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의외라 여겼던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행을 성사시킨 인물은 이동준 디제이매니지먼트 대표[아래 사진]다. 박항서 감독의 제리 맥과이어라고 하면 적절한 비유가 될까? '박항서 매직'의 숨은 조력자라 할 이 대표를 만난 것은 24일 오후다. 전날 결승 진출이 확정된 베트남 대표팀의 쾌거는 그의 전화기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 중에는 주한베트남대사관에서 걸려온 전화도 있었다. 베트남 국영TV(VTV)에서 박항서 감독의 가족을 취재하길 원한다며 도움을 구한다는 것이다. 대화를 몇 분 이상 이어가기 힘들 정도로 분주했지만, 표정에서는 즐거운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에게서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행과 이후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Q.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행은 뜻밖이었다. 베트남이 '박항서'를 원한다는게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때 대표팀과 프로팀에서 성과를 내긴 했지만, 실업팀 창원시청 감독을 맡은 뒤론 세대 교체 바람 속에 잊혀져가는 이름이었던게 사실 아닌가. 그 과정이 궁금하다.
이동준(이하 이) : 박 감독님과는 일면식이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창원시청 감독에 부임하기 전 쉬고 계실 때 한 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뵙고 물으니 내가 아시아 여러 나라에 선수, 감독을 보냈던 얘기를 들었다며 해외에서 지도자 생활을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당시로선 마땅한 길이 없었지만, 그렇게 연락을 주신게 고마워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뒤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이 공석이 됐길래, 박 감독님을 강력 추천했다. 추천한 것은 나지만, 베트남축구협회가 감독님의 경력이니 지도철학에 끌려서 성사된 계약이다.
Q. 베트남 축구협회에 한국 감독을 추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게 대단해보인다. 그 무렵, 베트남 명문 클럽에 정해성 감독을 앉히는 데에도 기여하지 않았나. 베트남과 무슨 인연이길래 그런 계약이 가능한건가?
이 : 베트남 축구계와 가까워진 본격적 계기는 쯔엉을 인천유나이티드에 데려오면서부터다. 쯔엉 영입을 성사시키고, 이후 쯔엉의 한국 생활을 잘 도와주는 모습을 현지에서 잘 봐줬다. 이 과정에서 신뢰 관계가 생겼다.
Q. 맞다. 쯔엉의 K리그 입성도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박항서 이전에 쯔엉이 있었네. 아니, 그런데 그럼 그 이전에는 어떻게 베트남 축구와 연이 생긴건가?
이 : 음. 얘기가 좀 길다. (웃음)
Q. 긴 얘기 좋아한다. 들려달라.
이 : 베트남 얘기가 나오려면 좀 걸리는데 괜찮겠나. (웃음) 대학교 4학년때 축구 에이전트 라이센스를 취득했다. 그리고 곧장 사업에 도전했는데 경험도 없고 기존 선배 회사들의 틈바구니에서 쉽지가 않더라. 경험쌓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스포츠마케팅을 할 수 있는 기업에 취업을 했다. 그때 다니던 회사(미래애셋자산운용)의 슬로건이 'Emerging market expert'였다. 성장하는 시장에 주목하라는 의미인데,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금융상품을 접하다보니 인도네시아, 베트남 같은 나라의 시장이 성장하는게 보이더라. 축구와 접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뒤 본격적으로 축구 에이전트 사업을 해보려는데 아무래도 기존 에이전트들이 주도하는 한국이나 일본, 유럽 같은 시장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더라. 이 과정에서 새로 주목받는 시장을 타겟으로 삼았다. 첫 타겟은 중국이었다.
