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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64:1-6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본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하소연과 다윗의 기도하는 말로 표현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우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원수들의 불의와 잔인성과 모의와 사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끝부분에서 다윗은 자신의 눈을 하나님께 향합니다.
다윗은 마침내 원수들의 손에서부터 기쁘게 구출될 것을 기대합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 본문 1-2절은 “(1)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2)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진지하고 열렬하게 기도드렸다고 말함으로서 본 시편을 시작합니다(1-)
동시에 다윗은 이 기도가 어째서 필요하게 되었나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느끼기에도 그 음성이 기도 가운데서 비교적 진지하고 열렬하게 들려옵니다.
다윗은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자세를 낮춥니다.
다윗은 원수들에게 자기 생명이 노출되어 있는 그 위험에 주의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생각을 환기시키기에 적절한 몇 가지 점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는 다윗의 기도는 다윗이 그 당시에 위험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하반절에서 다윗은 자기의 원수들이 무수하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원수들의 공격을 견딜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이 말에는 어떤 난관이 있다는 것이요, 곧 그 말은 두 가지 의미가 가능합니다.
סוד(쏘드)라는 히브리어는 본래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악인들의 은밀한 계획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악인들이 의논하기 위해 모이는 모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번역할 때 두 가지 해석을 다 인정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시편 64 편
1절의 하반절에 사용된 דגשת(리그샷)이란 말도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곧 사람들의 ‘모임’이거나 ‘소란’과 ‘소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소요케 하다’를 의미하는 어근인 דגש(라가쉬)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이 구절의 암시는 상반절의 סוד(쏘드)가 악인들의 은밀한 계획을 뜻합니다.
하반절의 דגשת(리그샷)은 그들의 공공연한 폭동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기도는 한편으로는 그 원수들의 악한 의도에서 보호받는 것이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행동 개시했던 그 무서운 행동에서 보호받는 일인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채택했던 처음 번역의 의미가 가장 간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대적하여 결속한 숫자가 많은 것을 하나님께 하소연함으로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청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윗의 말에는 자기가 하나님의 보호를 대적들과 가장 큰 연합 세력에 대해 충분히 대적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덧붙일 수 있는 것은 다윗이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의 악의와 사악성을 말함으로 기도 가운데 자기 주장에 힘을 더하는 탄원이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원수들의 행위가 잔인하고 불의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는 비례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섭하시리라는 것을 믿을 만한 더 유리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3-4절은 “(3) 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 하며 화살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4)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격분했을 때 그들은 다만 다윗의 생명만을 노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소연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말에 담겨 있던 악독입니다.
아마 다윗이 말하고 있는 것은 중상적인 풍문으로 여겨집니다.
다윗은 이 풍문이 거짓되게 퍼져 자기를 불명예스럽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 다윗은 백성들에게 자기의 평판을 훼손시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원수들의 “혀”를 “칼”에 비교합니다. 저희의 “독한 말”을 “화살”에 비교합니다.
또 다윗이 ‘저희가 정직하고 무죄한 자를 향하여 쏘았다’고 덧붙입니다.
이 때 다윗은 저들의 부정직한 행동과 자신의 정직을 대조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양심은 죄가 없고 또 쓸모없이 버려진 자들에게 자기가 공격받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영감을 주어 이 확신에 찬 경건한 말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은밀히 또 갑자기 쏘았다’고 말해서 다윗은 그들의 교활한 성품을 말합니다.
그 원수들은 행악에 전념하여 그들의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시편 64 편
그 뿐 아니라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도 노숙하고 빨라서 그들의 희생물이 위험을 알아채기도 전에 그 희생물을 덮칠 정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거룩하고 정직했던 다윗이 이토록 자신의 성품에 대해 이유없는 중상모략으로 시달렸다는 사실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비슷한 시련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놀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최소한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김으로 그 정직한 소송에 대한 하나님의 변호를 얻을 수 있다는 위로를 항상 갖습니다.
다윗은 원수들이 그 입으로 독 묻은 화살을 쏘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 합니다.
또 다윗은 그 행악자들이 도무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런 악행의 현상에 특별히 주의합니다.
원수들의 자아 안전 정신(self-secure spirit)은 방종한 뻔뻔스러움을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이 계속해 왔고 또 새로이 무모하게 시도하는 행위를 완고히 추구하기를 고집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세상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3. 본문 5-6절은 “(5)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
(6)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도다” 입니다.
