠퇴하는 징후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뇌과학자들은 기억력 쇠퇴가 암울한 징조가 아니라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젊었을 때는 뇌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뇌는 외부환경에서 비롯되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드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자기 자신의 생각을 심사숙고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뇌과학자들이 말하듯이, 뇌의 퇴화가 아닌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당연한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스스로 갇혀 있는 생각 때문입니다.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 조건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니, 하느님의 사랑까지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더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하게 지금을 인정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심판의 주체는 늘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남을 심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율법이 허락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했기에 하느님께서는 그 모습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점을 주님께서는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지 않는 행동의 결과인 용서와 자선을 이야기하십니다. 즉, 베풀고 용서해야, 자비하신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임에도 끊임없이 심판하고 단죄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따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에서 드러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은 목에서 발목에 이르는 품이 넓은 옷이었습니다. 담을 그릇이 없을 때, 이 옷은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주신다는 것이지요.
이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영역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모습이 됩니다.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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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을 천천히 손에 쥐어 보라. 귀가 후 천천히 옷을 벗어 보라. 일상을 음미하면 옷을 벗는 것이 힘든 하루의 일과를 벗어내는 것과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축제를 즐기려면 지금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여야 한다(안셀름 그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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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지 마세요
등교길과 등굣길, 차값과 찻값, 최대값과 최댓값.
어떤 단어가 맞을까요?
이런 단어들을 만나면 우리말이 참 어렵다 싶습니다. 우선 정답은 ‘우리말’과 ‘한자어’로 구성된 단어는 중간에 사이시옷을 넣게 되어 있으므로 등굣길, 찻값, 최댓값이 맞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한국말을 쓰며 살았지만, 아직도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하긴 아는 청년 중에 우리나라 국어사전을 만드는 청년이 있는데, 그 친구도 종종 헷갈려서 힘들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랫동안 써 온 우리말도 이렇게 정확하게 쓰기 어렵습니다. 이것만 봐도 다른 사람의 말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판단과 단죄로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전하고 있었을까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먼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삶이 아닌, 용서하고 베푸는 자선의 삶을 통해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이 훨씬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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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대한독립만세!”에 담긴 뜻과 파장
사순 제2주간 월요일인 오늘은 삼일절입니다.
1905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후 1910년에 강제합방(强制合邦)으로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고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민족 전체가 노예가 되자 이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합방
조약의 무효와 나라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을 3·1 만세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1919년 이 날에 발표된 독립선언서에는 나라의 기원을 기원전 2333년에 이 땅에 처음으로 세워진
고조선으로 잡아 단기(檀紀)를 서기(西紀)와 함께 공표함으로써 이 나라의 역사가 오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음을 밝혔으며, 새로이 세울 나라의 정체성으로서 고조선 이래 고구려·신라·백제, 고려와
조선을 이어오며 이 땅에 대대로 살아온 한(韓) 민족의 사상을 담았습니다.
본시 이 사건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어 숨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 장례일이었던 3월 3일을 앞두고 3월 1일에 한반도 전역에서 한 해 내내 봉기한 독립운동이었습니다.
특히 3월부터 5월까지 석 달 동안에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전국 230개의 군(郡)에서 2백만 명 이상이 천 5백여 회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습니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평화 시위를 일제는 총칼을 앞세우고
폭력으로 진압하자 무장투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 결과 공식집계로도 7천 5백여 명이 살해되고 4만 6천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만 6천여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그리고 체포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잔학한 고문과 태형으로 옥사(獄死)했습니다.
당시 인구가 2천만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만 해도 인구의 1/10 정도이니까 이들을 돕거나 간접적으로 참가한 이들까지 하면
극소수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 민족이 참여하여 대규모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지식인과 소수 지도자로 시작된 움직임이 대중의 참여로 명실상부한
민족운동으로 전환되면서,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의 각성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민족 성원 대부분의 각성이 이루어진 것은 아마 한 민족 오천 년 역사상 초유의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3·1 독립만세 운동을 계기로 그 다음 달인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국호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는 국운이 기울어가던 1897년에 세워지고 1910년에 한일 강제합방으로
멸망한 ‘대한제국’(大韓帝國)에 대해서 ‘한국’(韓國)이라는 국호는 계승을 하지만 이제는
군주에게 맡기는 대신에 백성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민중의 각성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제국’(帝國)이 아니라 ‘민국’(民國)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48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3·1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 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함을 천명하였습니다.