Q. 요즘은 중국 시장이 커지고 또 뜨겁지만, 그때만해도 다르긴 했다.
이 : 내 입장에선 상황이 좋았다. 아시아 시장에 편견이 있을 때라 관심갖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때였고, K리그에 실력있는 베테랑 FA 선수들이 몰려나올 시기였다. 나이 많고 연봉이 높다는 이유로 K리그 구단들의 외면을 받은 30대 선수들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때마침, 중국 리그가 한국 선수 영입에 관심이 커질 때였다. 덕분에 김태민, 손대호처럼풍부한 경험에 프로 정신과 실력까지 두루 갖춘 베테랑들을 중국 구단에 입단시킬 수 있었다. 그 뒤 홍콩과도 인연이 생겨 키치FC에 김동진, 김봉진 선수 이적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선수 한 두 명을 이적시키는 것보다 구단이나 협회에 전반적인 컨설팅을 해주는 일에 관심이 생겨 전지훈련이나 장비 구매 같은 계약을 도와주고, 한국에 있는 수준 높은 팀닥터 분들을 연결시켜주기도 했다. 중국과 홍콩 구단들을 상대로 교분을 쌓다보니 네트워크가 넓어졌고 그 중 항저우 구단과도 소통하는 관계가 됐다. 그러다보니 홍명보 감독의 항저우행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Q. 컨설팅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는데, 홍 감독의 항저우행은 좋은 계기가 됐을 것 같다.
이 : 선수든 감독이든 입단 계약만 성사시키는게 에이전트나 매니지먼트의 전부가 아니다. 이후 현지 적응이나 여러 도움을 줘야 하는데, 감독 같은 경우는 선수 때와는 또 다르더라. 감독이 바뀌면 수석코치, 코칭 스태프, 통역, 전지훈련 같은 여러 업무에도 변화가 생긴다. 감독 매니지먼트는 이런 부분들도 다 케어해야 하더라. 이때 경험을 많이 쌓았고, 잘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봤다.
Q. 그 뒤가 베트남이었나?
이 : 중국 다음은 태국이었다. (Q. 베트남은 언제 나오나?) 태국 다음이다. (웃음) 태국 무앙통 구단에 김동진을 이적시킨 뒤로 태국 프리미어리그에 한국 선수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때마침 중국이 세계적인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중국 내 한국 선수들의 입지가 줄어들 때였다. 여러 선수들의 태국행에 관여하면서 축구를 경기 중심이 아닌 컨텐츠 관점에서 바라보게 됐다. 예를 들어, 태국은 EPL 중계권을 어마어마한 액수가 구입하는데, K리그에는 관심이 없었다. 왜 그럴까, 궁금증을 갖고 K리그 중계권 판매에 도전했다.
Q. 태국에 K리그 중계권을 파는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
이 : 그래서 못 팔았다. (웃음) K리그 레전드이기도 한 태국 축구 영웅 피아퐁을 만나 K리그가 태국에 알려지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흔쾌히 응해준 피아퐁과 함께 태국 방송사들을 싹 돌았다. 그쪽에서 관심이 없는건 아니었는데 스폰서를 요구하더라. 돈 주고 구매할 정도의 관심은 아니었던거다. 그래서 태국 쪽에 우리 기업들이 진출한 현황을 들여다봤다. 2% 정도 밖에 안되더라.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베트남 지표를 살펴봤는데 여기는 한국 기업의 투자가 20%에 달하더라. 그래서 좀 더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 베트남으로 방향을 바꿨다.
Q. 드디어 베트남이다! 그러고보니 몇 해 전 베트남에 K리그 중계권이 팔렸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그게 당신이었나?
이 : 그렇다. 그런데 이게 좀.. 쉽지 않았다. 방송사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는데 섣불리 돈을 쓰려고 하지 않더라. 하지만 태국보다는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서 자비로 3만불을 투자했다. 프로축구연맹에 그 돈을 내고 내가 K리그 10경기 중계권을 사서 베트남 국영TV(VTV)에 방송을 내보냈다. 중계 나갈 때마다 선수 명단 체크해서 알려주고 분주히 움직였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 혼자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걸 절감했다. 협회나 연맹이 태스크포스를 만든다거나 이런 방향으로 접근하면 도움이 많이 되지 않을까 싶다.
