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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9편 12절-15절: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 저희로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12절: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저희 입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입에서 나오는 말은 참말이던 거짓말이던, 농담이던 악담이던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대로 나온다. 세상성질이 들어있으면 세상에 속한 말이 나오고, 천국의 성질이 들어있으면 천국에 속한 말이 나온다.
성도에게 세상성만 들어있어도 거짓의 사람이 되고, 세상성과 천국성이 혼합으로 들어있어도 이 사람은 거짓의 사람이 된다. 혼합적인 정신이 들어있는 사람은 정신이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느라고, 편리주의로 사느라고 정함이 없게 된다. 사람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성질대로 태도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들은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자기를 고치려고 하지를 않는다. 결국은 자기의 교만에 자기가 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역을 한 양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얼마나 입었느냐? 닮았느냐?’에 따라 심판의 경중이 달라진다. 사람의 속 중심을 보시고 상벌을 하신다. 그래서 자기가 한 말은 모두 자기에게 메아리로 돌아오게 된다. 자기가 한 말이 말로써 자기에게 돌아오기도 하고, 자기가 한 말이 사건화 되어서 이 사건이 자기에게 되돌아오기도 한다. 다른 데로 안 가고 자기에게로 되돌아온다.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무엇이 저주냐? 세상 일반적으로 ‘저주’란 재산이 없어지고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라고 악담을 하는 것을 저주의 말이라고 한다. 노골적으로 악담을 하는 사람은 ‘빌어먹어라. 호랑이가 잡아가라. 눈알이 빠져라. 다리가 부러져라’ 이런 말을 한다. 그러면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사람이 갚지도 않고 도망을 갔다면 받기는 틀렸고 해서 ‘그 돈 가지고 잘 먹고 잘 살아라’ 라고 한다면 이게 저주냐, 축복이냐? 저주다. 말로는 잘 먹고 잘 살라고 했으나 저주다. 속이 문제라 그 말이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공부를 못해라. 못해라’ 하면 공부를 못하는 거냐, 아니면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노래방이나 오락실에 데리고 다니면 공부를 못하는 거냐? 나중 것이다. 그러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을 바로 믿지 못하게 하려면 ‘예수를 믿지 말아라’ 라고 해야 하느냐? 예수 잘 믿는 사람의 마음을 어느 쪽으로 뽑아내야 하느냐? 세상 쪽으로 뽑아내면 된다. 또는 일 충성봉사로 뽑아내면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을 신앙 면에 저주를 받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에덴동산에서 보면 생명과를 쳐다보게 하고 생명과를 자랑한 게 아니라 선악과를 쳐다보게 하고 ‘색깔을 보니 맛이 좋다느니’ 라고 하면서 마음을 선악과 쪽으로 끌리도록 했다. 그러니까 교훈이 사람의 정신을 크게 좌우하는 거다. 우리는 교훈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성경에 있듯이 말세가 될수록 거짓 종들이 많기 때문에 목사라고 해서 다 천국에 관한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거짓 종들이 말을 한다면 어느 쪽의 말을 하겠느냐?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라고 한다. 성경을 들고 불에 타는 물질성을 구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 종이다. 이런 가르침은 선악과를 먹이는 교훈이다.
선악과를 먹이는 거짓 종은 세상과 세상 것을 가지라고 가르치는데, 이 거짓 종은 자기가 참 종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거짓 종이 볼 때 어떤 사람을 참 종이라고 하겠느냐? 목사가 노회나 총회에 들어있지 않으면 거짓 종이라고 할 거고,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는 사람을 참 종이라고 할 거다.
이런 것을 기준으로 참 종과 거짓 종을 말한다면 어떤 목사가 노회나 총회에 들어있지 않아서 거짓 종이라고 말을 했는데 어느 날 이 목사가 노회를 만들어서 등록을 하고 활동을 하면 이제는 거짓 종이 아니라 참 종이 되는 거냐? 참 종과 거짓 종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질을 가지고 논하는 건데 무슨 제도나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삼아서 말을 하게 되면 이와 같이 모순된 말을 하게 된다. 신학을 했다느니, 목사안수를 받았다느니 하는 눈에 보이는 현상의 것을 기준으로 세워서 ‘참 종이다. 거짓 종이다’ 라고 말을 한다면 오히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거짓 종이다. 간단히 말하면 거짓 종은 질을 말하지 않고 양(量)을 가지고 말을 한다. 이게 거짓 종이다.
금은 아무리 작아도 금이다. 돌의 색깔이 아무리 금색이라고 해도 크기 때문에 이 돌을 금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는 왜 참 종과 거짓 종을 외모나 외형이나 학식이나 조직 등을 기준으로 말을 하느냐? 질을 가지고 분별을 해야 하는데 왜 덩어리를 기준 삼아서 분별을 하려고 하느냐?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냐? 기준이 없이 말을 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거다.
