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사] 제3장 우파니샤드의 철학
길희성: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졸업. 하바드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 전공.
저서- Chinul, the Founder of the Korean Son Tradition
현재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 목 차 ▒
제3장 우파니샤드의 철학
1. 우파니샤드의 성격 ▲ 위로
베다와 브라흐마나에서 이미 보이기 시작한 고대 인도인에 의한 세계의 통일적 원리에 대한 사유는 우파니샤드에 와서 그 절정을 이룬다. 눈에 보이는 다양한 경험적 현상을 궁극적인 실제로 보지 않고 그 근저에 보이지 않는 통일적인 실제를 탐구하려는 형이상학적인 사유이다.
이 사유는 종교적으로는 인격화된 자연현상으로서의 제신들의 여러 형태나 성격을 초월하여 그들의 배후에 있는 보다 더 근본적인 하나의 신에 대한 추구로 나타난다. 여러 특수한 성격과 모습을 지닌 제신들은 아직도 현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유한한 존재들로서, 모든 존재의 궁극적 원리를 추구하는 우파니샤드 철인들의 마음을 더 이상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목표는 그것을 앎으로써 다른 모든 것들을 알게 되는 단 하나의 근원적인 실재 그 자체였던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이런 고대 인도인의 형이상학적 정열의 산물로서, 그 후의 인도철학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베다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베단타(베다의 끝 혹은 목적)라고도 불리며, 육파철학의 하나인 베단타 철학의 기반을 이룰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학파에 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베다는 그 내용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 특히 제사의 의무와 규정을 다루는 행위편과, 형이상학적 지식을 다루는 지식편으로 구별되어 왔다. 우파니샤드는 이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우파니샤드에는 형이상학적 사유 이외에도 아직도 브라흐마나에서와 같이 제의에 관한 여러 가지 잡다한 사상들이 섞여 있지만, 그 독특한 철학적 의의는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결코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항시 변하는 유한하고 고통스러운 현상세계 자체를 초월하여 영원한 실재에 도달하려는 새로운 종교적 갈망에 입각한 것이었다. 우파니샤드에 와서는 고대 인도인들은 인간의 운명이란 카르마의 법칙에 의하여 윤회의 세계에서 끝없는 생사를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마치 풀벌레가 한 잎사귀에서 다른 잎사귀로 옮겨가듯이 사람은 한 생이 끝나면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파니샤드 철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여야 이런 목적없는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생사의 되풀이에서부터 해방되어 절대적인 삶을 얻을 수 있는가에 촛점을 모으게 되었다. 이러한 끝없는 생사의 되풀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올바른 행위란 그것이 도덕적이거나 제사의 행위이거나간에 이미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행위는 어떠한 것이든간에 반드시 그 결과를 초래하게끔 되어 있어, 아무리 선한 행위라 할지라도 우리를 계속해서 윤회의 세계에 속박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따름이기 때문이다. 선한 업보를 받는다 해도 이 현상세계 자체를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절대적인 삶의 발견을 위해서는 행위가 아니라 우주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실재 자체를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서 브라흐마나의 제사를 중심으로 한 행위주의적 철학이 극복되게 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지식이란 경험적인 현상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일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우주와 인생의 비밀을 아는 신비한 지식이었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이 신비한 지식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전달하지 않았고, 스승과 제자의 특별한 관계 아래서 조심스럽게 성스러운 지식으로서 전수했던 것이다.
'우파니샤드'란 말은 "가까이 앉는다"라는 뜻을 지닌 말로서, 선생과 제자가 가까이 앉아 대화를 통하여 비의적인 지식을 전수했다는 데서 주어진 이름이다. 따라서 우파니샤드의 진리탐구는 주로 대화의 형식으로 전개되며, 우리는 이 대화들을 통하여 우파니샤드 철인들이 세계의 궁극적 실재를 추구하는 철학적 정열과 영원한 삶을 바라는 종교적 갈망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에 참가하는 자들은 바라문계급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크샤트리아나 혹은 심지어 슈드라계급의 출신들과 여자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우파니샤드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형성된 다양하고 방대한 문헌으로서, 현재 우파니샤드라는 이름을 지닌 문헌은 약 150종 내지 200여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브라흐마나에 소속되어 있는 고전적인 주요 우파니샤드는 약 13편으로서, 시기적으로 보아 약 B.C 700년으로부터 A.D 200년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며, 따라서 그 안에서도 여러 가지 사상적 흐름들이 발견되고 결코 하나의 일관된 사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브르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와 '챤도기아 우파니샤드'로 대표되는 초기 우파니샤드의 중심사상을 고찰하기로 하자.
