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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째 시집 출간한 송재학 시인 "시는 悲鳴이고 무늬…카프카는 삶의 텍스트죠"
고통을 껴안는 윤리학
낮엔 의사, 밤엔 시인
"카프카처럼 두 生 살아
시인, 생 기록하는 자"
그는 현생(現生)의 망명자다. 현생에서 전생(前生)을 감각하고 전생을 후생(後生)으로 더듬는 상상력의 렌즈가 그의 온몸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가려 읽어도 "이건 명백히 송재학 시(詩)"라고 알아맞히는 사태가 빈번할 정도로, 그는 생을 넘나들면서 고혹적인 시세계를 구축했다. 최근 열 번째 시집 '슬프다 풀 끗혜 이슬'(문학과지성사 펴냄)을 상재한 송재학 시인(64)과 이메일로 대화를 나눴다. 열 권의 시집에 경계를 두지 않고 질문을 퍼붓자 글자 크기 10포인트, 줄 간격 160%, 한 글자 허투루 쓰지 않은 A4용지 4쪽짜리 빼곡한 답변이 '지하(地下) 골방'에서 도착했다.
독특한 제목부터 보자. "람포(LAMP) 갓튼 시"로 기생 화홍을 기리는 진명(표제작 '슬프다 풀 끗혜 이슬')이나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고 영원한 나라로 가"버린 권번 출신 강명화(시 '강명화의 죽엄') 등을 다룬, 1930년대 '딱지본 소설'을 차용한 시 13편이 시집 3부에 오롯하다. "식민 시대의 선험적 죄의식"이라는 그에게 죄의식의 이유를 묻자 고통의 윤리학이 펼쳐졌다.
"고통을 확대하는 자세는, 모든 시인에게 잠재된 감정의 의무입니다. 고통이 점점 자라 확대될 때 고통은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 내가 겪지 않았던 과거까지 간섭하니까요. 일제강점기의 고통은 아직도 이어지는 우리의 삶이니…. 여위고 신산한 삶에 고통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미 한 장르가 돼버린 그의 시는 '평범한 사물의 시적(詩的) 가능성'을 질문한다. 인격을 가진 주체가 역전되고 전환된다. 그 주체는 시간·공간·사물로 몸을 바꾼다. "현학주의, 풍경의 미학, 물활론, 범신론이 뒤엉킨 변화를 응시하려는 나의 항적과 일치하는 지점이에요. 비극을 건드리고 곱씹고 만지는 자의 적극적 운명같은…."
그래서일까. 시인은 시를 통찰한다. 시를 두고 "부러진 늑골"이라거나 "한 번도 부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질문을 가진 입"이라고 비유하는 대목이 절창이다. 골절된 뼈를 짜맞춰 본모습을 복원하지 않고, 스스로 수면 위로 떠올라 숨 쉬려 하지 않는 표정이다. "시는 제게 어떤 비명, 어떤 무늬입니다. 깊은 내면에서 만들어진 작은 비명, 작은 무늬죠. 시인은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려는 사람이며 쉬이 말할 수 없는 걸 말하려는 자라고 생각해요."
그의 작업실은 지하실로, 이름은 내간채(內間寨)다. '지하생활자'의 골방은 어떤 곳일까. "불을 끄면 완전한 어둠이 지하를 가득 채웁니다. 빛이 전혀 없는 어둠은 절대적 존재죠. 내간채의 내면은 바로 어둠이라는 물질이 아닐까 싶어요. 계단을 올라와도 내간채에는 스스로 폭설이 내리고 양치식물이 자라죠. 언어를 물질로 인식하고, 사물조차 물질화시키는…."
지상에 오르면 송재학은 치과의사다. 대구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한다. "카프카는 25세부터 22년간 보험회사를 다녔어요. '시와 삶은 서로 울타리를 가지고 있다'는 명제가 아니더라도 저는 카프카의 삶을 베끼고 있습니다. 카프카는 이중생활을 위한 텍스트죠. 삶과 내면 사이에 있는 건 두꺼운 옹벽이 아니라 유리벽입니다."
