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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지역 작전
제 1절 작전 개요
1. 개 요
동부지역 작전은 국군이 철수작전을 통해 낙동강 연안에 방어선을 형성한 '50. 8. 1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반격으로 전환하기 직전인 9월 14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의 동부전선인 영덕, 포항, 기계, 안강 등에서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과 육국본부 직할 제3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5사단과 제12사단, 독립유격대대인 제766부대와 최후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전개한 방어작전이다.
개전초기 주도권을 잡은 북한군은 7월 말에는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잇는 선의 북쪽까지 진출했다. 적은 최종 목표인 부산 점령을 위해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계획해서 아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
북한군 제2군단은 '50. 8. 5일부터 개시된 8월 공세에서 주공방향을 대구로 지향하고 김천북방에서 영덕까지 공격을 담당해 대구와 영천, 포항 점령을 시도하였다.
특히 동부지역에서 적 제2군단은 예하 제12사단과 제5사단을 청송-현동-죽장-기계 축선 및 영덕-포항을 연하는 동해안 축선에 각각 투입해 경주-울산-부산 축선으로 진격할 발판을 마련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와 더불어 보현산 일대에 전개한 적 제766부대는 그들의 침투기도를 은폐하기 위해 의성-구산-자천 축선에서 양동작전을 실시하였다.
한편 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육본직할 제3사단으로 낙동강 남안의 상아동-구수동-진보-영덕을 연결하는 주저항선을 형성하려 했다. 그러나 철수작전의 실패로 낙동강 남안의 방어선 대신 양호한 남북으로 이어진 안동-의성 축선과 전략적 요충지인 포항 방어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길안과 청송 일대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한 수도사단이 부대간격으로 침투한 적 12사단의 포위공격에 의성으로 철수함에 따라 의성-영덕간 방어정면 중 주저항선이 형성된 지역은 의성 북방 제8사단의 약 10km와 영덕 및 강구 일대 제3사단의 약 10km에 불과 하였다.
적 제12사단은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침투하여 8월 9일 경주 방어의 요충지인 기계를 점령한데 이어 11일에는 포항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강구부근의 제3사단이 고립되고 경주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국군 제1군단은 미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와 함께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안강으로 급파해 적의 진출을 저지 하였다. 또한 8월 14일 수도사단 주력을 현동-죽장-기계 축선에 투입해 포항일대에 전개한 적을 북쪽에서 협공함으로써 8월 18일 기계와 포항을 탈환한다. 그리고 8월 22일 제1군단은 보현산-침곡산-도음산-93고지를 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고 반격준비에 착수한다.
한편 기계. 포항 전투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적 제12사단은 비학산에서 제766부대를 흡수해 전투력을 보강하였다. 그리고 8월 24일 야간 공격으로 수도사단 주저항선을 공격해 8월 27일 기계를 재점령하였다. 이날을 전후하여 총공세를 위한 발판을 마련한 적 제5사단과 제12사단은 9월 2일 공격을 재개하여 5일에는 안강과 포항을 점령한 후 일부 병력을 경주 북서쪽 4~5km지점까지 접근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9월 5일 무릉산-곤제봉-형산강 선에 최후의 방어선을 형성해 11일간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물리치고 공세이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의 기상이 극심한 무더위가 9월 중순까지 계속되고 강우량이 8월에는 극심한 가뭄이 9월 초순에 110.4밀리 내려 형산가이 범람할 정도였다.
2. 북한군과 국군 상황
가. 북한군 상황
(1) 북한군 전투 편성
동부방면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제5사단과 제12사단, 그리고 독립 유격대인 제766부대(3개 대대)가 투입되었다. 주요 지휘관은 군단장이 김무정('50. 9. 10이후 최인), 제5사단장이 김창덕 소장, 제12사단장이 최춘국('50. 8월 말 최인), 제766부대장이 오진우 총좌였다
(2)공격준비태세
북한군은 국군 및 유엔군의 방어선을 종심 깊이 침투해 남동해안으로 시속하게 진출한 후 포항과 울산, 그리고 부산을 점령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공세에 앞서 기존의 정면 견제 후 일부 또는 주력으로 배후를 공격한다는 전법을 포기하고 모든 접근로로 공격을 개시해 성공하면 돌파구를 확장해 전과를 확대하는 전술을 택했다.
(3) 전투력 수준
북한군은 계속 남진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어 제5사단은 병력은 50%수준이고 포병화력도 122밀리 곡사포 4문, 76밀리 포 12문, 45밀리 대전차 포 12문, 120밀리 박격포 12문으로 50%이하로 화력운용에 문제점이 있었다.
같은 시기에 적 12사단은 막대한 인원손실에도 불구하고 북한지역과 남한지역에서 의용군을 지원받아 10,000명 선을 유지하였고 화력은 122밀리 곡사포 20문, 76밀리가 22문, 45밀리 대전차포가 44문, 각종 박격포가 100여문, 전차 및 장갑차가 각각 10여대씩 보유하였다.
(4) 인접부대 상황
적 제2군단은 우측에 제5사단, 좌측에 제12사단 순으로 배치하고 제12사단 우측에 안동-의성-영천 방면으로 공격하는 제8사단이 있었다.
나. 국군 상황
(1) 국군의 일반현황
북한군이 낙동강 외곾선까지 진출하자, 육군본부는 제1군단 및 제2군단에 낙동강-반변천 연변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라 명령한다. 이때 육본 직할의 제3사단은 오십천 연변 영덕~강구지구의 방어임무를 계속 수행토록 하였다.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은 안동에서 낙동강을 도하하여 길안-청송 방면으로 이동해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미동-청송간 24km를, 제3사단이 영덕 방면의 16km를 형성하였다. 그러다 다시 방어정면을 축소하여 왜관-포남동-수암산-유학산-보현산을 연결하는 수정된 방어선으로 이동토록 한다.
한편 이무렵 동부지역의 북한군 제2군단은 포항을 목표로한 제5사단이 영덕을 점령후에 장사동의 국군 제3사단을 압박하고 기계에 출현한 적 제12사단의 일부 병력은 포항에 침입하였다. 유격 독립 연대인 적 제766부대도 영덕에서 안강 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육본은 적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포항지구사령부를 8월 10일부로 편성해 안강지구에 투입하고, 수도사단도 급파하였다. 포항이 피탈되고 영일비행장과 경주가 위협을 받는 등 동부지역이 위급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브래들리. 잭슨, 처치 특수임무부대를 차례로 편성해 포항과 경주지역에서 적의 남침을 저지토록 했다
(2) 전투준비태세와 전투력 수준
동부지역의 국군 제1군단은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는 부대기동이 제한되고 보급로가 취약하여 북한군이 청송-현동-죽장-기계 축선으로는 사단 단위 전투부대를 투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안동-의성 축선과 영일비행장이 있는 포항을 방어하는데 주력하였다.
또한 개전 이전부터 공비들이 준동한 보현산과 구암산 일대에 적 제766부대가 출현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독립 유격 제1대대와 제1201 건설공병단을 투입해 소탕작전에 착수하였다.
병력 수준은 병력이 보충되면서 수도사단이 5,780명, 제3사단이 6,470명 수준으로 올라갔다.
(3) 인접부대 상황
제3사단은 영덕-포항 축선을, 수도사단은 청송-기계-안강 축선을 중심으로 산악지대 방어를 담당하였다.
군단 예하 제8사단이 안동-의성- 영천 축선의 의성과 보현산, 영천 일대에서 북한군 제8사단 및 제15사단과 대치하였다.
동부지역 작전('50.8.1-9.14)
안동 적12사 기갑연 적5사
의성 영덕
국22연
국23연
강구
도평동 적12사(8.7-8)
국18연(8.14)
감은동 국기갑연
국10-1대, 국10연
구산동 국21연
모계동 국16연 독석동
월포동 국3사
(8.17해상철수)
벌전 국8사 적766대대 8=수도 청하 국22연
동부지역 작전('50.8.1-9.14)
적15-48연 적12-?연 적12사
국16-1대 국18연 비학산 적12-?연
16연=18연 국17연 적5사
국16-1대 국1-2대 적1개연 적1개연 적1개연
운주산 국18연 기계 국26연 국23연
8사=수도사 국17연 국1연 국22연 포항
적12사 적5-10연 수도=국3사 국26연 국22연=국23연
국3사(8.17)
국3연 안강 수도사 국3사(8.19)
적5-10연
국3연(9.13)
국1연 국18연(9.7)
기갑연 국3연(9.7) 국17연(9.7)
부산으로(9.15)
국26연(9.7), 포항(9.9) 경주 국26연, 수도사(9.5이후) 국18연
제2절 기계-안강 전투
1. 전투 개요
기계-안강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허고 있던 1950. 8. 9부터 9. 14까지 기계와 안강, 포항 및 경주 북부에서 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766유격 연대로 증강된 제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전투다.
국군 제1군단은 적의 주력이 안동-의성-영천 접근로에 투입될 것으로 판단하여 제8사단을 의성일대에, 수도사단을 길안 일대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수도사단이 8월 5일부터 개시된 적의 공격으로 와해되어 제1연대는 의성일대로, 퇴로가 차단된 제18연대와 독립 기갑연대는 구수동을 경유 의성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따라 청송-기계 축선은 무방비상태가 되고, 적 제12사단이 이 공백지대를 통해 저항없이 남하하여 8월 9일 기계를 점령한 후 포항으로 진출했다. 위기를 느낀 육본은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급편하여 제25연대와 함께 기계로 투입하고 제17연대와 민부대, 그리고 신편부대인 제26연대를 배속하였다. 아울러 의성에 집결한 수도사단(-)을 안강으로 이동 시키고 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를 현동으로 진출시켜 기계일대의 적을 남북 양쪽에서 포위하였다.
8월 13일 제1군단의 명령에 따라 수도사단은 제1연대를 안강지구로 이동시키고 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로 구산동에서 동남진 하였다. 8월 16일 제17연대가 기계 남쪽 고지를 탈환 후 기계로 전진하고 기계 북쪽에서는 용기동 일대의 고지를 점령하여 측방을 위협하자 적은 비학산 일대로 퇴각함으로써 18일 오후에 기계를 탈환한다.
하지만 적은 비학산 일대에서 제766부대를 흡수하여 재편성한 후에 새벽 무렵에 공격을 개시하여 기계를 재점령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의해 제8군사령부는 잭슨특수임무대를 편성하고, 수도사단과 기계를 점령하기 위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수도사단이 기계 남쪽 고지에 제18, 제17, 제1연대 순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는 가운데 적의 9월 2일 공세로 곤제봉-호명리 일대로 철수하였은나 다시 무릉산-곤제봉선이 무너진다.
사단은 즉시 기갑연대 3대대와 제17연대로 역습을 전개하게 되고 이로부터 반격작전이 진행되는 때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곤제봉과 무릉산 일대에서, 형산강 북쪽으로 진출하려는 아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적 제12사단은 우군의 공군 폭격이 폭우로 중단된 틈을 이용하여 형산강을 도하 동쪽으로 운제산까지 진출하여 영일비행장을 위협하게 된다. 이에 제8군 사령관 워커중장의 명령에 따라 제18연대와 제26연대가 운제봉을 공격하게 되고 제18연대가 탈환하며 제17연대가 9월 12일 곤제봉을 탈환함으로써 공세로 전환하고 적은 이후에 후퇴하게 된다.
2. 북한군과 국군 상황
(가) 북한군 상황
1950. 8. 3일 청송을 출발한 적 제12사단은 도평동을 경유하여 입암리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 무렵 적 제766부대는 향로봉과 비학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타고 남하하여 기계와 안강부근에 출현하고 있었다.
적 제12사단과 제766유격 부대는 동쪽위 적 제5사단과 호응하여 안강,포항 등을 점령 후에 부산을 점령하려 했으며 그들의 전투력은 그동안의 피해를 제 때에 극복하지 못하고 50%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요 지휘관은 군단장이 김무정('50. 9. 10이후 최인), 제12사단장이 최춘국('50. 8월 말 최인), 제766부대장이 오진우 총좌였다
같은 시기에 적 12사단은 막대한 인원손실에도 불구하고 북한지역과 남한지역에서 의용군을 지원받아 10,000명 선을 유지하였고 화력은 122밀리 곡사포 20문, 76밀리가 22문, 45밀리 대전차포가 44문, 각종 박격포가 100여문, 전차 및 장갑차가 각각 10여대씩 보유하였다.
(나) 국군 상황
청송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하고 있던 국군 제18연대와 기갑연대는 '50. 8. 5일 의성으로 철수 중에 있었고, 동해안의 제3사단은 강구에서 적 제5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에 육본은 즉각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고 수도사단을 이 지역으로 기동시켜 적 제12사단의 남진과 포항지구 침투 적을 격퇴하도록 한다.
한편 수도사단의 병력은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포함하여 약10,000명 수준이고 105밀리 유탄포 10문, 81밀리 박격포 64문, 60밀리 박격포 92문, 3.5인치 로켓포 105문을 보유하였다.
수도사단의 주요지휘관은 사단장 백인엽(9.2일부터 송요찬), 제1연대장 한신 중령, 기갑연대장 백남권 대령, 제17연대장 김희준 대령, 제25연대장 유해준 중령(8.11이후 이기건 대령), 제26연대장 이백우 중령(9.2이후 이치업 대령), 해군육전대장 강기천 소령이었다.
3. 전투 경과
가. 기계방어전(8.9~12일)
(1) 길안~청송 방어전과 구수동 철수작전
8월 1일 안동을 점령한 적 제12사단은 다음날 야간에 안동 동쪽 송천동에서 반변천을 도하하였다. 일부 병력을 산악지대로 산개시켜 수도사단의 관심을 산악지대로 유인하는 양동 작전을 실시하면서 청송-현동-기계 축선으로 남하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계책을 수립했다.
따라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있는 제766유격부대와 함께 동서 양쪽에서 포위하려 했으며 당시 제766부대는 진보 및 청송 일대는 물론 일부는 구산동과 구암산, 보현산 등지에서 준동하였다.
한편 육본은 영양-청송 축선에서 준동하는 적 제766부대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영동에서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있던 독립 기갑연대를 제3사단에 배속하여 진보를 진출시켰다. 7월 26일 기갑연대장은 이 지구에 배치된 강원경찰 제5대대장 김인호총경으로부터 적의 동정을 확인 후에 진보-영덕-강구간 도로의 소통작전을 계획했다.
기갑연대는 전투경찰대를 편성, 8월 1일부터 4차례에 걸쳐 도로 소통을 개시했으나 실패하고 반변천과 서시천 연변의 261-월전동-273고지에 방어선을 형성, 적 제766부대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진보 정면에 위치한 적이 8월 2일 비봉산 동쪽으로 우회를 시도하자 이에 연대장은 적 제766부대가 청송을 포위하려는 시도로 판단하고 송강리 375-비봉산(670)-666고지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지만 산악지대로써 협조된 방어선이 어려워 그 간격으로 적이 침투하여 기습함으로써 8월 5일 방어선이 무너지자 청송 북방 방광산(519m)일대에서 병력을 수습하던중에 구수동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에 기갑연대는 경찰대대와 구수동 송토산 마을로 철수해 합류(제1장갑대대, 제2기병대대,제3도보대대)하게 된다.
한편 수도사단은 제1군단의 명령으로 8월 2일 길안으로 진출해 좌전방 제1연대는 11번도로 이천천 추목리에서 금소리 고곡교 새터가지, 우전방 제18연대는 오대리 전방 390고지에서 와룡산-대곡리 426고지 선을 점령하고 사단은 길안초등학교에 전술지휘소를 편성했다.