나라의 정체는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이라는 삼권분립(三權分立)의 원칙과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을 헌번 제1조에 담았습니다.
1919년 3월에 민중이 대규모로 참여하는 만세시위운동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민주주의의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진전이었습니다.
한 민족의 ‘한’을 한자로는 성씨로도 쓰고 나라 이름으로도 쓰는 ‘韓’으로 표기합니다만,
이는 그 음을 빌려와서 썼던 것이고 본래는 크다는 뜻의 우리 말 한을 아래 아(ㆍ)를 써서 써 왔었습니다.
백 년 전 독립선언서에 담겼던 그 사상은 바로 한 민족이 본래 품어 왔고 실현해 왔던 그 뜻,
즉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라는 고조선의 건국이념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담겼던 그 “하늘의 뜻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독립하려던 바는
일제의 강점에서 풀려난 지 70년이 지나가는 지금에서야 실현되어 가는 듯합니다.
일제로부터 풀려나서도 강대국들에 의해서 분단과 전쟁,
빈곤과 독재의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방역을 비롯하여
산업과 문화와 정치와 국방 등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의 호응을 받고 있는 한류를 보면,
“원래부터 풍부하다고 자부해온 독창성이 발휘된 우수한 문화”의 결과라고 보입니다.
국난이 닥칠 때마다 단결하여 보란 듯이 극복해 낸 그 길에 “양심과 진리가 빛을 비추어주고” 있다고
여겨질 뿐만 아니라, “수천 년 전 조상의 영혼이 안에서 도와줄 것이고, 온 세계의 기운이 밖에서 지켜줄 것”
이라던 그 희망대로 앞으로 우리 한 민족은 저 앞의 밝은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주변 민족들을 야만적인 오랑캐로 보는 나머지 세상의 중심이 되겠다고 자부하지도 않았고,
다른 민족들을 힘으로 억눌러서는 노예로 삼아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이토록 도덕적으로 선한 이념과 사상을 그 오랜 세월 동안 지녀온 민족은 유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저 양심과 진리에 따라서 더불어 평화로이 살고자 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렇듯 정신적 토양이 비옥했기 때문에 역시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복음 진리를 스스로 찾아 들여오는 오묘한 섭리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와 부활을 핵심으로 하는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준비된 정신적 토양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서양의 신앙 열기가 식어가고 있고, 동양에서도 다른 나라들에서는 불투명한 가운데,
우리 한 민족의 선교적 전망이 밝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민족 구성원들에게 입교 세례를 권면하기에 앞서서,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이 먼저 민족의 고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서 다 함께 희망을 찾으려는
토착화 노력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은 백 년 전 삼일 만세운동에서
천도교인, 개신교인, 불교인들에 뒤처졌던 바를 보속하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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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사순 제2주간 월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바이러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불필요한 활동의 자제입니다. 이런 수칙을 잘 지키면 바이러스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 지킨 나라는 바이러스의 감염을 줄 일 수 있었습니다. 의료체계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사망자의 수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백신의 개발입니다. 백신을 맞으면 우리의 몸에는 바이러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항체가 형성됩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했음에도 바이러스는 우리의 몸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고, 약간의 틈새도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신을 맞으면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70% 이상의 사람이 백신을 맞으면 집단면역이 생기고, 바이러스는 더 이상 전파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셋째는 치료제입니다. 바이러스는 증식하는 과정에서 우리 몸의 장기를 다치게 합니다. 특히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은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치료제가 있으면 우리 몸의 장기를 보호 할 수 있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백신은 개발되어서 접종이 시작되었습니다. 2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백신을 접종 받았습니다. 이제 곧 치료제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코로나19의 위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일상의 소중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나뭇잎은 흔들리고 싶지 않아도 바람이 불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죄와 유혹의 바람에 흔들리곤 합니다. 하느님과 멀어지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몸이 바이러스로 인해 피해를 입듯이, 우리의 영혼도 악의 세력에 의해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하느님께로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슷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둘째는 ‘청원’입니다. 청원은 백신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셋째는 ‘선행’입니다. 선행은 치료제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세상은 선한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간다면 어떤 악의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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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사순 제2주간 월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한 사람에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 - 기도, 회개, 실천 -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 은총으로 시작되는 3월 첫날입니다. 오늘은 3월 첫날 ‘삼일절’이자 4월4일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둔 본격적 복된 영적훈련의 ‘파스카의 달’이자 ‘성 요셉 성월’입니다. 본기도중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 육신의 극기를 명하셨으니’라는 대목도 참 적절합니다. 육신의 극기와 직결된 영혼의 건강임을 깨닫습니다. 1년 영적 농사의 성패가 이 한달에 달려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 부활을 앞당겨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야 할 마음 설레게 하는 3월의 봄날들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우울하고 어둡게가 아닌 기쁘고 밝게 지내야 할 사순절임을 이미 규칙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으로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성규49,6-7).