인터뷰 말미에 이르러 몽상의 티베트가 펼쳐졌다. "고비사막 외곽 지역에서, 티베트 라싸로 가는 이정표를 봤어요.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이 말하는 건, 전생과 후생에 대한 아련한 감각이라고 생각했어요. 후생은 전생의 운명 같고, 그들은 서로 관통하는 앞뒤 같은…. 지금 내 생도 나의 후생이며 전생이 아닐까요. 그걸 기록하는 자가 시인일 테고…."
아래는 송재학 시인과의 서면 인터뷰 전문(全文)이다.
1. 딱지본 소설을 차용한 시집 3부와 관련하여, 최근 한 인터뷰에서 "식민 시기의 선험적 죄의식"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죄의식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릴케는 1916년의 어느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 것에나 고통을 느끼는 것, 그것이 나의 몫입니다.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 미리 느끼는 것 그리고 나중에 다시 느끼는 것까지 말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확대는 모든 시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감정의 의무이다. 고통이 점점 자라면서 확대될 때 고통은 일어나지 않는 미래의 일, 혹은 내가 겪지 않았던 과거까지 간섭하게 된다. 고통의 윤리학이다. 나·우리·민족·우주·생물·무생물까지 포함하는 윤리관의 심화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윤리관은 시간과 공간을 자꾸 넓힐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가 일제 강점기의 바짝 여위고 신산한 삶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의 고통은 아직도 이어지는 우리들의 삶이기도 하다.
중국 위진교체기(220∼265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죽림칠현은 조씨와 사마씨의 천하쟁탈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민중들은 여전히 조씨의 위나라를 지지했고, 죽림에서 청담을 나누며 은일의 삶을 살며 소극적 저항을 하던 7명의 현자를 응원했다. 죽림칠현의 이미지는 딱, 그 지점까지이다. 그들은 결국 조씨냐 사마씨냐를 선택해야만 했다. 전자의 선택은 명분이고 후자의 선택은 부귀영화이다.
죽림칠현 중 죽음으로 사마씨에게 저항한 사람은 혜강 뿐이었다. 혜강의 죽음 또한 혜강이 원하지 않았던 죽음이고 그 죽음마저 구차한 느낌이 없지 않다. 혜강은 여안이란 사람을 변호한 글을 발표하는데 그 글을 구실로 삼아 정적인 종회의 부추김으로 죽는다. 혜강 또한 본격적으로 사마씨 일가들에게 저항한 것은 아니다. 이후 죽림칠현의 나머지 사람들은 슬그머니 사마씨에게 굽히면서 벼슬을 하였다. 죽림에 머물면서 저항을 하면서 쌓아올린 명성을 관리가 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 과정이 너무 적나라하고 너무 허망하여 인간의 신념이란 쉬이 구부러지기 쉬운 것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선험적 죄의식이란 죽림칠현처럼 학문과 수양의 정점에 도달한 사람의 변신과 맞닿아 있다. 죽림칠현조차 굴욕을 맛보았는데, 나는 과연 친일파가 아니었을까라는 반성과 자괴감이 있다.
2. '평범한 사물의 시적 가능성'을 묻는 작업이 선생님의 시라는 생각을 감히 해봤습니다. 인격을 가진 주체가 전환되거나 역전되고, 전환과 역전의 주체가 시간이거나 공간이기도 하고, 사물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시에 매료되는 이유는 저 놀랍고도 탁월한 변모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의하신다면, '송재학 시'에서의 전환과 역전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릴케를 빌리자면, 릴케는 1921년의 『유언서』에서 "작업을 할 때 너는 멋진 솜씨로 던져진 창(槍)이다"라고 했다. 릴케의 창은 자신을 소모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어야 하는, 비극을 건드리고 곱씹고 만지는 자의 적극적 운명을 따라간다.