이어서 수도사단은 기갑연대를 배속받고 이어 호림부대를 길안 북쪽 1km지점에 배치하여 길안을 경계토록 하였다. 그러나 중앙에 대한 방어력이 미흡하였는바 8월 5일 수미상의 적이 제1연대 후방과 측방으로 침투 공격함으로써 사단 좌측방이 무너지고 제1연대는 신계리 성황고개에서 병력을 수습하였다. 이어서 사단전술지휘소가 있는 길안이 공격으로 와해되어 사단은 914번도로를 따라 의성 단촌 우측방 윤암리로 철수해 모든 연대와 통신이 두절된다.
한편 우익의 제18연대는 구수동에 있는 연대지휘소를 기습한 적을 격퇴하고 사단과의 연락유지 및 적정 파악을 위해 연대 수색대를 양곡재로 급파하였으나 적이 이미 양곡재와 구수동 동쪽의 가산재마저 점령하여 제18연대와 기갑연대는 퇴로가 차단 되었다.
※양곡재의 비명소리, 그리고 불타는 차량들!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구수동에 포위된 2개 연대의 퇴로를 타개하기 위해 제1연대를 성황고개에서 투입토록 했으나 이미 적이 진출하고 있어 기동이 불가했다. 따라서 양개 연대는 양곡재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사단 명에 따라 각자 철수를 개시, 모든 중장비와 탄약, 보급품을 파괴하거나 소각한 후 야간에 구수동과 송토산 마을에서 철수를 개시 계명산(537m)-고란리-송제-구산동(현서면)으로 철수하여 8월 6일 야간에 의성에 도착한다. 이로써 청송-기계축선에는 국군 병력이 거의 배치되지 않았다.
수도사단은 제1연대를 성황고개-460고지-만음동을 연하는 선에서 적의 측방공격을 대비히면서 제18연대도 의성으로 보내 기갑연대와 부대정비를 하게 되며 이때 기갑연대는 보병연대로 개편되고 , 8월 9일 군단명령으로 수도사단에서 배속이 해제되어 구산동으로 이동하였다.
국군 제1군단은 8월 12일 육본 계획에 따라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해 수도사단은 제8사단의 엄호하에 사단 주력은 안강 지구로, 제18연대는 구산동으로 각각 이동하여 포항지구전투사령부 예하 부대와 기계. 안강 일대에서 적 제12사단을 역포위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었다.
(2) 기계피탈과 포항지구전투사령부의 편성
북한군은 7월 중순 보현산과 구암산 일대로 침투한 제766부대의 정찰활동으로 청송-기계 축선이 무방비 상태임을 파악하여 적 제12사단이 아무런 저항없이 기계축선으로 남진하고, 제766유격부대는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의성-구산동-자천 축서에서 양공작전을 단행했다.
8월 5일 청송-현동 축선으로 남하를 개시한 적 12사단은 예하의 1개 연대는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청송과 입암을 거쳐 8월 7일 오후 도평동에 도착해 제766부대와 합세한 후 남진을 계속해 다음날 죽장을 점령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그때서야 알게 된 국군과 미 제8군사령부는 적의 돌파구 형성을 저지 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위기를 직감한 육본은 8월 8일 대구에서 새로 편성된 제25연대를 제3사단에 배속해 급파하였다.
8월 9일 기계북쪽까지 남하한 적은 부근에 배치된 아군을 격파하고 진출을 잠시 중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선발대로 도착한 제25-1대대가 노당리 445고지에 능선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해군 육전대 포항지구대 약 300명이 기계 북쪽에서 적과 지연전을 전개하고 후퇴해 안강 북쪽 5km 지점의 지금의 강동면 다산동 145고지 일대를 점령, 이곳에 도착한 제25연대와 협조하여 포항으로 통하는 제31번도로를 차단하고 다음날 포항지구전투사령부에 편성되었다.
육본은 제25연대의 급파에 이어 8월 9일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해 기계.포항지구의 방어임무를 부여하였다. 포항지구전투사령부는 제17, 제25, 제26연대와 육본직할의 독립 제1유격대대와 제2유격대대, 그리고 해군육전대 포항지구대, 및 제18야전포병대대 C포대로 편성했다.
(3) 제17연대의 반격과 445고지 탈환전
제17연대의 공격상황('50.8.11)
용산
적12-1개연 적1개대대
기계
달성동
적1개대대
학전동 적1개대대 칠성동 145 277
적1개대대 적1개대대 적1개대대 적1개대대
221
노당동
국17-1대 110 256
적1개중대
도덕산 553 적1개중대 공격선 남산동
국17-2대대
제산
자옥산 국26연(-) 165 214
국1-1대 적1개대대
옥산동 공격선 안강 129
국17-3대대 국1연 국17-1대, 국17-3대 형산강 259
포항사, 국17연 형산
8월 7일 미 제8군의 예비로 마산 전선으로 행군하던 중 수도사단에 배속된 제17연대는 8월 9일 구산동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기계지역의 상황 긴박으로 8월 10일을 기해 포항지구전투사령부로 배속시켜 열차를 이용하여 8월 11일 아침 안강에 도착한 제17연대장은 해군 육전대와 협조하여 우선적으로 양동일대의 적을 격퇴하고 이어서 31번도로를 감제하는 145고지와 236고지를 탈환하였다. 이어서 제3대대가 터널고지로 진입하여 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적 1개 대대를 격멸하고 236고지로 복귀했다.
한편 아군 제17연대의 신속한 전개로 31번도로가 차단되고, 아군 증가 이전에 적 제5사단과 연개하여 남하하려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아울러 적은 의성과 구산동 일대에 위치한 수도사단이 자신들의 병참선을 차단할 수 있다는불안감에 쌓여 먼저 기계를 확보하려 노당동의 445고지 일대 탈취에 주력하였다.
"노당재의 비밀"
8월 12일 적은 445고지일대의 제25연대를 공격하였고 치열한 백병전까지 수행하면서 연대는 밀려나게 된다. 이에 제17연대가 8월 13일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45고지마저 제3대대가 적의 역습으로 피탈되고 안강일대로 집결하여 12일 열차편으로 의성에서 경주로 진출, 행군으로 안강에 진출한 제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이에 제1군단은 수도사단에 제17연대를 배속시켜 수도사단이 안강.기계지구작전을 관장하도록 했다.
안강에서 부대정비를 완료한 제3대대는 어래산을 공격해 탈환하고 제26연대에 인계후 안강에 집결했다.
나. 기계탈환전(8. 13~18일)
(1) 역포위 작전과 제18연대의 남진
제18연대 및 기갑연대의 고격상황('50.8.15)
죽장 국18연, 국기갑연, 국18-1대
입암리 대곡산
봉화봉 국18-1대 516 국18-3대
공격선
국18-2대 비학산으로 철수
정자동 677 적1개대대
기갑연 공격선 422 340 대곡동
한티재 350 국18연-2중 적1개대대
적12사 1개연 적 1개중대
안심동
구지동 253 적1개대대
288 적1개대대(비학산으로 철수)
운주산 적12사
적 제12사단의 도평동 출현을 보고받은 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즉시 독립 기갑연대를 구산동에 투입, 적과의 접촉을 유지하도록 조치하였다. 적은 8월 8일 죽장으로 남하해 기계로 진출하고있었다.
육본은 이런 상황에서 제1.2군단의 작전지역과 부대를 일부 조정해서 제2군단이 화산 동쪽까지 제8사단으로 통제하고 동쪽의 제3사단을 제1군단에 배속하였다. 하지만 잘못하면 경주로의 적의 진출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다는 판단아래 역포위 작전을 구상하여 의성의 수도사단을 안강으로 이동시키고, 제17연대를 수도사단장이 통합 지휘토록 하여 적의 남하를 저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수도사단 예하의 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를 구산동-현동에 전개시켜 적 제12사단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면서 북에서 남으로 진격토록 하여 기계지구의 적을 포위 공격하는 역포위작전을 계획하였다.
이 역포위작전의 승패는 수도사단 2개 연대의 배후에 대한 적의 위협을 제거하는데 있는바 군단은 제8사단으로 하여금 보현산 지구 구산동-도평동 선에 임시방어선을 편성하여 엄호 지원토록 하였다.
군단의 명령으로 안강에 도착한 제1연대는 8월13일 제17연대 제3대대와 진지를 교대한 후 양동과 유금동 제산에 이른 고지군을 점령하였다. 반면에 적 제12사단은 8월 13일을 전후에 도음산(383m)-양동-227고지 방향에 주공을 , 기계-445고지-무릉산 방향으로 조공을 투입해 2개 접근로에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8월 14일부터 북에서의 포위공격이 시작되어 양 연대는 거의 교전이 없이 31번도로를 따라 진출하여 20km를 남진, 죽장은 물론 봉화봉과 538고지도 탈환하여 기계 및 운주산 방향으로 남진할 공격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에 죽장에 있던 적 제12사단 예하 2개 대대와 후방지원부대는 급히 비학산(762m)으로 철수하였다.
단기간내에 기계를 탈환하라는 군단의 명령에 제18연대가 죽장-기계방향으로 공격을 8월 15일 감행하자 적 제12사단은 남쪽에서는 제1연대와 제17연대, 북쪽에서는 제18연대와 기갑연대의 공격으로 보급로가 차단되고 배후로부터 위협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2) 253고지- 288고지 전투와 기계 탈환
제18연대의 기계탈환 상황('50.8.18)
구지동 253
288 국18-1대 공격선 비학산으로 철수
인비동 지가동 170
기갑연 238 적1개대대
봉계동 기계
문성동 37 적1개대대 달성동
송계동
운주산 국17-3대
190 국17-1대
388
445 국17-2대 노당리
지동-정자동-침곡리 516고지선에서 공격을 개시한 제18연대는 우익의 제1대대가 감곡 677고지- 기북 용기리 340고지로 진격중 340고지일대에서 격전끝에 점령하였다.
연대 우전방인 제2대대는 31번도로 좌측으로 진출해 기안리 북쪽 350고지를 점령하고 기갑연대가 정자동에 진입했다.
제18연대는 8월 16일 공격을 재개해 253고지-288고지 선상에서 적 1개연대와 육박전을 치르며 탈환에 실패한 반면 적 제12사단은 북쪽에 주력을 운용함으로써 남쪽 어래산 동쪽 445고지와 유금리 북방 236고지를 국군 제17연대에 내주어야 했다.
제18연대는 8월 17일에도 혈전을 반복하며 288고지를 공격하여 탈환하며 적은 비학산으로 지휘체계가 무너진 가운데 철수하게 된다. 이어서 전과확대로 바로 기계로 공격하여 기계북방 238고지(두봉산)를 확보하면서 8월 18일 기계로 진입했다.
이와 동시에 기계남쪽의 445고지와 190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17연대는 남쪽에서 협공하여 기계의 적은 대부분 격멸되고 일부만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이로써 기계를 탈환하게 되는데 사살 1,245명, 포로 17명이고 아군 피해는 전사 92명, 부상 171명, 실종이 500여명이었다.
(3) 제1연대의 반격과 운주산 포위작전
제18연대와 제17연대가 협공으로 적을 비학산으로 격퇴하던 시기에 제1연대도 31번 도로 남쪽 고지군에서 적 1개연대를 맞이하여 격파하고 양동과 유금리 고지군에서 능선을 따라 북으로 진출하여 31번도로 북방 고지군으로 진출했다. 이후 제26연대에 인계하게 되며 터널고지(유금동)를 점령한 제3대대는 민부대에 인계하였다.
한편 제18연대가 253~288고지군에서 격전시 적의 일부가 운주산으로 철수함에 따라 8월 17일 제8사단 제10연대와 배속된 제1 및 제2유격대대가 운주산 포위작전에 돌입했으나 적이 먼저 비학산방향으로 빠져나가 작전이 취소되고 보현산 일대의 전황이 긴박하여 제10연대는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독립 제1유격대대는 제8사단에 배속되고 제2유격대대는 제8-16연대를 지원하였다. 또 8월19일 기갑연대는 제6사단에 배속되고 포항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됨으로서 해군육전대도 원대복귀하였다.
다. 비학산 전투(8월 18~26일)
수도사단 주저항선 형성('50.8.22)
구암산
적15사
합덕동 성범령
가사동 710
적15-1개연대 적부대 사관령
매현동 538 492 적 대대
국18-1대대 침곡산 국18-2대대 오덕동
16연=18연
수석봉 입암 481 비학산 적12사
국16-3대대 광천동 봉화봉 국1개중대 감곡동 484
352 652
국17-2대 국17-3대 425 토성동
18연=17연
국18연, 국18-3대 용기동 국17연(전)
347 국1-3대
안심동 구지동
288 184
8사=수도사 국26연
인비동 17연=26연
운주산 기계 365
국1연 도음산
수도사=3사
(1) 전과 확대와 주저항선의 형성
적 제12사단은 8월 14일부터 감행된 국군 제1군단의 기계탈환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8월 17일 비학산 지역으로 총퇴각을 시작하였다. 8월 19일 지휘부를 영천에서 경주로 이동한 제1군단장은 전과확대를 위한 반격명령을 하달 하였다.
구지동에서 오덕리에 이르는 921번도로를 전투지경선으로 좌측에서 제18연대가 우측에서 비학산을 목표로 제17연대가 진출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도중에 돈좌 된다.
8월 21일에는 제1연대로 우측방 도음산을 공격토록 하였으나 역시 돈좌되고 제3-26연대에 임무를 인계하고 예비가 되었다.
(2) 적의 재편성과 주저항선의 붕괴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적 제12사단은 비학산 일대에서 아군의 판단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전투력을 복원하였다. 적 제2군단은 제766부대를 해체하여 사단에 편입하고 신병 2,000명을 보충받아 5,000명으로 전투부대를 개편하고 좌인접인 제5사단으로부터 일부 장비를 지원받아 8월 24일 수세에서 국지적인 공세로 전환하였다.
제17연대의 계속적인 비학산 탈환작전은 실패를 거듭하고, 좌측의 제18연대는 제3대대장이 적의 기습(638고지? 봉화봉인지?)으로 납치되는 상황이 벌어지며 몇번의 역습으로 재탈환을 반복하며 결국 방어선이 무너져 침곡산-638고지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게 된다. 우측의 제26연대는 도음산 공격에 실패하면서 8부능선에 저항선을 형성하였으며 제3사단에서 수도사단에 배속된다.
이와 같이 수도사단의 비학산 탈환이 실패하면서 적이 8월 24일 기해 수세에서 국부적인 공세로 전환하였다.
라. 제2차 기계~ 안강 방어전(8월 27일~9월 4일)
(1) 제2차 기계 피탈과 작전지휘체계의 일원화
적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최종 목표인 부산으로 진출하기 의해 9월 공세를 계획하고 적 제5사단은 흥해-포항 축선을 따라 남진해 포항을 점령후 경우에 따라 경주로 진출하고, 제12사단은 기계-445고지-안강-곤제봉-261고지를 딸 남하하여 경주로 진출토록 계획하였다. 그들은 9월 2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8월 24일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적 제12사단의 야간 기습 작전으로 수도사단 주저항선 여러 곳에 돌파구가 생기고 8월 27일 드디어 기계가 피탈 되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즉시 "잭슨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미 제24사단제21연대와 영일 비행장을 경계중인 미 제29사단 제9연대 3대대 및 미 제73전차대대(-)로 제8-16연대가 방어중인 죽장과 포항 북쪽 19km 지점의 월포동까지 연결하는 선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국군 제1군단은 현재 각 사단의 전투손실이 커서 반격작전은 곤란하다는 의견으로 일단 계획은 보류되고 안강 북쪽의 445고지마저 5시간의 격전끝에 적에게 다시 피탈된다.