2. 초기 우파니샤드의 철학 ▲ 위로
우파니샤드의 궁극적인 지식은 브라흐만을 아는 지식이다. 브라흐만은 원래 브라흐마나에서 제사에 쓰이는 성스러운 말 혹은 이 말의 성스러운 힘 등을 나타내는 말이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우파니샤에 와서는 이 개념이 더욱더 형이상학적으로 발전하여, 제의와 관계된 의미는 거의 없어지고 우주의 궁극적 실체 내지 힘을 의미하는 말로 널리 쓰여지고 있다. 이는 모든 현상계의 근저 또는 핵심으로 이해되며, 보이는 다양한 세계의 배후에 있는 어떤 통일적인 실재이다. 만유가 그로부터 나왔고, 그에게로 다시 흡수되게 되는 만유의 근원이며 귀착지인 것이다.
최초에는 이 세계는 둘도 없는 일자인 유 만이 있었다. 어떻게 비유로부터 유가 생길 수 있겠는가? 이 일자가 다가 되고 싶어서 불을 방출했고 불은 물을 방출했고 물은 음식을 방출했다. 그 다음 일자가 이들 셋 안으로 살아 있는 내적 자아로서 들어가서 그 셋을 섞어서 각각 또 셋을 만들내어 만물의 이름과 형상을 산출시켰다. 불과 물과 음식의 색갈은 각각 빨강과 하얀색과 까만색이고 이들은 진리이고 그들로부터 나온 차별적인 것들은 말에 의하여 이름이 주어진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에 들어와서는 이 세 요소들의 가장 미세한 부분은 각각 마음과 숨과 말이 되었다.
웃달라카의 이러한 우주론적 사변은 분명히 다양한 만물에 본질을 이루는 하나의 통일적 실체가 깔려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현상세계의 다양성을 세 가지 요소들의 혼합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상키야 학파에 의하여 물질계를 구성하는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의 삼요소설로 발전되게 되는 것이다. 웃달라카는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주론적 사변을 인간에 대한 고찰에 연결시켜 우주와 인간의 본질이 동일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에서는 만물의 모태와 같은 브라흐만으로부터 전개되어 나온 현상세계의 존재론적질서를 인간존재를 중심으로 하여 다섯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브라흐만은 인간존재에 있어서 다섯 가지의 층을 가진 자아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 중 제일 낮은 층을 이루는 것은 음식, 즉 물질로 이루어진 자아, 동물 만에 공통된 지각활동으로 구성된 자아, 인간만이 소유하고 있는 인식활동으로 된 자아, 그리고 가장 높고 깊은 단계로서 희열로 이루어진 자아를 말하고 있다. 이 마지막의 희열로 된 자아란 곧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내재하는 브라흐만 자체인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과 브라흐만의 현현인 현상세계와의 관계를 여러가지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거미와 거미로부터 나온 거미줄, 금과 금으로 만든 여러 가지 물건들, 불과 불꽃들, 진흙과 진흙으로 만든 그릇들, 혹은 악기와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와 같은 비유들이다. 이 비유들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일(1)과 다의 관계로서, 일을 알면 다를 알 수 있으며, 일은 불변하는 실재이며 다는 변화하는 현상세계로서 사실은 단지 이름과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명한 샹카라의 불이론적인 베단타 철학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현상세계를 단지 우리의 무지로 인한 환술로 보는 견해는 우파니샤드에는 아직 분명히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암시적으로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슈베타슈바타라'와 같은 후기의 우파니샤드는 브라흐만을 인격적 신인 이슈바라(주)로서 파악하며 이 세계는 마술사와 같은 신의 환술에 의하여 나타나 보여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잡다한 현상세계가 브라흐만으로부터 전개되어 나온 것이거나 혹은 그것의 변형인 만큼 어디까지나 환술일 수 없고 오히려 브라흐만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는 일종의 범신론적 사상도 다분히 발견되고 있다. 모든 것이 브라흐만의 현현이기 때문에 브라흐만이 모든 것의 배후에 혹은 그 속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우파니샤드에는 세계를 브라흐만의 전개로 보는 전변설과, 세계는 브라흐만이라는 유일의 실재를 근거로 하되 단순히 가상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 즉 가현설이 둘 다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베다나 브라흐만에서 이미 발견되는 우주발생론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며, 후자는 우파니샤드 특유의 철학적 기여라고 볼 수 있다. 양자는 다 우주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실재인 브라흐만과 유한하고 변하는 현상세계와의 관계를 파악해보려는 노력인 것이다.
