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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뜰과 문
출 27: 9-19
성막의 뜰은 성막 주위를 울타리처럼 만든 담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이 뜰의 길이가 45M, 폭이 22.5M, 높이가 2M가량 되는 담입니다. 이 담을 치기 위해서는 기둥을 세웠는데, 그 기둥이 남북으로 20개씩, 동서로 10개씩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합해서 60개의 기둥으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담은 시멘트가 아니고 세마포였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직사각형의 세마포 담장을 둘러 쳤던 것입니다. 이 성막의 뜰은 성막에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들짐승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뜰을 세울 때 기둥과 줄이 연결되어 있어서 견고하게 세워졌습니다. 성경 지리학자들에 의하면 광야였던 시나이 반도에는 200만 명이 넘는 대 군중이 거주할 만큼 평탄한 지역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먼저 성막을 세울만한 평평한 대지를 확보한 후에 그 곳에다 성막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다 자신들의 장막을 세웠습니다. 마치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와서 지치고 병든 가운데서도 미국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교회를 세우고 그 다음에 학교를 세우고 나서 자기들이 살 집을 지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먼저 성막을 짓게 하시고 그 성막을 완성하는 뜰을 만들라고 하신 것을 관심있게 보아야 합니다. 이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나의 이익이나 욕심을 먼저 생각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교회 우선주의로 살게 될 때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성막의 뜰은 오늘 날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장 9절 이하에 보면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바깥 뜰에서 기도를 했다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봉헌할 때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이 백성들이 이 성전에 나아와서 기도할 때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일을 돌아보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성막의 뜰과 문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므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로 담을 치기 위해 세운 기둥에 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직사각형으로 2.5M 간격으로 담을 쳤는데 기둥이 60개였습니다. 이 기둥의 재료는 조각목이었습니다. 이 기둥은 조각목 밑에다 놋으로 말뚝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놋으로 된 말뚝은 땅속에 묻혀 있어서 보이지 않았고 기둥인 조각못만 지상에 세워졌던 것입니다. 기둥은 천으로 된 막을 지지하고 동시에 성막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했는데, 이 성막의 뜰로 인하여 성막이 견고하게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 성막은 60개의 기둥으로 둘러쳐진 담에 의해서 안전하게 보호된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3장 15절에 보면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했습니다. 초대 교회부터 오늘까지 음부의 권세가 계속해서 교회를 핍박하였지만 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요한 계시록 19장 11절에 보면 “백마탄 자가 공의로 심판하여 싸우더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백마탄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권세와 싸우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도 지금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영적 전쟁을 쉴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6장 11절 이하에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7절 이하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베드로전서 5장 8절 이하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앎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대적할 상대는 마귀입니다. 악한 영입니다. 주적 개념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를 위해서 계속해서 어둠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성막 주위에는 60개의 기둥이 둘러서 있어서 성마을 보호하였습니다. 이 기둥은 교회의 일군들을 상징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의 기둥 같은 일군들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대림 교회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소아시아 7교회중에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가 나옵니다. 계시록 3장 10절부터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 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올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마귀 권세와 싸워 이기는 교회의 기둥 같은 일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뜰의 기둥을 둘러친 사마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막의 담은 세마포로 막았습니다. 이 세마포담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 곳과 백성들이 있는 곳을 가로막아 구별하였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신성한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부르셔서 구별된 성도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릅니다. 세상에서 부름 받은 거룩한 무리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결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면 안됩니다. 지금 세속의 물결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삶이 불신자와 다를바 없을 정도로 타락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 이하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로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도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또 4절부터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지기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라” 성도는 세상의 빛입니다. 빛을 비추지 못하는 등은 무의미 한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 데가 없습니다. 길에 버리워져서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입니다. 성도가 성결할 때 교회가 성결해 집니다. 대림교회 성도들은 성결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징계를 받을 때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성결케 하셔서 더 귀히 쓰시기 위함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 19장 6절부터 8절에 보면 천국에서 허다한 무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데, 저들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 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마포는 성도들의 올바른 행실을 말합니다. 이사야 61장 10절에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 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해야 합니다. 성도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답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셋째로 성막 뜰을 세우기 위한 줄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막의 뜰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서 줄로 단단히 묶어 주었습니다. 이 줄은 사랑의 띠입니다. 소망의 줄이기도 합니다.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성도와 성도간에 서로 사랑함으로 믿음을 굳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깊이 체험한 사람이 호세아 선지자 입니다. 그의 아내 고멜이 집을 나가서 음란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내를 용서하고 데려와 같이 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호세아는 아내를 데려 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예언자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납하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에 온갖 죄를 지으면서 살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줄로 이끌어 주시는데, 그 줄은 사랑의 줄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성도와 성도간에 사랑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당신의 생명까지도 버리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믿으시면 아멘하십시다.