(2) 적의 침투기도와 아군의 반격
8월 27일 밤 적 제12사단과 제5사단은 일부 병력으로 국군 방어선을 돌파해 차기 작전에 유리한 발판을 확보하였다. 이 무렵 도음산에 배치된 제1연대는 제26연대의 방어지역을 인수해 진지를 구축하고 우측의 제3-22연대는 128고지- 우현동 선에서 강력한 적의 공격를 가신히 저지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는 3km의 간격이 발생되어 있었으며 적은 이 틈을 이용해 학전동 송학마을로 침투해 남하태세를 갖추웠다.
이러한 사실을 항공관찰로 확인한 제1군단장은 잭슨부대장 콜터 소장에게미 제73전차부대를 7번도로상에 배치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군 제17연대는 적의 공격에 앞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8월 29일 새벽에 미 잭슨특수임무부대의 전차와 포병의 지원으로 기계를 공격해 탈환하고 몇차례의 역습을 물리쳤다. 우측의 제3사단도 유엔 해.공군과 제73전차대대의 엄호를 받으며 냉천동과 93고지를 공격했으나 적 제5사단의 저항으로 실패한다.
사단 좌전방 부대인 제18연대는 운주산 서쪽 기슭에 방어진지를 편성중 적 제15사단 일부병력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고전하고 있었다.
전 전선에서 적의 압력이 가중 됨에 따라 다시 기계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8월 31일 적이 공격을 재개해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군단 예비인 제8-10연대를 제3사단에 배속해 효자동으로 진출시키고 제26연대는 효자동 남쪽에서 부대정비를 실시토록 조치하였다.
"개장의 비극"
9월 1일 04시를 기해 도음산-효자동-포항에 전개한 국군 4개연대(제1,제10,제22, 제23)는 미 잭슨 특수임무부대의 근접지원아래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으나 특히 93고지를 공격하던 제23연대는 많은 사상자만 발생하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한편 9월 1일 인사이동으로 제1군단장에 김백일 준장, 수도사단장에 헌병사령관인 송요찬 대령, 제3사단장에 이종찬 대령을 임명하였다.
수도사단으로 부임한 송요찬 대령은 제17연대장에게 445고지 사수를 지시한다.
(3) 9월 공세와 수도사단의 철수
9월 2일 03시를 기해 적이 총공격, 이른바 9월 공세를 개시 하였다. 총공격을 개시한 적 제12사단의 목표는 안강을 경유 경주로 진출하는 것이다.
운주산 기슭에 배치된 제18연대는 8월 30일 야간에 기계남쪽으로 철수한 제17연대의 방어지역에 적이 진출함으로써 주보급로인 31번도로가 차단 되었다.
하지만 9월 1일 적 제15사단 일부 병력이 제8사단 제16연대 방어선을 돌파해 운주산으로 진출하고 있는데 제18연대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측방으로 침투한 적의 기습에 연대는 주저항선을 물러나 금대동-영천-건천을 거쳐 9월 5일 아침 경주에 도착한다.
마찬가지로 9월 2일 03시 제17연대도 445고지선에서 기습을 받고 격전을 벌이다 적전차 4대의 기습을 로켓포로 격파한다. 그러나 국군 복장을 한 1개 중대의 병력이 전면에 나타나자 제18연대 병력으로 오인하여 진지 전방 300m까지 진출시킴으로써 적의 불의의 기습으로 진지가 와해되고 계속적인 적의 파상공격으로 445고지선이 무너진다. 이러한 상황에 예비대로 다시 역습을 감행 445고지선을 확보하였다.
한편 9월 2일 새벽에 운주산을 돌파한 적 제15사단 예하의 증강된 1개 중대는 천장산-도덕산-자옥산으로 연결된 능선을 따라 남하하고 있었다. 이를 항공 관측으로 확인한 제1군단장은 재편중인 제26연대를 안강 옥산동으로 보내 28번도로를 확보토록 자옥산을 점령토록 했으나 적보다 늦게 일대로 도착함에 따라 문제점이 현실로 나타났다. 따라서 연대장을 이백우 중령에서 이치업 대령으로 교체한다.
밤사이에 병력을 증강한 적은 9월 3일 새벽에 28번 도로를 차단하여 육본은 안강지구의 위급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군 예비인 제7-3연대(1)를 수도사단에 배속시켜으나 이 무렵 적 제12사단의 1개 연대가 445고지 서쪽 어래산을 점령함으로써 안강은 위기를 맞았다.
이로써 군단은 안강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선을 재조정하여 9월 4일 10시를 기해 우측의 제1연대를 형산강 이남의 호명리 선으로, 중앙의 제17연대를 갑산리(곤제봉) 선으로, 좌측 부대인 제26연대를 경주로 이동토록 하였으나 연락을 받지못하고 낮에 철수를 감행하여 많은 피해를 입고 16시경 경주 동부리에 도착하였다.
아군의 철수로 적 제12사단은 증강된 1개 연대로 구련봉을 점령한 다음 능선을 따라 남진 태세를 갖추었다. 일부 병력은 경주 북서 5km지점의 안태봉, 소현동, 구미산까지 침투해 경주를 위협 하였다.
제1연대는 호명리에서 다시 모서리로 철수하라는 명령에 지형분석결과 형산강이 흐르고 낙산의 복호산(153m)과 국당리의 형산(257m)등 중요지형을 이용한 방어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이곳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접근하는 적을 격멸하였다. 퇴로 차단의 위협에 철수를 명하였지만 끝까지 낙산을 사수하여 적 제12사단은 큰 차질이 초래되고 국군은 무릉산-곤제봉-형산강 선을 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는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마. 경주 북방 전투(9월 4일~9월 9일)
(1) 제1군단의 방어배치와 곤제봉 전투
수도사단이 무릉산-곤제봉-호명리 선으로 철수한 9월 4일 적 제12사단은 주력을 안강에 주력을 집결시키고 적 제5사단과 협조하 경주를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적 제12사단은 445고지-곤제봉-경주 및 성주봉-호명리-경주의 2개 축선에 증강된 1개 연대를 지향하고 일부 병력은 구미산을 점령하여 대구~영천 ~ 경주 도로와 동해 남부선을 차단하려 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미 제24사단을 경주로 이동시켜 위급상황을 타개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경산에서 9월 5일 이동한 미 제24사단은 경주에 도착하였고 사단장 처치 소장은 잭슨 특수임무부대의 지휘권을 콜터 소장으로부터 받아 부대명칭을 "처치 특수임무부대"로 개칭하였다.
이와 함께 육본은 제7사단에 배속된 기갑연대를 9월 4일부로 제1군단으로 배속하고 다음날 제1군단 통제하의 제8사단을 제2군단을로 배속하였다.
수도사단은 경주방어의 성패가 달린 무릉산과 곤제봉간 약 5km 정면에 기갑연대와 제3연대, 제17연대의 3개 연대를 배치하였다. 글리고 처치 특수임무부대는 곤제봉 남쪽 2km지점의 무명고지에 미 제17연대 제3대대를 배치했다.
결국 이 지역의 성패는 곤제봉의 확보에 달려 있게 되었고 제17연대(기갑연대 3대대)와 적 제12사단은 무려 15회의 공방전 끝에 9월 13일 국군 제17연대 제2대대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9월 12일 특공대 진격간 제10야포대대의 오폭으로 큰 피해 발생)
(2) 군단의 방어선 정리와 호명리 방어전(제1연대)
제1연대가 호명리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에 그보다 5km후방의 모아리에 있던 사단 지휘소에 적 침투부대의 기습이 있음으로써 연대는 고립상태에 빠지게 된다. 적이 이미 북쪽의 양동리로부터 동쪽의 홍계리, 그리고 서쪽의나원리 및 남쪽의 모아리까지 진출했다.
계속되는 군단의 철수명령에도 연대는 더이상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의로 계속적으로 진지를 고수하였다.
이때 적 제12사단 주력은 9월 4일 안강에 집결, 무릉산으로 향하고 동측엔 적 제5사단의 1개 연대가 9월 5일 형산 앞 유금리에서 형산강을 도하하여 홍계리를 거쳐 운제산으로 향했다.
국군 제1군단장은 수도사단 사령부가 경주로 이동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9월 5일 경주에 도착한 기갑연대를 수도사단 제17연대 좌측방의 무릉산을 점령토록 하고 경주에 집결중인 제26연대를 구미산에 침입한 적을 격퇴토록 명령했다. 9월 3일 경주로 이동한 제18연대는 수도사단 우측방 홍계동에 197고지를 점령하고 이지역 일대의 적을 섬멸토록 했다.
'50. 9. 7일 적 제12사단의 1개 연대가 제17-3대대의 방어정면을 공격하고 적의 주력은 제3연대 정면의 무릉산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돌파되면서 제17연대 좌측후방이 우회공격을 받는다. 제3연대는 분산 철수하여 검단리일대에 배치되고 9월 8일에 제26연대는 구미산의 적을 격퇴하고 확보하였다.
상황이 일부 호전되어 제26연대는 9월 9일 포항지구로 제3사단에 배속되어 갔고 9월 5일 경주에 도착한 기갑연대는 제3연대의 점령지역인 검단리 부근에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1연대는 현 진지를 고수하며 적의 계속되는 공격을 방어하고, 경주-안강 도로를 중심으로 서쪽에서는 적 제12사단이 동측에서는 적 제5사단이 공격을 감행했으나 호명리 사수전은 성공하였다.
결국 9월 5일부터 수도사단은 무릉산-곤제봉-형산강을 잇는 최후의 방어선을 형성, 11일간의 격전 끝에 지켜내면서 공세이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제17연대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육본 직할로 예속을 변경해 9. 14~15일 야간에 부산으로 이동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다.
이에 따라 수도사단은 자체 전투지대를 조정하여 좌전방 기갑연대는 무릉산-곤제봉, 중앙의 제1연대는 호명리 일대에, 우전방엔 제3연대로 형산-중단동까지 방어토록 하고 예비인 제18연대는 호명리 남쪽에 집결해 반격작전을 준비한다.
4. 전투 결과
총공세를 위한 공격의 발판을 확보한 동부전선의 북한군은 9월 2일 03시 일제히 공격을 재개해 9월 5일에는 안강과ㅑ 포항을 점령하고 일부 병력은 경주 북서쪽 4-5km까지 육박함으로서 동부전선에 최ㅐ대의 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동부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은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9월 5일 무릉산-관제봉-형산강 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형성, 11일간의 격전 끝에
이 선을 확보함으로써 공세이전의 계기를 마련한다.
곤제봉 탈한을 계기로 상황은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연결된다. 유엔군은 8월 30일에 인천상륙작전명령에 국군 제1군단 또한 반격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여, 제17연대는 수도사단에서 육본직할로 예속을 변경하여 9월 14-15일 야간에 부산으로 이동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수도사단은 제17연대의 예속변경에 따라 전투지대를 자체 조정하여 좌전방 기갑연대는 무릉산-곤제보 일대로, 중앙의 제1연대는 낙산의 제1대대를 제외하고 2개 대대를 호명리로 집결시켜 공격준비를 한다. 우전방 제3연대는 형산-주단동 일대에 배치하고, 사단 예비인 호명리 남쪽에 집결하여 9월 16일 실시 될 반격작전을 준비한다.
9월 16일 반격을 개시한 수도사단은 주간도하작전에 실패한 후 야간 작전으로 전환해 다음날 형산강 대안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진격하게 된다.
수도사단은 9월 18일에 안강을 탈환하고 어래산-445-145-236고지선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적 제12사단이 어래산 일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구축해 제18연대는 여섯 번 만에 고지를 탈환하고 북쪽의 봉계동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적이 445고지와 190고지를 포기하고 물러나면서 445고지를 공격하던 기갑연대가 기계를 탈환하였다.
5.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길안 양곡재의 비명소리, 그리고 불타는 차량들!
이곳은 '50. 8.5일~6일어간, 수도사단의 2개 연대, 제18연대와 기갑연대가 길안-구수리 중간 양곡재에서 적에게 914번도로 퇴로가 차단되어 제1연대로 성황고개에서 구출작전을 감행했으나 실패하면서 양 연대들은 모든 무기와 장비를 유기한채로 각자 철수하여 의성으로 집결하게 되는 상황이다.
우리는 구수리, 송토산일대에서 탐문활동으로 지역주민을 만나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 이 일대는 수도사단 병력과 장비들이 꽉 들어차서 무슨 장터를 방불케하였다 한다.
"우린 북한군을 보지못했어요. 모두 같은 복장인데 누가누군지 모르는거라. 그런데 갑짜기 우당퉁탕하면서 군인들이 모두 길로 또는 산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럼 혹시 양곡재에서 전투가 있었다는데 목격하셨나요?"
"전투는 못보았어요. 본 것은 트럭들이 불타고 있고 이걸 빼내는 군인들을 보았는데 복장이 다 국군이라. 아마 그 놈들이 변복을 하고 왔나 봅니다. 그리고 다쳐서 도망치지 못한 군인들 중에 옷에 불이 붙어서 죽은 사람들 많았어요"
"북한군이든 아군이든 이 일대에 죽어서 있던 유해는 없었습니까?"
"저 양곡재라는 곳의 좌우측 산에 올라가면 없는게 없어요. 먹는 것부터 총, 탄알, 철모 등 군인 것은 다 있어 우리가 어렸을 때는 가끔 올라가 주어다 엿을 바꿔 먹기도 했지요. 그런데 죽은 군인은 모두 여기저기 구덩이에 다 밀어넣어 묻었는데 이 곳이 길을 넓히면서 다 어디로 갔어요.
나. 노당재의 비밀( '07. 29구를 25개 호에서 발굴)
안강. 기계에 가면 바로 보이는 산이 북쪽에 어래산, 남쪽에 무릉산이다. 어래산 너머에는 비학산이 우뚝 솟아있다. 청송 길안지역에서 수도사단의 2개 연대가 적의 포위에 의성으로 빠지면서 청송-기계구간은 대규모 돌파구가 생겼다. 적 제12사단은 무혈로 기계를 8월 9일 점령했다.
이에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해 이 지역에 대한 방어작전을 하게 되는데 미 제8군 예비로 마산 전선으로 행군하던 제17연대가 명령을 받고 11일 안강에 도착하여 해군육전대 포항지구대와 협조하 445고지(어래산 우단 능선)를 공격하게 된다. 노당재는 바로 445고지 우측 능선으로 68번도로와 31번도로를 감제관측하는 중요지형이다.
나는 '00년부터 이곳의 전쟁지역을 탐사하고 다녔는데 주로 어래산과 무릉산, 곤제봉일대에 치우쳤다. 사실 이곳에 대한 제보가 많았던게 사실이다. 그러던 '07년도에 노당리 거리마을을 지나는데 길가 어느 집에 나이드신 아저씨가 계셔 혹시나 하는생각에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르신 혹시 6.25전쟁때 여기 사셨나요?"
"그럼요, 여기서 나고 자랐는데 얼마간 서울 아들 집에 몇년 있다가 따분해서 다시 내려왔어요"
"할머니는 안계시는지요?'
"뭘 바쁘다고 먼저 떠났지요. 벌써 3년이 지났어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요즘 이 앞을 자주 지나던데 뭐하시는 분들입니까?"
"우린 유해발굴단이라고 6.25전쟁때 전사한 군인들의 유해를 찾으려 전쟁지역을 탐문하는 중입니다"
"그러면 저 강건너 양동 뒷산에 가 보셨나요?"