우파니샤드 철학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무엇보다도 브라흐만에 대한 우주론적인 사변을 넘어서서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를 주체적으로 파악했다는 데 있다. 즉,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은 곧 다름 아닌 인간의 실재라는 관점하에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실재탐구의 방향으로 전환하여 자아의 탐색에 눈을 돌린 것이다. 이 방향전환은 종래의 외향적인 우주론적 사변으로부터 내향적인 인간의 자기 성찰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파니샤드의 불멸의 사상적 공헌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이 전환은 제사의식을 관장하면서 성스러운 브라흐만의 힘을 거의 독차지하다시피한 바라문계급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반발로서 이해될 수 있다. 우파니샤드에 바라문계급 출신이 아닌 많은 철인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종래의 바라문계급에 의한 제사를 매개로 하는 종교생활에 회의를 품고 자기 자신의 영원한 자아를 찾음으로써 우주의 궁극적인 실제에 직접적으로 접하고자 하는 노력을 한 것이다. (Deussen은 특히 Ksatriya 계급 가운데서 우파니샤드의 비의적인 진리가 처음에 전수되었다고 생각한다)
우파니샤드는 인간의 참 자아를 아트만이라 불렀다. '아트만'이란 문자 그대로 '자아'라는 뜻으로, 문제는 무엇이 참으로 인간의 불변하는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우파니샤드 철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종종의 사변들을 우파니샤드에서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우선 인간존재의 근거로서 자주 숨이 거론되고 있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숨은 인간의 다른 모든 감각기관의 활동보다 더 긴요하고 잠시도 중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은 인간의 정신적 기능을 설명할 수 없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때로는 숨 대신 의근, 지 등이 인간의 본질적 자아로서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우파니샤드의 사변의 정점은 이 모든 것이 불충분한 것임을 깨닫고 인간의 참자아란 위에서 말한 육체나 정신적 요소와는 달리 그것보다 더 밑바닥에 깔려 있는 깊은 실재임을 이해하게 되는데 있다. 이러한 한층 심화된 사변은 소위 자아의 4가지 상태에 대한 이론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는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자아이다. 즉, 우리의 감각기관이 외계와의 접촉에 의하여 활동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자아는 우리의 몸과 동일시되며 자아가 가장 은폐된 상태이다.
둘째는 꿈을 꾸는 상태로서, 이때에는 우리의 감각기관과 몸은 쉬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 즉 내적 감각기관과 의식은 계속 활동하고 있으며 깨어 있을 때의 체험을 재료로 하여 미뉴(가늘 미, 가늘 뉴)한 대상의 세계를 임의로 만들어 내는 상태이다. 여기서도 역시 참자아는 발견되지 않고 마음이 자아와 혼동되고 있는 상태이다.
세번째 자아의 상태는 이보다 더 깊은 상태로, 꿈도 없는 깊은 수면의 상태이다. 여기서는 어떤 감각기관이나 의식작용도 없고 그에 해당하는 대상도 사라지게 된다. 즉, 주관과 객관의 대립과 교섭이 초월되고 다양성과 제한성이 사라진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상태이다. 그렇다고 이것은 아주 무의식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변적이고 특정한 제한된 의식이 아닌 무한한 순수식만이 밑바닥에 깊이 깔려 있는 상태라고 한다.
'챤도기야 우파니샤드'의 웃달라카는 이 깊은 수면의 상태를 곧 자아가 순수하게 그 자체를 되찾은 완전한 상태로 간주한다. 마치 한 마리의 새가 이리 저리 날아다니다가 마침내 자기의 보금자리에 돌아와서 쉬고 있는 상태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만두키야 우파니샤드'와 같은 후기 우파니샤드에서는 더 나아가서 제4의 상태를 완전한 상태로 말하고 있다.
이 4번째의 자아의 상태는 희열의 상태로서, 세번째의 깊은 수면의 상태와 같이 주 객의 대립이 초월되며, 모든 유한한 정신적 활동이 그친 상태이다. 이 상태야말로 자아가 아무런 방해없이 순수하게 드러나는 지극한 희열의 상태인 것이다. 자아가 특정한 대상이 없이 순수의식으로서 스스로 밝게 존재하는 상태이다. 이 상태는 보통의 경험으로서는 주어지지 않고 요가와 같은 정신적 훈련을 통하여 주어지는 신비적 체험의 세계이다.