1) 다윗은 원수들이 악을 추구하고 그들끼리 연합했다고 계속 하소연합니다.
다윗은 원수들이 확신으로 감히 최대의 죄악을 행하도록 서로 격려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다윗이 자신의 환경이 아주 허약한 상태가 되자 다윗의 원수들은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 다윗이 가난과 추방 가운데 놓여 저항할 힘이 없게 되자 보다 자유롭게 다윗을 핍박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다윗은 그들에게 고칠 소망이 없으며 인간애의 감정도 없다고 언급합니다.
다음에 다윗은 그들이 자기를 파멸할 계획으로 서로 모였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행동으로 옮기게 될 끊임없는 자신(自信)이 그들에게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신감은 그들의 음모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신념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악인들의 그릇된 안전에 힘을 더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어 마음이 단순하고 정직한 자들을 향해 교활한 책략으로 이기도록 하는 한 가지 현상은 그들이 자기들의 범죄를 항상 마련해 놓은 핑계로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64 편
이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들은 ‘누가 그들을 보리요’(칼빈 ; 누가 보리요 - 한글)라고 말합니다.
למו(라모; 그들을)라는 말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죄악을 행하는 그들 자신들이요, 또 하나는 상반절에 언급된 그 책략들입니다.
전자의 해석이 보다 좋은 의미입니다.
원수들이 죄의 길로 무모히 돌진한 것은 그들이 교만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생각이나 수치심을 전혀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6절에서 다윗은 그 원수들이 행했던 거짓에 대해 혹독하게 비난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모든 행악술을 다 사용해서 이 방면에 생각날 만한 묘책이 더 이상 없을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찾았다” 라는 말은 악을 행하는 은밀한 방법과 관련됩니다.
다윗은 그들의 악이 깊었다고 덧붙입니다.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로 다윗은 악인들이 숨어 행하는 책략을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각 사람의 속 뜻과” 라고 번역하는 대신 איש (이쉬) 라는 말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속과 깊은 마음이 저희에게 있도다’ 라고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원수들이 자신들 속에 모든 사람을 다 포함시키려고 꾀한 셈입니다.
곧 그 행악자들은 음흉과 교활함을 드러내 온 모든 사람들입니다.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합니다.
다윗의 의도는 원수들이 자기 파멸을 위해 공공연히 난폭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원수들이 자기들의 은밀한 전략을 수행했다는 사실이겠습니다.
또한 그 원수들이 행악을 위한 은밀하고 상상 못할 방법을 발견해 냄으로서 자기들이 가장 깊은 투시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과시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시편 64 편
시64:7-10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를 쏘시리니
다윗은 성령의 조명과 성령의 감화로 하나님께서 극악한 자들을 반듯이 징벌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서 확신하는 중에 자신 신념을 굳히고 있습니다.
1. 본문 7절은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를 쏘시리니 저희가 홀연히 살에 당하리로다”
입니다.
이제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효과 없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기 기도가 이미 응답되었다는 분명한 확신 가운데 자축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지 않아도 그 심판이 갑자기 수행되리라고 선포합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괄목할 만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악인들이 번영 속에서 자신들을 강퍅케 하고 있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또 다윗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묵인과 오래 참으심을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악인들의 현상에만 주목하여 실망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참으로 인식하게 된 하나님이 주신 그 신앙으로 견뎌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대하는 일상적인 방법에 따라 그들이 제딴에는 벌을 피한 것으로 믿고 무모한 확신에 빠져 있을 때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저들을 찾아가시리라는 사실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처벌을 지연시키는 것은 그들에게 보다 적절한 응분의 심판을 후에 가하시려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에 의한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판을 지연시키신 것은 그 행악자들이 “평강하다, 평강하다”(렘8:11) 할 때에 갑작스런 멸망으로 저들을 전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오래 계속되는 시련을 겪을 때 우리를 위로하는 생각입니다.
2. 본문 8절은 “이러므로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저희를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한 주제를 계속 다루면서 그들의 은밀한 계획에는 독이 섞여 있다고 말합니다.
시편 64 편
다윗은 그들의 혀로 드러낸 독이 결국 그들 자신들을 죽이는 결과가 되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다른 곳에서 다른 비유로 표현된 것과 같습니다.