마지막으로 성막 뜰의 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동쪽으로 향하여 문이 하나 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뜰문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한 축복의 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한 생명의 문이십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만이 구원 받을 이름입니다.
이 뜰의 문은 비록 한 개밖에 없지만 아주 넓습니다. 약 10M나 됩니다. 구원의 문은 넓게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올 수 잇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17절에서 천국에 계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안전지대
출 27: 9-19
우리가 살고 잇는 이 땅 도처에는 사망의 독이 가득 찼습니다.
교통사고, 음식물 중독, 심지어는 홍수 시 전봇대에서 방전된 전기로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한번쯤은 누구나 생각해 보았겠죠?
한평생 살면서 사고 없이, 몸에 칼 대는 수술 없이, 그러면서 평안히 여생을 마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큰복은 없으리라고....
오늘 성경은 그 답을 줍니다.
성막을 둘러싼 담과 그 뜰은 우리가 거하여할 안전지대입니다.
1) 모양
출 27:10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찌니 남을 향하여 뜰 남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편은 당하게 할찌니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찌며"
2) 의미
자! 이러한 담과 뜰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① 구별을 의미합니다.
사람 사는 곳에는 회사든 집이든 경계가 있습니다.
특별히 개인집이든 아파트든 담장이 쳐 있어서 이쪽과 저쪽을 구별해 놓아 자기 중심 영역을 확실해 놓고 있습니다.
도시는 콘크리트 담으로 구별하고, 시골은 시골답게 탱자나무로 이 모든 경계를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은 재건축 한답시고 아파트, 상가에 가림막을 둘러 친 것도 똑같은 뜻입니다.
어릴 때 짝꿍과 같은 책상을 사용했습니다.
그때에도 내 책상 네 책상 싸우다가 책상 위를 금 그어 양쪽으로 구별시킨 것! 생각 날겁니다.
이 담이 주는 큰 의미는 무엇입니까? 구별입니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
혹은 안이다 밖이다 하는 구별입니다.
안이다 하는 개념은 담 안을 말하고,
밖이다 하는 개념은 담 밖을 지칭하기에 이러한 경계석 혹은 경계목 혹은 경계선이 생명에 중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것이 없다면 혼란이 오고 충돌이 오고 약자는 늘 당하기만 할겁니다.
그러기에,
인류는 수많은 차이와 차별을 서로 두고 경계하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가 세운 각가지 규제나 제도나 규범의 경계를 초월하시고 오직 한 가지 사실을 따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즉, 믿음만이 우리를 세상과 구별 시켜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님에 대한 믿음, 성령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성경에 대한 믿음 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시는 겁니다.
② 보호를 의미합니다.
이항복이란 영의정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분의 어릴 때 얘기입니다.
자신의 마당에 심어 논 감나무가 옆 대감집 마당으로 가지가 넘어갔습니다.
하인이 그 감을 따려고 하는데 그 대감이 호통을 쳐서 따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연을 들은 항복소년은 다짜고짜 대감 안방을 찾아가서 안방 문풍지를 주먹손으로 불쑥 내밀었습니다.
놀란 대감이 "뉘 놈이냐?"할 때,
항복 소년은 물었습니다. "이 손이 뉘손입니까?"
대감이 대답을 했겠죠. "이 놈아 니 손이지!!"
또 항복 소년이 재차 물었습니다. "그럼 담장 위에 넘어온 감나무는 누구 겁니까?
결국 대감이 사과했다는 실화입니다.
국가는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합니다.
자국민이 누구입니까? 국경선 안에 있는 백성입니다. 즉, 담 안에 있는 백성입니다.
요즘 애완견을 많이 키웁니다.