「흰색과 분홍의 차이」라는 졸시에서 나 또한 "흰색은 햇빛을 따라간 질서이지만 그 무채색마저 분홍과의 망설임에 속한다 분홍은 흰색을 벗어나려는 격렬함이다"라는 변곡점 혹은 흰색은 거칠게 말하자면 보는 자의 감각이 스미기 전의 순수함이고 분홍은 흰색이 빚어낸 만유의 색이라는 특이점을 체험했다. 아마도 그것은 문학청년시절의 책이라는 현학주의에서 출발하여 풍경의 미학주의의 깨달음을 거친 뒤, 가이아 이론을 통해 다시 물활론과 만유정령설과 범신론이 뒤엉킨 변화를 스스로 응시하는 나의 항적과 일치하겠다.
3. "시는 부러진 늑골"이고, "한 번도 부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질문을 가진 입"(10쪽)이란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잠시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골절된 뼈를 짜맞춰 본모습을 복원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수면 위로 떠올라 숨 쉬려 하지 않는 표정이 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세상은 올바른 모습, 능동적인 표정을 강요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시는 무엇일까요.
시라는 것은 나에게 어떤 비명이거나 어떤 무늬이다. 땅 속 깊은 곳, 물 속 깊은 곳 , 바위의 중심, 혹은 깊은 내면에서 만들어 물질의 표면에 보낸 작은 비명들이나 작은 무늬로 드러난다. 시는 그 모든 것들(사물과 감정을 포함해서)의 심리를 드러내는 상징체계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무겁고 비극적(제 시적 경향입니다만)이고 자꾸 가라앉으려는 감정을 가졌다. 시인이 가진 예민함은 그러기에 그 감정에 쉬이 동화되도록 이루어져 있다. 저 깊이 안에 인간과 사물이 숨긴 것은 바로 영성(靈性)이라는 보석이다. 시는 영성의 파편이다.
결국 시인은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려는 사람이다. 또한 쉬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사람이다. 덧붙이자면 할 말을 감추느라 애써는 사람이기도 하다. 3300년 전 앗시리아의 시인 신레케 운니니가 수메르어 길가메시 서사시의 아카드어 판본을 편집했을 때 그 명칭은 『깊은 곳을 본 이(He who saw the deep)』였다.
4. 선생님의 옛 시집에서, 작업실을 지하실에 마련했다고 읽은 바 있습니다. 이번 시집에서도 "지하실에서 말은 단순해지고 있다 어둠을 통과하는 말이다"(31쪽)란 부분 표현을 읽고 멈춰설 수밖에 없었는데요. "지하생활자"로서, 그 지하실이란 이름의 골방의 풍경은 어떻습니까.
