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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19(토)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나에게는 나도 몰랐던 재능이 있다.
2015. 12. 18 아침 강릉경포대 앞바다의 전경입니다. 그런데 오리바위와 십리바위가 왜 아주 가깝게 느껴질까요?
코흘리던 어린시절 수영을 할 때는 무척이나 멀었었는데...
"나는 재능이 없어.
남들은 다 한두 가지 특별한
재능이 있는 데 나는 재능이 없어."
이렇게 말하면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니스트 새클턴 경은
최초 남극 탐험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지만 탐험대를 이끌고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와 필수품마저 떨어진
상황에서도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생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두고 역사 학자 캐롤라인
알렉산더는 다음과 같은 확신에 도달하였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상황에 따라 영웅적 자질을 발휘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숨어 있는 재능이 있다.
단지 그것이 빛을 보지 못했을 따름이다.
급박한 상황 또는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누구에게서든 숨겨진 능력이 발휘되게 마련이다.
자신이 재능이 빛을 못 보고 있음에 대하여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
언젠가 반드시 때가 온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조나라의 공손용은
재주가 한 가지라도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집에 식객으로 붙들어 두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재주를
내세우며 전국 각지에서 그를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청년이 찾아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누구보다도 고함을 잘 지르오.
그러니 여기 머무리게 해 주시오 !"
하지만 식객으로 머문 지 일 년이 지나도록
그가 고함지르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관리인은 할 일 없이 놀며 밥만 축내는
그 청년을 그만 내보내자고 공손용에게 권하였다.
이에 공손용이 말하였다.
"그냥 머무르도록 내버려 두게나.
언젠가는 그의 재주도 쓸 데가 있을 걸세."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뒤,
공손용은 연나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일이 생겨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날
큰 강이 가로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강의 반대편에 배가
한 척 있긴 했지만 사공은 보이지 않았다.
공손용의 무리들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함 잘 지르는 청년은
이때야말로 자신이 나설 차례라고 생각하고
강 저편을 향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여보게, 사공 ! 배 좀 빌려주시오 !"
청년이 단 한 번 고함을 쳤을 뿐인데
강 건너에서 바로 알아듣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공손용은 청년 덕에 다행히 강을 건너
중요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재능 없음을 탓하지 마라.
자신이 모르는 숨은 재능이 반드시 자신 안에 있다.
자신의 능력이 빛을 보지 못함에 원망치 마라.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
- 좋은 글 중에서 -
어니스트 새클턴 경 (Sir Ernest H. Shackleton)
위대한 남극탐험가 어니스트 새클턴은
1909.1.9 남극 탐험 사상, 당시 최고 기록이었던 남위 88도 23분에 도달하다.
1909년 1월 9일,섀클턴은 당시 남극 탐험 기록상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남단인 남위 88도 23분에 도달했다. 선배 탐험가 스콧의 기록을 갱신한 섀클턴은 그 자리에 알렉산드리아 여왕이 하사한 깃발을 꽂았다. 이렇게 인류 역사상 최남단을 밟았다는 표시를 남긴 섀클턴은 그곳을 ‘킹 에드워드 7세의 고원지대’라고 이름 지었다.
아문센과 스콧의 그늘에 가른 위대한 탐험가
이 곳은 남극점에서 155km 떨어진 장소다. 섀클턴이 여기에서 남극점을 향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것은 식량 부족 때문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장비와 식량만으로도 그곳까지 갔으니 그 자체로 대단한 기록이었다. 새클턴은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비록 남극점 정복은 실패했지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기존에 세웠던 사람들의 최극단 기록에서 남극은 580km나 초과했고, 북극은 120km를 초과했다. 이제 우리가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아멘.”
스콧의 대원으로 시작한 첫 남극 탐험에서 괴혈병으로 도중하차한 섀클턴. 이날의 원을 풀기라도 하듯, 두 번째 남극 도전에서 그는 대원을 이끌고 기록을 갱신했다. 그리고 그가 간절하게 기도한 대로 전 대원이 극한 상황에서 무사히 귀환했다. 당시에는 이렇게 전 대원이 무사 귀환한 예가 없었기에 섀클턴은 이 탐험으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으며, 국왕으로부터 ‘경’의 칭호를 받았다. 남극에서 비극적으로 운명한 섀클턴의 선배 로버트 팔콘 스콧(1890년). 최초의 남극점 정복은 노르웨이의 아문센 이 이루었다. 아쉽게도 섀클턴의 선배 스콧도 이 기록을 깨지 못하고 남극에서 비극적으로 운명한다. 그러자 섀클턴은 남극점 정복 대신 남극 대륙 횡단을 계획한다. 그는 27명의 대원과 함께 범선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세 번째 남극 탐험 장정을 떠난다. 인듀어런스호는 섀클턴을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탐험가, 지도자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비록 대륙 횡단은 하지 못했지만, 남극 빙벽에서 634일을 견디고 전 대원이 무사히 귀환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 번째 탐험을 ‘위대한 실패’, 혹은 ‘위대한 항해’라 부르면서 지금도 그의 정신을 추모한다. 아문센과 스콧의 그늘에 가려 있던 섀클턴. 그런데 왜 우리는 그를 위대한 탐험가로 추앙하는가?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이유가 확실하다. 그리고 섀클턴 마니아가 되고 만다.
