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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최근에 제가 약 7년간 이 지역에서 함께 했던 초교파 기독교연합단체에서 탈퇴를 했습니다. 최근 한 2년간 계속 모임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여 그 때 그 때마다 본질과 원칙을 강조하며 원리원칙대로 하자고 했는데 그것이 마치 연합정신을 깨뜨리고 함께 하기 싫어하고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킨다라고 생각하는 많은 분들을 보면서 한 2년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목회자의 본질과 신앙의 원칙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그런 본질과 원칙을 빼버리고 그냥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목회자라는 의식과 신앙이라는 원칙을 버려야할 것인가? 이런 내면의 전쟁속에서 한 2년간 고민하고 있다가 올해 가을쯤 큰 사건을 맞이하면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탈퇴를 결심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제가 분란을 일으키고 분쟁을 일으킨 것처럼 보여져도 원리와 원칙,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이런 분쟁과 전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모임을 탈퇴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말씀에 근거로 한 것이 아닌 그냥 보편적인 상식으로 생각해왔던 것을 완전히 뒤집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 당대의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관계의 측면을 무시하고 정말 본질적인 신앙관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여주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항상 전쟁의 굴레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이든 육적인든 우리는 매일 매일 관점의 차이로 인해 한 쪽에서 보면 다른 한 쪽이 항상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이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다른 쪽을 보면서 완전히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매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쟁을 일으키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가운데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면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편에 서서 어떤 전쟁을 해야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참된 진리속에서 바른 전쟁을 치르고 영육이 살아나고 또한 영육을 살리는 참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되는 우리가 싸울 전쟁, 첫째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는 전쟁입니다.
누가복음 12장 49,50절입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땅에 성령의 역사를 부어주고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와 구원의 체험을 불로 표현한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불을 받기 위한 삶입니다. 구원의 불을 받고 성령체험의 불을 받고 결국에는 구원의 불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구원받은 자도 불을 경험하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도 불을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의 불을 받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는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자는 영원한 지옥형벌의 불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령을 받기 위한 싸움을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세례인 불 세례를 경험하기 위한 영적 전쟁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12절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엄동설한이 되면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이는 자리가 있습니다. 따뜻한 온돌방의 아랫목입니다. 냉랭한 인간관계 속에서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입니다. 교회도 뜨거워야 성도가 모입니다. 기도가 뜨겁고, 말씀이 뜨겁고, 찬송이 뜨겁고, 성도 간의 사랑이 뜨거운 불의 공동체가 될 때 사람이 모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9절에는 우리 하나님께서 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불을 붙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 3절에서 우리 성령님은 불길 같은 모습으로 임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은 모두 불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엠마오로 가는 길의 제자들은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2~34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우리 또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불세례없이 교회성장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찬송가를 부르면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라고 강력하게 불을 기대하는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이런 성령의 역사를 위한 사역, 참된 구원을 위한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 사역들을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들어가면서 제가 목사님들 모임에서 탈퇴한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했는데요... 정말 목회자의 본질, 교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은 성령체험이고 구원사역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많은 교회의 모임이 친교의 모임이 많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모임이라는거죠.. 그리고 또 모이면 정치적인 얘기를 나누고 서로의 이해관계로 자리싸움을 하는 정치모임이 많습니다. 기독교계뿐 아니라 한국에서 모여지는 많은 모임의 양상이 대채로 이 두 가지로 모여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 화성시에 있는 기독교계 단체들이 이렇게 되어 있어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복음을 위해서 전도를 위해서 사역하는 단체, 정말 목회자의 본질회복과 교회의 순수한 사명을 위해 사역하는 연합사역 단체를 정말 추천해보라고 한다면 ‘성시화운동본부’라는 것과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 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체가 각 도시마다 대도시뿐만 아니라 중소도시 시군까지 왠만한 곳은 다 있는데 유독 이 화성시에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 참 이상한 일입니다.