사랑을 주는 것도 아무 동물에게 주질 않습니다.
담 안! 집안의 동물을 책임질 뿐,
담 밖의 것은 나와는 상관없기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공동주택인 경우 복도, 엘리베이터, 주차장 등은 지저분한 것이 이 이유입니다.
작년에 우리나라가 눈 많이 왔을 때의 일입니다.
아무도 거리를 쓸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집 문 앞도 쓸지 않아 너도나도 고생을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삽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알고 삶에 있어서 크게 경험했던 인물은 사도 바울이기에 특별히 빌립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단어가 수 십번 나오고 또한 감옥에서 기뻐하는 힘을 얻고 궁핍에도 처하고, 풍부에도 처할 수 있는 삶의 비결을 터득하기도 했던 겁니다.
③ 소유를 의미합니다.
담 안에 있다는 것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주인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름을 써 놓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나 담 밖에 있는 것은 대체로 임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쓰레기를 버릴 때 어디다 버립니까?
담 안에 버립니까? 담 밖에 버립니까?
배반자 가롯유다는 처음부터 마귀의 자식이었지만, 예수님이 데리고 있을 때에는 그의 아비 되는 마귀도 어쩌지 못했드랬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포기할 때야 비로소 먹이를 기다렸던 개처럼 마귀는 역사 할 수 있었습니다.
요 13:26-2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롯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대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같은 개, 고양이일지라도 담 안에 있는 것은 크던 작던 종자가 무엇이든 주인이 있어서 주인이 먹이 우고 재운다.
담 밖의 개와 고양이와는 털빛도 다르다.
믿는 가요? 성도만이 하나님께서 기르는 양임을.....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러므로,
행여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저주와 욕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하나님도 포기한 자!」라고 생각됩니다.
영영 희망이 없는 자요 마귀의 밥된 자입니다.
이런 저주는 하지도 말고, 듣지도 않도록 주안에 살도록 해야 합니다.
④ 안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고센 땅에 거할 때, 애굽 전역에 내렸던 사망의 재앙이 피하여 갔습니다.
그 고장 자체에 영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라는 관계 은총이 안전을 보호한 겁니다.
금번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은 보안 속에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여느 정상의 방문과는 다르게 안전에 가장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탄 열차는 어디선가 총격을 받았다고 신문은 보도했드랬습니다.
총알을 방탄 열차가 막을 수 있을련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내리는 재앙은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다는 삶, 혹은 하나님 모르는 삶은 내가 나의 안전을 보장 져야 되기에 항시 불안전하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주안에 잇다는 것은 안전지대에 있다는 증거요 보장이기에 편안하고 평안 됩니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⑤ 공급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있다는 것은 안전에 대한 보장은 물론 의, 식, 주에 관한 책임을 져 준다는 의미입니다.
소위 내가 만들지 않은 성공을 이루게 하시는 겁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보장을 받았으면서도 이 보장에서 비껴 가는 것은 은혜나 성공을 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먼저 머물러야할 「하나님 안」혹은 「주님 안」에서 머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좌표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정녕 주안에 있는가?
누가 뭐라던 세상이 흉흉해도 안전지대에 있는 겁니다. 참으로 안전지대에 있다면, 광야 길가다 물 없으면 반석에서 생수 나는 은혜도 있을 것이고, 하늘에서 만나 내리는 기적도 있을 겁니다만,
만약 머리로는 주안에 있는데, 몸과 삶은 주 밖에 있다면,
설령 나는 안전지대에 있다해도 그것은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지뢰지대입니다.
곧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일과 같기에 성할 수가 없습니다.
3) 장방형의 뜰
담 안에는 장방형의 마당이 있습니다.
거닐 수도 있고, 짐도 내릴 수 있고, 성소를 찾은 인생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쉼터요 거쳐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 마당!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인생들이 밟고 지나가고 쉴 수 있게 예수님의 사셨던 33년의 생애입니다.
인류는 많은 지혜 자를 배출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길이요」했던 인생은 없었고,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했던 초청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인생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수고하고 지쳐있으며, 안전지대를 벗어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천성 오르는 길이요,
강도 만나는 곳이 아니라 천군 천사의 영접함이 있는 길입니다.
안전지대!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있는 예수 품안의 삶입니다.
이제는 평안히 쉼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