인듀어런스
endurance는 '인내'라는 뜻이다. 작가 캐롤라인 알랙산더가 새클턴의 위대한 항해 내용을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독일. 프랑스, 스페인, 대만, 일본, 브라질어로 출간된 '인듀어런스' 각 나라별 冊들...
1914년. 15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대탐험시대가 종착역에 다다를 즈음, 영국의 극지탐험가 섀클턴은 그의 대원 27명과 함께 남극대륙 횡단에 도전한다. 하지만 그들은 남극대륙에는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다. 바다가 얼어붙는 바람에 배가 난파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배를 버리고 남극해를 떠다니는 부빙에 몸을 옮겨 실은 이들은 그때부터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역경을 만나게 된다.그러나 그들은 처참한 환경에 절대 굴하지 않고, 온 대원이 똘똘 뭉쳐 불굴의 의지와 투혼을 발휘한다. 그들은 펭귄을 잡아 허기를 달래고, 참혹한 추위에 발이 썩어들어 가면서도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 이들이 마지막 구조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일들은 인간의 생존 드라마 중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중 압권은 천신만고 끝에 대원들을 망망대해의 한 무인도에 안착시킨 탐험대장 섀클턴이 다섯 명의 대원을 데리고 구조를 요청하러 떠나는 장면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들에게 주어진 건 길이가 6m에 불과한 구명용 보트 한 척. 그것으로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거칠고 험하다는 1280km의 드레이크 해협을 통과하고, 도끼 한 자루와 로프에 몸을 맡긴 채 해발 3000m에 달하는 전인미답의 얼음산을 넘어 그들이 애초 출발했던 사우스 조지아 섬의 기지에 도착한다.그리고 조난당한 지 634일째 되는 날, 칠레 정부가 급파한 군함으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을 구조하는 데 성공한 섀클턴은 훗날 이렇게 고백한다.“길고도 험했던 여정의 마지막 단계인 얼음산을 넘을 때, 우리 일행은 분명 3명인데 난 4명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생각돼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그 힘들고 어려웠던 여행 내내 하느님이 우리와 동행하셨음을 난 믿는다.”
이 책에는 실화가 주는 감동 너머에 사진이 주는 감동이 있다. 죽음과의 사투 내내 사진기를 놓치 않고, 대원들의 면면을 카메라에 담았던 사진사 프랭크 헐리의 사진 덕분이다. 거의 텍스트 한 페이지에 사진 한컷 정도로 편집되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사진들은, 예술의 경지를 넘어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경외감으로 다가온다.
과거에 묻혀가던 탐험을 생생하게 되살려낸 작가,
캐롤라인 알렉산더(Caroline Alexander)
<뉴요커>(The New Yorker), <그란타>(Granta), <콘데 나스트 트래블러>(Conde Nast Traveler),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스미소니언>(Smithsonian), <아웃사이드>(Outside) 등에 글을 썼으며, 여러 권의 책을 내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1999년 4월 미국 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린 ‘인듀어런스: 섀클턴의 전설적인 탐험’ 전시회 큐레이터를 맡기도 했다. 현재 미국 뉴햄프셔의 한 농가에서 살고 있다.
공손용(公孫龍 BC 320년 ~ BC 250년)
기원전 3세기경 전국시대 조(趙)나라 철학자이다. 자는 자병(子秉)이다. 한단(邯鄲) 사람으로 명가(名家)의 대표인물이다. 언변에 능하며 평원군(平原君)의 식객이 되었다. 그의 주요한 저작은 《공손용자(公孫龍子)》가 있다. 서한(西漢) 시기에 모두 14편(篇)이 있었는데, 당대(唐代)에 이르러 3권으로 분책되었다. 북송(北宋) 때에 8편(篇)을 유실했고, 지금은 단지 6편(篇)만이 남아있다. 모두 1권으로 가장 중요한 두 문장은 《백마론(白馬論)》과 《견백론(堅白論)》이다. 그는 혜시(惠施)와 더불어 명가(名家)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계몽적 궤변(詭辯)으로써 유명한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 견백이동론(堅白異同論) 등에 보이는 논리는 사물의 외관과 본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단순한 궤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도(政治道)의 경고로서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어제의 이야기)
간밤에 강릉 물회집에서 소주를 마신 탓으로 처가집에 들어와선 그냥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런 탓으로 아침 일찍 기상하여 아이들 이모부와 함께 사천항으로 향했습니다.