18세기의 영국사회는 암흑사회로서 그 당시 영국은 도덕적으로 엉망진창이 되고 황폐화되어 세 명이 걸어가면 두 명이 사생아라고 그럴 정도로 온 나라가 타락하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심히 어려울 때였습니다. 한집 건너 술집이었고 한 집 건너 극장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사무엘 웨슬레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조지아 주로 선교하기 위해 갔다가 실패하고 고향인 영국의 런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1738년 5월 24일 9시되기 15분 전 쯤, 그가 올드 스케잇이란 거리를 걷고 있을 때, 그 거리의 어느 교회에서 열리고 있는 작은 집회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소리를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거듭나는 체험이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다가 더욱 강력한 성령의 불을 받아 하나님은 성령의 불을 받아 변화를 받은 웨슬레에 의해서 부패해 가는 영국사회를 건졌습니다. 곧 웨슬레 한 사람이 성령의 불을 받아 일으킨 영적 운동이 나라를 살리고, 경제도 살리고, 정치도 살리고, 대학도 살리고, 교육도 살려서 20세기의 최고의 나라를 건설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불을 주시는 예수님의 군사로, 불전쟁을 해야합니다. 그 불전쟁은 바로 구원체험, 성령체험전쟁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먼저 불받고 성령체험하고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속에서 불을 전하며 구원을 전하는 전쟁을 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며 전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되는 우리가 싸울 전쟁, 둘째는 구별됨을 이루기 위한 전쟁입니다.
누가복음 12장 51절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이 일어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되어지고 연합되어지고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고 원수되었던 담과 벽이 사라지고 이제는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이 인종과 지역, 빈부와 성별 전혀 상관없이 이제는 하나가 된다라고 알고 있는데 이것 또 무슨 말씀입니까?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한 번 같이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13,14절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여기서 말씀하시는 화평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리스도안에서의 화평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든 벽이 있었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의 화평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서로 하나되어지고 연합되어진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주러왔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세상과는 구별되어지고 세상 사람으로부터 각종 박해와 고난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그런 세상의 영적인 악행, 육적인 악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움을 싸울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8장 53절입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주의 종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심 같이 주께서 세상 만민 가운데에서 그들을 구별하여 주의 기업으로 삼으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세상가운데 구별해내셔서 세상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른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고 그 신앙가치관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소중함으로 세상을 변화시켜나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어 걸고 로마카톨릭교회의 비리와 잘못된 신앙행위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로마카톨릭교회는 카톨릭 신부이면서 저명한 신학교수인 한 사람이 교회를 반박하고 진리처럼 받아들여졌던 교황의 지시를 무시하는 것이 교회를 파괴하는 행동을 받아드렸습니다. 전 세계의 하나의 교회조직체로 보여졌던 로마카톨릭교회내에서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으로 보여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틴 루터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에 말씀에 반하여 비기독교적인 신앙교리를 가르치고 비기독교적인 신앙행위를 하는 로마카톨릭교회가 교회를 파괴하는 조직으로 보여졌기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 주기철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근거로 보았을 때 그것은 분명 우상숭배였습니다. 주기철목사님께서는 아무리 교단에서 결정하였어도 교단보다 더 상위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거부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로 인해 교단을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분열한다며 목사님을 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제 조선총독부는 주기철목사님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며 신사참배에 동조하도록 핍박하였습니다. 그 당시 한국교회의 교단들과 식민지배정부는 주기철목사님을 혼란을 야기시키는 분열주의자로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와 민족을 위해 참다운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을 기대했던 주기철목사님의 입장에서는 한국교회 교단과 일제총독부가 혼란을 일으키는 주체였을 것입니다.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구별은 나와는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가치충돌이기에 결국 가치관의 다툼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51절에 우리 예수님께서는 분쟁하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탄 마귀의 영향속에서 지옥의 형벌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과 원수되었고 하나님앞에 죄인되었고 결국 어두움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러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고 결국은 예수그리스도의 가치관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과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세상가운데 살아가면 어쩔 수 없이 세상속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된 신앙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면 가치관이 다른 세상속의 사람들과는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분쟁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조용하게 지나가고 세상사람과 똑같이 살아가는 것을 오히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합니다. 세상과는 달라서 그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어 일어나는 분쟁은 우리는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별된 존재로 항상 믿음가운데 전쟁을 치르고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되는 우리가 싸울 전쟁 셋째는, 가족이나 이웃이나 친척이라도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 일로 해결하는 전쟁입니다.
