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프라노 비벌리 실스가 부르는 30년대 샹송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Parlez moi d'amour,빠흘레 무아
다무흐>, 이 노래는 우디 알렌의 최근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흘러 나옵니다
[ 아폴리네르와 시 <미라보 다리>의 탄생지를 찾아 ]
파리의 세느 강에는 35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파리 한복판의 시테 섬을 가로지르는 퐁뇌프(지금은 가장 오래된 다리이지만 이름은 새로운 다리라는 뜻입니다)로 4백년 전인 1578년에 기공된 것이고,가장 긴 것도 250m 길이의 이 다리입니다. 가장 아름답기로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세워진 알렉산드르 3세 교(橋)를 치죠.
그러나 파리를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찾는 다리는 이 다리들 보다는 파리 시내에서도 서쪽 끝의 좀 외진 곳에 있는 미라보 다리입니다. 1895년에 세워진 미라보 다리의 길이는 190m, 폭이 20m.
* 미라보 다리
레잘이라는 사람이 설계한 궁상(弓狀)의 철제교로 두 개의 교각 사이의 가운데 다리 마디는 길이가 1백m가 넘어 돌다리로는 할 수 없는 공사를 해냈다고 건설 당시는 평판이 대단했던 다리이기도 합니다.
그뿐, 달리 자랑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닌 이 미라보 다리가 전 세계에 널리 이름을 떨친 것은 바로 기욤 아폴리네르의 명시 <미라보 다리> 때문입니다.
* 미라보 다리
세느 강이 유독 미라보 다리 아래로만 흐르는 것이 아닌데도 아폴리네르가 이 다리를 노래한 것은 우연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시를 쓸 때 그 부근에 살았고,거의 매일 이 다리를 지나 다녔습니다.
시(詩) <미라보 다리>는 시인의 실연(失戀)의 노래입니다. 시인은 마리 로랑생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마리 로랑생이라면 서양 미술사에 과히 흔치 않은 여류화가 중 대표적 존재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1907년 27세의 아폴리네르는 당시 아직 무명이던 22세의 마리 로랑생을 피카소의 소개로 어느 화상(畵商)의 가게에서 만났습니다. 피갈(파리의 몽마르트 지역에 있습니다)에 가까운 에네르 가(街)에 살던 그는 매주 수요일 문인과 화가들을 초대하는 모임을 열었고 마리 로랑생은 여기에 반드시 끼었습니다.
앙리 루소의 유명한 그림 <시인과 뮤즈>(바젤 미술관 소장)는 이 두 연인의 상(像)입니다.
* 앙리 루소의 그림
라 샤펠 지역에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마리 로랑생이 얼마 후 오퇴이유 지역의 라 퐁텐 가(街)로 이사를 하자 아폴리네르도 미라보 다리에 가까운 이 동네의 그로 가(街) 15번지로 옮겼습니다. 1912년 마리 로랑생과의 사랑이 끝나고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를 이 집에서 씁니다.
이 시는 연인과의 파국을 세느 강의 흐름에 의탁한 것이죠. 아폴리네르는 이 연인을 그리워한 다른 시(마리)에서도 “강물은 내 괴로움 같아서 항상 흘러 마르지 않는다”고 읊었습니다. “아무리 바라보고 있어도 지치지 않는다”던 세느 강은 그에게 장한(長恨)의 강이었고 몽파르나스에 살던 샤갈의 집에 갔다 돌아오거나 하면서 걷던 미라보 다리는 발 무거운 다리였습니다.
마리 로랑생은 피카소,브라크 등 입체파 화가들과 친교를 맺은 뒤 아폴리네르와 헤어지던 1912년 첫 개인전을 열어 인정을 받았고 2년 뒤 어떤 독일인과 결혼합니다.
* 파리의 오퇴이유 지하철 역
다리에서 상류 쪽을 바라보면 오른편 강변에 현대식 고층 아파트촌이 들어서 있고 그 너머로 아폴리네르 때 이미 있었던 에펠 탑이 하늘을 찌릅니다. 다리 아래로는 페니슈라 부르는 기다란 하천 수송선들이 하루살이들처럼 지나 다닙니다. 세월은 가고 사랑도 가고 시인만 남던 다리에 이제 그 시인마저 가고 시(詩)만 남았습니다.