규칙서에서 기쁨이란 말마디가 오직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라는 장에만 단 두 번 나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야 할 3월 봄철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맨 먼저 영춘화迎春花, 하느님의 봄꽃 선물이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영춘迎春花, 봄꽃 어감도 말 뜻도 곱고 깊습니다. 겨울에서 봄맞이 영춘화 봄꽃 그대로 ‘파스카의 꽃’이라 명명해도 좋겠습니다. 두분과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영춘화 봄사랑 선물입니다.”
“영춘화가 피었으니 봄이 왔군요. 아, 세월은 어김없이 지나가고 있으니 오늘 그동안 잡고 있던 2월을 또 놓치고 있네요!”
“영춘화! 정말 봄사랑입니다. 노란 영춘화가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설레임이랄까, 봄날같은 삶으로, 희망으로---”-
은총의 사순시기, 하루하루 놓치지 말고 하루의 선물을 보람있고 기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좋으면 축복은 저절로 따릅니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사람이 참 보물입니다. 사람이 참 선물입니다. 아무리 환경 좋고 건물 좋고 전통 좋아도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특히 수도형제는 더 그러합니다. 아무리 거금을 주고도 수도자는 스카웃 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새 지원자 정보영 사도 요한 형제를 공동체에 선물로 보내 주셨으니 참 감사하고 기쁩니다. 전번 예결산 회의를 하면서 수도자 하나하나가 얼마나 수도공동체의 기초와 기반을 튼튼히 하는 보물인지 절감했습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회개도 겸손도 불가능합니다. 참으로 사람이 하느님을 따르면 사람도 돈도 온갖 축복도 저절로 뒤따릅니다. 결코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찾아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참 사람입니다. 무지한 사람에게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참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병인 무지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자비뿐임을 깨닫습니다. 자비롭고 너그럽고 지혜로운 하느님을 닮아가는 길뿐입니다. 사순시기 3월 첫날의 복음이 흡사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3월의 말씀’처럼 생각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바다같이 넓고 깊은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 마태복음의 아버지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무지한 사람에서 완전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너그러운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 강론중 일부가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거룩함holiness이자 온전함wholeness이요 영어 발음도 같습니다. 바로 아버지를 닮은 ‘완전함perfection’은 그대로 ‘거룩함’과 ‘온전함’과 ‘자비로움’은 하나로 통함을 봅니다. 지난 밤 정월 보름달처럼 원숙, 원만圓滿한 둥근 모습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닮을수록 둥근 마음, 둥근 삶이 됨을 깨닫습니다. 둥근 해, 둥근 달, 가을철 둥글게 익은 원숙圓熟한 열매들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참으로 이렇게 무지에서 벗어나 너그럽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노년의 둥근 인생이라면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울런지요!”
우리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궁극의 꿈이자 목표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을런지요? 이의 결정적 롤모델이 가엾이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자비로운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기도와 회개, 그리고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삶이자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입니다. 기도없는 인간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습니다. 기도할수록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아 참 사람의 내가 됩니다. 제1독서 다니엘서는 매년 사순시기 1000년동안 계속된 말씀입니다. 매해 들을 때 마다 감동입니다.
그대로 기도와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회개가 우리의 공동전례 기도를 닮았습니다. 우리의 평생 끊임없이 하루하루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 기도가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함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회개의 시스템’같은 일과표가 고맙습니다. 다니엘의 감동적 기도 일부를 그대로 소개합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모두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런 진정성 가득한 겸손과 경배, 고백과 탄원의 회개의 기도가 무지의 병을 치유하여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자비롭고 너그럽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기도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전환과 개혁, 변화의 회개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할 하나의 결정적 요소가 자비의 실천이요 오늘 복음이 가르쳐줍니다. 아주 간단한 처방이나 늘 걸려 넘어지는 자비의 수행입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2.남을 단죄하지 마라. 3.용서하여라. 4.주어라.”