누가복음 12장 53절입니다.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다보면 부자간에 모자간에 시댁과 며느리, 처갓집과 사위간에 모든 혈연관계, 혼인관계속에서 생기는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도 고주리에 들어와서는 아직 성도도 적고 교회자체적으로 어떤 경조사를 주관하는 경우가 없어서 그런 경험이 거의 없지만 제가 고주리에 들어오기 전에 부산 초량교회에서 교구담당 부목사로 약 5년간 사역을 할 때 많은 경조사를 주관하고 집례하였습니다. 결혼식, 장례식을 집례하는데 그 전에 일단 가족들끼리의 협의가 필요했습니다. 왜냐면 온 가족이 전부 교회에 나오시는 분이면 문제가 없는데 고인이나 결혼당사자의 신앙과 혼주,상주의 신앙이 다른 경우, 혹은 그렇게 최소한 함께 사는 분들은 신앙이 같은데 친척중에 영향력있는 분이 신앙이 다른 경우 정말 난감한 경우가 참 많이 있었습니다. 신앙으로 인해 참 많은 갈등이 가족들간에 일어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런 일에 대해 우리가 황당할 필요도 없는 것이 예수님께서도 친족들사이에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상황을 경험하였던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1절입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의 가족, 친척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나는 분명히 반듯하고 정직하고 올바른데 가족중에 누가 나를 미쳤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가슴찢어지고 애통한 지.. 남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그렇게 말할 때는 정말 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전에 어떤 집에서는 부모를 정신병자로 몰아 정신병원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 부모가 너무 억울해서 갖가지 방법으로 호소해서 그 정신병원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멀쩡한 가족을 미쳤다고 감옥같은 정신병원에 집어 넣어서 정신병 약을 먹여 죽이는 가정도 더러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것처럼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가족들이 미친 환자로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5절에도 보니 예수님을 형제들도 믿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3장 12,13절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정말 참 신앙을 가지려고 하다보면 가족들의 오해와 가족들의 미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정의 신앙이 참 좋은 집에서도 간혹 아들이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가겠다고 할 때 가족의 반대가 일어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하물며 신앙이 없는 집에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얼마나 큰 반대를 만나게 될까요? 그리고 오늘 본문의 가족들이 신앙으로 인해 분쟁하게 될 것이라는 것과 방금 읽었던 본문에서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만든다는 구절을 근거로 이단들은 자신의 신앙을 가족들이 반대하니 도망쳐 나와 믿는 자들끼리 공동체생활을 하자며 가족을 떠나 가출하도록 강요합니다.
하지만, 방금 읽은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어디 따로 도망나와서 살라고 어디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이런 미움을 받을 때에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하며 견디고 이겨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간증을 들었습니다. 한 여대생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신의 아버지와 원만한 관계에 있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도 그녀와 아버지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괴로움을 느끼며 그녀가 기도할 때, 주님은 그 괴로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문제의 본질이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그녀 안에 내주해 계시는 그리스도 사이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즉 사탄은 그녀 안에 내주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이기기 위하여 그녀의 아버지를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녀가 이런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였을 때 집안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버지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고 아버지와 충돌하게 될 것 같으면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진짜 적과 싸웠습니다. 사탄이 교회에 불화의 씨앗을 뿌릴 때, 교인들은 서로 싸우게 됩니다. 이 싸움은 그들의 진짜 적, 즉 사탄을 바로 분별하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적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싸우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상황에 관계없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가족들의 방해와 반대, 핍박을 경험할 때 그들과 육체적인 싸움, 언쟁을 통한 싸움을 하기보다 참된 사랑을 보여주며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시며 참된 희생으로 다가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절대 포기해서는 안되는 본질을 지켜며 믿음으로 이 전쟁을 싸워나갈 때 결국은 온 가족이 구원을 얻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가치관을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 화내지 말고 항상 수긍하고 어떤 일이든지 그냥 화합하며 하나됨을 깨뜨리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이 틀린 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예수님께서 분명 세상에 불을 던지러왔으며 예수님으로 인해 오히려 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여주셨으며 가족들마저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인해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본질을 위해서는 바른 길을 걸어갈 때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참 신앙을 위해 살아가다보면 핍박과 방해와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수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아갈 때 참된 신앙생활속에 이런 어려움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온전히 우리 예수님만 의지하며 참 신앙을 지키며 우리가 들어갈 천국을 기대하며 세상가운데 참 예수님의 사랑만을 보여주며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