Q. 아.. 그러니까 일반적인 중계권 판매는 아니었던거네. 그래서 베트남 내 반응은 어땠나.
이 : 반향이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K리그에 대한 관심 자체가 크지 않았으니까.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축구에 대해 생각보다 잘 모르더라. 이 과정에서 스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만일, K리그에 스타 선수가 있거나 베트남의 유명 선수가 뛴다면 K리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겠지 싶었다. 그래서 베트남 축구인들에게 선수 추천을 받았다. 유망한 스타 TOP3를 추천해주더라. 그 중 가장 눈에 들었던 선수가 쯔엉이었다. 추천 받은 선수들 중 키(177cm)도 가장 컸고, 박지성 선수 어린 시절과 비슷한 스타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 선수를 K리그로 데려와야 겠다고 맘을 먹고 공을 들였다. 먼 거리에 있는 쯔엉의 구단까지 찾아가 이적 허가를 받아냈고, K리그 내에서 관심있어하는 팀을 찾기 시작했다.

Q. 결국 인천 유나이티드에 쯔엉을 입단시켰다. 베트남에서의 K리그 관심도 커졌나?
이 : 당시 인천 정의석 단장이 굉장히 전향적으로 고려를 해준 덕분에 쯔엉의 K리그 입성이 가능했다. 그런데 쯔엉이 생각보다 경기에 자주 나서지 못했다. 적응도 쉽지 않았겠지만 아무래도 경기를 꾸준히 뛰지 못하니 기량 발휘가 어려웠던 것 같다. 부상도 있고 심리적으로도 위축된 것도 영향을 미쳤고. 그래서 베트남 내에 K리그 인기를 높이는 쪽으로 연결되진 않았다. 중계권 판매도 이뤄지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나에겐 신선하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베트남 사람들과 좋은 관계도 형성할 수 있었고. 나에게는 모든게 즐거운 스토리로 남았다.
Q. 그런 관계가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 대표팀 부임으로 이어진걸까?
이 : 베트남 대표팀 감독직이 공석이 되었을때 베트남 축구협회 관계자가 귀띰을 해주더라. 차기 감독은 한국이나 일본 쪽에서 찾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그 얘기를 듣고 박항서 감독과의 만남이 떠올랐다. 박 감독님의 지도자 경력을 보면 토너먼트에서 굉장히 강하다. 그 부분을 강조해서 제안했다.
Q. 그래도 베트남 입장에서는 낯선 감독이었을텐데, 2002년 월드컵과 히딩크 감독과의 인연도 도움이 되었겠다.
이 : 한국 분들에겐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베트남에서는 2002년이나 히딩크 감독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다. 한국에서는 (박항서 감독에게) 히딩크 감독에 빗댄 별명도 많이 만들고 '제2의 히딩크' 식으로 소개하지만, 베트남에서는 그냥 '박항서'다. 그런 표현이 통할 정도로 히딩크 감독이 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팀 감독 선임에 영향을 미쳤을 지는 모르지만, 지금 베트남에서 부는 박항서 열풍은 온전히 박 감독님의 힘이다.
Q. 부임 초기 현지 반응이 썩 좋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2002년과 히딩크를 잘 모른다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면, 박항서 감독 입장에서는 베트남에 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을테니 적응이 쉽지 않았겠다.
이 : 부임 후 첫 A매치(11월 14일)가 아프가니스탄과의 홈 경기였는데 0-0으로 비겼다. 이때만해도 다들 반신반의했는데 12월에 열린 M150컵 태국전에서 U23팀이 승리하면서 난리가 났다. 베트남은 사회적으로 태국에 경쟁 심리가 있다. 축구에서도 오랫동안 이겨보지 못한 상대였고. 그런 태국을, 그것도 태국 원정에서 꺾었으니 반응이 정말 대단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번 AFC U23 대회가 이어진거다. 베트남 사람들은 승리도 승리지만, 공격적인 축구와 드라마틱한 과정에 열광하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호주, 이라크, 카타르를 상대로 모두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끈기를 보여준 것에 감동하고 있다.
Q.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대표팀에 입힌 색깔은 무엇일까? 기존팀과 많이 달라졌나?