"아니요. 이곳은 지금 바로 뒤산 445고지하고 어래산, 비학산등을 올랐고 저 안계리 지역은 안가봤습니다"
"우리가 10살 먹던 해에 전쟁인데 북한군이 갔다고 해서 저 산에 가보니 모두 시체만 있어요. 철모며 총도 많아"
"그렇습니까. 여기는 없었습니까?"
"여기는 달구지가 가는 길인데 거 뭐요 학도병들이 교복을 입은채로 죽어서 길가에 쭉 널려있는데 숫자는 셀 수도 없지. 길가로 늘러져 있는데 어쩌다 트럭이 와서 실어가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요" 저기 노당재로 올라가면 성황당 자리가 있는데 그곳에 시체가 쌓여서 고약한 냄새가 진동해서 동네 어른들이 경찰을 따라서 가 여기저기 묻었는데 그 산에 구덩이 하나에 한구씩 밀어 넣었다고 들었어요"
우린 곧바로 노당재로 가서 445고지 우단을로 올랐다. 멀지않은 곳에 개인호가 25개 있다. 그리고 발굴을 하는데 정말 한 호당 1구씩 발굴되고 어떤 호는 두분이 계셔셔 29구를 '07년도에 발굴했다.
이 지역 일대는 이미 '04년도에 바로 길 옆에서 3구를 발굴했었다. 그 때는 할아버지가 안계시던 때다. 우린 다시 기계천 넘어 안계리 일대를 탐사했다. 이곳도 이미 안계저수지 만들 때에 뼈가 있었다는 제보로 '03~'04년도에 5구를 발굴했는데 저수지 우측 236고지 일대에 200여개의 개인호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09년도에 11구를 발굴하는 등 일대에서 30여 명의 전사자를 발굴했다.
다. "아저씨 밥좀 주세요(육통리 원당 : 북한군 학도 의용군의 눈물)"
2010년도에 제18연대 전기풍 참전용사, 왕선구 참전용사 두 분을 모시고 안강과 기계 일대를 탐사했다. 우리가 안강에서 기계로 가는 도중에 육통리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50. 8월 말 9월 초에 제18연대가 445고지일대에서 적과 일진일퇴의 전투를 하던 시기다
제18연대 왕선구용사 : 나는 445고지 공격간 취사반에 있었어요. 거의 한달을 여기서 머물렀다고 봐요
제18연대 전기풍 용사 : 나는 운주산에 살아나 영천으로해서 경주로 갔어. 북한군이 쥐새끼처럼 포복으로 엎드려 산 정상까지 오는 바람에 연대장부터 권총을 당기며 싸우다 좌측으로 후퇴하여 영천으로 가서 경주로 갔다 올라 왔어요.
당시는 비도 한번 내리면 게속 내리고 또 얼마나 더운지 옷을 입고 있기가 아무리 전쟁통이라해도 힘들었다고 한다
"왕 용사님 : 그런데 8월말 새벽에 밥을 짓고 있는데 누가 와서 불러요. 그래 보니까 총을 거꾸로 메고 비를 철철 맞으며 솥 앞에 서 있는거야. 그래서 같은 소속 병력인줄 알고 왜 왔느냐고 대수롭지않게 물었더니 아 글세"아저씨 밥좀 주세요" 그러잖아"
알고 보니 445고지에서 있다가 새벽에 연기나는 모습을 보고 내려온 북한군 학도의용군으로 서울의 대학에 다니다 잡혀서 참여했다는거야"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아니 난리가 순간 났지. 북한군이 침투해 왔으니 말이야. 결국 아침 밥을 주고 정보과에서 연대로 보냈는데 나중은 모르겠어"
"개인호가 능선에 전부다"
죽음을 무릎쓰고,배가 고파서 그 비가 퍼붓는 가운데 야전 취사장으로 걸어와 밥을 달라고 하는 북한군 학도의용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 나는 그 취사반 위치를 확인후에 원당으로 해서 445고지에 올랐다. 보이는 것은 모두 개인호였다, 역시 전사대로 흔적이 많다고 확신하며 우린 유해발굴을 했지만 '04년도에 1구만을 발굴 했다.
"산불이 자주나서 수류탄도 터지고 남은게 없어요"
노당리 대밭골에서 한 지역 할아버지를 만났다. 전쟁 당시에 이곳에 살았다는 분이다.
"산에 아무것도 없어요. 다 불타버리고 경찰이 통제해서 동네 어른들이 모두 치웠는데 산짐승이 파먹고 문등병환자분들이 발굴해 가고 없어요. 여기 대밭에도 북한군이 죽어 있었는데 팔둑에 시계를 8개나 차고 있어. 경찰에 신고해서 다 가져갔어요"
"왕 선배님 어떻게 군인이 됐어요, 당시에 나이가 어리고 키도 작으셨다면서요?" 점심을 먹고 난 후 육통리에 있는 추모비를 찾아 묵념을 올리고 나는 질문을 드렸다.
"난 황해도가 고향이야. 전쟁전에 제18연대가 우리 지역에 있었고 그래서 간부급들을 일부 알고 있었지. 연안 중학교에 다니다가 송도중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6.25전쟁 전날 국군이 모병한다고 개성시내를 장갑차를 돌아다녓는데 다음날 아침에 전쟁이 난거야. 나는 고향인 청단을로 갈려고 기차를 타려는데 전쟁이야. 그런데 여기서 18연대 상사 한명이 내이름을 부르는거야. 날르 알고 있었던 아저시야. 그래서 함께 백석포 방향으로 빠지는데 빨갱이들이 사람을 막 사살하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뗏목을 만들어 함께 강하도를 거쳐 김포로 갔어요. 여기서 18연대 1대대 3중대를 만나 시흥에서 수원, 다시 조치원으로 갔지"
"아니 지금 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도병도 아닌데 계속 부대를 따라 간거네요?"
"그렇게 됐어요. 원래 고향에서부터 18연대를 알다보니 그 간부들 따라 간거지 . 18연대에는 서북청년단원이 많았어. 그래서 나처럼 이북출신들이 적응하기가 쉬웠다고 봐야지.
그러다 진천에가서 무슨 언덕이 있는데 좌우측에 산이 있어요. 여기서 18연대가 전투를 하는데 당시에 나같은 학생들이 상당수 있어가지고 탄도 날라주고 그랬어요. 그러다 다시 청주로 해서 예천으로 가서 칼빈총도 쏘아봤어요
라. "대곡리 330고지, 이름은 고희경 대위"('08, 마을 주민 저 고지에서 수도사단 1개중대 다 죽었다) : 80여구 발굴
우리가 열심히탐사와 탐문을 하고 유해를 찾는다해도 한계가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않는 것을 찾아가는 과업이다. 이곳은 '00년부터 많은 시간을 투입하여 왠만한 고지는 다 올랐고 주변 사람도 만났다고 보는데 찾아보면 또 있다.
'07년도 가을에 나는 차를 기계 마현리로 몰았다.
바깥재내미에 가니 연세가 드신 분이 사과 과수원인데 그믈망을 치고 있다.
"어르신 좀 쉬면서 하세요. 우리가 도와 드릴께요"
"아니 이 산골까지 어떻게 올라오셨습니까, 뭘 찾으러 다니세요?"
"네 6.25전쟁때 전사하신 국군의 유해를 찾고 잇습니다." 집 안에서 할머니가 사과 몇개를 가지고 나오셨다.
"이거 드세요, 군인들 모습 오랜만에 보네. 전쟁통에 보고 처음이야'
"그러세요" 우린 집 마당에 서서 가져오신 사과를 먹으니 꿀사과다. 그런데 까치들이 달콤한 맛을 알고 쫑먹기 때문에 지금 그믈망을 치는 거란다.
얼마후 이야기를 들으니 바로 서쪽 능선에 엄청난 전투가 있었고 당시 소문에 수도사단 1개 중대가 전멸했다는 것이다. 전사에는 오덕리의 353고지와 대곡리의 253고지와 2인비동 288고지에서 격전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린 일을 조금 도와 드리고 주시는 사과를 받아들고 차를 달려 대곡리로 들어가 계전리 방향으로 능선에 오르고 다시 율산링에서 546고지 방향으로 올라 서서 탐사를 했다.
"능선 고지마다 사방으로 개인호가 첩첩이 있다."
우리는 '08년도부터 발굴 작전에 돌입하였다. 주로 바깥재내미 위의 능선위주로 발굴하여 30여구를 발굴하고 '09년도에는 대곡리 253고지 윗쪽 고지군을 발굴하여 28구를 다시 발굴했다.
"인식표, 중위 계급장, 그리고 육사 9기 박클 : 그 이름 고희경 중위"
작은 소나무 한그루 뿌리에 몇명의 유해가 혼재되어 있다. 백팀장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여기 인식표와 도장이 나옵니다"
나는 바로 무릉산 탐사중 그곳으로 달려갔다.
"일동 차렷, 경례!"
지금까지 발굴현장에서 인식표와 계급장 그리고 유해가 함께 나온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조회결과 유족이 없다. 아니 식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육사 9기생을 통하여 수소문 결과 당시에 결혼을 했고 나중에 가족은 일본으로 갔고 자녀는 없다고 한다. 북에서 내려와 남한에 친인척관계는 잘 모르고 결혼해서 당시에 삼각지에 집이 있었는데 전쟁 전에는 찾아가서 커피도 마셨다 한다. 그런데 유가족이 없으니 DNA 검사도 못한다. 우린 결국 동기생 보증으로 현충원에 안장해야 했다. '13년도에도 이곳 일대에서 27구의 유해를 다시 발굴했다.
마. 현내리 두봉산의 권소위" ('09.황진수, 17세떼 나무하러 갔는데 정상에 권소위 푯말" 1구 발굴 유품 11점, 치약 빗등)
안강. 기계 지역은 수도사단이 길안-청송간에서 양곡재에서 2개 연대가 퇴로가 차단되어 의성으로 이동하면서 돌파구가 크게 형성되어 적 제12사단 병력이 무혈입성하면서 안강-경주-부산, 포항-경주-부산으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수도사단이 긴급히 포항지구전투사령부와 합동으로 남북에서 적을 포위 공격하여 적의 남진을 일시적 정지시키고 이어서 정상적인 방어작전으로 전환하여 15회의 곤제봉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공세이전한 곳이다.
현내리는 바로 기계에 있으며 그 북쪽에 238고지 두봉산이 있어 이 고지를 누가 확보하느냐에 따라 기계 전역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중요한 곳이다. 따라서 피아간에 서로 확보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던 곳이다.
비록 작은 고지이지만 올라가 보면 산 전체가 개인호가 굴토되어 있다. 나는 '00년부터 전국의 주요 전투지역은 섬부터 DMZ 안까지 웬만한 곳은 다 탐사하여 보았다.
그런데 이곳은 우리가 이미 '00년부터 수없이 발굴작전을 수행하면서 별다른 제보자를 만나지 않했는데 '09년도에 지역주민 황진수님을 우연히 기계 장터에서 만났다.
"어떻게 많이들 발굴하셨나요?" 장터는 바로 주도로를 끼고 펼쳐지는데 어느 어르신이 우릴 바라보며 말씀을 하신다.
"예, 계속 발굴 하고 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신 곳이 있으세요?"
"저기 두봉산에 내가 17살에 나무하러 올라갔는데 푯말에 "권소위"라고 적혀있는 작은 무덤같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도 있나 모르겠네요"
"혹시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발굴결과 유해 1구와 탄피 , 플라스틱 빗, 치약 등 11점의 유품을 발굴 했지만 아직 "권소위"의 유가족 찾기는 진행형이다.
사. "도음산의 김소위와 황장군비화"
얼마전에 "사병 묘역으로 간 장군 : 채명신 중장(주월 한국군 사령관)"이 많은 국민적 감동을 가져왔다. 나아 함께한 전우의 묘역에 묻게 해달라는 유언을 받아들여 파월장병 묘역에 안장 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진한 전우애가 또 있다. 바로 '50. 9월 안강. 기계전투 당시 도음산에서 전사한 제26연대 김소위와 인접부대 제1연대 황소위의 영원한 전우애다. 전쟁 당시에 전사한 김소위를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서 황소위는 그 장소에 가매장하고 공방전을 계속했다.
그리고 반격작전에 북으로 진출하면서 잠시 잊혀지나 했던 전우애는 휴전 후에 장군(황규만 장군)이 되어 이곳을 찾아온 황소위가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인식표는 없고 명찰은 모두 자연의 품으로 가버렸다.
"잊혀진 이름, 김00소위"
비록 이름은 모르지만 김00소위인 것은 확실하기에 국군묘지에 안장토록 탄원서를 제출하여 안장을 했고 그의 이름을 찾기에 온 힘을 기울여 드디어 "김 수영"이란 사실을 확인했고 유가족도 찾았다.
"국립묘지 안장사에 최초로 같은 한장소에 나란히 묻히게 된 용사 : 고 김 수영 소위, 고 황 규 만 장군"
황장군님은 생전에 매년 이 묘소를 직접 관리하고 헌화하였다. 그리고 금년도에 황장군이 노환으로 작고 하셨다. 운명하시기전 국가에 소원서를 제출했다. 전시에 목숨을 함께한 전우가 나보다 먼저 가 있으니 그곳에 묻히게 해달라는 내용이였다.
나는 처음 이 유해발굴 작전을 계획하는 단계부터 황장군님의 많은 지도를 받았고 함께 안강-포항지구를 탐사도 했다. 그러나 산림이 우거져 세워놓았다는 김소위 묘비를 찾지는 못했다. ('08년도에 드디어 찾아냄)
383m의 도음산은 흥해 용곡리부터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리는 15km 이상되는 긴 능선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남쪽이 바로 유금리로 형산강에 이르는데 터널고지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도사단 제1연대, 제7-3연대. 제26연대, 민부대 등이 북한군 제12사단, 제5사단 에하 부대들과 8월 말에서 9월 중순 반격시 까지 전투한 곳으로 능선 모두에 개인호가 준비 되어 있다.
"구덩이에서 집단으로 발굴된 33구"
이미 우리는 전사적 사실로 탐사를 하여 개인호의 실태는 분석하고 있었는데 '05년도에 지역주민 두분의 결정적 제보를 받아 발굴작전으로 33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손익수(76. '05) : 전쟁이 끝난 후에 달전리 지역 주민들이 부역으로 도음산 정상에서 10여개의 구덩이를 파서 유해를 묻었다"
"손익태(70. '05) : 전쟁이 끝나고 제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 묘 앞에 15구의 유해가 그대로 있어 다른 장소로 옮겨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발굴 당시에 나침반, 대검, 철모, 만년필, 전투화등 많은 유품도 함께 발굴 되었다.
또한 우리는 '08년도에 지역주민 박옥순(81세)으로부터 "산에 나물하러 갔다가 포탄 떨어진 자리에서 유해를 목격했다"는 제보에 의해 능선상에서 10구의 유해를 발굴 하는 등 도음산 일대에서 지금까지 100여구를 발굴 했다.
아. 달전리 갈대밭 북한군 야전병원에서 2구 발굴
탐문중에 포항공대 건립시 많은 유해와 유품들이 나왔는데 노적봉 근처에 재매장했다는 제보를 받고 학교측과 협조하여 우린 탐사를 했다. 그러나 흔적을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달전 저수지 옆에 있는 공동묘지부근으로 옮겨졌다는 풍문도 들었다고 한다.
주변을 계속 탐사하는 가운데 당수마을에 가서 공동묘지에 얽힌 비화를 들고 싶었으나 아는 분이 없었고 김백수(75, '08) 어르신이 길 옆에 갈대밭이 있는데 이곳에 북한군 야전병원이 있었고 본인이 직접 묻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어른을 모시고 현장에 가보니 아직도 갈대밭은 존재하고 있고 옆이 축사분비물을 저장하는 장소였다.