우파니샤드의 철인 야즈나발키야에 의하면 자아는 인간의 모든 인식행위나 정신적 활동의 배후에서 항시 그것을 지켜보는 증인과 같은 절대적 주체로서 결코 우리의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인식이요, 다른 모든 인식의 주체로서 그 자체는 결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직관에 의하여 자명한 것으로밖에 알려질 수 없는 실재이다. 따라서 설명이나 정의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부정적 방법으로, '무엇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다'라는 식으로밖에는 이야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야즈나발캬는 강조하고 있다.
이 자아는 어떤 차별성이나 개별성을 용납하지 않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자아이다. 웃달라카는 그의 아들 슈베타켓투에게 이 진리를 여러가지 비유로써 가르치고 있다. 꿀이 여러 나무들로부터 채취되지만 하나의 본질이듯이, 강물들이 동에서 오든 서에서 오든 하나의 바닷물을 이루듯이, 아트만에는 아무런 개별적 차별성이 없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 아트만은 다름 아닌 브라흐만으로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공통된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소금이 물에 녹으면 물의 어느 부분을 맛보나 소금의 맛이 있듯이 아트만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편재하는 공통된 본질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세계는 하나의 궁극적 실재에 참여하고 있으며 브라흐만은 우주의 아트만이요, 아트만은 인간에 내재하는 브라흐만인 것이다. 바로 이 범아일여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최고의 지식인 것이다. '네가 그것이다' 혹은 '내가 브라만이다'라는 우파니샤드의 유명한 구절들은 이 진리를 말해 주는 것이다.
베다나 브라흐마나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인간을 소우주로 보는 견해가 종종 발견되지만, 우파니샤드에 와서 이 사상은 더욱 철학적으로 승화되어 대우주의 실재가 다름 아닌 소우주로서의 인간의 실재로 파악되는 것이다. 브라흐만이 이렇게 인간에 있어서 주체적으로 파악된 결과, 브라흐만의 본성은 불변하는 존재, 순수식, 희열로서 파악되게 되었으며, 동시에 인간의 본질은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의 본질과 동일시된 것이다.
자기가 곧 브라흐만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모든 욕망과 두려움에서부터 해방된다. 왜냐하면 자기자신 이외에 따로이 원하거나 두려워할 다른 아무 대상도 존재하지 않기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은 모든 업으로부터 자유로와지며 사후에는 다시 환생하는 일이 없이 브라흐만 그 자체로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삶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삶은 물론 어떤 개인적인 삶의 존속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해탈이란 결국 현세에서 이미 자신에 대한 올바른 통찰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생해탈의 사상을 우리는 이미 우파니샤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리그베다'나 브라흐마나의 전통적인 사유에 따라서 해탈을 사후에 신들의 길을 따라서 브라흐만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3. 중후기 우파니샤드의 철학 ▲ 위로
이상에서 우리는 초기 우파니샤드의 주요 사상을 대략 살펴보았다. 이제는 '카타우파니샤드',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등과 같은 주기 우파니샤드의 사상을 검토해 본다.(중기에 속하는 우파니샤드는 이 둘 외에도 이샤, 문다카 등이 있다. Mundaka Upanisad 는 Atharva Veda 에 소속되어 있고 나머지 셋은 모두 Yajur Veda에 속해 있다)
이들 중기 우파니샤드는 대체로 B C 500년에서 B C 200년경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서, 형식상으로 볼 때 산문 대신 주로 운문으로 쓰여진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그 부피에 있어서 '브르하드아라야냐카' 등과 같은 것에 비하면 훨씬 짧고 내용이 비교적 간단하다는 특색이 있다. 사상적으로는 초기 우파니샤드에서 아직도 많이 발견되고 있는 브라흐마나의 제사주의적 우주론적 사변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카타 우파니샤드'에 있어서 철학적으로 새롭고 중요한 것은 상키야나 요가 철학의 근원적 사상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카나 우파니샤드'는 아트만을 마차의 주인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마차이고, 우리의 지성은 마차를 모는 자, 마음은 고삐, 감각기관은 말들, 그리고 감각기관의 대상은 말이 달리는 길에 비유되고 있다. 지혜있는 자는 항시 마음의 고삐를 제어하고, 감각기관의 말을 잘 몰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여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지만, 무지한 자는 그 반대로 생각과 감각기관에 이끌리어 윤회의 세계에 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어한다'는 말은 요가와 같은 어원의 말로서 해탈을 위한 실천적 행위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방법과 동시에 이를 뒷받침해주는 형이상학적 원리들에 대한 사변도 '카타 우파니샤드'에 전개되고 있다. 세계 전체를 점차적으로 높은 존재론적 원리에 따라 해석하여 요가라는 정신통일의 훈련을 통하여 가장 높은 실재에 접하도록 이론적인 뒷받침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감각기관보다는 대상 세계, 대상 세계보다는 의근, 의근보다는 지성, 지성보다는 대아, 대아보다는 미현현 그리고 미현현보다는 정신이 더 높은 실재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나중에 상키야 철학에서 하나의 정돈된 세계 전변의 이론으로 정립되게 되는 것으로서, 상세한 것은 후에 검토키로 한다.