그 골방의 풍경엔 모래장 중인 넙적뼈가 있고, 몸 한쪽이 나비인 웅크린 산이 있고, 공중에서 색깔을 묻혀온 곤줄박이 한마리가 앉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내 작업실은 지하 공간이다. 그럴듯하게 '내간채(內間寨)'라고 명명했지만, 기실 그곳은 어둡고 눅눅하면서 적막하다. 음악을 듣기 위해 음반을 고를 때만 공간은 잠깐 부산해진다. 하지만 음악조차 그곳에서 다시 어둡고 눅눅하면서 적막해진다. 번잡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나의 내성적인 성정 탓에 내간채는 자꾸 비어내려 한다. 내간채에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리면서, 이 공간에서 내가 해야할 의무와 혹은 이 공간은 무엇과 연결되는가 생각하곤 했다. 오래전 실크로드를 다니면서 풍경과 대화체를 유지해본 경험으로 미루어 내간채에게는 확실히 내면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간채의 어둠이라는 물질 때문이 아닐까. 불을 끄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 지하 공간을 가득 채운다. 빛이 전혀 없는 어둠은 절대적 존재이다. 절대라는 언어의 비의를 체험하는 순간이다. 이목구비가 없지만 나 보다 더 많은 눈과 귀와 입이 어둠에 매달려 있다. 소위 우주를 가득 채우는 암흑물질이라고 불리는 무거운 물질이, 내가 스위치를 내리자 금방 뻑뻑하게 내간채를 채운다. 어둠의 정체를 나는 정확하게 모르기에 암흑물질이라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겼지만, 확실히 문을 닫고 불을 끄면 어둠에는 스멀거리는 물질이 있다. 그게 어둠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불을 끄면 폐활량이 적은 나로서는 어둠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문을 닫고 계단을 올라오면 내간채는 저 스스로 공간을 창조하여 아마도 그곳에는 폭설이 내리고 양치식물이 자라는 것이다. 지하 공간의 장단점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물질에 민감 해왔다. 언어를 물질로 인식하고 사물조차 물질화시킨다. 생각의 전후를 붙들고 - 물론 대다수는 어떤 시에 대한 관념들이다 - 생각을 길게 이어가고 생각을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나는 생각이란 것을 물질로 혹은 생각이 물질이 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린다.
내 지하공간 '내간채'의 사생활은 그렇게 태어났다. 내 시집의 제목인 내간체(內簡體)에서 빌려온 '내간채'의 채(寨)는 울타리의 의미이거나 위리안치의 감정적 공간이다.
5. 과거 한 기사에서 선생님께서 문학상 수상을 두고 "수상은 곧 장애다. 갈증을 막아버리는 장애"라고 표현하신 바를 읽었습니다. 시나 소설 등 문학을 포함해 모든 예술은 '결핍'의 상태를 지양할 때 찾아오는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이 죽어' 오직 충만한 현재를 살아야 하고, '결핍이 결핍된' 상태만을 만끽하려는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인으로서의 '결핍'에 대하여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지요.
문학상을 받을 때마다 이율배반에 시달린다. 이 상을 받고 싶다는 세속의 욕망과 문학상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은자의 심리가 뒤엉킨다. 불행의 자의식 또한 뒤엉킨다.
불행의 자의식이란 말은 헤겔의 '불행한 의식'이란 용어를 내가 임의로 바꾸어 사용하는 나의 무의식이다. 모든 존재는 즉자와 대자로 구별할 수 있다. 즉자(卽自), 즉 의식 없는 존재는 자체동일성의 존재로, 이를테면 돌은 돌이라는 자체동일성을 가지고 영원히 그 돌/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대자(對自)적 존재로서 인간은 의식이 있고 의식의 본질인 무엇을 사유하는, 자기동일성이란 특성을 가진다. 즉 인간은 자체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동일성의 회로로 존재하는 생명체이다. 자기동일성이라는 건 인간의 운명이자 숙명이다. 인간의 의식이 발전하면서 감성, 오성, 이성, 개체, 집단, 사회, 국가로 발전하는 기저에는 이러한 자기동일적 회로에의 근본적 갈망과 결핍이 있기에 인간은 완전체가 아닌 불완전체이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욕망은 당연한 추구이다. 이에 비해서 신은 즉자대자이자 대자즉자인 존재 즉 자기 자신의 본질이 자기원인인 즉자이자 대자인 존재로 불만이 없는 완전체이자, 자기 행동의 원인을 완벽히 파악한 존재로 절대정신이기에, 인간도 이런 절대정신을 지향하자는 게 헤겔의 진리 개념이자 불안한 의식이라는 용어의 탄생 배경이다. 