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7] 정대화 (鄭大和) - 내조자로서의 한평생
1. 입교 동기 - 4
31 그래서 마음속으로 최원복 선생에 대한 존경심도 더욱 새로웠다. 또 기독교 문학 시간에 성경을 배우는데 김영운 교수의 태도가 신령하고 분위기가 엄숙했으며 나는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 모른다. 예수님의 3대 시험에 관한 강의였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김영운 교수도 아주 존경을 했었다. 32 나는 등교할 때 언덕 비탈을 올라 다니며 부산 시내를 내려다보았는데 보이는 것은 피난민촌이었다. 피난민 수용소에 따가운 여름 햇볕이 내리쬐이는데 엄마는 앓아누웠고, 아빠는 군대에 가고 없는데 아이들은 먹을 것을 달라고 울고 있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33 그런 가난한 광경을 보면서 만일 내가 저런 환경에 처한다면 저런 생활을 감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해 보았다. 그런데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환경이 온다 하더라도 감사하며 일생을 살 수 있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34 나는 교회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영혼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애를 썼다. 박재봉 목사가 시무하는 감리교회에도 가보곤 했지만 심금을 울릴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35 나는 교회에 갈 때면 성경과 찬송가를 보자기에 싸가지고 다녔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해 ‘네가 교인이냐?’ 하고 비웃을 것 같아 그랬던 것이다. 그만큼 신앙에 자신이 없었다.
36 그 무렵 마산에서 알게 된 최순실씨가 찾아왔다. 최순실씨는 연세대학교에 입학을 하였었는데 하루는 나에게 영어 공부를 같이 해보지 않겠냐며 권했다. 영어 선생님은 미국인이라고 했다.
37 그러자 나의 부모님은 미국인이라면 검둥이일 거라며 절대 반대를 하였다. 그래서 못 갔던 것인데 그때 갔었더라면 그 뒤 수정동에서 아버님을 만났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왜냐하면 그 최순실씨는 53년도 아버님이 수정동에 있을 때부터 통일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8 휴전이 되면서 학교가 다시 서울 신촌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우리 가족도 서울 관철동 집으로 올라왔는데 집은 우리가 피난 갈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39 나는 집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학교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래도 견딜 수 없어서 3학년 2학기 때 휴학(休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다. 40 나는 열일곱 살 때 늑막염을 앓다가 보름 만에 나은 적이 있고, 부산 피난 시절에도 재발이 되었었다. 세 번째로 서울에서 병을 앓은 것인데 서울대학병원에서 한 달을 입원해 있었는데도 확실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