넷입니다. 최종적 심판이나 단죄는 일단 무조건 보류하고, 결론내리지 말고 활짝 열어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경솔한 심판이나 단죄의 죄로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비상한 자비행이 아니라 심판이나 단죄를 하지 않는, 용서하는, 소소한 일상의 평범한 자비행이요 이들이 완덕에 도달한 성인입니다.
마지막 ‘주어라’는 대목도 너무 중요합니다. 인색하지 말고 돈과 물질의 재물을 나누는 자선이 자비행의 결정적 요소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살 때 저절로 축복입니다. 우리는 심판받지 않고, 단죄받지 않고, 용서받고, 하느님은 또 넘치도록 후하게 우리 품에 담아 주십니다.
무지에서 벗어나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기도와 회개, 자비의 실천뿐이요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입니다. 말그대로 기도의 여정, 회개의 여정, 자비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성공적 인생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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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자비를 이야기하십니다.
제1독서는 바빌론에 유배를 갔다가 왕궁에 들어간 다니엘이 동포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의 대목입니다.
"저희는 ...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다니 9,5-6)
다니엘은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리신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몰락과 유배의 원인을 자신들에게서 찾습니다. 이스라엘은 거듭 다가오시는 주님을 외면하고, 거듭 보내시는 예언자들을 거부한 대가로 이방 민족들 사이에 흩어져 하느님의 율법과 예식, 성전을 그리워하는 신세가 되었지요.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다니 9,7)
다니엘 예언자는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의로우심을 고백합니다. 자신들의 죄에 비추어 지금 겪는 벌은 합당하다는 뜻이지요.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다니 9,9)
하지만 뼈아픈 통회는 자책과 자포자기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희망의 상기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배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또 그에 대해 벌을 받은 일도 다반사였지만, 그때마다 다시 당신 백성에게 얼굴을 돌이켜 기회를 주신 분은 하느님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계속 죄 속에 주저앉아 멋대로 살자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간과했던 일들,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말씀 경청, 계명 준수를 다시 기억하자는 겁니다. 당신 백성의 고통을 가장 아파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니 그분께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것이지요.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는 사람에서 그 자비를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나약한 죄인인 우리에게 아버지처럼 자비로우라는 권고는 꽤나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사 이해관계에 얽혀 돌아가다 보니, 마냥 자비롭다가는 이용만 당하고 바보 취급 받기 십상이니까요. 사실 자비는 우리가 자기 힘만으로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로 자비를 베풉니다. 우리가 나누는 사랑이 나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인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모든 자비도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흘러 나옵니다.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 흘러온 자비는 우리 안에 고여있지 않고, 그 자비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또 흘러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소유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흐름으로써 진정 "자비"가 되는 신비입니다.
"심판하지 마라. ... 단죄하지 마라. ... 용서하여라. ... 주어라."(루카 6,37-38)
예수님은 아버지의 자비가 우리에게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가 아버지의 자비와 다른 건, 보상이 약속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너희가 타인을 이러이러하게 자비로 대하면, 나도 너희를 그렇게 대하겠다."는 약속이 따릅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는 또 다시 아버지의 자비를 부릅니다. 자비를 베푼 만큼 또 다시 자비를 얻는다니, 힘껏 자비의 사람이 되려 노력해도 좋을 듯하지요. 자비는 이렇게 순환되고 확장됩니다.
그렇다면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는 무슨 보상을 받으실까요? 아버지께서 자비로 얻을 보상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분은 그것으로 흡족하시고 행복하십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의 보상도 결국 그 사람의 구원일 겁니다. 그러니 다른 보상은 기대할 필요가 없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 때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때 받은 자비가 누군가에게 이어져 열매를 맺었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지요. 여전히 그 자비가 내 안에 고여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힘 내어 자비를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자비는 또 다른 자비를 부를 것입니다. 그러면 자비를 입은 사람은 물론, 벗님도 행복하고, 아버지는 더더욱 흡족하시겠지요.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은 벗님을 응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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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탄생기념미사-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오늘은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 탄생하신 날'입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1821년 3월 1일,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제는 신부님 시복 기원미사를 드렸고,
오늘은 신부님 탄생기념미사를 드립니다.
