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댓글 0 다른 공유 찾기
전자점자 다운로드 바로가기
본문 글씨 키우기 본문 글씨 줄이기
똑같지 않은 비장애인들이 그렇듯, 똑같지 않고 다양한 장애인이 공존하는 사회. 우리의 미래는 점점 앞을 지향하고 있을지 되짚게 된다. © pixabay
많은 장애 당사자들에게 그렇겠지만, 지금과 앞으로의 삶에 장애가 있는 것을 돌이키거나 온전히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또 확실한 건 자신의 처지와 삶을 비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기에, 이렇게 살아갈 길을 찾거나 찾아나서는 장애 당사자들이 많다.
장애계 활동가 계열 인물이 아니더라도, 이젠 이를 단순히 '감동의 인간승리'로 포장하고 소비하는 것에 비판적인 입장을 표하는 모습들이 종종 보이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렇게 장애를 바라보는 비장애인들의 시선 또한 조금씩은 우리 사회에서 나아지고 있다는 부분도 느낀다.
이런 배경은 장애인 개인으로서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새롭고 의미 있는 미래를 만들어 갈 밑바탕이 되고, 또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필자는 지난 7월 말, '신경다양인, 계획적으로 삶을 꾸려나가다'라는 칼럼을 이곳 에이블뉴스에 연재하며 당사자로서 '정신적 장애인 살아남기'의 단면을 다루었다.
이번 칼럼은 정신적 장애인으로 한정한다면 해당 7월 칼럼의 후속편 성격을 일부 갖겠으나, 더 넓게 보아 신체적 장애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형의 장애인들이 장애인다울 것, 그리고 장애인답지 않아야 할 것을 동시에 요구받는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게 되었다.
그 칼럼을 비롯하여 그간 필자가 당사자로서 많이 다뤄 온, 법적 장애로 등록되지 못한 정신적 장애인들의 경우 법적 비장애인의 조건으로 경쟁하여, 사회에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구조임이 명백하다. 이러면 분명 장애인답지 않게 보이도록 늘 몸과 정신력을 소모해서 살되, 필요한 때 장애를 부정당하지 않게끔 장애인다워야 하는 현실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제는 장애유형도, 등록 여부도 무관하게 저런 일이 있다는 글을 쓴다니 혹여 너무 비약이 아닌가 지적받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장애인다워야 하며, 장애인답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장애를 뺐다 꼈다 하며 쓰기라도 요구받는다는 말일까? 물론 그런 극단적인 비유까진 아니겠지만 예시는 많다.
생계 활동에 있어서는 등록장애인의 '장애인다움'을 무능함으로 보아 온전한 자립과 다양성에서 퇴출시키려 하고, '장애인답지 않음'에 대해서는 더욱 직접적이다. '장애인답지 않다'가 칭찬이 아니라고 지적해야 한다는 것 이전에, '내가 앞서야 사는' 경쟁에 익숙한 각박한 사회의 시민들로부터 얼핏 보기엔 혜택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 이가 혜택받는 것 같다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차별적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요즘 시대의 감성에 맞는 예시 하나가 있다. 언젠가부터 유튜브(YouTube)에선 한국어 사용자 안에서도 자신의 장애 특성을 당당히 표현하고 드러내는 장애유튜버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장애 유형은 다양하지만 장애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브이로그를 찍기도 하며 때론 여느 유튜버들처럼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방'도 하고, 외모를 꾸미며 여행을 다녀오는 모습을 업로드하기도 하며 구독자를 모으고 소통한다.
그러나 그들은 유튜브에서 성공할 수 있을 만큼 책임감을 갖고 시청자의 컨텐츠를 위한 채널 운영과 자기관리를 하는 '프로'들이다.(물론 채널 관리, 영상 제작, 방송을 모두 동일인이 하지는 않는 채널도 많다) 아예 인기를 얻은 유튜버들의 '잘생기고 예쁜' 외모마저 마치 비장애인의 전유물인 것인 양 여겨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실로 외모지상주의의 처참한 모습이다.
이런 차별적 시각으로 인해 '주작('조작'의 인터넷 유행어), '가짜 장애인' 아니냐는 댓글들에 대해 상세히 해명하는 영상을 올리는 것은 장애유튜버에게서 낯설지 않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장애 유형에 따라서는 장애 부정등록을 의심받아 신고를 받는 등록장애인의 사례까지 나오고 만다.
이렇게 보니 등록을 할 수 있던 각 유형의 장애 당사자들 역시 장애에 대한 비당사자 중심적 시각으로 인해 겪는 이중고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은 물론, 그 수준 역시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앞서 언급한 7월 칼럼에서, 필자는 차별을 넘으려면 능력주의적 ‘극복 서사’를 넘어야 한다는 점을 부제목에 짚어두었다.
화성에 인류를 보내겠다는 포부를 비롯, 각종 파격적 언행으로 좋게든 어떻게든 유명해진 세계구급 부자(富者), 전기차 기업 테슬라의 대표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과거 스스로를 자폐 스펙트럼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이후에 정식 진단은 아닌 자가진단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자폐-아스퍼거 당사자 개인의 삶에 영향을 준 건 그리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능력으로 성공한 장애 당사자 개인이 나타나서 비장애인에게 인정받고 바뀌어가는 신화에 대한 기대감이란 이런 것이다.
장애 당사자들도 차별에 반대하기 위한 활동에 직접 나서는 개인들도 있지만, 또 많은 이들은 각자의 생업은 물론 삶의 활력소가 되는 개별적 취미활동에 있어서도 책임감을 갖고 임하게 된다. 이런 적당한 책임감은 '계획을 이루는 삶'을 스스로에게 가져다 줌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자기계발적 성취감을 주기도 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의무를 감면받았으니 동등하지 못한 시민으로 살아감이 맞다고 자처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의무와 권리는 깊은 관계는 있으나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이는 그 자체로 업무량, 복지 수혜량 등에 따라서도 국민을 차등해 정당한 차별을 만들어 행하자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한국에서 의무라 함은 으레 병역의무와 혼용되는 '국방의 의무'를 떠올리겠으나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모두 마찬가지다. 장애수당이나 장애인연금을 받는다고 해서(물론 기초수급이나 차상위 지원 등도 해당된다면 동일하다), 특수교육을 받느라 정규교육과정을 실질적으로 온전히 이수하지 못했다고 해서, 취업에 어려움을 겪을 입장이라고 해서 '국민실격'이 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나는 장애유형과 중증도를 저울 재기 이전에, 나의 고향 대한민국을 사랑하며 사람을 아끼고 도덕을 준수하며 나의 행동에 책임의식을 다하는 시민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내가 나의 몫을 어떤 형태로 사회에 기여하더라도 더욱 안전하게, 널리 이롭게 쓰일 토양이 갖춰지기를 바라며 더 나아지는 나라를 만드는 밑거름 될 수 있기를 늘 소망한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