성도를 정신 사상적으로 선악과를 먹게 하는 자는 저주다.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하와로 선악과를 따먹게 해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만들었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행복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통치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생명권 자리에서 쫓겨났고,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에서 쫓겨났다. 이게 저주요 재앙이요, 그 다음에 오는 것은 고통밖에 없다. 말씀의 이치에서 벗어나면 자기에게는 고통밖에 없는 거다.
물질이 많은 것이 복이고 기쁨이고 행복이냐? 아니다. 인간의 행불행을 그런 데서 찾지 말아라. 어리석다. 사람이 돈만 많이 있으면 병도 안 들고 안 죽느냐? 아무리 부자라도 속병이 나면 하루 세 끼 미음만 먹는다. 이게 뭐가 행복이냐?
선악과란 인간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이것이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보여서 그것을 소원 목적하고 취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보이는 세상과 세상 것을 취하지 말고 신령하고 영원하고 영적인 것을 취해야 한다. 사람을 볼 때도 외모 외형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을 봐야 한다. 껍데기만 보면 큰일 난다. 속중심이 옳으면서 껍데기도 좋다면 아주 바람직한 거다.
성경을 들고 세상이나 세상의 것이 하나님의 것이나 천국의 것보다 아름답다고 하며 이것을 자랑하고 돋보게 하며 가지라고 하거나, 이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거나, 이것을 소원 목적하게 하거나, 이것을 신앙의 잣대로 삼게 한다면 이런 말들은 뱀의 말이고 하나님 앞에 저주의 사람이 되는 거다. 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장OO목사가 테레비에 나와서 하는 말이 각자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때까지 부르짖으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라는 게 주실 때까지 큰 소리로 기도를 하라는 말이냐? 사람이 왜 큰 소리를 내느냐? 어떤 때 큰 소리를 내느냐? 사람이 숨이 넘어가려고 할 때 죽지 말라고 정신을 차리라고 큰 소리를 낸다. 그 다음에 집에 불이 났을 때 큰 소리를 낸다. 이럴 때 큰 소리로 부르짖는 건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입으로 큰 소리를 안 해도 다 아신다.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큰 소리도 있고 작은 소리도 있는데, 그러면 큰 소리는 어떤 거고 작은 소리는 어떤 거냐? 신앙 면에서는 크게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큰 소리가 있고 작은 소리가 있는데, 뭐가 큰 소리냐? 큰 소리라고 하는 것은 육에 속한 소리가 아니라 영에 속한 소리가 큰 소리다. 비중이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소리를 빨리 듣느냐? 크게 말하는 것을 빨리 듣는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소리를 빨리 듣겠느냐? 영에 속한 소리를 빨리 듣겠느냐, 육에 속한 소리를 빨리 듣겠느냐? 영에 속한 소리다. 영 위주로 영을 위해 하는 소리가 큰 소리다. 하나님은 이걸 더 크게 들으신다.
그러면 왜 ‘주실 때까지’ 라는 표현을 하셨을까? 주실 때까지 하나님을 귀찮게 하라는 거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비중이 크게 들어간 말이냐, 아니면 인간 나의 마음의 간절성에 비중을 둔 말이냐? 기도를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 하는 것의 원인이 인간 나에게 있다는 거냐, 하나님에게 있다는 거냐? 인간 내가 하나님께 한 번만 ‘주시오’ 라고 하면 안 들으시고, 여러 번 ‘주시오. 주시오. 주시오’ 라고 하면 들으신다는 거냐? ‘주실 때까지’ 라는 게 기도응답의 이유가 나에게 있다는 거냐, 하나님에게 있다는 거냐? 이 말씀의 앞뒤를 보면 시간이나 간절성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게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신앙의 세계에서는 저주와 거짓말이 신앙사상과 연결이 된다. 자기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은 거짓이나 거짓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거짓에 넘어가는 거냐? 상대가 나를 넘긴 거냐, 내가 나에게 속아서 상대의 거짓말에 넘어간 거냐? 후자다. 반드시 이렇게 되어있다.
내가 남에게 얻어맞았을 때 얻어맞은 원인이 상대가 나를 때렸기 때문이냐, 내가 상대를 이길 힘이 없기 때문이냐? 권투시합을 하다가 내가 상대방의 주먹에 맞고 넘어가면 왜 넘어간 거냐? 대부분 상대방의 주먹에 의해 넘어갔다고 한다. 중계방송을 하는 사람도 ‘상대가 어퍼컷을 해서 넘어갔다느니’ 라고 말을 하지 진 사람이 힘이 없고 실력이 없어서 넘어갔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상대보다 약하면 얻어맞고, 상대보다 느리면 얻어맞는 거다. 상대방이 아무리 힘이 셀지라도 내 쪽에서 그걸 피할 수 있는 빠름이 있어서 상대방을 치고 도망가고 하면서 한 대도 안 맞으면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거다.