단지 여기서 한가지 언급되어야 할 점은 중기 우파니샤드에는 아직도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은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신은 물질보다 높은, 그러나 그것과 존재론적으로 동일선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서, 신 혹은 브라흐만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신론적 이원론의 사상은 우파니샤드에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기 우파니샤드의 또 하나의 중요한 문헌은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이다. '카타 우파니샤드'보다 좀더 나중의 것으로, B C 2~ 3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우파니샤드에는 요가의 실천에 관하여 '카타 우파니샤드'보다도 더욱더 상세한 설명이 발견된다. 이를테면 요가를 행하는 장소, 정좌의 자세, 호흡의 조절, 요가의 실습에 따른 종종의 초자연적 능력 등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가의 궁극적 목표는 신의 인식에 있으며 신의 인식은 개인의 영혼들을 물질세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다고 한다. 신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유일자로서, 만유를 창조하고 그 안에 내재하며 마자막에는 만유를 다시 회수하는 대주재자이다. 우리는 그의 은총에 의해 신과 그의 위대함을 보며 그를 신애하는 자는 진리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본래 초기 우파니샤드에는 브라흐만이 대체로 비인격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로 이해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분명히 온 세계를 지배하는 인격신으로 간주되고 있다. 특히 그를 베다의 신 가운데 하나인 루드라로 부르고 있으며 이 루드라신은 나중에 쉬바 신과 동일시되는 신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슈베타슈바타라'의 강한 유일신적 사상과 신애의 사상은 서력 기원전 3~ 4 세기경부터 대중의 신앙운동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쉬바 신과 비슈누신의 숭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경향은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 와서 더욱더 본격적인 자세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의 사상 가운데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신과 물질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신을 환술사로, 물질세계를 그에 의하여 조작된 환술로 비유하고 있으며 개인의 영혼은 이 환술에 홀려서 붙들려 있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나중에 베단타 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의 하나인 '마야'라는 말이 여기에 비로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신과 개인 영혼과 물질세계와의 삼각관계는 후세의 유신론적 제철학체계의 근본을 이루는 문제인 것이다.
중기 우파니샤드의 인격적인 브라흐만의 이해와 더불어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카타'와 '문다카 우파니샤드'에 나타나 있는 아트만의 계시의 사상이다. 즉 아트만은 어떤 가르침이나 지적인 능력에 의하여 알려질 수 없는 실재로서 자기가 선택한 자에게만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하는 사상이다.
지금까지 '카타'나 '슈베타슈바브라' 등과 같은 중기 우파니샤드 사상의 특징들을 살펴보았거니와 이들보다도 더 늦게 산출된 일군의 후기 우파니샤드들도 있다. '프라슈나', '마이트리', '만두기야'와 같은 우파니샤드들이 이에 속하며 대략 B C 200에서 A D 200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는 '마이트리 우파니샤드'의 사상만을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마이트리 우파니샤드'에는 대체로 '카타 우파니샤드' 등에 나타나 있는 상키야 철학의 씨가 더욱더 분명하게 개념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상키야 학파에서 말하는 개인아의 개념이 명확히 정립되어 물질로부터 성립된 원소아와 확실히 구별되고 있으며, 윤회의 주체로서의 세신의 개념도 발견된다. 또한 만유를 구성하고 있는 삼요소(sattva, rajas, tamas)의 이론도 발견되며, 요가 철학의 근본이 되는 요가 수행의 팔지설에 가깝게 그 중의 6단계가 이미 언급되어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중후기의 우파니샤드들을 통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상키야철학은 아마도 체계적인 학파 가운데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철학적 사유라는 점이다. 그것은 해탈의 종교로서 실천적인 요소가 강한 불교의 영향 아래 이에 상응할 만한 해탈의 방법과 이론을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를 느낀 바라문 사상가들의 대응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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