우린 유금리 마을회관에서 '13년도에 지역 주민 간담회를 해봤다.
1) 손규호(87) : 매봉지일대에 미군이 불폭탄 사격으로 풀 한포기 없었다. 개인호마다 북한군이 한명씩 죽었었다. 미군은 형산강 강가에 죽어 있는 것 보았다. 하지만 어느날부터는 보이지 않더라
2) 오기달(77): 비행기 폭격으로 많이 죽었고 집에 가축들도 다 죽었다. 설창산에 아군이 많이 죽었다.
3) 이광남(68) : 매봉지에서 어릴때 북한군 군관 복장도 가지고 옴. 안계저수지 댐 공사시 주변 일애에서 유해가 많이 나왔다.
4) 손윤익(75) : 마을 어른들이 부역으로 가서 유해를 묻었고 당시 주변 산에 교통호에는 많이 있었다.
이러한 제보내용을 근거로 우린 매봉지에서 '13년도에 3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자. 포항 "개장"의 비극
포항지구는 93고지, 천마산, 포항여중 뒷산, 소치재 능선등 시내 전체가 전쟁터다.
그런 어느날 포항 일원을 탐사 및 탐문하다 어느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가사 한 분이 다가와서 본인이 묻혀있는 장소를 안고 있다고 해서 우린 따라 나섰다. 창포동 어느 과수원 안으로 들어서니 집 주인이 나왔다. 이곳으로 이사해 온지는 오래되지 않는다고 한다. 원 땅 주인은 별도로 있다.
택시기사님이 알려준 곳이 바로 이 집 입구 오른쪽 산밑으로 보니 옛날 개장이 크게 있다. 그런데 그곳이 바로 이 일대에서 죽은 군인들을 집단으로 매장한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을 수소문해서 발굴을 추진하려 했으나 난색을 표한다. 어쩐 이유인지는 몰라도 손대지 말라며 그곳이 전에는 돼지도 기르고 가축 농장같은 곳이라고 한다.
우린 할 수 없이 그 철망으로 둘러있는 바같부분에 약간 솟아오른 부분만 기초굴토를 해보고 종료했다. 묻혀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피아 구분을 떠나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죽어서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다면 굴토하여 그 한을 씻겨주는 것이 후손인 우리의 도리가 아닐까... .
차. 운주산 정상의 경계병과 북한군의 만남"(포복으로 부대간격을 이용하여 침투, 북한군이 운주산 정상에 나타남)
내가 운명적으로 이 유해발굴업무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명에 따라 다만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많은 시간이 지나 지금도 나는 이러한 질문에 명쾌히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지않다. 다만 관심이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도 전사를 읽고 관련 사실을 조회하고 있으니까.
운주산 정상은 이미 영천지구전투에서 언급하고 20여구의 유해가 발굴된 곳이다. 그런데 기계지역 전투에서 얻은 새로운 사실은 우리 제18연대(연대장 임충식 중령)가 북한군의 8월 후반기 공세에 밀리면서 이곳에서 영천=건천=경주로 이동해 재편성 했다는 내용이다.
더욱이 이곳에 연대 지휘소가 있었는데 우측의 제17연대와 전투지대 공백이 발생하여 이곳으로 북한군이 포복으로 침투식 기동을 감행하여 지휘소를 기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연대 참모들은 권총을 뽑아들고 적에 응전하여 결국 적을 진전에서 격퇴하고 철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생전에 '10년도 이병형 에비역 중장의 증언)
당시에 제18연대에는 제1유격대대가 배속되는데 유격대대 구성원의 대부분이 서북청년단원들로서 편성되어 전투력과 정신력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백골부대의 애칭이 바로 이곳 안강지구 전투에서 형산강을 건너 곤제봉을 탈환하고 반격으로 북진하게 되는 싯점에 주어졌다고 한다.
운주산 전투에서 경계병이 근무를 하고 있는데 한명씩 한명씩 포복으로 이동해 오니 처음에는 같은 아군의 수색대원이 용기동 일대로 정찰을 나갔다 복귀하는 줄로 알았다. 복장도 이미 국군 복장을 하고 있었다.
"너 누구냐?"
"나 18연대"
"나무?"
"소나무?"
약간의 코믹한 소설처럼 쓰고 있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이보다 더 코믹한 비화가 많다고 용사님들에게 들었다. 부대가 같으니 후퇴하던 제8사단은 50년 8월 초 안동북방 웅천지구에서 바로 길옆에 국민학교에 들어가 밤을 맞이 했는데 비는 퍼붓고 있고 심야에 또 한일행이 비를 맞으며 학교 정문으로 들어오는데 당시 경계병이 수화를 했다.
"누구냐, 7?"
"우리 10연대" 그리고 안내를 받아 교실에 들어가 베낭을 풀고 잠을 잔다.
새벽녁 소변을 보러 일어나니 적군과 아군이 엉켜서 자고 있었다. 어떻게 하겠는가 바로 서로 어두컴텀한 교실에서 머리를 만져보고 민머리면 대검으로 찌르고 서로 교실밖으로 벗어나 헤어졌다는 용사님들의 증언은 거짓이 아니다. 나는 실제 그 학교에 그 당시 용사님을 모시고 탐문도 했다.
이곳 운주산에서도 이렇게 해서 식별되고 총을 당기는데 경계병이 물러나지 않았다. 진지를 사수하고 육방전이 전개되는 사이 총소리에 놀란 지휘부 간부들이 바로 권총을 빼들고 진내로 들어온 북한군과 전투를 벌여 적군이 물러나게 되었다.
카. 비학산의 두 얼굴
1) 김용식-홍재근 일병(학도병 왕선구의 가장 친한 선임자였다)
왕선구 용사님은 학도병으로 제17연대 제3대대에 취사병 지원병으로 시작했다.
제18연대의 비학산 탈환이 계속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8월 말 수도사단은 제17연대에 탈환을 명령하게 된다.
제17연대는 다시 3대대에 임무를 부여하였고 제3대대장은 특공대를 모집한바 특공대로 자원하여 적 자동화기 진지까지 포복으로 전진하여 적 군관 등 15명을 사살 또는 생포하는 등 적 제766부대를 와해시켜 버렸다.
그 이후 계속되는 적의 압력을 극복하고 반격작전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안강시가지 전투에서 백병전을 수행하며 장렬히 전사하였다. '51년도에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2) 이종록 중위(육사 특 7기, 예비역 중령)와 비학산 유해 17구('01)
"어이 이중령, 나좀 비학산에 데려가 주소. 소대원들의 명복을 빌어야지~!"
'01년도 이른 봄에 예비역 중령이신 참전용사 이종록님이 현충원으로 나를 찾아오셨다. 이분은 전쟁 당시에 기갑연대 소대장이었다. 반격작전으로 진격시 비학산 탈환전에 참가하여 고지 점령작전시 소대원 대부분이 전원이 전사했다 한다. 살았어도 부상이나 전쟁 공포증으로 다시는 전선에 나서지 못하는 고통을 받게 되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하신다.
나는 참전용사님을 모시고 안강으로 내려가 신광면 마현리 샛들로해서 비학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능선에는 대부분 개읺호가 즐비하게 구축되어 있어 그 당시에 전투상황을 짐작하게 하였다. 꼭대기에 올라서니 산불감시 초소가 우두커니 서 있다.
"여기서 다 죽었는데 목표를 탈환하고 잠시 휴식하는 사이에 바로 적의 역습이 진행되어 많은 피해를 입고 다시 철수하는데 전사한 전우를 어떻게 운반할 방법이 없어 정말 북한군에 훼손되면 안된다는 마음에 동료를 개인호에 걸쳐놓고 허리를 밟아서 호안으로 집어넣고 흙을 긁어 살짝 덥고 후퇴했어요. 아마 파면 그런 모습일거요!"
"머리 뒷부분에 와 있는 전투화와 발"
우리는 병력을 투입해 화대리 뒷산부터 비학산 정상까지 발굴 작전을 수행하고 17구를 발굴했다. 그런데 용사님이 말한대로 유해가 모두 포개져서 나오는데 머리 뒤통수에 전투화가 놓여 있는 모습이었다 용사님의 증언이 그대로 일치되었다.
우린 다시 용사님을 모시고 안강으로 갔고 다시 발굴현장에 올랐다.
"차렷, 경례!" 하염없이 용사님의 두눈에 눈물이 흘렸다.
파. "우리 형수님 보지않도록 유해를 저리 돌아서 모시고 가주시면 고맙계습니다"
안강 흥곡 마조리에서 미군 추정유해를 발굴했다. 마을 뒤 커다란 바위 밑에서 유해와 함께 구두칼, 치솔, 면도기 등이 발굴되었다. 동네에서 제보가 전쟁 당시에 북한군이 미군 3명을 바위 밑에서 총살하였고 얼마간 그대로 방치되다 부역으로 동네분들이 묻었다는 내용이다.
"미군 추정 두번째 유해 3구 발굴"
우리는 '00년도에 다부동 숲데미산 우측 동굴에서 미군전투화와 머리부분만 없고 완벽하게 있는 유해를 8월에 발굴하여 미국 하와이로 보낸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안강 흥곡에서 또 미군추정 유해를 지역주민 제보로 발굴하였다.
"미군이 북한군이 물러난 후에 찾으러 다녔을텐데 어떻게 여긴 안왔나요?"
"오기야 왔지. 나도 보았어요. 그러나 그때는 무서웠고 말하기 곤란한 것들이 있었다고 봐요."
"아아 시계를 빼가고 달러를 가져가고 북한군에 밀고하고 뭐 이런 것 때문에 보복이 있었다고는 저도 들었어요"
"알고 계시네요. 그래서 서로가 쉬쉬하고 세월이 지났고 나도 돌아가신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이니 장담은 못해요. 그후에 워낙 비가 와서 싯겨나갈 수도 있고... ." 나는 그곳에서 3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미군측에 인도했다.
"우리형수님이 저기 앉아 계시는데 보이지않도록 저 뒤로 돌아서 나가 주십시요?"
우리는 발굴된 유해를 대형관에 옮겨서 차량이 대기중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글래서 운구병들이 들어와 관을 들어서 나가는데 동네에 한분이 달려오셨다.
알고보니 이분은 형이 당시에 전투에 가서 전사했는데 장가를 들었고 그 부인이 수절과부로 지금껏 시부모님을 모시고 동네에 살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세가 들어 이제 약간의 치매끼가 있는데 남편이 죽지않고 살아있다고 믿고 있고 군복만 보이면 나와서 멍하니 바라본다는 것이다.
우린 먼길이라도 돌아서야했다. 뭐라고 위로의 말씀도 못했다. 전쟁은 비극이었다.
하. 호명리(낙산 갑산리)에 사라진 전쟁 기념관과 유해"
호명리 갑산리에 제1연대 전쟁기념관이 있었다. 그런데 기념관 잔듸밭에 토종벌집 크기의 나무상자가 20여 개 묻혔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00년도에 지역주민이 제보하여 나무상자 속에서 몇점의 유해를 발굴하여 수습했다. 혼재되어 있어 분류 자체가 어려운 상태였다.
"'90년대 초에 강동 면소재지 송고개일대 야산에서 발굴한 유해"
누가 어떻게 왜 발굴하였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안강에 있는 포항 학도병참전용사 전우회 회장님이 조금 알고 있었다. 제50향토사단의 지시가 있어 이곳 경주대대에서 지역 민방위대원을 이용하여 보이는 유해를 거둬서 묻었다는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무지하게 시작하였지만 알고보니 뼈를 함부로 만지면 오염에다 DNA 감식조차 할 수 없는 정말 큰 문제에 도달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는데 '90년도 초에야 무슨 변별력이 있었겠는가.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는그랬던 것이 우리의 수준이다.
그런데 이 기념관의 땅에 대한 소유권 재판에서 국방부가 지는 바람에 이 건물은 헐리고 말았다. 땅 소유주의 아버지 시절에 군에 기부한 것인데 행정서류룰 갖추지 않고 있다가 그 아들이 소유권을 주장하여 결국 모두 헐리고 말았다. 사실 그곳에 일부 유해가 잔존하고 있었는데 흔적조차 사라져버렸다.
하-1 : 갑산 마미산(158m)의 고 이장학 이등중사, 2번째의 신원확인 유해다
'00년도에 안강지구에서 발굴작전을 하는데 포항지구 학도병 참전전우회 회장이신 "이종달'님이 제보를 했다.
"갑산 마루에 상사 분이 한명 매장되어 있는데 이름이 이 장학이다"
"어떻게 이름을 기억하세요?"
"매장지에 나무로 푯말이 있었다."
안강국민학교에서 박격포를 쏘다 전사했고 당시에 군인들이 학교밖 시내 장의사에서 관을 들고와 수습해서 여러명이 메고 이곳에 올라 양지마른 곳에 묻고 푯말을 설치했는데 그때 이름이 명확히 있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는 제보였다.
우린 전사자 명부를 확인하여 대전에 동생분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연락을 하니 안강지구에서 전사한 것이 맞다고 한다. 본인도 함께 입대했는데 대를 이어야 한다고 해서 형님보고 복귀하라하니 동생인 본인보고 돌아가서 부모님을 모셔라고 해 돌아왔는데 그만 전사했다고 한다.
우린 동생분을 모시고 현장에 가서 발굴을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완전한 모습으로 발굴 되는데 치아구조가 어쩜 형제지간이라지만 똑 같았다. 우린 이곳 일대 무릉산 등에서 27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현재까지는 총 100여구를 발굴했다.
하-2 : 그 이름 이명우 일병을 아시나요?
이곳 안강에 가면 신라시대 흥덕왕릉이 있다. 어떻게 경주가 아닌 이곳에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산재리 소나무 숲속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특히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아리비아 장수 몸을 가진 돌상이 서있어 고고학적으로 유명세를 받고 있는 곳이다.
"흥덕왕릉은 격전지였다"
그런데 이 소나무들이 몇백년은 되어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총알자국이 선명하다. 그 안에 있는 비석들도 몸통에 온통 총알자국이 있다. 이곳에 포병이 들어와 방열을 했고 큰 비석은 대포를 맞고 쓰러지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어래산 밑으로 격전지였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안내간판에 없다. 이런 내용을 기록하면 역사가 아닌 것인지 의문이 든다. 더욱이 바로 입구에서 몇m 걸어들어가면 당시에 전사자가 묻혔다는 봉분같은 흔적이 있었다. 그곳을 굴토결과 수류탄부터 미제 수푼, 탄창, M1완탄 등 20여 점의 유품이 발굴 되었다.
"대구 거주 오기용씨의 제보다"
내가 바로 그 왕릉에서 살았다. 지금도 왕릉 바로 좌측 울타리 밖에 보면 집 한채가 있는데 내가 살던 집이고 지금도 친척이 살고 있다. 어렸을 때에는 왕릉 앞에 죽은 시체가 여기저기 있었고 철모며 총도 많았다. 죽은 사람중에는 흑인도 있었다고 기억 된다. 그런데 북한군이 물러가고 알마 있어 미군은 들어와 다 찾아가는데 국군은 오지않았다.
지금 가보면 우리집 앞에 개울이 있는데 당시에 아버지가 계셔셔 묻었는데 분명 "이명우"라는 충남 공주출신이다, 그 당시에 상의 호주머니에 수첩이 있고 주소가 있어서 아버지가 그 집에 연락을 했고 답장도 왔다. 형편이 그러니 조금 있다가 발굴해 가겠다는 내용이고 그 후로 한두번 더 연락을 주고 받았다고 알고 있다. 처음에는 거적으로 덥었으나 한여름이라 자구 썩어가 아버지가 개울가에 묻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분이 대략 위치를 알고 있다. 하지만 끝가지 연락이 없었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우린 바로 '00년도에 바로 발굴작전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수류탄, 탄피등은 나왔으나 유해는 없다. 흙의 상태를 보니 마사토라 아마도 일찍 자연으로 산화되어 버린 모양이다.
