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삼월의 마지막 주
드디어 벚꽃이 활짝 피었네요.
언제 피려나 조바심내어 기다렸던 벚꽃들
꽃들은 제 때에 피는데
사람들의 조바심이
내년보다 빨리 핀다
그래서 많은 지자체들이 벚꽃없는
벚꽃축제들이 되었다고 울상이었는데
엄마 여기 있다 울지마라
하시며 달래주는 엄마처럼
내가 여기 있다 울지마라
봄꽃들이 우리를 반겨주네요.
하루도 태양이 뜨지 않는 날이
없었던 것처럼
한 해도
봄이 오지 않는 해가 없었던 것처럼
하늘은 늘
우리에게 신실하고
늘 성실한데
우리의 마음이 변덕스럽네요.
오늘도
그 아름다운 하늘이 내려주시는
귀한 사랑
맘껏 누리시는 축복의 날 되세요.
🍀 소와 사자의 사랑이야기
늘 새로운 삶을 동경하던 암소 한마리가 어느날 멋진 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싸움도 잘하고 밀림의 왕처럼 빛나 보였습니다.
삶을 좀 더 낭만적으로 멋지게 살고 싶었던 사자가
다가오는 풍만한 소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녀의 미소, 매력적인 몸매
그의 이상형이 분명했습니다.
첫눈에 반한 그들은 너무나 사랑해
결혼에 꼴인하게 되었습니다.
소는 사자를 위해 날마다 제일 싱싱하고 맛있는 풀을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풀이 싫었지만 사랑하는 소를 위해 참고 먹었습니다.
사자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특식을 준비해서
요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신랑 사자는 아내를 위하여
피가 철철 흐르는 싱싱한 살코기를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그것을 보던 아내를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나에게 먹으라고 할 수 있지...
도대체 나를 생각하기는 해 본 거야!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 같으니라구...
하지만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는 법.. 결국 소와 사자는 크게 다투고 끝내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난 당신에게 최선을 다했어"
소는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는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았기에
그들은 함께 했을 때에도 혼자 사는 무인도였습니다.
소는 소의 세상,
사자는 사자의 세상일 뿐이었습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았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감싸주고, 안아주었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소와 사자의 이야기
혹 우리 이야기는 아닌가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것이 성경에 나와있는 황금률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대하셨을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하나되어 보세요.
이것이 백금율입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못 보는 최선, 그 최선은 시간이 갈수록 최악을 낳고 맙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바쁘게 움직이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나의 의를 위한 최선이고 상대방을 보지 못하는 최악의 최선일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좋으나 잘못하면 그 열심 때문에 오히려 지치고 힘들고 실망하고 더 피곤한 인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물속에 빠진 사람이 무조건 열심히 손과 발을 움직이며 온몸을 움직이면 물위에 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라앉고 힘은 힘대로 들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영하는 법을 알아서 몸의 힘을 빼고 손발을 움직일 때에 물위에서 멋지게 수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에 빠져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가장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외롭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데 상대방은 전혀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가족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이해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나요?
나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사나요 아님 나의 의를 위해 내가 보기 좋은 삶을 살고 있나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열심히 교회다니고 열심히 봉사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분주하게 사는데… 실상은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지는 않는지… 묵상해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 없고, 봉사를 많이 한다거나 직분이 있다고 해서..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다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지식이나 시간,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공부나 연구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삶 속에 나타나는 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도 무조건 열심히 살아간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전 없는 분주함은 곧 지치게 만들고, 가치 없는 열심은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소와 사자처럼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나 혼자만의 최선은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헛된 것으로 끝나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수영 하는 방법을 모른채 열심히 첨벙대는 것은 중노동이요 짐이요 스트레스이지만, 수영 방법을 알고 열심히 하는 것은 운동이요 취미생활이요 스포츠이며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며 목표에 도달할수 있습니다.
생의 안락함과 풍요로움, 그리고 명예를 누리기 위해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내 삶의 목적과 사명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땀 흘리며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은 적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왜 여전히 나는 나인가요? 내 속에는 해갈되지 않는 갈증들과 천근 만근 되는 답답함이 짓누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안 할 수는 없고, 계속 하자니 그렇고, 신앙생활이 본래 이렇게 힘들고 맥빠지고 답답한 것인가요? "
혹시 이렇게 신앙생활 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누구나 한번쯤은 품었던 신앙의 딜레마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면 결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답답하지도, 맥빠지지도 않습니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열심히 살아가되 목적 없는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주신다면 또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지표가 되고 기준이 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가정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시고 주체이시고 중심이시라는 고백이 우리 가운데서 늘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고 귀하고 아름답고 감동이 넘치는 곳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https://youtu.be/G8nNGk6LHaM?si=dgBVKZeVrSBLquIV
https://youtu.be/XKkJI7PTXyY
https://youtu.be/fz4s61S-lRg?si=rRAv2RGpBh2fC2vy
https://youtu.be/LTY9ZLsiuA0?si=eOTxWjDfSsbS6fUn
https://youtu.be/oPUTlFnMH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