곧 그들이 자기 올무에 걸리고 자기가 판 웅덩이에 스스로 빠졌다(시57:6)는 말입니다 저희가 죄 없고 정직한 자들을 대적하여 짜낸 행악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머리에 돌려주는 것은 정당합니다.
이런 심판은 우리가 보는 대로 우리 눈앞에 매일 되풀이되는 예증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심판이 행해지는 것을 믿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마땅히 중요한 진리를 마음에 더욱 새겨야 할 의무를 느낍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술책을 그 행악자들 자신들의 파멸에 완전히 효과적인 수단으로 변하게 할 기회를 찾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악인들이 그 술책을 고의로 자기들의 멸망을 위해 사용한 것처럼 만드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반절에는 악인들의 처벌에 대한 충격적인 혹독함을 나타내기 위해 ‘저희를 보는 자가 다 도망하리로다’(칼빈 ; 머리를 흔들리로다 -한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지한 세상이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높이 들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나 두려움과 당황을 주기 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손길의 신호임에 틀림없습니다.
3. 본문 9-10절은 “(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10)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 하리로다” 입니다.
1) 다윗이 보다 충분히 주장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다윗이 주장한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전에는 선두에 서서 하나님의 섭리를 간과할 정도로 판단해 버렸다는 사실들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말은 이제 그 사실들로부터 도리어 좋은 결과가 나오게 해달라는 말이기도 하고, 또한 다윗의 공개적인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 특이한 광경을 보고 조사하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친히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지금까지 그들에게 전혀 새로운 주제였던 것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현저하게 보여주신 그 지식이 멀리 그리고 넓게 퍼지리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64 편
이는 다윗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용된 שכל(샤칼)이라는 동사는 자동사적인 의미로 ‘그들이 이해할 것이요’ 이거나 타동사적 의미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게 할 것이요’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있어서 같은 것을 두 번 반복하는 일은 보통이기에 아마도 후자, 곧 타동사적 의미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2)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베풀어진 구원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사실들을 선언합니다. 다윗은 또 하나의 바람직한 결과를 마지막 10절에 언급합니다.
곧 그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기 종 다윗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도움을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히 기대하는 성도들에게 기쁨과 소망과 거룩한 승리를 주리라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의인”이라고 불렸던 자들이 다음에는 “마음이 정직한 자”로 표현됩니다.
이는 우리에게 용납될 만한 유일한 의(義)는 내적 진지함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충분히 주장했습니다.
시 65:1-3 하나님이여 찬송이
이 시편은 청원과 감사 두 가지로 구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이방인들이 동일한 믿음으로 초대될 예언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 시편에서는 주로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 안에 내려주시는 아버지로서의 배려를 볼 수 있습니다. 또 그 배려로부터 흘러넘치는 온갖 유익에 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편안함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전에 유대 백성에게 내려주셨던 자비로우심을 계속 보존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한 두 가지 특정한 예가 뚜렷이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땅에까지 뻗어주신 하나님의 강력하신 보호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수많은 복들로 그 땅을 풍요롭게 하신 은혜입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 본문 1-2절은 “(1)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 께 이행하리이다
(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입니다.
원문 문자대로는 ‘찬송이 주께 잠잠하오며’의 뜻이나 동사 דמיה(두미야)는 먼저 ‘쉬고 있다’는 뜻으로 은유적 풀이였다가 나중에 ‘기다리다’ 라는 의미로 옮겨졌습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다윗으로서는 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무 커서 언제나 그칠 줄 모르는 새로운 찬송을 받으시기에 족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온 세계에 두루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특히 자신의 교회에 대해서는 더욱 각별하게 보입니다.
더우기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자기들에게 엄청나게 풍요로운 유익이 쏟아져 내린다 해도 그 은혜가 어디서부터 오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도 전혀 모른 채 받기만 했던 갖가지 축복 속에서 허랑방탕한 마음에 젖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전하려는 주된 것은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에게 나타내신 인자하심에 대해 주께 감사를 드림이 지당하다는 것입니다.
시편 65 편
이 구절 하반절은 같은 내용으로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는 다윗이 사람들의 편에서 마땅한 감사를 드릴 것을 촉구하는 뜻입니다.