"자식이 죽고 형, 동생, 오빠가 죽었는데 찾아올 비용이 없어 오지 못했다.
나라를 위해 사우다 전사했는데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느지... .
찾아주지 않으니 그 당시는 그렇게 유족들이 전쟁터를 돌며 유해를 발구해 가기도 했다."
6. 소련군 군사고문관 라조바예프의 보고서(1권 223p)
우리측 전사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수도사단은 9월 18일에 안강을 탈환하고 어래산-445-145-236고지선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적 제12사단이 어래산 일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구축해 제18연대는 여섯 번 만에 고지를 탈환하고 북쪽의 봉계동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적이 445고지와 190고지를 포기하고 물러나면서 445고지를 공격하던 기갑연대가 기계를 탈환하였다.
그런가 하면 소련군 군사고문과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50.8.1일에 안동을 점령했으며, 8월 11일에 포항동을 점령했다고 기록한다. 8월 12일 밤 8시부터 아군이 2개 여대 규모의 보병과 전차를 투입하여 안강리지역으로부터 역습을 가해왔으며, 8월 13일 포항동을 서쪽으로 우회하여 경주에 대한 공격을 ㄱ시하여 8월 14일 오후 2시에 부조(경주 동북방 19km)지역까지 진출하였으며 그 곳에서 9월 2일까지 존투를 수행했다고 기록한다.
9월 2일 오후 늦게 안강리, 안태봉(338.경주북방 6km)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아군의 조직적인 저항에 정지되었다. 9월 15일 오후 2시에 포위를 면하기 위하여 부대철수를 지시받았다고 한다.
9월 17일에 사단 예하들은 북쪽 방면으로 철수를 시작하여 9월 23일에 덕천 (공정리 서남방 10km), 장리부근에 집결하여, 사단은 23일에 안동을 거쳐 계속 후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다면 9월 18일에 안강을 탈환하고 이어서 어래산에서 6번의 쟁탈전이 있었다는 우리 제18연대의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
제 3 절 영덕 - 포항 전 투
1. 전투 개요
영덕-포항 전투는 1950. 8. 1일부터 9. 14일까지 동해안의 영덕- 포항 일대에서 국군 제3사단이 증원부대와 함께 영덕과 포하을 점령한 후 부산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5사단의 기도를 저지하고 반격작전의 발판을 마련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적 제5사단은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2주일이 넘도록 영덕지구에서 지체함으로서 그들이 기도했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초래하였다.
적 제2군단은 8월 공세의 주공을 대구로 지향하고 조공을로 적 제5사단은 동해안 축선에서 7월 말까지 포항을 점령한 후 경주-울산-부산으로 진격할 발판을 확보하려했다.
당시 포항은 항만과 철도, 육로의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동해안 최대의 병참기지이며 영일 비행장이 있어 미 제40전투비행대대가 지상부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 중에 있었다.
국군 제3사단은 7월 중순부터 적 제5사단과 일진일퇴의 격전을 전개해 영덕을 장악하고 있던 중, 8월 8일에 적의 공격으로 방어선이 무너져 남쪽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이때 제22연대장은 임의로 오십천교를 폭파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영덕-강구전투는 종료되었다.
제3사단은 제23연대로 오십천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제22연대를 남호동으로 철수시켰으나, 흥해 남쪽 냉천동에 적이 출현해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포항이 피탈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워커 중장은 브래들리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영일비행장 방어임무를 부여하고 육본은 민부대를 출동시켰다. 8월 11일 아침 포항시내로 진입한 적은 학도의용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포항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후방이 차단된 제3사단은 장사동 일대에서 교전을 반복하고, 흥해 북쪽에 적이 출현함으로써 협공의 위기에 처하자 8월 17일 06시에 해상으로 철수를 감행해 성공적으로 구룡포에 도착하였다. 또한 민부대는 형산강 남쪽고지 일대에 진출한 후 미군 전차소대의 지원아래 포항시가지로 진입하여 포항을 탈환하였다.
제26연대를 배속 받은 제3사단은 법천동- 양덕동을 연결하는 주저항선을 형성한 후 93고지에 대한 적의 계속되는 공격을 물리치고 포항을 재점령하려는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제3사단은 적의 9월 공세시 적 제5사단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중앙의 주저항선이 와해되어 효자동-두호동 선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형산강 남쪽으로 이동해 방어진지를 구축했으나 다시 송정동-장동선으로 물러나 새 방어선을 편성한다. 이어 사단이 옥녀봉을 탈한하고 운제산의 적 후방을 차단하자 적은 진지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퇴각을 시작하였다
2. 북한군과 국군 상황
가. 북한군 상황
1950년 8월 초 동해안을 따라 남진하던 북한군 제5사단은 영덕 남쪽 강구일대에서 국구 제3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전진이 교착상태였다. 이는 미 공군의 근접지원과 함포사격으로 인해 주로 야간에 이동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8월 9일 강구를 점령한 적은 더이상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 좌측 적 제12사단은 입암에 진출하였으며 그 선두부대가 흥해 서쪽 6km지점까지 진출하였으며 8월 11일 그 일부부대와 제766유격부대 일부병력이 포항시가지에 진입함에 따라 동부전선은 새로운 상황이 전개 된다.
적 제5사단은 병력이 8,500명 수준이었고 장비와 뮈로는 전차 5대를 비롯해 122밀리 곡사포 12문, 76밀리 곡사포 26문, 45밀리 대전차포 24문, 120밀리 박격포 12문, 82밀리 박격포 54문 등이었다.
나. 국군 상황
1950년 8월초 동부지구는 적 제12사단이 안동 동남쪽 산악지대를 이용 기계 및 안강 일대로 침투하고, 유격부대인 적 제766부대는 영덕에서 안강일대로 서남진하고 있었다.
동해안에서 적을 저지하고 있던 국군 제3사단은 영덕 남쪽 10km지점의 장사 일대로 후퇴하여 적 제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11일 적의 일부가 포항에 진입하자 제3사단은 후방이 차단되어 독석동에서 해상철수를 단행하여 구룡포에 상륙한 후 포항지구에 배치되었다.
한편 육군본부는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제3사단과 협조하여 안강과 포항 일대로 침투한 적을 격퇴하려 하였다. 또한 민부대와 수도사단의 일부 병력을 포항지구로 출동시켜 미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와 합동으로 적의 침입을 저지하려 했다.
제3사단의 병력은 12,600명 수준이고, 장비와 무기 수준은 포병은 없고 81밀리 박격포 80문, 60밀리 박격포 128문, 57밀리 대전처포 25문, 3.5인치 로켓포 47문 등이다.
주요지휘관은 사단장은 이준식 장군에서 8월 7일이후에는 김석원 장군이, 9월 1일 이후에는 이종찬 대령이 이고 제22연대장은 강태민 중령(8.18이후는 김응조 중령), 제23연대장은 김종원(8.12이후는 김종순 중령), 제26연대장은 이백우 중령(9.2이후는 이치업 대령)이며 배속 부대장은 제10연대장이 고근홍 중령이고 민부대장은 민기식 대령, 제1연대장은 한신 중령이었다.
다. 전투 경과
(1)영덕 탈환전과 독석동 철수작전
(가) 영덕 탈환전과 오십천교의 폭파
제3사단(영덕-강구) 철수 상황('50.8.8-9)
203 155
영덕
적5사-1개연대 206
184 우곡동 적 1개 연대
207
국22연
281 하자동
금호동
지곡동 173
국23연
150
국22연
오십천
오포동
강구
국23연 오십천교
신강구
국3사(전), 국22연, 국23연
남호동
영덕 북방 영해에서 적 제5사단의 남진을 저지하던 제23연대는 7월 16일 영덕 북방 4km지점의 활인산-237고지-매정동을 잇는 선상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하지만 적의 야간 기습에 혼란에 빠져 영덕을 상실하였다. 이후에 몇번의 공방정을 거쳐 원대복귀한 제22연대의 역습으로 207-181고지를점령하였다.
그리고 제23연대는 7월 29일에 유엔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영덕탈환전에 나서 다음날 제22연대가 영덕을 재탈환하였다. 따라서 8월 5일까지는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적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부대정비에 들어갔다. 반면에 안동을 점령한 적 제12사단은 청송-기계방향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적 제5사단은 8월 5일 야간부터 다시 공격을 재개하였고 결국 금호동 위 207-181고지선에서 저지하는데 실패하고 강구 북쪽 150고지선에서 사태를 수습하였다.
8월 6일 제22연대로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반격작전을 감행하여 결국 다시 207-181고지선을 회복하였다.
한편 사단전술지휘소는 181고지를 공격하던 적의 일부가 박격포 사격을 가하자 당황해 지휘체계가 마비되었다. 이로 인해 사단장이 이준식장군에서 김석원 장군으로, 독립 제1대대가 제23연대에 흡수되고 연대장이 교체되었다.
"또 무너진 오십천교, 한강, 안동대교이어 세번째 일방적 폭파(8월 9일 05시)"
8월 8일 저녁에 적 제5사단이 다시 강력한 공격으로 181-207고지선이 무너지면서 제22연대장이 8월 9일 05시 무렵 오십천교를 폭파하면서 도하를 하지못한 병력이 강물에 뛰어들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나머지는 강구에서 어선을 이용해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나)제3사단의 고립과 독석동 철수전
오십천 이남으로 철수한 제3사단은 흥해로 침투한 적으로부터 후방이 차단됨에 따라 8월 10일 후방으로의 공격을 계획하게 되는데 바로 미 제8군사령관 지시로 계획을 취소하고 해안경계에 임하게 된다.
강구를 점령한 적은 유엔 해군과 공군의 포격으로 고개를 들지못하고 해안에서 2~8km떨어진 야산지대를 따라 침투하였다.
사단의 부상자들은 장사동 해안에 정박한 LST로 이동해 부산으로 후송되었다.
8월 15일 새벽 흥해 북쪽에 적이 출현하자 사단은 해상철수를 실행하게 되는데 유엔 해군 함정과 공군기의 포격하에 8월 17일 07시에 독석동 해변을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철수작전을 완료 되었다.
(2) 포항 방어전
(가) 포항피탈과 학도병의 용전
북한군 제12사단의 증강된 1개 연대는 기계를 점령 후 흥해 남쪽의 냉천동 일대로 진출해 무방비 상태의 포항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포항에는 제3사단의 후방사령부와 전투근무지원 부대, 해군 포항경비 사령부, 공군 포항지부대 1개 중대, 그리고 경찰과 청년방위대 등 9,000명이 있었지만 조직적인 전투임무를 수행할 지휘체계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 미 제8군사령부는 영일 비행장 방어 임무가 시급한 문제로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를 급파하였다. 또한 포항 지구전투사령부는 민부대를 투입해 포항탈환을 준비한다.
한편 제25연대 제3대대는 열차편으로 대구를 떠나 8월 9일 09시경 포항역에 도착하였다. 전황이 긴박한 안강으로 2개 중대를 보내고 제9중대(대부분 학도병)를 소티재 105고지일대에 배치되어 있었고 적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결국 대량 손실을 입고 있었다.
한편 8월 10일 제3사단 후방지휘소가 설치된 포항여자중학교에는 전날 의성지구로부터 도착해 있는 71명의 학도병이 있었다. 이 무렵 적 제12사단의 1개 연대 병력은 소티재 제9중대 진지를 돌파 포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8월 11일 04시경 소티재에서는 적 제5사단 1개 연대와 제9중대의 교전이 시작되고 제3사단 후방지휘부는 학도병에게 방어임무를 부여하고 일부 병력으로 보급품과 기밀문서를 후송하기 시작했다.
※ 포항여중에서 전투한 학도병을 만났다(신광면 상읍 법광사에 포로 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날이 밝으며 적이 포항여중 정문을 향해 진격 50m까지 도달하자 일제히 사격으로 200여명을 살상하지만 15시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학도병 71명은 47명이 전사하고 적은 50~60명을 사살했다. 그리고 모두 실종 또는 부상으로 후퇴하게 되는데 이 시간에 대부분 행정기관은 안전지대로 대피하고 군수품은 민간선박을 이용 후송되었다. 결국 형산강 제방을 이용 방어선을 편성하고 포항은 적의 손에 들어 갔다.
(나) 미군의 증원과 민부대의 포항탈환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기계피탈에 이어 포항까지 피탈되는 상황에 영일의 전투비행장이 위협을 받게 되자 매우 심각한 상황을로 인식하여 8월 10일 미 제8군 에비인 제2사단장에게 즉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영일 비행장을 방어할 것을 짓시한다. 이에 따라 부사단장인 브래들리 준장이 미 제2-9-3대대와 미 제15야전포병대대 제3포대,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 M-16 고사기관총 1개 소대, 공병 1개 소대를 배석받아 브래들리특수임무부대를 편성 하여 비행장 경계임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 제9-3-K중대와 포병의 일부 인원이 늦게 8월 11일 유금동 터널고지를 통과할 때 적 제766부대의 기습을 받고 70여 명의 인명손실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워커 중장은 즉시 경주에 대기중인 전차 1개 소대와 국군 제17연대로 하여금 터널고지를 확보토록 하고 공군에의한 터널고지를 강타토록 하여 적 70여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그러나 8월 13일 제40전투비행대대가 아무런 협의 없이 일본 스즈키 비행장으로 철수하기도 하면서 8월 20일 브래들리특수임무부대는 해체되고 미 제9-3대대가 비행장 경계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기계와 포항지구에 침공한 적 제12사단과 제766부대는 포항지구전투사령부 예하 제25연대, 제17연대, 그리고 해군육전대의 반격에 일시적 물러나 있다 안강 북쪽과 포항으로 재진출하였다.
이에 육본은 8월 15일 군단예비로 있던 민부대를 영천에서 포항으로 이동시켜 17일 금호강선에서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적은 8월 11일 포항에 진입한 적은 일시 철수하였고 이틀 후에 다시 1개 연대가 포항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포항 북쪽에 진출해 있던 적 제5사단 일부 병력이 8월 15일 포항에 도달하자 적 제12사단 예하 연대는 서측방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포항외곾까지 진출한 민부대 제2대대는 8월 17일 14명으로 편성된 전투 정찰대를 피난민으로 가장 시켜 주간에 침투하여 적정을 살핀결과 적이 유엔군의 함포사격으로 포항 외곾지대 야산을도 대피한 것을 확인하여 8월 18일 04시에 형산강을 건너 시내로 진입했다.
이 시기에 국군 제3사단이 구룡포로 철수를 완료하였고 적 제5사단은 거침없이 남하하여 포항을 점령하기 위해서 흥해에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8월 19일에 육본은 민부대와 제3사단의 임무교대를 지시하여 제3사단은 제23연대가 민부대 배치선으로 진지를 인수하고 제22연대는 예비로 포항에 잔류하였으며 임무를 교대한 민부대는 신녕지구로 전진해 8월 20일 제5연대로 개편되었다.