아폴리네르는 1913년 1월 실연의 땅 오퇴이유를 떠나 생 제르맹 데 프레로 집을 옮겼습니다.
“사람은 아쉬움없이 아무 것과도 헤어질 수 없다. 자기에게 불행을 안겨다 준 장소나 물건이나 사람이라도 그렇다. 그리운 오퇴이유여, 내 커다란 슬픔이 고인 고장이여, 나는 쓰라림없이 너를 떠나지 못했다”고 그는 뒷날 <양안(兩岸)의 산보자>에서 미라보 다리 부근 시절을 회상하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 양안(兩岸) : 세느 강은 좌안(강 남쪽),우완(강 북쪽)으로 나뉘어 불리웁니다.
* 에펠탑과 세느 강
생 제르맹 대로 202번지. 이 집 6층 꼭대기에서 아폴리네르가 마지막 6년을 산 후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 자클린이 1967년 죽을 때까지 이 집을 지켰고 아폴리네르에게는 직계 후손이 없어 지금은 처조카뻘 되는 부다르 아폴리네르 씨가 주인입니다.
대시인의 거소로는 뜻밖의 누거(陋居)입니다. 나무바닥의 침침한 방들은 손바닥만씩하며, 침실 벽에는 마리 로랑생의 명작 <아폴리네르와 그의 친구들>이 걸렸던 자국이 남아 있고, 그 자리에 대신 복사판을 걸어 놓았습니다.
1909년에 그려진 이 그림의 원화는 현재 파리의 상트르 퐁피두 센터(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배경에 미라보 다리가 보입니다. 아폴리네르는 평생 이 다리를 곁에 더불고 살았던 것입니다.
아폴리네르의 방에 남은 유물은 장롱 하나, 의자 하나, 그리고 서재에는 4천여 권의 장서가 그대로 고스란히 꽂혀 있습니다. 부다르 아폴리네르 씨는 이 집에 있던 마리 로랑생의 그림 6점을 물려 받았습니다. 팔면 엄청난 값이 나가는 재산가입니다. 수년 전에는 마리 로랑생의 그림을 탐내어 도둑이 들었었다고 합니다.
서재 옆의 좁다란 계단을 비집고 오르면 지붕 위의 별실이 나옵니다. 아폴리네르는 파리의 우울한 회색 지붕들이 창 밖으로 내다뵈는 이 1평짜리 옥탑 방에서 글을 썼습니다. 전위(前衛)란 한 평의 운동장으로도 족한 운동이던가요. 아폴리네르는 20세기 초 전위예술의 기수였습니다.
* 파리의 세느 강, 왼쪽 자세히 보면 에펠 탑이 보이고 그 왼쪽 세번째 다리가 미라보 다리입니다.
아폴리네르의 집 부근의 생 제르맹 대로 변에는 소위 <문학 카페>로 유명한 곳이 두 군데 있습니다. <오 되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 <카페 드 플로르>는 아폴리네르가 앙드레 살몽 등과 <스와레 드 라 플륌>이란 모임을 만들어 토요일마다 새로운 시의 개혁을 논하던 곳입니다.
그 바로 옆에 나란한 <오 되 마고>는 2차대전 직후 샤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브와르가 진을 치고 앉았던 실존주의의 탄생지로서 생 제르맹 데 프레 지역을 파리의 명물로 만든 카페입니다.
<오 되 마고> 건너편의 생 제르맹 데 프레 광장 한쪽 가에는 교회 옆의 소록지(小綠地)에 동제(銅製) 소녀상이 하나 서 있습니다. 1952년 피카소가 옛 친구 아폴리네르를 추념하여 그에게 헌정한 것입니다. 아폴리네르가 이 지역에 심은 예술적 분위기의 기념상이기도 합니다.