한편 다윗의 말 속에는 언제나 그침 없고 새로운 찬양의 뿌리가 백성 앞에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 살피는 절과 이어지는 절도 하나님 자신이 백성이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는 사실을 확언하면서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습니다.
이리하여 왜 서원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지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이들의 기도에 은혜로운 응답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지막에 서술된 것이 자연스러운 사고의 순서로서는 맨 처음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붙여진 칭호는 그와 함께 깊은 중요성을 지닌 진리를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부정하시는 것이 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확실히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이런저런 경우에 기도를 들어주셨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라는 이름을 부여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청에 귀를 막으신다면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기도를 들어 주심이야말로 하나님 영광의 계속되는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은 하나님 자신의 특유하신 부분입니다.
또 기도응답이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새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에 결코 시들지 않는 신뢰를 불어 넣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능력에는 결코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간구에 대한 응답을 그 어느 것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뒤따르는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역시 우리 주목을 끌기에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는 확신없이 하나님 앞으로 감히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두려움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우리의 기도를 허락하시기 위해 자신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음을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 앞으로 나아오실 때 우리는 감히 그의 면전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목전에 닥친 필요의 속박에 얽매여 마지못해 기도하는 위선자와 경건치 못한 자들의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시편 65 편
이런 자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 말씀에 바탕을 둔 믿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혹시 들어주시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로 나아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하나님 앞에 다가서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 하신 약속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은 먼저 그들에게 신뢰로 살아있게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확실한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 즉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는 말씀에서 분명히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고서는 도저히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항상 긴장과 의문의 상태에서 기도하는 교황주의자들에게서는 기도의 합당한 원칙이 행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의해서 우리가 누리게 된바 자유로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은 그 가치를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다윗이 “모든 육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비록 당시에는 유대인에게만 특유했던 이러한 특권이 모든 민족에게 널리 확대될 사실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2. 본문 3절은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죄악의 말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 칼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중상과 비방으로 핍박받는 자들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 민족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의 전달에서 흔히 일어났던 온갖 방해들은 곧 그들의 죄가 그 모든 것의 원인인 사실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사59:1)의 대응 구절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에는 언제나 걸림이 없으시며, 부르심에 그토록 은혜롭고 친절하신 하나님이 그 백성이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한동안 자신의 거룩한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다윗은 먼저 자신의 개인적인 죄를 인정합니다.
그 후에 다윗은 다니엘처럼(단9:5) 온 민족을 자신과 같이 부각시킵니다.
이런 진실을 밝히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그 신뢰를 쇠하게 하려는 의도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기도를 가로막고 있는 어떤 장애를 제하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시편 65 편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격도 없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한,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다윗이 이러한 종류의 유혹과 투쟁하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당시에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불쾌하심에 관한 어떤 징표 아래 고통당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다윗으로서는 확실한 구제책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다윗은 자기 죄 문제를 언급함과 동시에 그 죄를 용서하시고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특권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피는 구절은 반드시 앞 절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비록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쫓겨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과 화해하여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사실에 기운을 얻어 기도를 계속할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구할 때 아주 낮은 자세로 탄원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의 간청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아무런 대가없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은혜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만약에 언젠가 하나님께서 은총을 거두시고 우리에게 찌푸린 모습을 보이신다면 다윗의 본보기에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것을 희망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죄에 관한 고백에서 다윗이 단수형(單數形)을 쓰고 있는 이유는 자신이 왕으로서 백성 전체를 대표하고 있거나 다니엘처럼 백성들에게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개별적이고 특정적으로 검토하고 고백할 것을 권고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위선자들이 일반 범죄 속에 자신들의 몫도 들어 있음을 형식적으로 인정하여 간교하게 그들 개인의 개별적 죄에서 숨어 버리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겸허를 가장하지 않고 내면의 깊은 확신으로 우선 자신이 먼저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윗은 다른 사람들을 같은 죄의 영역에다 포함시킵니다.
시편 65 편
시65:4-8 주께서 택하시고
본문 4절은 3절의 결론입니다. 곧 본 구절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사죄를 받고 열납(悅納)된 자의 복이 크다는 말씀입니다.
“주의 뜰,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이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아름다움”이란 말은 신령한 은혜를 가리킵니다.
본문 5-8절은 전쟁의 승리를 주신 은혜로 인한 감사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의 난(亂)에서 구원받은 일을 염두에 두고 말한듯합니다.