당연하게 시인은 인간의 앞에서 불행의 자의식을 주체할 수 없는 존재이자, 그러기에 그 자의식을 과잉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6. 낮에는 본인의 이름을 내건 치과의 의사이고(생업), 동시에 본인의 이름으로 시를 남기는 시인(본업)이란 두 생을 살고 계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 생업과 본업을 나눠 두 생을 산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시와 삶은 서로 울타리를 가지고 있다"는 명제가 아니더라도 나는 카프카의 삶과 문학을 베끼고 있다. 나에게 카프카는 이중생활을 위한 텍스트이다. 카프카가 철저하게 분리한 생활과 내면은, 시와 거리가 먼 내 직업이 만들어낸 매개물에 다름 아니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연한 영화 「카프카」를 보았는데 그 영화는 삶과 내면 사이의 경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삶과 내면은 그 영화처럼 혹은 그 영화가 아니더라도 간격이 있거나 뒤섞여 있다. 그 사이의 통로는 삼투압처럼 미세하다. 시각적으로는 삶과 내면 사이에 있는 것은 두꺼운 옹벽이 아니라 유리벽이다. 금방 손에 잡힐 것 같고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는 그 유리 속! 깨어진다면 바로 이쪽과 저쪽의 차이가 없는. 25살부터 22년 가까이 카프카가 일한 '노동자상해보험회사'는 오후 2시가 퇴근 시간이었다. 자정이 되면 고요해질 때 그의 소설작업은 시작된다. 그것이 유명한 카프카의 이중생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 또한 시와 연관이 없는 직업을 가진 것을 카프카처럼 담담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와 카프카가 다른 것은 나는 대낮에도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카프카와 달리 나는 머리 속에 모니터를 보유하고 있다. 그 모니터는 절전형이기에, 종일 시쓰기가 가능하게끔 되어 있다. 일을 하는 순간에는 모니터가 절전모드가 되고 다시 내 책상에 앉으면 모니터는 금방 가동된다.
생활의 단순화 내지는 양식화는 내가 시인으로써 살아가는 동력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니 나는 사회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다.
7. 선생님의 '환생'이란 시를 떠올려 봅니다. 인간은 모두 지나가는 생이고 전생, 후생이 놓여 있을지에 대해선 의견이 다를 수 있을 텐데요. 지금 주어진 생(生)을 지나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시인으로서, 혹은 인간으로서. 내가 한때 경험했던 티베트의 염불통인 마니차는 측면에 만트라가 새겨져 있고 안에 경문이 빼곡하다. 마치 영혼에 대한 설명을 압축시킨 듯한 마니차를 한 번 돌리면 경을 한 번 읽은 것으로 셈한다고 되어 있다. 경문을 읽지 못하는 티베트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의지이다. 하지만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누군가 마니차를 한 번 돌린다는 것은, 같은 마니차를 돌렸던 사람들이 경험한 모든 경문이 같은 기억을 한다는 것. 즉 같은 마니차를 거쳐 간 모든 사람들의 경문에 대한 기억을 같이 공유한다는 점이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자, 두려움도 생겼다. 누군가의 경문 뿐만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죄의식도 공유되리라는 자각이 왔다.
마찬가지로 전생과 후생도 그렇다. 전생을 기억한다면 후생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시간은 그러한 의미에서 순환적이다.
다른 예를 덧붙이자면 20년 전, 돈황의 양관에서 티벳으로의 이정표를 보았다. 고비사막 외곽지역인 그곳은 소소초라는 키낮은 낙타풀이 덤성덤성 있는 곳이다. 내 메모지에는 그 때의 고양된 흥분이 남겨져 있다. 티벳 라싸까지의 이정표를 보면서,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이 말하는 건 전생과 후생에 대한 아련한 감각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먼지로 상징되는 건 전생이고 신기루로 나타나는 건 후생일거라고 적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전생이란 후생의 앞이고 후생이란 전생의 뒤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생들은 서로 관통해 있어서 전생은 후생의 앞뒤이기도 하고 후생은 전생의 운명 같은 것이라는 희미한 성찰이 있다. 내가 지나가는 이 생은 지금 나의 후생이면서 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