(다) 제3사단의 반격과 주저항선의 형성
8월 17일 제3사단이 구룡포에 상륙함으로써 해상철수작전은 성공적읃로 완료되었다. 이날 사단은 독립 제2대대를 제22연대 제1대대에 편입시키고 신병을 보충받아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다음날 구룡포를 출발한 제23연대는 부산에서 도착한 신병 500명과 영등포학원 소속 장교 25명 및 시병 394명을 보충 받아 재편성하고 8월 20일에는 도음산에 배치된 제26연대를 배속받아 3개 연대의 사단이 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8월 19일 민부대와 임무교대를 제23연대로 하고 우측에서는 제26연대가 게속하여 도음산지역을 담당하였으며 예비인 제22연대가 사단의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적 제5사단은 사단의 우측방 93고지를 확보하여 계속적인 침투공격을 감행해 제23연대는 주야로 주인이 바뀌는 전투를 벌려야 했고 중앙의 제22연대는 흥해가지 진출했으나 적의 압력으로 초곡동 149고지가 피탈되면서 적의 일부가 후방으로 침투하여 초곡동 후방능선으로 철수한다
좌익의 제26연대는 도음산 전방 2km까지 진출했으나 8월 24일 적의 계속되는 압력에 불리한 상황에 처하여 제1군단장은 수도사단의 제1연대를 제26연대 좌측으로 진출시켜 전투 정면을 축소시켜준다.
한편 수일에 걸쳐 공격준비를 완료한 적은 8월 27일 새벽에 사단 전 정면에 공격을 감행하였다. 따라서 죄익인 제26연대 지역이 돌파되어 연대는 효자동일대로 철수하고 군단장은 제1연대로 하여금 돌파구를 저지하라 하고 제1연대와 제22연대 사이로 제1군단에 배속된 제8-1대대를 투입하였다.
계속적인 적의 압력에 군단은 제8-10연대를 8월 31일부로 배속 전환하여 효자동으로 진출시키고 전투력을 상실한 제26연대는 후방으로 이동시켜 재편성하도록 하였다.
※ 미 군사 고문관과 제3사단장의 갈등, 그리고 사단장 교체 "형산강을 넘어갈 수 없다. 넘어 오려면 강물이 핏물이 되어야 한다". "너는 안되면 바다건너 가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나라를 잃는다"
9월 1일 사단은 전 정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출은 어려웠다. 이날 제3사단장의 교체가 이루어져 김석원 장군의 후임으로 이종찬 대령이 부임하였다.
(라) 제3사단의 철수와 형산강 방어선의 형성
9월 공세 당시 제5공굑집단의 조공으로 흥해지구에 전개한 적 제5사단은 포항과 영일 비행장을 목표로 기동하였다. 이들은 목표를 점령한 후 계속 남하하여 울산, 경주로 해서 부산을 점령하려 했다.
9월 2일 03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 적 제5사단에 맞서 국군 제3사단은 좌전방에 배치된 제10연대가 수도사단 제1연대와 연결을 유지하고 중앙에 제22연대, 우측에는 제23연대가 93고지와 환호동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적의 공격개시 1시간만에 전방이 무너지면서 제10연대와 제22연대의 접경인 128~163고지의 중간지대에 돌파구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 9월 3일 제22연대는 소티재로 철수하게 되며 9월 4일 사단은 방어선을 자명동-111고지-96고지-소티재-두호동으로 재조정하였다.
하지만 좌측의 수도사단이 곤제봉-호명리 선으로 철수함으로써 좌측방에 3km에 달하는 간격이 발생하였다. 결국 제3사단은 9월 5일 저녁에 형산강변으로 철수를 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마) 형산강 방어선의 붕괴와 홍계동 부근 전투
9월 6일 제3사단은 형산강을 연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제1군단은 영천 피탈에 따른 병력 증원이 요구됨에 따라 제8-10연대를 원대복귀 시키도록 하는데 교대부대인 제22연가 도착하기전에 철수해 버려 형산-연일간 5km의 방어정면이 공백상태로 남게 되었다.
반면 적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적 제5사단은 증강된 1개 대대를 남하시키면서 제10연대의 방어진지를 점령하게 된다.
※형산강에 흐르는 핏물
하지만 국군 제3-22연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병력을 투입하다 적의 사격을 받고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옥녀봉(215)일대로 진출하여 적의 도하를 저지토록 했다. 그러나 이미 적은 운제산(480)까지 도달해 있었고 옥녀봉과 197고지로 진출하여 우측방 제23연대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사단은 9월 8일 방어선을 송정동-장도우복동 간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제1군단은 경주의 위기가 현실화 됨에 따라 미 "처치 특수임무부대" 장을 만나 처치 특수임무부대는 운제산을 공격하고 제1군단은 형산강 남쪽의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대책을 수립하고 9월 7일 영천 아화에 있던 제26연대를 제3사단 방어지역으로 차량으로 이동시켰다.
이 무렵 제1군단장은 운제산의 적이 남서쪽 2km지점의 503고지로 진출하자, 적의 목표가 경주라고 확신하고 천북면 동산동에 집결한 제18연대를 503고지 남서쪽의 438-392고지선으로 진출시켰다.
원대복귀를 지시받은 제26연대는 9월 9일 경주-감포-양포동을 경유 세계동으로 이동, 제8-3대대를 배속받아 131곶지 일대를 점령, 미 처치 특수임무부대의 공격발판을 마련했다.
한편 미 처치 특수임무부대는 미 제24사단 부사단장 데이비슨 준장에게 운제산 탈환 임무를 부여하고 미 제19연대(1), 미 제9연대 3대대 및 제9연대 전차중대 등으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 9월 11일 공격을 개시하여 운제산을 탈환하여 제26연대에 인계한다.
한편 9월 8일 제1군단은 미 데이비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이 지연되자 197고지와 옥녀봉을 탈환해 적의 퇴로를 차단토록 제3사단에 명령하였다.
제18연대장은 9월 9일 이른 새벽에 수색대를 침투시켜 적의 방어진지를 확인한바 적이 보급과 증원 병력의 차질로 진출이 중단되었음을 판단하고 9월 11일 데이비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에 맞춰 옥녀봉을 공격하여 적을 고립시켰다.
9월 12일 제18연대는 마침내 형산을 탈환하여 형산강변의 방어진지 일부를 회복하였다. 그러자 적이 낙산지역의 제1연대와 제18연대 사이로 철수하는 것이 확인되어 지원 포병과 보병의 공격으로 무려 2,000여 명이 사살되고 56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한편 적은 운제산과 형산 및 곤제봉을 빼앗긴 9월 12~13일에 이르러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23연대는 연일을 공격하여 적의 감제하에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9월 14일 05시에 연일을 탈환하였다.
이로써 제3사단은 9월 6일 방어선이 돌파된 이후 8일만에 형산강변의 방어진지를 전부 회복하고 반격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영덕-포항전투 결과 북한군 제5사단은 영덕지구에서 국군 제3사단의 저항에 직면에 2주일이란 시간을 소비했다. 사실 북한군은 7월 하순까지 포항을 점령하여 안강-경주축선을 이용하여 부산을 점령하려던 계획은 해군 및 공군으로부터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은 제3사단에 이해 좌절되었다.
하지만 국군도 인수부대가 오기도 전에 인계부대가 빠져버려 적이 그 공백을 이용하여 침투, 형산강 방어선이 무너지는 등 문제점을 노출하였고 9월 14일 형산강 도하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엄청난 피해를 입고 실패하여 9월 19일에 다시 도하작전을 하는 등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온 전투다.
적은 9월 22일 전면적인 철수가 시작되었고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도주하는데 급급했다.
4. 전투 결과
동해안 축선을 따라 남진하는 임무가 부여된 북한군 제5사단은 영덕지구에서 국군 제3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2주일이 넘도록 지체함으로서 적 제2군단의 작전계획에 상당한 차질을 초래하였다. 적 제5사단은 국군과 유엔군이 방어선을 형성하기 이전인 7월 하순가지 포항을 점령하고, 안강-경주 축선으로 남하해 울산을 거쳐 최종 목표인 부산진출하는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엔 해군 미 ㅊ공군의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은 국군 제3사다늬 저항으로 좌절되었다.
9월 12일과 13일 양일간 운제산과 형산, 그리고곤제봉을 빼앗긴 적은 공격에 한계를 느끼고 공세작전에서 ㅅ세작전으로 전환하였다. 경주 북방까지 한 때 진출했던 북한군은 동부전선에서 더 이상의 공세를 중단하고 병력을 수습하여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을 하여, 국군 제1군단은 주공인 미 제1군단의 조공으로 동부전선에서 반격에 참여 한다.
국군 제3사단은 9월 14일 형산강 방어선을 재편성하고, 9월 17일 반격을 개시하여 형산강 도하작전을 전개하였으나 1차 실패하고 9월 19일에 형산강 도하에 성공하여 9월 20일에 포항을 재탈환한 후 포항-청하-영덕 축선을 따라 북진을 개시하게 된다.
5.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학도병의 진실
협조되지 않은 오십천교의 폭파로 제3사단은 많은 피해를 감수하고 축차적인 철수를 해야했다. 그러다 기계가 피탈되고 적의 일부 병력이 포항시내로 진입하여 퇴로가 차단되는 위기에서 장사동에서 해상 철수작전이 성공하여 다시 구룡포에서 재편성을 하여 포항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 싯점에 8월 11일 포항시내 포항여자중학교에서 북한군과 학도병이 전투를 벌여 71명중 47명이 전사하고 24명의 인원은 부상이나 실종 등 위대한 전투가 있었다고 기록된다.
그럼 이 학도병 용사님들은 어디서 왔을까?
전사에는 구산동에서 의성으로 철수한 수도사단의 지휘부에서 이곳 후방지휘소가 마련된 포항여중으로 왔다고 기록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 상황으로 과연 의성에서 포항으로, 수도사단장에서 제3사단장으로 가는 김석원 장군을 따라 갔다는 것은 이해가 힘들었다. 그래서 참전용사님들은 만나 이야기를 들은 결과 이미 진천에서부터 따라다닌 분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당시에 김석원 장군은 사회적으로 지명도가 있어서 이분 밑에 가면 대우받고 살 수 있다는 나름의 희망들이 학생사회에 퍼져 있어서 그를 따르는 학생 수가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포항에 지휘부가 있다하니 여기저기 학생들이 수소문해서 개별로 찾아가는 학생들도 있고 실제 의성에서 수도사단을 떠나 제3사단으로 간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혹시 그 당시에 전우중에 어머니께 편지를 써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니나요?"
난 쉽게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 당시에 집단으로 가매장되었다가 화장되었다는 것만 들었다.
※ 화개장터 위 탑리 전투('50. 7. 26?)
호남지역 전투에서 이영규 소령 부대(제5사단 제15연대 소속)를 따라 다니던 전남 여수.순천의 학도병 200여명이 남원으로 북상했다 다시 구례를 거쳐 하동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하동 화개장터, 탑리라는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참전용사 정효명님이 증언을했다. 그러나 우리 전사기록이나 소련군 군사고문관 보고서에도 이런 사실은 명확하지 않다.
학도의용군자료집('1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발행)에 보면 생존한 몇분의 증언록이 수록 되어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이보다 훨씬 앞서서 여기 대담하신 분들은 모두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백영기 예비역 장군만 만나지 못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미 고령이다보니 말씀의 시기가 잘 이해하기 힘들었다. 서울학도포병동지회 강성모님의 증언록은 책으로 나와 있고(제18포병대대 역사관에 보관돼 있었음) 나는 이걸 읽고 화천 북방 지금의 제15사단 책임구역인 삼천봉 전방 735고지의 발굴장소를 결정하게 되고 무려 300여 명의 전사자를 발굴해 냈다.
정효명 용사님도 벌써 '06년도부터 만나 증언을 들었고 함께 탐리지역을 탐사도 하고 '07년도에 10구를 발굴도 했다. 그러나 증언처럼 최초의 학도병 전투지라는 것은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우리 전사기록에 불명확하고 소련군 군사고문관의 기록에도 없으며 지역주민들의 기억이 우리가 전투를 했다는 것 보다는 행군중에 아침식사를 준비하다 적에게 대응하지 못하고 전사했다는 설이 많았다. 탑리 지역에서는 나이드신 분은 거의 다 만나 보았다.
최초는 육군 정훈국이 수원에서부터 모집했고 실제 진천 잣고개(봉화산)전투시 학도병이 김석원 장군을 찾아가 참전을 했다는 것은 용사님들의 증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물론 춘천지구 전투시에도 교복입은 학도병이 참여한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린 학도병인지 학도의용군인지 용어의 혼란스러움도 있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아니면 단순 용어의 겉치레이니 나는 그걸 알려고 노력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무의미했다. 이미 그 당시에 전쟁 나기 전에 학교에는 학도대가 있어서 예전의 학도호국단과 같은 교련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왜 학도라는 말이 시작되었는지 알게 되엇다.
일부는 의용군은 북한군이 남한에 진주해 있으면서 낙동강 전선이 불리해지자 점령지역 청소년을 붙잡아 가는 구실로 조국해방을 위한 의로운 참여라는 미사여구를 붙인 것이고, 남한은 대다수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학도병이라 하는 것이 맞다고 한다.
실제 당시에 사용된 명칭은 다양해서 학련 구국대(이철승이 위원장), 학도호국치안대(도 경찰국장이 발행), 비상학도대(대령 이선근), 학도의용대(대령 이선근), 학도유격대 등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르게 명명 되기도 했다. 그러니 무엇이 정답인지는 사실 내가 답하기는 어렵고 모두가 책가방을 놓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들어가 잘은 모르지만 명령에 딸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다는 명분은 동일하다.
다만 북한군의 선전선동에 그들의 강제와 요구로 참여한 학생신분의 학도의용군의 평가는 역사가 증명하리라 본다.
물론 그 당시에 남한도 강제로 징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학생신분이 아니라 군에 갈 정령이 되었기에 의무로서 가야하는데 일부 병역기피 사례가 빈번해지다 보니 좀 키가 크고 덩치가 있으면 피난민 대열이나 피난민이 모여있는 곳에서 강제로 타에 태워 현역으로 입대시킨 사실이 분명 있었다.
나는 포항여중 참전 전우회 일원을 살아계신 분은 모두 만나 보았다. 그 이름이야 다 델 수는 없지만 김만규, 유명욱씨등 나는 포항이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혹은 제18연대, 백골부대 전우회 등에서 만나뵙고 포항여중 전투의 무용담을 들었고 몇분은 우리와 같이 포항여중을 찾아가 탐사와 그 뒷산부터 일대의 구릉성 능선을 전수 탐사했다.
※ 포항여중에서 전투한 학도병(김만규님)을 만났다(신광면 상읍 법광사에 포로 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옆에서 다른 전우중에 목사님의 옛날를 조금 말해준 분이 있다. 대구 분이고 포항에서 목회를 하다 지금은 군포인지 조그만 교회에 계시다는 이야기도 했다. 난 동작동 현충원 무명용사탑 앞에서 그 일행을 만나 초모행사에 참여하고 점심도 도시락으로 같이 했다.
"참전용사님, 어떻게 살아나셨어요?"
"그걸 말로 표현이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운명은 주어진 것이라 하기에도 그렇고 아니다 하기에도 그렇고 어쨋든 살아났어요"
"혹시 질문에 잘못이 있다면 용서하시고 제가 궁금한 것은 그당시에 사실 국군은 한 일이 없이 학도병들로만 정규전을 한거잖아요. 그런데 살아서 다시 돌아오셨다는 것은 기적이거나 신의 과호가 있었다고 봐야 하기에 너무 감격스러워서 하는 질문입니다. 절대로 다른 뜻이 없으니 이해바랍니다."
"내가 붙들려 간 곳이 법광사란 절이야. 절에 끌려 가니 나 말고도 군인도 몇 있고 경찰도 있고 한 3~40명은 되어 보여요. 그런데 계속하여 함포가 떨어지지 비행기가 폭격하지 그러니까 우릴 경비하는 북한군들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쏘리고 그 놈들이 더 웃겨. 살려고 숨는 것이."