어제 복음묵상글을 보내드리면서, 제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 흘리신 땀에 대해 잘못 보내드린 것이 있어서 다시 보내드립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는 12년 동안 사목을 하시면서, 매년 7,000여리(2,800km), 그러니 합치면 12년 동안 약 33,600km의 길을 걸으시면서 땀을 흘리셨습니다.'
오늘 복음 중에서, 루카복음 6장 36절의 말씀은 제가 2004년 사제서품을 받을 때, 서품성구로 택한 말씀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닮은 사제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사제서품 성구로 정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 주님!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다니9,4.5.9)
다니엘 예언자가 하느님 아버지께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죄인입니다.
무엇보다도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큰 죄인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지 못한 죄인이며,
너를 심판하고 단죄한 죄인입니다.
너를 용서하지 못한 죄인이며, 너에게 주지(나눔) 못한 죄인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도 너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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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신부님.
미움은 고통의 바다에서 스티로폼이지만 행복의 바다에서는 납덩이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가장 자주 나오는 주제이지만 일상에서 가장 되지 않는 것이 또 용서일 것입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해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득문득 떠오르는 순간은 내가 행복하지 못할 때일 것입니다.
보통은 누구를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탓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미움입니다. 하지만 순서상 그 사람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청년이 애인과 헤어져 고통스럽다며 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벌써 한 달째 술로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술자리에서 친구와 싸움도 일어나고 부모에게 상처도 주고 돈도 떼이고 직장생활도 잘 안 되는 등의 사건이 더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이 그 애인을 만나기 전에는 행복했을까요?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그 애인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애인은 상대를 행복하게 해줘야만 하는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애인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으면 그 기회를 이용해 떠나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부부가 서로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그 미움 전에 각자의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나기 전에 외로웠고 만나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행복하지 못하니 그 탓을 상대에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행복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용서에 대한 이러저러한 방법을 제시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가 더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해도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고통스러워서 미워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의 근본 원인을 알아야 참다운 용서가 생깁니다. 미움이 고통에서 시작된다면 행복하면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용서하기 위해 그 사람을 계속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이란 물 밑으로 가라앉히면 됩니다.
천국에 미운 사람과 함께 있는 편이 나을까요, 아니면 미운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천국 행복을 포기하는 편이 나을까요? 모두 미운 사람과 있어도 천국에 머물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천국에 있다면 미움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행복할 수 있는 천국만 이 세상에서 발견한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더라도, 혹은 살해당했더라도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용서는 행복으로 미움의 고통을 수장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마치 암초처럼 우리 배를 긁습니다. 방법은 물 수위를 높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들 가운 데 있다면 그 행복의 수준이 고통을 넘어서기 때문에 미워할 이유도 사라지게 됩니다.
2015년 6월 17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흑인교회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던 신자 9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총을 난사한 범인은 21세 백인 청년 딜런 로프는 백인우월주의자였습니다. 19일 법원 대형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보석 여부를 결정하는 약식재판정에는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가해자에게 직접 얘기할 기회를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관행에 따라 유족들은 한 명씩 범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네이딘 콜리어, 어머니를 잃은 딸]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갔습니다. 엄마와 다시는 얘기를 나눌 수도, 엄마를 다시 안을 수도 없지만,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 영혼에 자비가 깃들기를 빕니다. 당신은 나를 아프게 했어요. 다른 많은 사람을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펠리샤 샌더스, 아들을 잃은 어머니]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을 죽게 했어요. 내 살점 하나하나가 다 아픕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예전처럼 살아가지 못하겠죠. 하지만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 영혼에 신의 자비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이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용서의 말을 하자 범인도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떻게 그들은 부모와 자녀를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 교회가 나눔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용서해도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손을 부여잡고 죽은 이들을 애도하며 서로를 위로했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자비의 공동체에서는 용서할 수 있는 에너지가 흘러넘칩니다.
용서가 안 될 때 그 사람과 직접 맞대결하지 마십시오. 그건 잘못된 해결방법입니다.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움은 납덩이처럼 가라앉습니다.