아폴리네르는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긴 자연석 석주가 선 묘비에는 “무게 없는 인생을 나는 얼마나 많이 손으로 달아 보았는가. 나는 이제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 아폴리네르의 묘지
[ 아폴리네르와 시 <미라보 다리> ]
널리 애송되는 <미라보 다리>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는 로마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19세 때 파리에 온 후 새로운 예술운동을 주창하여 쉬르레알리즘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미라보 다리>는 1912년 <스와레 드 파리> 지(지)에 처음 발표되었다가 이듬해에 나온 그의 대표시집 <알콜>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 미라보 다리 >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
기억해야 하랴
기쁨은 항상 슬픔 뒤에 오던 것을
해는 저물어 종이 울린다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잡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하자
팔을 낀 다리 밑으로
영원한 눈길을 한 물결은
지쳐 흐르는데
해는 저물어 종이 울린다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세월은 간다,
저 흐르는 물처럼 사랑은 간다
인생은 이리도 더디고 희망은 이리도 벅찬데
해는 저물어 종이 울린다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지나간 세월도 가버린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다리 아래
세느 강만 흐른다
해는 저물어 종이 울린다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 파리의 전설 <카페 레 되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 ]
< 카페 레 되 마고 >
* 카페 레 되 마고
카페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는 1885년 문을 연 이래 각 시대를 대표하는 파리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이곳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19세기 말에는 라르메, 베를렌, 랭보 등의 상징파 시인들이 이곳에 모습을 자주 나타냈습니다.
1920년대에는 아폴리네르, 브르통, 아라공, 피카소, 브라크 등 초현실주의 시인과 화가들이, 그리고 1940년대애는 사르트르, 보부아르, 카뮈 등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이 카페에서 모임을 갖곤 했습니다.
또한 앙드레 지드, 하인리히 만, 브레히트 등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작가와 지식인들도 이 카페의 단골이었습니다. 헤밍웨이에 따르면 이 카페가 있는 거리에서 제임스 조이스를 자주 만났다고 합니다.
카페의 이름 레 되 마고는 ‘2개의 중국인 인형’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곳에는 중국 비단을 팔던 상점이 있었는데, 중국 분위기를 살리기 위하여 중국인 전통의상에 변발을 한 인물 조각상을 만들어 카페 입구 기둥을 장식했던 것입니다. 2개의 중국 인형은 요즘도 볼 수 있습니다.
* 카페 안에 있는 중국인 인형
파리의 명물이 된 카페 레 되 마고는 전설과 같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파리가 독일군에게 점령 당했을 때, 레 되 마고의 명성을 들은 독일군 고급 장교들이 이 카페를 자주 찾아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황망히 자리를 떠나기 일쑤였는데, 독일군이 카페 안으로 들어오면 손님이든 종업원이든 모두들 침묵으로 일관해서 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곤 했다고 합니다. 당시 파리 시민들에게 카페 레 되 마고는 프랑스의 자존심과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 카페 드 플로르 >
* 카페 드 플로르
카페 드 플로르(Cafe de Flore)는 레 되 마고와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입니다. 두 카페는 생 브누아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이 골목은 보나파르트 거리를 거쳐 국립미술학교 앞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카페 드 플로르가 문을 연 것은 19세기 말인 1881년이었습니다. 꽃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는데, 이후 이곳에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비롯해서 시인 아폴리네르, 프레베르,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 소설가 생 텍쥐베리,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등이 모습을 자주 나타냈습니다.
장 폴 벨몽도, 알랑 들롱, 로만 폴란스키, 피에르 카르뎅,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 영화, 패션계 인사들도 즐겨 찾았습니다. 또한 이 카페는 전후 최고의 샹송 가수 에디프 피아프가 어린 시절에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꽃을 팔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 카페 2층은 계약결혼으로 유명했던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보부아르가 함께 집필하고 사색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원래 레 되 마고의 단골이었는데 카페 드 플로르가 난방이 더 잘 되서 플로르로 옮겼다고 합니다.
* 1930년대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세요>를 처음으로 부른 오리지널 가수 루시엔느 브와이에
첫댓글 제가 좋아하는 샹송 몇곡을 들어보면은요. <La Vie en Rose,장및빛 인생>,<La Mer,바다>
<Moulin Rouse,물랭루즈>,<A Paris,파리에서>,<Parlez Moi D'amour,사랑한다는 말을 애
주세요> 등등 인데요. 사실 이중에서 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Parlez Moi D'amoour>를 가
장 좋아하고 있지요. 현직에 있을 때 파리에 출장갈 때마다 이 노래들을 흥얼거리면서 세느강
가를 을매나 싸 돌아다녔는지...
위에서 소개한 바 있는 우디 알렌의 최근 영화(3년전 쯤) <미드나잇 인 파리>를 기회있으시면
한번쯤 감상을 추천합니다. 이 노래가 나오고든요. 그리고 파리의 전성기 벨 에포크 시대(19세
기 말~20세기 초)도 감상할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