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별 (隨筆)
김인희
별을 사랑하는 소녀!
소녀에게 어울리는 대명사다. 야트막한 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빙 둘러싼 산골 마을에서 나서 자란 소녀가 있다. 양지 녘에 하얀 민들레꽃이 노란 나비를 부르면 산비탈에 연분홍 진달래가 피었고 밭두렁마다 개나리가 피었다. 산벚꽃이 소리 없는 폭죽을 터뜨리면 앞산과 뒷산에서 뻐꾸기가 요란하게 노래했다. 실지렁이처럼 꼬물거리는 그 길을 걸어서 초등학교에 오가고 중학생이 되었다.
교복자율화 1세대 중학생이 되어 이웃 마을을 지나 중학교에 오가던 길에는 실개천이 놓여있었다.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고 있는 논두렁을 지나 실개천에 다다르면 떡두꺼비 등판 같은 징검다리가 놓여있었다. 비가 많이 내린 날에는 실개천을 건너는 지름길을 외면하고 부채꼴 능선을 따라 먼 거리로 다녔다. 국어 시간에 ‘소나기’를 배운 어느 날 소설 속의 소녀가 되어 징검다리에 앉아서 개울물에 손을 담그고 물장난을 하기도 했다. 한겨울에는 징검다리가 얼어서 미끄러워서 조심조심 건너서 오갔다.
그 시절에 밤하늘 우러러 별을 보고 별을 사랑한 시인을 만났다.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서 만난 윤동주 시인 그리고 그의 시 ‘별 헤는 밤’을 읊조리던 가을밤에 가슴에 쏟아져 내리던 별을 주체하지 못하고 황토 마당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날 밤 소녀와 별의 합일이 이루어졌다. 소녀의 문학 혈맥에 각인된 별의 유전자가 이끄는 대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소녀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던 해에 사회 초년생이 되었다. 부천에서 용산 전자상가로 출퇴근할 때 지옥철로 악명 높은 1호선 전철을 이용했다. 쥐꼬리만한 경리 월급은 요목조목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서점에 들러 책 한 권 품에 안으면 하늘만큼 땅만큼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해 늦가을 땅거미가 내린 부천역 광장을 바람 따라 배회하던 플라타너스 낙엽이 처연했다.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를 핑계 삼아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집까지 걸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중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께서 소녀에게 점지(漸漬)해 준 언어 ‘수불석권(手不釋卷)’이 찬연한 별이 되어 소녀를 지켜주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전철을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만났던 작가와 책의 등장인물들은 소녀의 연인이 되었고 그들과 사랑에 빠졌다. 한수산 작가의 『부초』를 읽은 후 서커스 천막 안을 기웃거리면서 등장인물들을 찾았던 적도 있었다. 별을 사랑한 시인은 소녀의 하늘에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다. 소녀는 책을 통하여 역사, 문학, 문화, 예술 등에 입문하면서 성숙했다.
도시에서 몽유병에 걸린 알프스의 하이디처럼 소녀도 빌딩숲을 헤매면서 시골을 그리워했다. 자본주의 군상에 흡수되지 못하고 물 위를 떠도는 기름이 되어 표류하던 시절이었다. 젊은이들이 상경을 동경하던 때 소녀는 역주행하여 시골을 동경했다. 소녀의 바람대로 결혼 후 시골(부여군)에 안온한 둥지를 틀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때도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하고 현모양처를 꿈꾸며 주경야독(晝耕夜讀)을 감행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공부를 하면서 두 자녀와 아웅다웅하고 남편과 티격태격하고 양가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느라 좌충우돌했다. 무엇 하나 간과할 수 없었던 고단하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이만큼 지나 돌이켜보니 그 시절이 전성기였을까 하는 생각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빛난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빛나는 경력으로 방과 후 학습지도를 하면서 사회복지사 석사과정에 입문했다. 강의실에서 직접 교수님 강의를 듣는 것이 황홀했다. 꿈을 꾸듯 석사과정을 마치고 사회복지사가 되어서도 학업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어쩌면 제때 하지 못한 공부가 천추의 한(恨)이 되었을 것이라고 자위했다.