행복하려면 행복한 공동체에 머무르려고 하십시오. 그런데 직장과 같은 데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눔의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족 공동체는 좋기는 하지만 너무 작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어떠한 고통이 와도 그 고통을 이겨낼 공동체에 속해있어야 합니다. 그 공동체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사랑이 쏟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그 행복의 수위가 모든 고통을 넘어설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독특하게 ‘용서하는 마음’과 ‘주는 마음’이 결합하여 있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도 하십니다.
용서와 주는 것은 서로 다는 것 같지만 실제로 같은 ‘자비’에서 나옵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서로 나눌 줄 아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용서도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용서도 자비고, 주는 것도 자비입니다. 주는 마음이 사라지면 용서하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용서의 힘도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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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사순 제2주간 월요일.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단죄와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저 용서하고 또 용서할 뿐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며 십자가상 예수님의 모습을 자주 묵상하게 됩니다. 활기찬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의 모습도 감동적이지만, 십자가 상 예수님의 모습역시 그에 못지 않게 감동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의 그 끔찍하고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명언 몇가지를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이른바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도 합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오 복음 27장 46절)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복음 22장 3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복음 23장 43절)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복음 23장 46절)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복음 19장 26~27절)
“목마르다.”(요한 복음 19장 28절)
“다 이루어졌다.”(요한 복음 19장 30절)
여러 말씀 가운데 오늘은 용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제 마음에 큰 반향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복음 22장 34절)
그토록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저런 말씀이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 참으로 놀랍니다. 그 순간 저 말씀이 예수님 입에서 나온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 아니시라면 도저히 저런 표현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만일 십자가상 예수님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묵상해봅니다. 욱하기 잘하고, 한 성깔 하는 제가 도저히 그냥 넘길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하느님 아버지께 따졌을 것입니다.
“아버지, 아무리 인류 구원 사업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저 인간들 하는 행동 한번 보십시오. 어떻게 저럴수가 있습니까? 인간으로서 저게 할짓입니까? 저는 저들의 치유와 구원, 행복과 영생을 위해 이 한 목숨 불살랐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습니까? 무죄한 저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것도 모지라 저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무리 바쁘시다 할지라도 제게 딱 3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저 녀석들 제대로 손좀 보고 다시 십자가 위로 올라오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함구하십니다. 철저히 침묵하십니다. 인간들의 무자비한 악행 앞에서도 보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 적대자들의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참으로 크고도 놀라운 예수님의 인내요 사랑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단죄와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저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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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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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1.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유산소 운동을 하면 폐활량이 증가하게 되고 심폐기능이 좋아져서 몸이 건강하게 되는 건 일반적으로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건 후천적인 노력이 따르는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인자와 별개로 자기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린 것입니다.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면도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운동을 하면 건강해진다는 것은 알지만 이것도 생각만큼 몸에 하나의 습관처럼 되지 않으면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폐활량을 키우는 것 또한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폐활량을 키우는 데 좋는 활동 중 하나가 등산이 있습니다. 등산은 상당히 힘든 운동이라면 운동입니다. 상당히 많은 산소를 필요로 합니다. 조금만 올라가도 숨이 찰 정도로 격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일정 시점에서는 호흡하기 가장 힘든 시점이 옵니다. 이를 일명 ‘사점’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죽는 지점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근데 등산을 하다보면 이 사점에 도달하기까지는 죽을 만큼 힘들지만 이 사점을 어느 시점에서 참고 잘 견디면 극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시점을 잘 넘기는 훈련을 잘 해야 등산을 통해서 폐활량을 좋게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물론 쉬엄쉬엄 하면서 산을 올라가도 등산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심폐기능을 좋게 하려면 이만한 고통도 따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고 하십니다. 복음 말씀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게 좋은 것이라는 건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냥 자비로워야 한다고 해서 자비롭게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인위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원래 선천적으로 타고난 심성이 착하고 여리며 동정심이 많은 사람은 굳이 누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고 하지 않아도 자비로운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특이한 경우라고 치부했을 때 보통의 범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게 잘 적용이 되지 않을 겁니다.
