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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떠나지 아니한 제자 / 성홍모 목사
우리 영주교회가 금년에 힘써 나가려는 목표는 “성숙한 제자로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성숙하다는 말은 미숙하다는 말의 반대개념으로, 어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연령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른스럽게, 성숙한 사람으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선생님이십니다. 그 위대하신 선생님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일생에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스승으로 모신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은총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학교를 다니고 중고등부 청년부를 거쳐 신학을 공부하였고, 목회자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주님 앞에 서야한다는 마지막 골인지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다급한 심정으로,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따르고, 배우고 싶습니다. 오직 예수님, 주님만을 닮고 싶습니다. 주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는 한국천주교회를 이끌어 오신 정신적인 지주이신 김수환추기경이 돌아가셨습니다.
김추기경의 지나온 아름다운 생애를 보여주는데, 저도 한 사람의 종교지도자로 그분과 비교해보았는데, 정말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사랑한 분이요, 사람들에게 꿈과 소망을 심어주었고, 우리 한국사회에 엄청난 교훈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는 가톨릭신자들만의 지도자가 아니라 모든 한국인에게 사랑과 평화의 사도이셨고, 우리 시대의 정말 큰 어른이셨습니다. 우리 시대에 그런 큰 분이 계셨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요, 그 분이 온 몸으로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아호가 옹기라고 합니다. 옹기는 우리 한국인의 애환과 정서가 물씬 묻어있는 소박한 그릇입니다. 옹기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는 오물까지도 담아내는 질박한 그릇입니다. 자신의 몸에 한없는 사랑을 담아 사회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어주는 그런 소박한 그릇으로 살아가신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 병자들, 힘없는 수감자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고,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는 우리 시대의 통합의 리더십을 실천하셨습니다. 그의 리더십을 말하라고 하면 사랑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선종하고 나서 비로소 사랑의 실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사랑이었는데, 비로소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많은 가르침과 명언 중에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고 하셨고,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라고 하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을 존경합니다.
우리 시대는 사랑이 부재하는 시대입니다. 사랑과 화합이 부재하고 보니, 반성이나 책임 또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책임지려는 사람은 없고,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만 있다고 봅니다. 내 일이 아니면 그만이고, 지나가면 그만이고,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나의 눈물을 닦을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만, 남의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은 없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작은 손수건이 되어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어야겠습니다.
오늘 설교시간에 길게 그 분에 대하여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다 그 분의 생애를 통하여 많은 감동을 받고, 깨달은 점도 많았을 것입니다. 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적은 일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 내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으며, 베풀고 나눌 수 있는 넉넉한 사람,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자기의 것을 흔쾌히 내어놓고도 다 잊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은 “스승을 떠나지 아니한 제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으려고 합니다. “스승을 끝까지 따라간 제자”라는 제목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스승이신 엘리야와 제자 엘리사가 나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두 사람은 정말 위대한 선지자들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다시 엘리사가 엘리야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위대한 선지자들이 될 수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남으로 위대한 선생이 되었고, 엘리사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만남으로 갑절의 영감을 받았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좀 더 쉽게 풀어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데려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불말과 불병거로 엘리야를 이끌어 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세상에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요 그도 한 세상 살아간 사람이요, 우리도 한 세상 살아가는 사람인데,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요, 한없이 높아 보이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살았으면, 하나님이 그를 죽음도 면하게 하시고, 하늘로 데려가셨는지, 불가사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범죄한 이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그는 죄도 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성경에 설명하지 않고, 에녹이라는 사람도 하나님이 산채로 데려가시고, 엘리야도 산채로 데려가셨습니다. 엘리야는 여러 선지학교를 돌아다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고, 엘리야에게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데리고 길갈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길갈이란 곳에서 엘리야는 이제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계시를 받은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길갈을 떠나서 길을 가다가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씀하였습니다.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단호하게 잘라서, 거절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선지자는 벧엘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벧엘에 살고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엘리사는 또 단호하게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엘리야와 당신 엘리사의 문제이지, 다른 제자들이 간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오늘 하나님이 엘리야를 데려가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정말 귀한 영성을 가진 것이요, 신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이 건강하신데, 하나님이 데려가신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신통한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성도님이 다 돌아가실 것 같아,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렇게 쇠약하신 분도 일주일을 더 사시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한 일주일은 족히 갈 것 같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날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엘리사야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엘리사는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델에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엘리야가 오늘로 하나님 앞에 간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엘리야를 따라간다고 결심하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벧엘에 머물라는 말씀에도 순종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고 있습니다.
