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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이며, 계몽 사상가였던, “볼테르”는, “나는 기독교의 주일을 먼저 파괴하지 않고는 기독교를 때려 부술 수 없는 것으로 본다”라고 했습니다. 프랑스는 귀족들의 사치와 탄압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혁명이 성공으로 끝나자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볼테르의 말처럼, 주일성수를 파괴하기 위해, 6일 일하고 1일 쉬는 것을, 9일 일하고 1일 쉬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10일 휴무제로 인하여, 프랑스는 40%의 국가적 적자를 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7일 휴무제로 바꾸었습니다. 영국의 “국립 아카데미”에서는 사람이 일을 하다가 몇 일 만에 한 번 쉬는 것이 좋은 지를 설문과 상담 등 여러 분야에서 연구했습니다. 그 연구에서의 결론은, “7일 중에 한 번 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쉬어야 합니다. 기계 역시, 계속적으로 운영하면 오래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일주일 단위로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의 중요한 것은, “주일성수”입니다. 주일성수란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일을 주신 것은, 큰 은혜요 큰 복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온 우주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시작이요 세상의 끝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창조하실 때, 빛을 먼저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하나 새로운 것을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창조의 역사는 6일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창조의 절정이 7일에 가서야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역사의 마지막인 7일에 가장 위대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7일에 두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또, 세상은 어떠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7일에 두지 않으셨어도, 프랑스의 경우에서처럼 또, 영국의 국립 아카데미의 연구와 같은 일이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안식을 우리의 본성에 두셨기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안식을 찾게 되는 겁니다. 또한, 우리는 6일 간의 노동과 7일째의 안식을 통해, 우리가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안식을 취할 수 있는지를 이 땅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성수를 잘 지키심으로, 안식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본문에서의 “다 이루어지니라”는 말은, “마치다, 완수하다”란 의미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하나님의 뜻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졌기에, 이에 더 이상의 보수가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본문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6일간의 창조사역이 완벽하였고, 완충되었음을 확고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앞으로의 진행에서나 일부에서 말하는, 진화의 씨앗으로 주장하는 밑그림이나 윤곽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이루어진 창조 사역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 1: 9에서,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발견하거나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존재한 것의 그림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자연 현상에서 발생하는 “쓰나미”나 “대 화산 폭발” 또, “지진, 홍수”등의 피해도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 속에서 이미 만드신 것이냐?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문으로 인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라고 부르거나 온 인류를 불행과 고통 속으로 빠트림으로, 겉과 속이 다른 “수박같은 신”이라고 조롱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자연계의 현상인 기근, 태풍, 화산 폭발, 지진, 기상 이변 등 각종 재해들이 본래 있었으나 그것은 우리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관리하기 위한 제어장치였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에덴에서의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입니다. 창 3: 18을 보시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첫 사람의 죄로 인해, 우리의 터전이 되는 자연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음으로, 우리에게 고통과 수고가 되었다는 겁니다. 막 4: 39을 보시면,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를 배로 건너실 때, 풍랑이 일어나서 배를 위협할 때의 상황입니다. 이때의 풍랑이 예수님의 말 한 마디에 그대로 잔잔해 진 것은, 그것의 창조주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음으로 사람을 위협하게 된 겁니다. 이러한 세상을 다시, 처음의 그 모습처럼 아름다움을 회복시키는 것이 요한 계시록에서 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잠시 앞도 모르고, 한 발 앞도 모릅니다. 우리는 깜깜한 어둠 속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이 속에서 우리가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속에서 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얼마 지나면, 기억은 희미해집니다. 기억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반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는 것은 사명과 축복이며, 생명과 신앙으로, 우리의 본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반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일성수”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기념하는 거룩한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시작하신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루시되 그 일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증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완성을 조금도 의심치 말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주일성수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과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선, 6일 동안의 창조 사역을 완료하고, 7일째 되는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건국 기념일이나 독립 기념일 등 어떤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날을 기념일로 지정하여 지킵니다. 이것은 자신이 그 사건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겁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지키심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자되심과 세상 만물에 대한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본문에서, “안식하시니라”는, 일에 지쳐 곯아떨어진 상태가 아니라, 일을 마친 후, 새로운 활동을 잠시 중단한 체, 취하는 휴식을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안식일을 성수하는 겁니다. 또한, 성도된 우리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안식일인 주일을 지킴으로, 주일을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얼마 전, 비대면 타이어 교체를 했습니다. 타이어 교체를 해 주신 분께서, “가까운 타이어 매장에 가셔서 휠 얼라이먼트를 꼭 보셔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타이어를 교체하는 것을 다 된 것으로 알았는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순서가 있다는 말에, 인터넷과 주변의 지인을 통해 알아 봤습니다. 그랬더니, 휠 얼라이먼트는 타이어를 차에 장착한 후 타이어의 각도를 잡는 것인데, 타이어는 그냥 끼우는 것이 아니라, 각도에 맞춰서 끼워야 한다는 겁니다. 캠버, 캐스터, 토인의 각도를 제대로 맞춰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기에, 장치를 통해서만 할 수 있으며, 이것을 해야 하는 이유는, 차가 주행할 때, 도로의 사정에 의해, 각도가 틀어짐으로, 핸들이 흔들리거나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 제가 기억한 것은, 우리의 신앙 역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외면할 때가 있기에, 언제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축에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축에서 각도가 조금도 벗어나서는 안 되는데, 이것을 잡아주는 신앙의 휠 얼라이먼트가 “성수주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기억했습니다. 여러분, 성수주일을, 일반적인 쉼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수주일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쉼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나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자문으로 스스로를 늘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각도가 틀어져서는 안 되기에, 우리 신앙의 견고한 기준은 언제나 예수님을 향하여 각도가 맞혀져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를 유대교의 짝퉁이라고 하는 표현을 보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며, 어디서 이 표현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틀렸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짝퉁이 아니라, 실체이며 진본이고, 참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자되심과 우리와 세상 만물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 행위이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성수주일에 힘씀으로, 성수주일을 행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안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셨다고 합니다. 이는, 인격이신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인 사람에게 복 주시는 날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수주일은, 무엇보다도 내가 성도로서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임을 확인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며 하나님 앞에서 쉬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평안 그리고, 회복하심을 얻게 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안합니다. 그것은, 그들은 성도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노력하며, 자력으로 달려가지만,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삶 속에서의 안식을 잊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최고의 클라이막스는, 본문 3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하나님의 은혜의 날로 특별하게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를 괴롭히고, 옭아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충만한 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막 2: 27을 보시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육신과 마음에 쉼을 주는 것이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한 주님의 날로 구별하여 이 날을 지킴으로, 하나님 안에서 복되고 기쁜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하며, 주일을 지키며, 안식을 누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된 우리의 최대 급선무는, 우리의 주변사람들과의 인간관계나 물질 문제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주일을 잘 지키심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일의 복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