1. 본문 4절은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입니다.
백성들이 그들의 죄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들어주실 기도를 행할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이 사실을 이미 인정하고 난 후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에서 위안을 찾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다른 복들과 함께 죄사함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다윗은 이미 자기가 죄 씻음에 관해 말한 것에다 하나님이 불쌍한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를 지적함으로서 또 하나의 광명을 첨가합니다.
이 같은 은혜는 죄인들이 아무리 쓸모없는 존재라 해도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오는 것을 환영하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사랑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받고 있는 죄 용서는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으로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 우리의 모든 기도도 기초를 둡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의 화해를 구하여 감히 하나님 보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이 구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방인들까지 미치는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윗이 이 시를 쓰던 당시의 시대에만 오직 적용되는 관점으로 보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오직 유대 백성에게 국한되었습니다.
또한 그들만 성소에 들어갈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차별이 없어지고 다른 민족들도 같은 특권을 누리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또 우리 모두 자유롭고 친근하게 아버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편 65 편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한글) 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가 멀리 있는 자들과 가까이 있는 자들을 모두 하나로 뭉치셨습니다.
지금 말하는 내용은 동시에 다윗의 시계(視界)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그 택하신 백성은 죄를 사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그 숫자 속에 포함시키고 엄청난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사람들을 복이 있다고 합니다.
다윗의 말은 이 같은 선택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서 끝나 버린 것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다른 민족들을 제쳐두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유대 민족의 특별한 우선권으로 이러한 복을 굳이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것을 예기하여 무엇이든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록 선택의 권한과 능력이 분명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하더라도 선택은 하나님 자신과 더불어 함께 하기를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누렸다는 단 한 가지 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민족들에 비해 어떤 우월성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참여를 막고 있던 벽이 이제 허물어져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도 그 안으로 부름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닌 사실은 분명합니다.
세심하게 관찰해 보면 하나님 편에서 아무 선택도 행하심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미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사실을 밝혀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사람들을 서로 구별 짓게 한 것이 아니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부르시지 않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믿음과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흘러넘치는 원천은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신뢰로 맡긴다는 것, 또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껴안은데 복이 있습니다.
이 복은 중재자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이해하고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기도가 이런 성격 안에서 이끌어질 때 체험합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과 기도 이전에 우리는 어떤 믿음의 실체를 가질 수 있으며 우리들의 성품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간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다시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기대했고, 또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 가까이에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낮추심 속에서 지옥 만큼이나 멀리 까지 손을 뻗으시고 우리에게 이르셔서 붙잡아 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 가까이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65 편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불러 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거하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특별한 한 민족으로서 분리시키시고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할레자인 유대 민족이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유대인들 중에도 구별하여 모든 유대인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살아 있는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못될뿐더러 하나님의 성전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할 합당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윗이 유대 민족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선택받은 것으로 이야기할 때 이 표상은 외적인 성소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유대인이 성전 뜰을 밟을 수 있는 진정한 교회의 구성원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는 구절이 시15편과 시24:3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교회 구성원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절대적인 요건이 정결한 마음과 깨끗한 손임을 상기해야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가까이로 데려감을 받은 사람들을 두고 진정하고 순수한 믿음의 역사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자들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외양만으로 하나님의 성전 안에 한자리를 차지하는 자들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선택받은 자들과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여기서 함께 언급된 두 가지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양들은 언제까지라도 자의(自意)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허락을 받았고 우리 안에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것 같은 헛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아무런 대가없이 우리를 택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곧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성소로 나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한 방편입니다.
다윗이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덧붙인 것은 그가 이야기한 복 받은 자의 특권으로부터 꽃핀 열매를 두고 한 말입니다.
위선자들도 역시 성소에 갈 수는 있지만 어떠한 영적인 복도 누리지 못한 채 공허하고 불만에 찬 마음으로 돌아오고 맙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개인 체험에서 이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의 체험을 다른 믿는 자들과 연관시키면서 다시 한번 이 부근에서 개인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라고 어떤 특정한 순간에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한꺼번에 충만하게 얻는다고 알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은 점진적으로 믿는 자들에게 전달됩니다.