여리고에 오신 엘리야는 다시 선지학교의 생도들에게 권면하시고 가르치신 후에, 다시 일어나 길을 가려고 합니다. 엘리야는 다시 엘리사에게 말씀합니다.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엘리사는 다시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선생님을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요단강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때 여리고에 있던 선지자의 제자들 오십 명이 멀리 서서 두 사람이 가는 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 선지자가 요단강 가에 서 있었는데, 엘리야가 그의 겉옷을 벗어가지고 둘둘 말아서 물을 이리저리 치는데,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이런 광경을 멀리 서서 바라보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엘리야가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전송하는데, 요단가에 와서 멀리 서서 바라봅니다. 그들도 대단한 영성을 가진 사람들이요, 당시에 아주 훌륭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요단강을 건너온 엘리야는 자기를 끝까지 따라오는 제자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이때에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볼 때에 그런 일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사람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순간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따라오는 엘리사가 무슨 소원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라도 주고 싶었습니다.
두 선지자가 대화를 나누며, 길을 갈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불수레와 불말들이 내려오더니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를 이끌어 불수레에 앉히더니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놀라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는데, 두 사람을 갈라놓으며, 불말이 이끄는 불수레가 내려오고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그 불수레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그 이상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때 다급해진 사람은 남아 있은 엘리사입니다. 그는 엘리야의 갑절의 능력을 받으려는 열정으로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따라왔는데, 지금 엘리야가 자기 앞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 엘리사는 소리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라고 했습니다.
그는 엘리야를 데려가는 불수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사는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옷을 둘로 찢으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입고 있던 겉옷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옷을 주어 가지고 돌아옵니다. 엘리사는 요단 언덕에 서서 요단강을 건너오는데, 조금 전에 엘리야가 옷을 말라 물을 이리저리 치면서 건넌 것처럼 물을 이리저리 치면서 마른 땅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는 물을 치면서 말합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그도 물을 이리저리 칠 때에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엘리사는 마른 땅으로 건너왔습니다. 두 분이 한 일을 보면 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저는 오늘 엘리사의 열정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는 왜 갑절의 영력을 요구하였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느끼기에 갑절의 영감을 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값지게 사용되고 싶은 마음에서 갑절의 영력을 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가 악해져가기에 시대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마음에서 갑절의 영력을 구하였을 것입니다. 갑절의 영감은 장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유산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는 영력 있는 후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일들은 하고 싶은 사람들이 맡아야 합니다.
엘리사는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길갈에 머물라고 하는데, 거절합니다. 지금 선지학교의 교장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길갈에 머물라는 말은 길갈에 거주하라, 살라는 말인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엘리야가 받은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사역은 앞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능력을 받는 것은 엘리야가 있을 때에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침 받아야만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눅24:49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역이란 그 후에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준비한 만큼 사용될 수 있습니다. 많이 준비한 사람은 많이 써먹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사의 열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로서 성숙해지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롬12:11 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열심이란 말은 끊는 마음, 불타는 마음, 타오르는 마음을 말합니다. 여러분, 물이 끓으려면 99도를 가지고도 되지 않습니다. 100도가 되어야 물이 끓습니다. 99도는 끓지 않습니다. 마지막 1도가 넘어야 끓습니다. 물이 수증기로 증발할 때는 표면에서 증발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물이 끓어 기화될 때에는 속에서부터 기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생도들처럼, 90도 정도에서 만족하고, 요단강가에 멀리 서서 바라보는 정도라 만족하고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주님을 따르고, 스승을 따르고, 갑절의 영감을 받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위대한 일이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열정이라고 하니 욕심이나 야심이 아닙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요,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겠다고 하는 순수한 마음입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이 빼앗아간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11:12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팔복의 말씀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 프뉴마, 성령에 대하여 배고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3일에 한 끼 정도 먹는 사람이 음식을 갈망하는 것과 같은 심정이라고 합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장애물이 있다고 해도 주님을 따라가는데,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역이 주님을 따라가는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음에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방해를 놓습니다. 그래도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은 식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막10:29-30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일생 예수님에게 쓰임을 받는 것, 예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결심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 주님만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잘 믿는 것을 일생의 우선순위로 알고 힘써야겠습니다.
저는 목회하는 목사로서 “그리스도의 제자화”라는 것을 목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면 제자화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제자화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요, 본받는 것으로, 자기를 부인하여,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리로 삼았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걸어 다니는 작은 예수로,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에 있어 어떤 사람이 과연 성숙한 제자들입니까? 막8:34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숙한 제자는 예수님만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만을 목표로 하여 그 분을 닮아가려는 사람들이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말이 되고, 주님이 살아가신 그 발걸음이 나의 발걸음이 되고, 예수님의 가치관이 곧 나의 가치관이 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왕이 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드러나시고, 주님이 나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숙한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일생에 걸쳐 자기와 씨름해야 하는 과제요, 덕목이라고 봅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교만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나라고 하는 자아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 때문에 걱정입니다.
갈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하고, 인정하여야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 안에 사시는 증거를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숙한 제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자들입니다. 우리 시대는 고난을 잊어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고난을 말하는 것조차, 십자가를 생각하고 지려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부활의 영광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그릇에 은총의 복을 담아주십니다.
열정적인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엘리사와 같은 열심,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고 얻어내고야 마는 열심을 내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