성경에는 온갖 좋은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나 훈육에 관련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말씀이 있다는 것은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서는 그렇게 잘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자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가 자비로울 수 있도록 하는 요소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일단 마음의 그릇이 커야 될 거라고 봅니다. 불교에서도 그렇지만 우리 가톨릭에서도 ‘대자대비’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자비도 대소가 있는 것처럼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자비로운 마음도 마음이 커야 다시 말해 도량이 커야 그에 비례해서 자비로운 마음도 클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비의 도량도 폐활량을 키우기 위해 등산이나 조깅처럼 숨이 찰 정도의 유산소 운동을 통해서 심폐기능을 키우듯이 인위적인 노력이 수반이 되지 않으면 되지 않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그게 단순히 쉽게 될 요량이면 우리가 그렇게 미사를 봉헌하면서 한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을 그토록 듣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만큼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반증이지 않을까요.
냉정하게 따지면 자비는 남을 위해 남을 향해 자비를 베푸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이 남을 위해 자비를 베풀면 그 자비가 하느님이 베푸시는 자비로 부메랑이 되어 자신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는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비를 이런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다다익선’처럼 자비를 베풀면 베풀수록 자신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적으로도 유익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대명사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랑보다도 더 심오한 사랑이 ‘자비’입니다. 자비는 사랑이라는 차원보다 더 높은 차원입니다. 그럼 당연히 일반적인 사랑도 허물인 죄를 덮을 수준이면 자비는 덮고 가리는 수준을 넘어 아예 없애는 수준까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 크기만큼이나 세상을 향해서 또는 남을 향해서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비로운 마음도 공부처럼 그런 마음을 가지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공부하고 해야 우리가 자비로울 수 있는 품성을 가질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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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로마노 형제님.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다니9,4ㄴ~10)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9~10)
선민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다니엘이 바빌론 유배를 초래한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하여 3가지 단락으로 회개하는 내용이 다니엘서 9장 5~15절에 나온다.
그 가운데 첫번째 단락인 다니엘서 9장 5~8절에서는 바빌론 유배가 하느님의 공의(公義)와 심판의 실현으로 이루어졌음을 회상하며 회개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제 다니엘서 9장 9~12절은 모세 율법에 규정된 내용이 실현되어 이루어졌음을 회상하며 회개하는 내용이다.
다니엘서 9장 9절의 '그러나'로 번역된 접속사 '키'(ki)는 '~에도 불구하고'라는 양보의 의미로 번역하여야 한다.
즉 다니엘서 9장 9절은 하느님께서 크나큰 자비와 용서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선민 이스라엘이 주님께 크나큰 거역을 저질렀음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다니엘서 9장 9절에서 하느님의 속성 내지는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처신으로 소개되고 있는 '자비와 용서를 베푸심'에 해당하는 '하라하밈 웨핫쎌리호트'(harahamim wehassellihoth)는 둘 다 복수형 명사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정도를 매우 강조하는 표현이다. 즉 하느님의 자비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고 그분의 용서하심이 매우 풍성하다는 사실을 이중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특히 '자비'에 해당하는 '하라하밈'(harahamim)의 원형 '라함'(raham)은 본래 어머니의 자궁(womb) 혹은 사람의 내장(bowel)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어머니가 자기 자녀에게 대해 나타내는 강력한 사랑의 감정과 이에 수반하는 행동을 나타낸다.
이처럼 선민 이스라엘에 대해 하느님께서 뜨거운 사랑의 마음, 자비의 심정을 품으셨기에, 이스라엘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다.
사실 다니엘이 이것을 진술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도 불구하고 범죄와 거역을 자행하는 이스라엘의 죄상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진술은 이처럼 하느님을 거역한 이스라엘이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외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다니엘서 9장 10절과 11절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9장 5절, 6절의 진술과 유사하며, 선민 이스라엘이 주님께 대하여 크나큰 범죄를 자행했음을 자백하는 기도이다.