시편 65 편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은 이와 같이 연속적인 계기로 전달되는 것이지만 그 하나 하나는 즉각적인 충족으로 스스로 풍요로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모든 믿는 자가 합당한 때에 완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말처럼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시103:5 ; 하나님께선 좋은 것으로 우리의 입을 만족케 하사 - 칼빈)라고 함이 사실이며, 동시에 다른 구절에서 밝힌 것처럼 “너희 입을 열라 그리하면 내가 그를 충족케 하리라”는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움츠러든 소망이 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풍요로운 복의 공급을 받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속에서 한껏 위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로우심의 전달을 우리의 소망의 그릇에 맞추어 내려 주십니다.
다윗은 성소의 유익함, 즉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을 특히 명백하게 지적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복을 즐길 수 있도록 이끄시기 위하여 명백히 가리키신 외적인 도움들을 은근히 찬양합니다.
이와 같이 옛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찬미드리는 자들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기 위해 하늘로부터 직접 자신의 손을 뻗어 내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봉헌, 그리고 다른 의식들과의 경건에 관한 외적인 방편들이라는 교의(敎義)의 수단을 빌어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의 영혼을 만족케 하심이 합당하다고 보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서 행하시는 수단들이 이와 비슷한 것으로 비록 우리가 이런 것들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2. 본문 5절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다소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보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어지고 주의 집에서 하나님이 주신 영양물을 섭취하는 자들의 복됨을 같은 관점에서 보다 분명히 밝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엄위하신 이적이나 기적과 같이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 보이시는 역사를 행하심으로서 자신의 백성에게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마치 다윗은 자신의 조상들이 애굽으로부터 탈출해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만큼이나 놀랍고 신기한 구원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듯합니다.
시편 65 편
하나님께서 오직 엄위하신 권능으로 자신의 교회를 지켜주신 것은 결코 흔히 볼 수 있거나 범상한 방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분명 가장 처절하고 절박한 위기에 처했을지라도 그들의 소망을 간직하도록 가르침이 지당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유대 민족이 특별히 누리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야말로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이심을 덧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이방인들에게도 미치게 되어 있음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3. 본문 6-7절은 “(6)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7)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입니다.
명백한 입증을 보여주기 위해 다윗은 이 세상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세상의 짜임 속에 비쳐진 하나님의 권능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방인들도 유대 민족과 함께 똑같은 소망으로 부르심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새롭고 낯선 진리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 진리가 그들이 생각하기 쉬운 것처럼 그렇게 의아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다윗은 이 세상의 모든 부분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권능에 적절하고도 합당하게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다윗은 들판보다는 산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산이라는 존재가 제시하는 거대한 땅과 흙의 봉우리, 그리고 높이 치솟은 암석들이 신성(神性)에 관해 보다 더 인상적인 이미지를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다음 절이 지닌 정확한 의미는 주석가들의 견해가 일치되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문장의 첫 번째 단어 앞에 어떤 비유의 표시(as)가 보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마치 바다의 흉용(洶湧)을 가라앉히듯이(as) 사람들이 그 무례하고 건방진 시도로 물끓듯 할 때 인간의 온갖 소동을(만민의 선화) 하나님께서 진정시키심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절의 첫 번째 부분은 끝부분에서 분명히 서술된 내용에 관한 은유적인 공포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두고 그 말이 가리키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7절 상반에서 다윗은 우리가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권능을 입증하려고 그쪽으로 우리 주의를 돌리려 합니다.
하반절에서는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밝히 볼 수 있는 자신의 권능에 돌려진 것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힘은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을 고요히 가라앉히시는 데서 보여집니다.
시편 65 편
바로 이러한 권능이 사람들에 의해 불러일으켜진 온갖 소동들을 진압하시는 일에서도 적용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4. 본문 8절은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입니다.
여기 언급된 “징조”라는 말을 우리는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손의 각인(刻印)을 품고 있는 뛰어나고 기억할만한 주의 역사하심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늘에서나 땅위에서나 가장 사소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물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합니다.
그렇지만 여기 언급된 이름은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을 보다 뚜렷이 나타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으로 갖가지 이적들에 특징적으로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증거가 너무나 뚜렷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다윗이 우리에게 공표하는 것처럼 땅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미개한 민족들에게조차 하나님은 존경과 경이의 대상이십니다.