아침 공기도 좋았지만 안목과 송정해안 그리고 솔밭의 풍경과 파란 바닷가의 전경은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차창을 통해 경포바닷가를 보면서 코흘리던 어린시절 나이론 빤스를 입고 오리바위를 헤엄쳐갔던 당시의 전경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때는 오리바위와 십리바위가 엄청 멀게 느껴졌었는데, 지금보니 너무도 가까워 보였습니다. 어떻든 경포대를 경유하여 불과 20여분만에 사천항에 금방 도착했습니다. 그렇지만 항구에는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와 또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어 서있는 몇명의 아낙 외에는 조용했습니다. 그녀들은 곧 들어올 양미리를 가득 잡은 만성의 배가 도착 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끝물인 도루묵만 팔고 있기에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지난밤 강릉물어횟집에서는 산오징어가 떨어져서 겨우 맛만 보았는데, 이곳 사천항 횟장 어항에는 산오징어가 소위 강릉말로 "개락"이었습니다. 처가집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큰 처남은 회사 출근준비로 바빴고 외숙모는 아침상을 차리겠다며 분부했습니다. 하여 우리는 외숙모와 조카 그리고 우리 마나님과 작은 이모를 반강제적으로 승용차에 탑승시켜 아침식사는 주문진의 유명한 음식점인 '파도식당'으로 결정하고 내달렸습니다.
해안도로를 통해 사천항과 영진항을 지나 30여분만에 주문진 항에 도착했습니다. 금요일 아침나절이라 비교적 한가했습니다. 오래전 인터넷을 통해 널리 알려진 말로만 듣던 주문진 항구 인근에 위치한 '파도식당'은 비록 허술해 보였으나, 역시 물곰지리국은 지금까지 먹어본 물곰중에 단연 최고였습니다.
통상 물곰국에는 김치를 넣지만 이 식당은 무우를 넣었고 특히 물곰의 내장까지 넣었기에 더욱 담백했습니다. 생선찜도 아주 훌륭했습니다. 동행한 이모와 외숙모 그리고 조카와 우리 마나님도 입이 함지박이 될 정도로 기뻐해서 우리의 선택은 탁월했다고 스스로 자평해 봅니다. 아침부터 안주가 좋은 탓으로 한잔 할 수 박에 없었습니다.
아침식사를 마치곤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이곳 강릉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이디오피아 커피점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경포대 벚꽃도로를 지나 대관령 IC 길 목 작은 언덕에 위치한 커피점인데, 늘 강릉에 오면 한번씩 들리곤 했던 정감하는 커피집입니다. 쥔장 심사장과 그동안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그가 주방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는 모습이 띄어 통성명도 나누었습니다. 이것 저것 족보를 따지니깐 초등학교를 같이 나온 저의 동기였습니다.
커피숖 내부에 부착된 아프리카 커피밭의 전경 등을 비롯하여 커피를 재배하고 가공하는 사진들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커피에 대한 기본상식과 참숯으로 볶는 커피 제조 과정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안내문이 있어서 커피에 대한 상식을 배울 수 있었지요. 이곳 심사장은 우리나라 최초 정식 바리스타 제1호라는 자기 소개서를 테이블에 게시해 놓아서 더욱 신뢰감도 생겼지요.
커피숖 내부에 부착된 많은 사진중에 특히 아프리카 여인네들이 커피를 채취하는 모습이 눈낄을 끌어 여기에 담아 보았습니다.
커피점을 나온 후, 강릉 갈바리아 병원을 다시 찾았습니다. 투병중인 큰 이모님의 병문안을 한 후, 서울로 귀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위독하시다고는 했으나 고비는 넘긴 것 같아 안도했습니다. 오후 3시 30분, 강릉을 출발하여 귀경길에 올랐습니다. 강릉에서 문막까지는 비교적 원할하게 영동 고속도로를 잘 달렸으나, 서울에 가까이 다다르면서 금요일 오후 퇴근시간이 임박한 탓인지 엄청 차량이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덕평 휴게소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또 겨울모자를 하나 구입하곤 서울로 向했는데,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그때부터 무려 2시간 가까이 소요되어 야심한 밤 9시쯤에야 집에 귀가하였습니다. 흑~흑~흑~
비록 먼길이었으나 임종을 앞두고 계신 아이들의 큰 이모님을 뵙고 온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오늘의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