이 : 베트남 축구에 스리백을 장착한 것이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한다. 원래 베트남 대표팀은 포백을 기반으로 한다. 스리백을 안썼던 팀이다. 그런데 박 감독이 토너먼트를 치르면서 포백과 스리백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 효과를 보고 있다. 이전에는 기회를 받지 못했던 선수들을 중용하는 것도 호평을 받는 이유다. 13번과 14번 선수는 박항서 감독 부임 이전까지 존재감이 거의 없는 선수들이었다. 박항서 감독이 이들의 재능을 발견해 기회를 줬고, 선수들이 자기 능력을 발휘하면서 대표팀의 성과로도 이어지고 있다.

Q. 주장 완장을 찬 쯔엉(전 강원FC)이 반갑더라.
이 : 박항서 감독에게나 쯔엉에게나 모두 잘된 일 같다. 쯔엉은 한국어 소통이 가능하고 한국의 축구 문화가 어떤 지도 잘 안다. 그래서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 가교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고 있다. 박 감독 역시 익숙치 않은 베트남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데에 있어 적잖은 도움을 받는다.
Q. 이번 대회에서 쯔엉의 활약이 인상적이다.
이 : 사실 지난 가을엔 좋지 못했다. 이영진 수석코치가 11월 소집 때 쯔엉에 대한 걱정이 컸다. K리그에서 경기를 거의 못 뛰다보니 컨디션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자신감도 그렇고. 그런데 본인이 노력을 많이 했다. 이 코치님은 지금 쯔엉 없으면 경기 어떻게 하냐고 농담할 정도로 만족해 한다.
Q. 이번 대회 경기 모습을 보면 베트남 선수들 기술이 굉장히 좋더라.
이 : 박 감독님은 베트남 선수들이 '스펀지 같다'고 한다. 한국 선수들이 이미 알고 있는게 많아서 자기 스타일이 있다면, 베트남 선수들은 동년배 한국 선수들에 비해 잘 빨아들인다더라. 배울 자세가 되어있고 열의가 충만하다는게 한국 코칭 스태프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Q. 4강 진출 뒤 베트남 총리가 축전까지 보냈더라.
이 : 4강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성과였다. 인상적인게, 보통 이런 경우엔 감독이나 단장이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박 감독님은 축전 낭독을 주장에게 맡겼다. 이전까지 베트남 대표팀에서 주장은 완장은 찼어도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가 별로 없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박 감독 체제에서 주장은 좀 더 힘이 있다. 쯔엉이 살아나는 데에도 이러한 주장으로서의 리더십이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동영상 오디오 '베트남의 기적' 거리로 나온 베트남 국민들
풋볼리스트TV | 사상 최초! 'AFC U-23 챔피언십' 결승에 진출한 베트남 대표팀. 기쁨에 취한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tv.naver.com
본문으로 이동
Q.
. 베트남은 물론이고 대회가 열리는 중국 현지에서도 응원 열기가 대단한 것 같다.
이 : 중국에서 유학중인 베트남 학생들이 많다. 평소에 차별도 받고 외롭고 그랬을텐데 이번에 대표팀이 좋은 경기를 하니 경기장에 많이 갔다고 한다. 그런데 티켓값이 없어서 못 들어가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베트남 축구협회에서 티켓을 사줘서 들여보냈다고 한다. 축구 성적도 중요하지만, 중국에서 무시받던 베트남 사회에도 큰 힘을 줬다는 얘기를 들었다.
Q. 결승전이 남았다. 베트남이 박항서 감독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뭘까. 올 여름 아시안게임 메달?
이 : 아시안게임은 목표가 아닌 것 같더라. 관심이 없다는게 아니라 너무 높은 목표라 그런 기대를 하진 않았다는거다. 사실, 이번 대회도 기대치는 그리 높지 않았다. 이미 너무 높은 성과를 냈기 때문에 다음 목표 설정이 어떻게 될 지는 잘 모르겠다.
Q. 결승전 현장에 가나?
이 : 보러 간다. 박 감독님이 베트남의 영웅이 되셔서 내가 도울 일이 좀 많아졌다. (웃음) 지금 베트남 분위기를 보면 베트남 귀국 때 열기가 어떨지 기대된다. 앞으로도 박항서 감독이 안정적으로 지도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돕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