후반부에 관해서는 일부 주석가들이 제시한 풀이를 따른다면 아침에 해가 솟으면 그 빛으로 사람들이 소생하는 기쁨을 맛보고 밤이 되어 달과 별들이 하늘에 나타나면 그것들이 없이는 사람이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을 어두움으로부터 구조된다고 하는 뜻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해석을 채택한다면 전치사 하나를 규명해야 됩니다.
이 해석에 의하면 이 시귀가 마치 ‘주께서 해와 달과 그리고 별들이 떠오르는 것 때문에(또는 .....것에 의하여) 사람들이 기뻐하게 하시며......’ 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부분의 표현은 어떤 별개의 다른 말도 추가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충분하고도 적절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주께서 행하시는 모든 놀라운 권능의 행사로 해서 땅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널리 퍼진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연후 이제는 똑같은 사실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놀라운 역사에 의해 땅끝까지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해가 떠서 지기까지 사람들은 그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은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65 편
시65:9-13 땅을 권고하사
본문 9-13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년으로 인한 감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풍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권고하시는 복 중의 하나입니다.
땅 위에 죄가 관영(貫盈)한 때에 흉년이 드는 일은 역사상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인간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풍년이 드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한 것입니다.
(1) 먼저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자연을 통해 베푸시는) 은총의 덕으로 그렇게 되는 것 입니다(마5:45-48).
(2) 그 외에도 그 악인들을 벌하시는 방법을 기근으로 하시지 않고 어떤 다른 방법으 로 하시는 때에도 그렇게 됩니다.
1. 본문 9절은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입니다.
이 구절과 다음에 따르는 동사들은 끊임없이 진행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이에 따라 현재 시제로 옮겨져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문장에 나오는 두 번째 동사의 정확한 의미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소망하다’의 뜻을 지닌 동사 שוק(슈크)에서 유래돼서 땅이 오랜 가뭄으로 메마르고 갈증에 시달린 후에 하나님이 이 땅을 찾아주신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다른 이들은 이 동사가 ‘마실 것을 주다’는 뜻의 동사 שקה(샤카)에서 유래했다 합니다.
후자가 가장 자연스러운 ‘물을 대심으로 땅을 찾아 주시고’ 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쪽이 앞뒤의 연관으로 보아 훨씬 적합합니다.
그 뒤에 “심히 윤택케 하시며” 가 따릅니다.
또 이것이 강조 문맥으로 덧붙여진 표현임이 분명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 다윗이 과연 유대만을 가리켜 이야기하는 것인지, 세상 전체를 두루 지적하는지의 여부가 그에 따라 갖가지 다른 견해를 주장하게 하는 점입니다.
우리도 이 문제를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윗의 말은 대체로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적용됩니다. 그렇지만 보다 특징적으로 유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시의 앞부분이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와 그 백성에 대한 자신의 자비로우심을 보다 특별히 서술하는 것으로 거의 압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견해는 이어진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로 확실히 뒷받침됩니다.
시편 65 편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강”이 위용을 갖춘 큰 강을 의미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풀이는 경솔하고 지나친 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강”에 복수형이 쓰이는 것이 표현상 합당한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조그마한 실로암 시내를 지적하여 읊은 것으로 모세의 말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나일강의 범람으로 기름진) 애굽땅과 같지 아니하니 ......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신11:10,11)”를 완곡하게 비유하려는 의도에서 다른 나라들의 땅을 풍요롭게 하는 자연적인 강과 상반되는 입장에서 이 시내를 끌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다윗이 비 자체를 은유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강”으로 부르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구절은 유대를 한정적으로 가리키는 사실에 틀림없습니다.
12절에 “들의 초장”이란 말도 우리는 성경말씀에서 “언덕의 땅”이라고 불리는 더욱 건조하고 경작되지 않은 지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더욱 잘 알려진 것으로 보다 각별한 찬미를 부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입니다.
그렇지만 그에 반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어떤 지역에서도 땅의 비옥함과 소산의 풍성함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비에 관해 우리 모두가 그 풍요로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땅이 지칠 줄 모르는 온갖 열매를 맺는 것은 땅이 저절로 그리 되는데 아닙니다.