다니엘서 9장 10절의 '듣지 않고'에 해당하는 '웰로 사마으누'(wello samahnu)는 '그리고 저희가 결코 듣지 않았습니다'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특히 '저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번역 '뻬콜 예호와'(beqol yehowa)는 '주님의 목소리'로 번역되고, 이 표현은 선민 이스라엘이 단순히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아예 하느님의 말씀 자체를 싫어하는 태도를 취했음을 나타낸다.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주님의 종 예언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전파한 말씀뿐 아니라(다니9,6) 하느님께서 그들의 손을 의탁하여 이스라엘 앞에 내놓으신 율법까지(다니9,10) 선민 이스라엘이 듣지 않고 행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주님께서 ~~(부탁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에 해당하는 '나탄 레파네누' (nathan lepanenu)는 문자적으로 '그가 우리 앞에 주신'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처음 율법이 부여된 모세 시대에 관한 회상이 아니라 이미 부여된 그 율법들이 각각의 시대마다, 세대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통해 생생하게 선민 이스라엘에게 다시 각성되고, 그것에 대한 이행이 지속적으로 촉구되었음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본문에서 '법에 따라'에 해당하는 '뻬토로타이우'(bethorothaiu)의 원형 '토라'(thora)는 가르치는 행위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을 말한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십계명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규정들과 법령들 및 율법의 구체적인 조항들을 포함한다.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용서 받은 이는 용서하신 분을 잃어버릴 수 없지요.
(루가 6,36-38)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자비(스폴랑코 니조마임)- 한 생명을 키워내는 자궁을 뜻하는 것으로 애 끓는 마음~ 자비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다시 살리시는 그 애 간장이 녹는 사랑이 자비입니다.
그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받아 이웃에게 전해주는 사람이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눈이 멀어 살아갈 수 없는 이가~
(마태20,31) 군중이 그들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주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티토3,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말씀, 약속)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에페2,3-5) 3 우리도 다 한때 그들 가운데에서 우리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본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4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우리는 자비를 얻어야 할 존재이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 처럼의 그 자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 그 사랑으로 용서를 구원(생명)을 받았습니다.
(1요한4,9-10)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 우리는 죄의 속죄 제물로 돌아가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십자가로 내가 용서 받았음을 믿는다면 나에게 잘못한 이 또한 그 십자가로 용서 받았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우리의 용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용서 받았다는 곧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그 때 용서가 온전히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느 누구를 심판도 단죄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 모드는 다 용서 받은 죄인 일 뿐입니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 그러니 십자가의 복음을 구원의 진리로 믿는다면 이웃에게 아낌없이, 조건 없이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마음, 자비(慈悲) 그 큰 사랑, 그 하늘의 용서로 다시 살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마태10,7-8) 7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마귀(對敵者)는 하느님의 자비가 아닌 인간의 자비로 고쳐주고, 일으켜주고 깨끗하게 해 주라고 합니다. 그거 우리가 해야 할 좋은 일 아닌가요? ‘해야지요, 당연히~’ 그러나 사람의 좋은 일, 그 자비에 만족해 하고, 목적이 된다면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용서와 구원(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자비의 용서 구원(생명)의 근원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그래서 멋있어 보이는, 더 참인 것 같은 사람의 일로,~
그러나 보이지 않는 참인 하느님의 일, 그 구원의 자비를 얻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하느님의 대적자 그 마귀의 말을 믿지 마라, 쫓아내라 하십니다. 그러면 나의 구원자 그리스도를 절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아플 때, 시련의 때, 그 때마다 죄의식 이라는 질병에 시달리지 않게 하시는 용서의 십자가(代贖)를 바라보게 하시는, 하늘의 희망으로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 아멘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복음(루카6,36~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6)
사람의 대인 관계에 있어서 절정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믿는 이들의 자비의 모델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루카 복음 6장 36절에서 '~처럼'으로 번역된 '카토스'(kathos; as)는 '~을 따라서' '~에 부합하여' 등과 같이 유사성과 동질성을 나타내는 전치사 '카타'(kata)와 '~같이', '~처럼'이라는 뜻이 있는 부사 '호스'(hos)의 합성어로서 '~와 같이', '~와 동일하게'라는 매우 강조적인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나약하여 늘상 죄(罪)를 저지르지만, 그 목표만큼은 절대선(善)에 두어야 하며, 그 절대선의 모델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카토스'(kathos)라는 부사가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루카 복음 6장 36절은 '~하신(것)'에 해당하는 '에스틴'(estin; is)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의 현재형이다.
희랍어의 현재형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불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데, 항상 자비하신 속성을 유지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러 죄지은 인류가 멸망과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 무죄하신 예수님까지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으로 드러나며, 그 사랑은 일회적이 아니라 오늘날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절대적 사랑과 자비의 실천은 아담의 타락한 본성과 원죄성(原罪性)을 지닌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체, 말씀 앞에 부단히 인간의 자아와 본성을 내려놓고 비울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할 수 있는 신적 덕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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