"아 바다에 있는 함정에서 함포를 여기저기 사격했나 봅니다."
"그럼 바다는 유엔군이 장악하여 이놈들이 꼼짝못하고 있었지. 그래서 비행기가 떠서 정찰을 하고 나면 곧 포격이 시작되니 우리들 포로들도 예외는 없어요. 그래서 사실 그 아군 포격에도 많이 죽었다고 봐야돼요."
"그래서 북한군들이 숨는 틈을 이용하여 탈출한거군요?"
"그게 아니고 사실은 거기 있는 간호사가 도와 주었지"
"예? 간호사가 도와주다니요?"
"부상당한 포로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간호사가 서울에서 내려온 여자의용군인데 이화여대 다니다 북한군에 입대하여 이곳에 온 모양이야. 그러니 조금의 애환이 있었겠지. 팔이 부러진 환자, 다리가 부러진 환자, 턱이 내려앉은 환자 등 무수한데 손가락에 파편상인 나한데 관심을 갖고 고향이나 기족등을 물어보고 하더라고. 난 그때 17살이었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된건지 갑작스레 모두 북한군이 사라졌어. 나는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이 간호담당 분이 손짓을 하는거야. 저리 가라고... ."
"그래서 탈출하여 밤낮으로 걸어서 다시 포항에 갔어요"
※백인엽 사단장의 이중성(?), 그리고 박태준 중위의 고마움~~!"
"걷다보니 몇명의 동지가 모여 산속을 위주로 걸어서 어느날인가 포항에 갔는데 사단장인 김석원 장군이 없고 백인엽이 사단장이라고 해. 그래서 우릴 대변할 사람이 없어 우린 헌병대에 북한군 공작원으로 붙들려 갔어요"
"하기야 뭘로 증명할 증명서가 없으니 난감하셨겠네요"
"그래요, 우리가 포항여중에서 전투한 학도병들이라고 해도 들어주지도 않아. 한번은 헌병초소 앞에 우리들이 여럿 앉아 있는데 사단장 차가 지나가는거야. 그런데 우리가 잘 모르고 경례를 안했어. 그랬더니 차를 세우고 지키는 헌병을 오라더니 "저놈들 누구야?"하고 물으니 헌병이 학도병들인데 하니 더 물어보지도 않고 "귀찮은 놈들 빨리 처리하라고 해"하고는 씽 가버렸잖아
"와 그래서 이제는죽었구나 하셨겠네요"
"그렇지요. 아니 나라위해 책가방 내던지고 총을 잡고 싸웠더니 프락치로 몰아 처형하라는 것이니 기가 막히는데 뭐 다른 방도가 없어요. 우릴 대변하 사람이 없으니"
"그런데 어떻게 살아났어요?"
"아니 뭐 이런 말 있잖아요, 쥐구망에도 볕들날 있다고. 누가 지프를 타고 왔는데 당시 우릴 통제했던 남소위란 분이 온거야. 그래서 우린 신원부증이 되어 살아나 맥없이 걸어가는데 무슨 조그만 트럭같은 것이 와요. 나중에 알았는데 당시에 수송차량을 책임지고 있는 장교라는데 바로 박태준 중위였어. 이 장교가 우리 꼴을 불쌍하게 여겨 밥도 갔다주고 어디서 구했는지 군복도 갔다주어 입게 되었어요. 무려 한 달 만에 옷을 갈아 입었다니까" 이 분들 이야기는 백인엽장군은 안좋게 보였다. "김석원 장군을 따라왔다고 하면 "저놈들 없애라는 식"이었다 한다.
그러나 전사에는 김석원 장군의 후임으로 이종찬 대령이 기록되어 있다.
무엇이 맞느지는 모르겠다. 다만 당시의 혼한스런 상황에서 제17연대장이었던 백인엽 대령이 최초 후퇴작전간 평택지구에서 부상으로 후송이 되고 김희준 중령, 부연대장이 지휘하게 된다. 이후 복귀하는 과정에 제17연대가 인천상륙작전 부대로 선발되었고, 장군으로 진급한 백인엽은 상륙작전부대자이 되기 위해 장군 계급장을 떼고 대령을 달고 연대장으로 참여한다. 이 과정에 일시적 장군으로 잠깐이나마 제3사단장이 되어 포항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나. 미 군사 고문관과 제3사단장의 갈등, 그리고 사단장 교체 "형산강을 넘어갈 수 없다. 넘어 오려면 강물이 핏물이 되어야 한다". "너는 안되면 바다건너 가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나라를 잃는다"
나는 서울 대방동에 있는 성남고를 다니면서 김석원 장군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에 나의 국가관도 형성 되었다고 본다. "젊은이는 육체가 건강하면 군대를 가서 나라를 위해 위국헌신 해야한다"는 것이 김장군의 평소 지론이었다.
나는 백인엽장군도 그분이 인천 선인재단 이사장 시절에 지금의 인천공대 전신인 인천전문대에서 토목공학과를 반년 수강하면서 장군님을 자주 만났었다. 겉치레 없고 정말 성실하시며 강직한 분이라고 기억된다. 별별 루머도 수없이 들었지만 적어도 포항 여중 학도병님을 만나기 전에는 장군님을 좋아했었다.
전사책에는 마치 당시 제3사단장인 김석원 장군이 지병이 악화되어 이종찬 대령으로 바뀐 것처럼 되어 있으나 사실은 대부분 다 아는 사실로 미군 군사고문관과의 마찰이 원인이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장군은 미군의 형산강 이남으로의 철수를 하라는 통보에 반대를 하셨다. 지금 이 상황에서 충분히 방어가 가능한데 굳이 형산강 남안으로 방어선을 형성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제8군측은 철수를 강요했고 여기에 장군께서 전속부관이 갔고 있던 일본도를 들어 미군 군사고문관의 머리부분에 대고 " 당신들은 싸우다 안되면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나라를 잃는다"라고 하며 소리를 크게 질렀다. 그러자 놀란 고문관이 도망쳐 제8군으로 복귀해서 워커에게 "나 한국측 제너널 김 있으면 임무할 수 없어요"라고 고함으로써 이 사실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통보되었고 사실 보직을 해임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워낙 명망이 높았기에 바로 내보내지않고 슬며시 특명단(지금의 합참 준비태세 점검단과 같은 성격)에 발령하여 전장에서 발을 빼게하여 미군의 비위를 맞추어 줬다고 봐야 한다. 그 후에 장군은 '56년도에 소장으로 예편하지만 별 둘을 달아본 적이 없다.
"학생들 앞에서 깨어진 장군 철모"
사실 김석원 장군은 당시 그 유명했던 김활란 여사, 임영신 여사 등과 교분이 있었고 이는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그 내막은 내가 밝히기는 그렇다. 하지만 전방에서 북어 명태 사건으로 채병덕 총장과 동반 시퇴하고 있다 전쟁시 철수중에 다시 수도사단장으로 보임된 것이 임영신 여사의 천거가 있었다고 한다. 껄끄러운 상대인 김장군은 퇴임후에 학교에 있으면서 어느날 아침 조회시간에 대통령의 특사로 정일권 장군이 별이 달린 철모를 가지고 왔는데 "나는 이런걸 받으러 군인이 되지않았소"하며 바로 시멘트 연단 위에 내던져 투구는 깨져버렸고 머쓱게 정장군은 현장을 떠났다고 한다. 그 후에 장군은 5.16혁명전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의원에 당산도 된다. 자유당과는 원수처럼 살았다.
일부 비평가들이 무능과 무대포를 말하지만 당시 군대는 군대도 아니였다. 채병덕 시대의 군대는 북에다 무기를 주고 명태와 물물교환하던 썩어 문들어진 군대문화속에 빠져 있었다. 전쟁 전날 육군회관 개관식에 참여하여 술에 골아 떠러진 채로 전쟁을 맞이했던 군대다. 당시 미군 군사고문관들은 우리를 돕기보다는 우리를 얕잡아보고 자기들에게 굽신거리는 군인을 원했고 김장군은 반대로 그들을 업신여겼던 것이 차이다.
진천지구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임시정부의 대전에서 부산으로의 탈출(?)은 어려웠을 것이다. 영덕지구 전투도 이미 수도사단에서 제3사단장으로 갈 때는 북한군이 영덕 일원을 탈취하고 있던 시기고 그래도 무너진 진열을 가다듬고 장사동에서 장병과 장비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을 무사하게 구룡포로 해상철수케 하고 다시 포항으로 진출한 진정한 군인이었다고 본다. 그 당시에 그의 나이는 무려 60세였다.
다. "형산강에 흐르는 핏물" [대대장과 전령, 그리고 중대장(형산강을 헤엄으로 건너다니며 명령 전달]
나는 지난 20여년의 유해발굴 작전을 진두지휘하면서 정말 많은 참전용사님과 지역주민, 유가족 분들을 만났다. 하지만 내가 그분들의 어떤 혜택을 드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였다. 다만 그분들의 전쟁이야기를 듣고 또는 지역의 전쟁실태를 알고, 유가족의 한을 들어주는 역활이었다.
그러다 보니 솔직히 내가 내 시간을 갔고 여유를 갔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주말에도 거의 전투지역 산에 가거나 아니면 참전용사님을 만나야 했다.
그러던 중에 어느날 참전용사 한 분이 주말인데 현충원에 오셨다가 나를 만났다. 제3사단 백골부대 소속이란다. 즉 제18연대 제3대대라고 하였다. 본인이 대대장 전령이었다며 형산강 제방둑을 한번 가보았으면 했다. 그래서 나는 함께 고속버스편으로 포항을 가기로 하고 동행을 했던 적이 있다. 왜냐하면 관용차로 갔다가 혹시라도 도중에 어떤일(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항상 조심해야 함)이 벌어지면 솔직히 난감한 문제이기에 아예 주말을 이용하여 함께 가보기로 한 것이다.
"바로 이 부근인데 흔적도 없네!"
"아니 여긴 개활지라 몸을 숨길곳도 없는데 어떻게 싸우셨나요?"
"그러니까 미치는 거지. 당시는 강둑이 길게 연결되어 있고 바로 그 밑이 논바닥인데 그 각진 곳에 호를 파고 몸을 숨기고 있다가 아군이 도하하게 되면 얼굴을 내밀고 위로 사격을 하는거야"
"비행기나 포병사격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왜 없어요. 고개를 들 수 없도록 퍼붓는거야. 그런데도 저놈들이 위에 있다보니 움크리고 있다가 쏘아대니 피해가 말 할 수 없어요. 강물에 뛰어든 인원들이 저 편으로 당도하는 인원이 없어"
"그럼 다시 돌아오는 겁니까?"
"다 죽는거야. 수영을 잘하여 잠수하더라도 몇분이잖아. 얼마나 죽는지 정말 저 강물이 벌겋게 되었어요!"
용사님은 눈물을 흘리신다. 아니 강물이 핏물이 되었다고 한다. 정말 비가 퍼부어 강물이 범람하는데 핏물이 논으로 흘러들었다고 한신다. 얼마나 전사했을까?
※대대 전령으로 형산강에 뛰어들다
유금리 터널을 지나 갑산리 방향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여기도 용사님이 싸운 곳이 아니다. 다시 연일읍 방향으로 들어거 중단리 제방둑으로 갔다. 여기도 아니다. 이미 하천 정비사업으로 그 당시의 모습은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용사님이 전쟁당시의 현장을 찾으려 한 것은 바로 용사님이 전령으로 중대장에게 대대장의 명령을 전하려 직접 물속으로 뛰어들어 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전령을 한다고 하니 요즘 당번이 아니라 전화를 할 수 없으니 종이에 쓴 명령지나 전달사항을 가지고 직접 가는 거라 무척이나 중요한 직책인 것이다.
도하 공격을 개시하여 일제히 진격을 개시했는데 한쪽 중대는 여하히 강을 건너 강너머 둑에 엎드려있는데 한쪽 중대는 올라서지 못하고 밀려나 앞에 있는 적들이 다시 한쪽으로 집중하는 상황에서 피해를 막기위해 후퇴하여 돌아오라는 멧세지를 전달하는 임무였다.
쌍방이 포병과 박격포, 아군은 비행기 폭격까지 감행하고 있는 상황이라 한치 앞도 바라보기 힘든 그런 상태에서 용사님이 둑을 올라 강물로 뛰어드는 순간 이미 적이 감지하여 기관총 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강물 바닥에 엎드려 기다려야 하는데 해녀도 아니고 길어야 2분을 남기지 못한다. 얼마나 쏘아대는지 강물이 흙탕물로 뿌연한데 고개를 살며시 들어보니 무슨 여름날 오후늦게 해질무렵 강물에 뛰어오는 고기떼처럼 총알이 뜅기어 그렇게 차 오른다.
※ 강물 속은 뻘이 아니고 모두 시신이었다
천우신조인지 총을 맞지않고 물속을 기다시피하여 명령지를 전달하고 다시 돌아오는데 이건 콩볶는 소리보다 더 요란하게 난리다. 머리속에는 살아야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다시 물속을 긴다. 그런데 뭐가 큰 것이 손에 걸리어 보니 군인이다. 아군인지 적군이지 분간할 방법도 없고 그런 생각도 하지못했다. 그러고 보니 온통 죽은 군인들이 바닥에 깔려 있다. 도대체 얼마나 죽었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데 그만 한방이 손등을 지났다. 퍽하는 순간이다.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계속하여 남으로 물을 헤치며 나아가 둑으로 올굴을 내밀며 굴렀다. 논바닥에 떨어져 손을 보니 피투성이다 위생병이 포복으로 다가와 지혈을 하고 임무는 완수하였다. 다행히 지혈는 되고 바로 후송되어 3개월을 보내고 후방으로 배치되어 살아서 제대하였단다.
"형산강은 정말 제3사단이 다시 도하하여 올라설 때는 피로 강을 물들이고 포항시내로 진입했다. 김석원 장군의 말이 적중한 것이다."
6. 소련 군사고문관 라주바예프의 보고서 "해병대 상륙군의 진실?"
[제5사단은 영덕으로부터 연안을 따라 진격하여 별 저항을 받지않고 8월 18일 흥해를 점령하고 그 곳에서 9월 2일까지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제5사단은 9월 2일 제2군단 예하 구성군 전체와 함께 공격으로 전환하여 9월 5일밤 10시 무렵 포항동에서 적을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하였다. 9월 11일 경주 동북방 20km 지점인 용산동을 점령했으나 강력한 화력저항과 역습으로 그 곳에서진격을 멈추었다. 9월 17일까지 방어전을 전개하다 심각한 손실을 입은 채 (연대 병력 중 800명만 남았다) 철수하기 사작했다. 이후 사단은 전면적인 퇴각명령을 받았다.
적은 동해 연안을 따라 이루어지는 제5사단의 후퇴를 차단할 목적으로 9월 16일에 천전동(영덕 서방 1km)지역에 1,500명의 해병을 상륙시켰다. 하지만 제5사단의 훌륭한 작전으로해병 상륙군은 격퇴되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소련군 군사고문관이 속속들이 전장상황을 파악하여 보고하기란 어렵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이 9월 15일 전개되는데, 9월 16일 해병대의 영덕지구 상륙작전은 무언가 수상하다. 우리가 장사지역에 양동작전으로 학도병이 주축인 772명이 문산호를 타고 9월14일~15일에 실시하여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하고 나머지는 모두 실종된 전사가 있다. 이 당시에 동원되었던 문산호가 1991년3월즘에 난파선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 두가지를 비교해 보면 일치되지 않으면서 뭔가 개연성이 또 있어 보인다. 진실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