우리가 거짓 것에 넘어가는 것은 상대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넘어가는 것 이전에 자기의 거짓적인 성질에 자기가 넘어가는 거다. 반드시 이렇게 되어있다. 그래서 거짓적인 자로부터 피해를 본 후에 회개를 할진대 ‘저 나쁜 사람을 감옥에 넣든지 죽이든지 해서 나의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어서 속았습니다. 이런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거짓말이 무엇이냐? 일반적으로는 사실과 다르게 하는 말이지만 신앙 면에서는 성경을 들고 예수이름으로 세상과 세상의 것을 가지라고 하는 게 거짓말이다. 이게 왜 거짓말이냐? 세상 것을 많이 가지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고, 이런 걸 구하는 게 신앙인 줄 알고 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를 위해 힘을 다해 시간투자, 물질투자, 노력투자를 했는데 죽음의 선을 넘어 천국에 가서 보니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불탈 구원, 부끄러운 구원이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니 자기의 세상에서의 신앙이 결과적으로 거짓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성이기 때문에 신령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인데 믿는 내가 세상에 살면서 온통 물질성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면 내가 천국에 가지고 들어갈 것은 중생된 영밖에 없는 거다. 천국에 갈 때 자기가 이 땅에서 힘쓰고 애써서 이룬 것도 같이 가지고 들어갈 줄 알았는데 그곳에 가서 보니 세상적으로 이뤄놓은 것은 하나도 없으니 자기가 이 땅에 살 때 세상과 세상 것을 많이 가지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던 말들이 다 거짓이 돼버리는 거다. 일반사람들은 뭐가 거짓말이고 참말인지 전혀 모른다. 성경은 이걸 가르쳐 준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물질부자라면 이걸 가지고 천국에 가서도 부자가 될까? 안 된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물질부자라면 이 사람이 이 물질을 천국에 가지고 가느냐? 못 가져간다. 천국은 신령세계라서 물질은 일체 못 들어간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부자가 되었을지라도 이 물질은 천국과 하등의 상관이 없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 믿어 부자 되라’ 라는 가르침은 가르치는 사람도 남을 속인 거고, 이 말을 참으로 알아듣는 사람도 자기의 생각이 거짓말에 빠져든 거다. 다 같이 거짓말이 돼버리는 거다. 거짓말로 가르친 거고 거짓말 신앙을 가진 거다.
믿는 우리는 참과 거짓에 대한 판단을 즉시 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본질인 진리이치를 가져야 한다. 이게 옳은 신앙이다. 참과 거짓을 분간해내는 지식을 가져야 옳은 신앙지식이다. 이게 없이 물질을 많이 가지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인 것처럼 가르치고, 자기도 그렇게 알고 있다면 이 사람은 거짓 신앙을 가지고 있는 거다.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교만’이란 일반적으로 ‘나는 능력자다. 나는 다 할 수 있다. 내가 최고다’ 라고 하는 걸 말한다.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의사와 뜻은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절대자인 것처럼 날뛰며 선악과 따먹은 자기의 고집만 피우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다.
신앙적인 면에서 교만한 자는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을 품고 있지 않다. 돌려서 말하면 옛사람을 품고 벗지 않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다. 사람이 안 바뀌면 교만한 사람이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안 바꿔진 요소가 많이 있다. 어느 부분에는 바꿔졌는데 어느 부분은 안 바뀐 채 그대로 들어있다. 안 바뀐 부분은 교만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성질이나 성분 중에 예수님의 것으로 다 바꿔야 되느냐, 안 바꿔도 좋은 게 있느냐? 안 바꿔도 좋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건 날 때부터 신령한 것으로 가지고 온 거냐? 인간에게는 원래부터 좋은 것은 하나도 없다. 전부 주님의 것으로 바꿔야 한다. 예수이름으로 전부 거듭나야 한다.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이 말은 첫째로 교만한 자는 자기의 교만성이 자기를 하나님의 인격성으로 자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고, 그 결과로 자기의 교만으로 자기 스스로 망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교만으로 사는 자보다 더 강한 자가 와서 교만자를 쳐서 없이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13절: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 진노는 왜 하느냐? 한 번, 두 번, 세 번 경고를 했는데도 듣지 않을 때 진노를 하게 된다. 한 번 말하고서 진노를 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 경고를 한 후에 진노를 한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몽둥이가 들어간다. 그 다음에 성도가 신앙 면에서 계속적으로 교만하고 목이 곧아있으면 진노를 하신다. 계속 목이 곧고 굽힐 줄 모르면 진노를 한다.