지천명을 넘어 이순을 향한 능선에서 박사과정에 도전장을 던졌다. 박사과정 면접시험을 볼 때 면접 담당 교수님의 질문이 의미심장했다. 교수님은 서류를 보면서 영어영문학과 학사, 사회복지학 석사 그리고 박사과정은 한국어학과,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데 한국어학과를 지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나는 살포시 웃고는 “때마다 필요한 공부였다. 영어영문학사로서 방과 후 교사로 일했으며 사회복지사로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대상자들에게 복지의 햇살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일조했다. 한국어학과 지망은 연어의 귀환(歸還)과 다르지 않다. 문학이라는 별을 지표 삼아 오는 동안 애타게 찾은 귀착지”라고 답변했다. 면접관이었던 지도교수님께서 한용운 님의 ‘님의 침묵’ 시낭송을 요청했다. 즉석에서 시낭송을 하자 연관성이 없다는 우려를 표명한 교수님께서 활짝 웃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사과정 공부를 하면서 이국의 별들을 만났다. 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는 중국, 몽골, 미얀마,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등 외국에서 온 대학원생들이 90%다. 한국어의 위상이 급부상하여 한국어학과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K-POP, K-드라마, K-스포츠, K-푸드 등 한류열풍의 기류를 타고 한국어의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음을 몸소 실감했다. 이국의 별들과 공부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알았고 소녀의 언행심사(言行心事)가 곧 한국이라는 사명감을 한시도 내려놓지 않았다.
높이 띄운 별 하나, 박경리!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정하는 것이 최대 관건이었다. 이런저런 우려의 말, 쉬운 길로 가라는 달콤한 조언,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든든한 지원의 손길을 외면했다. 박경리 작가의 <土地> 열여섯 권을 안고 스스로 거푸집을 짓고 들어앉았다. <土地>의 시간적 배경은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 일제강점기부터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반세기의 역사였다. 공간적 배경은 하동 평사리 최참판 댁에서 전주, 서울, 만주, 연해주, 일본까지 넘나들고 6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한다. <土地>의 원고는 4만 여장이라고 했다. 박경리 선생의 <土地> 열여섯 권을 읽고 또 읽으면서 한국어문화문법을 찾아 권, 쪽, 행을 표기하면서 몸부림쳤다.
논문 『박경리 <土地>에 나타난 한국어문화문법』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을 쓰기 전에 거룩한 의식인 양 하동 박경리 문학관을 다녀왔다. 박경리 선생 동상 앞에서 빈손을 합장하듯 내밀고 거룩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문학의 거대한 산맥 열여섯 산맥을 완주한 후 과업을 달성했다는 안도감에 도취하기 전 탈진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박사학위 수여식 후 다시 하동 박경리 문학관을 다녀왔다. 박경리 선생 동상 앞에서 논문을 바치면서 감사를 드렸다. 문학관을 오가면서 ‘박경리 선생님께서 지금 살아계셨다면···’ 한없이 되뇌었다.
별이 된 소녀!
소녀는 별을 우러르는 일편단심으로 살아왔다. 한시도 별을 내려놓지 않고 낮에도 하늘 더듬으면서 거기 그 자리에 있는 별을 생각했다. 그 별을 따라 오솔길을 선택하여 걸으면서 숲속을 지나고 냇물을 건넜다. 천 길 단애의 끝에서 까마득한 절망으로 잠시 주저앉은 적 있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더러는 가시덤불을 헤매면서 가시에 찔려 상처에 선혈이 고였다. 소녀는 고독하거나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별을 따라가는 오솔길을 선택한 것을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전율하는 작은 별!
소녀는 간절하게 염원하던 경지에 도착한 후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가을 서리처럼 차갑게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수직으로 쏘아 올린 꿈이 궤도에 안착했다. 소녀는 수직의 시선을 넓고 평평하게 바라보려고 애쓰고 있다. 이국의 팔십 대 석학의 궤도를 따라 돌면서 봄날의 바람처럼 따뜻한 향기를 내뿜는 별이 되고 싶다. 책을 끼고 잠드는 시간이 그리움처럼 쌓이면 영롱하게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을까. ★
첫댓글 또 읽어도 좋은 글
이제는 샛별이 되어
언어와 문학의 길을 인도하는
등대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원님의 앞길을 밝혀 주시는
빛이 있음을 기억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앞길을 밝혀주는 빛!
힘들 때, 외로울 때, 지쳤을 때.......
기억하고 다시 힘을 내겠습니다.
더 노력하여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