오직 사람의 먹을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하나님이 합당한 땅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라고 덧붙여 말할 때 다윗이 사용한 표현방식에는 참으로 적절한 타당성과 효과가 있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땅이 풍요롭게 번성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이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시기 위해 인류라는 거대한 가계(家系)에 대한 아버지의 보살핌 가운데 땅이 지음받은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2. 본문 10절은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의 동사들을 기원법(祈願法)의 형태를 띤 것으로 일종의 기도에 관한 말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여전히 감사의 정취를 계속 읊고 있고 더불어 땅이 열매를 맺기 합당하게 하나님이 땅을 비로 적시고 물을 넉넉히 대주심을 찬양하고 있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자연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의 질서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낮추시고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주시는 아버지다운 사랑을 나타내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의 한 부분을 말함에 있어 반복적인 표현을 씁니다.
시편 65 편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사악하고 경건치 못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아무렇게나 얕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연 속에 드러나는 이차적인 원인들을 관찰하는 일에 보다 명석할수록 하나님께로 올라가기는 커녕 더 완고하게 그 이차적인 범주 속에 안주 해 버립니다.
철학이란 그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신비 속으로 파고 들어 갈수록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지당한 사실이 우리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부패와 패역한 요소로 인해 가로막혀 있습니다.
자신의 날카로운 이성에 자기 스스로 제 자랑을 하는 사람들은 비의 근원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고 하지 않고 눈을 돌려 공기와 원소들 중에서 찾으려고 애쓰기에 이럴수록 우리가 이러한 정신 상태에서 깨어나야 할 필요가 더욱 커집니다.
3. 본문 11-13절은 “(11) 주의 은택으로 연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 지며 (12)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13)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주의 은혜의 해에 관 씌우시니’라고 번역하여 마치 다윗이 풍요로운 해(年)는 그 특유한 영광이 첨가된 것이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관 씌움을 입었다고 풀이합니다.
만약 평년보다 더 풍부한 수확이 있었다면 이것이 곧 그해의 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해를 똑같이 복주하시지 않으신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전히 무엇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인한 그 권능의 관을 받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구절을 더 단순히 해석해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그 절기에 수확되는 연례적인 추수 안에서 분명히 드러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푸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다윗은 다음에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치 병거(兵車)을 올라타듯이(시109:3) 그 위에 올라앉으시는 구름을 은유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로 이 대목에서 자기가 뜻하는 바를 더욱 자세히 설명합니다. 땅이 그 풍성한 열매를 얻는 것은 물기, 또는 수분으로부터이며 이 물은 비로부터, 그리고 비는 구름으로부터 얻어집니다.
오묘한 표현상의 아름다움과 함께 이들 요소들이 ‘떨어지는 기름방울’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길 또는 병거이기에 이렇게 표현됩니다.
시편 65 편
다윗의 말은 마치 하나님이 거니시는 길에는 그 어디나 끝없이 다양하고 풍요로운 열매들이 그 발에서부터 흘러넘친다고 하는 표현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름 방울들이 심지어 더 거칠고 한층 경작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들의 초장)에까지 떨어진다는 말을 덧붙임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한결 강조합니다.
여기서 “들”이란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완전한 황무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작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며 거민이라곤 거의 없는 곳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뜻을 취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황무함에도 불구하고 산들의 봉우리마다 기름을 내려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다른 곳들에서보다 한층 더 웅변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 땅위에서 그 어느 곳도 하나님이 간과하시는 부분은 없으며 하나님의 넓고 깊은 너그러우심이 이 세상 어느 곳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골짜기”와 평평한 땅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자비로우심의 온갖 다양한 공표가 골짜기들과 낮은 땅에도 곡식이 덮이는 것은 물론 “양떼가 입혔다”고 말할 때 그 자비로움에 대한 찬미가 우러나옵니다.
다윗은 무생(無生)의 존재들이 기뻐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들판이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눈을 상쾌하게 적실 때 들판이 웃음 짓는 것으로 말하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 이런 ‘기쁨’이란 말이 쓰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먼저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를 말하고 난 뒤에 보다 부드럽고 연약한 표현인 “또 노래하나이다” 를 덧붙인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속에는 원래 강조의 역할을 하는 불변화사 אף(아프)가 중간에 삽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동사 ‘노래하다’는 미래시제로 취하여도 무방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속적인 즐거움을 표시합니다.
즉 초장과 골짜기들이 한해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끝없이 이어지는 계절 중에 언제까지나 즐거워할 것임을 뜻합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이긴 하지만 히브리어에서는 표현의 순서가 이와 같이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