영적 이스라엘이 전체적으로 세속화 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을 볼 수 있고, 성도가 비진리적으로 세상화 육적으로 돌아가 있으면 그 자가 어디를 가든지 계속 뒤를 따라가면서 속에 들어있는 세속화된 것이 없이 하기까지 진노를 하신다. 그리고 영적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이방세계를 진노의 심판을 하신다.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뭐가 없기까지 소멸해 달라? 소멸이 되면 다 없어지는 것인데 뭐가 없어지는 거냐? 속에 들어있는 죄악성을 말한다. 이것이 다 없어지기까지 뽑아내달라는 거다.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 야곱의 신앙심을 가진 자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 달라는 말인데, 성경을 보면 야곱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진노를 하셨는데,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야곱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야곱을 다스리는구나’ 라는 걸 알게 해 달라는 말이다. 또 한 뜻은 악한 자들이 야곱의 후손에게 피해를 줄 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진노를 함으로써 악한 자들이 생각하기를 ‘야곱의 하나님이 야곱의 후손을 보호하시는구나’ 하고 알게 해 달라는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잘못해서 채찍에 맞을 때 안 믿는 사람들은 이걸 보고 비웃고 비아냥거린다. 이 때 믿는 우리는 그 말에 반발하지 말고 ‘그래, 내가 잘못해서 매를 맞는 거다. 하나님은 계신다. 그러니 너도 나처럼 얻어맞기 전에 신앙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아라’ 라고 하라.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 성도를 위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눈으로 보게 해서 알게 하고, 소문을 듣게 해서 알게 하고, 얻어맞게 해서 알게 해 달라는 거다. 악한 자들이 지구 땅 어디에 가서 살아도, 별나라로 올라갈지라도 거기까지 따라가서 찾아서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 달라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독하냐, 안 지독하냐? 지독한 하나님이다. 계속 따라다니신다.
14절-15절: ‘저희로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이들은 다윗을 해치는 무리들이다. 영의 눈으로 보면 정로로 걸어가는 진리의 성도를 핍박하는 무리들을 말한다. 영적 이스라엘의 이룰구원을 훼방하는 사악한 자들을 말한다. 종교적으로 사악한 무리들을 말한다.
그러면 이들이 왜 저물 때 나타나서 개처럼 성을 두루 다니느냐?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의 교훈에 밝지 못하고 명확치 못하면 어둡고 흐려지기 마련이다. 교회의 인도자들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불타지고 썩어질 것을 자랑삼아 가르치면 성도들은 이것을 구하기 마련이고, 이렇게 되면 교회가 온통 이런 사상이 주인노릇을 하기 마련이다. 지금도 이런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악한 자들이 이런 자들을 잡아먹으려고 몰려다니는 거다.
본능을 따라 사는 개는 육욕을 채우는 동물이듯이 육적, 세상적, 신비적인 신앙정신을 가진 자들은 자기의 종교적인 만족을 이루기 위해 진리신앙 사상에 정립이 없는 성도들의 이성을 혼돈시키는 집회를 만들고, 또 이런 집회를 찾아다니느라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이런 자들을 개처럼 성을 두루 다닌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이들이 즐겨 먹는 식물은 진리생명, 신적인 도덕이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만족하고자 하는 정신이다. 이 만족을 이루기 위해 유리하며 돌아다니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만족이 없다. 그 만족을 채우고자 하지만 응답이 있을 리 없다. 사람은 영적 진리이치의 깨달음에서 만족이 있는 것인데 악령을 받은 자들은 이성을 잃고 유리하며 세상에서 자기의 만족을 찾으려 하지만 세상에는 이들이 참 만족을 얻을 것은 전혀 없다. 이런 자들과 같이 다니게 되면 자기도 이들의 정신에 전염이 돼버린다.
하나님 앞에 사악한 이들의 행동 활동을 말하는 것은 믿는 우리로 하여금 이들의 정신과 마음을 알고 자기 속에 이들의 정신 사상이 들어있음이 발견이 되면 말씀의 능력으로 씻어내고 말씀의 사람이 되라는 거다. 사람은 정신세계가 열려야 물질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 정신세계를 모르면 물질세계를 못 다스린다. 이러면 자기는 사기꾼에게 당하고 만다. 또한 자기가 자기에게 다 당하고 만다. 결국은 미련한 중에 죽게 된다. 이게 인간의 세계다. 인간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이런 걸 가르쳐 주고 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