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헌집 제11권 / 행장(行狀) / 상위당 김공 행록〔相違堂金公行錄〕
나의 벗 김보현(金普鉉) 우약(佑若 김보현의 자)이 자기 선조의 연보를 받들고 나에게 와 행록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는데, 내가 세 번이나 사양하였지만 되지 않았다. 삼가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공의 휘는 세명(世鳴)이고 자는 명대(鳴大)이며, 호는 상위당(相違堂)으로 대개 도정절(陶靖節)의 ‘세상이 나와 서로 어긋나네〔世與我相違〕’의 뜻에서 취하였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공은 숙종 신유년(1681, 숙종7) 고령(高靈) 가곡리(伽谷里) 집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겨우 8세에 온화하고 고아하며 조용하고 삼가여 동료들과 장난치며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선친 졸와공(拙窩公)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였다.
선친이 처음에는 《동몽수지(童蒙須知)》를 가르쳤고 다음으로 《소학(小學)》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옛날 우리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 선조께서 문도들에게 가르친 책이다.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함과 임금에게 충성하고 타인을 대함과 그리고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도리가 모두 이 책에 실려 있다. 너는 그 책을 익숙하게 읽어 체득하여 실행하는 바탕으로 삼은 뒤에 다른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공이 일심으로 그 말씀을 받들었다.
매일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질한 뒤 먼저 조모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는 부모에게 문안인사를 드렸다. 그리고는 물러나서 단정히 앉아 서책과 지필(紙筆)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글의 뜻을 알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잠심하여 생각하며 묵묵히 마음으로 알아 통쾌하게 깨달은 뒤에야 그만두었다. 한계(寒溪) 오선기(吳善基)는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두 선생의 가학〔詩禮之學〕이 이 사람에게 전수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경인년(1710, 숙종36) 졸와공이 직소(直所 번을 드는 곳)에서 병들었는데, 공이 밤새도록 달려가 마침내 아버지의 사직서를 올리고 수레에 태워 집으로 돌아왔다. 5개월 뒤에 문득 돌아가시니 이척(易慽 상례의 형식과 내용)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장례를 치르고 매일 성묘하며 통곡하였는데, 비록 묘소까지의 거리가 10리로 멀었지만 비바람과 추위와 그리고 더위 때문에 혹 폐하는 일이 없었다.
을미년(1715, 숙종41) 어머니께서 설사병에 걸렸는데, 공이 변기를 씻으며 약을 달이는 일을 노비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상을 당하자 죽을 먹으며 삼년상을 치르는데 야위고 수척하여 뼈대가 드러남에 사람들이 육즙을 먹기를 권하자, 공이 울면서 사양하기를 “어머님의 생각이 은연중에 나를 보살펴줄 터이니, 몸에 병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축년(1721, 경종1) 봄에 강호(江湖) 선생의 묘소를 성묘하였는데, 순찰사(廵察使) 조태억(趙泰億)이 마침 방문하여 공과 역사 및 고인의 정치득실을 논의하고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성대한 명성을 간직한 그대를 항상 간절히 만나보기를 원하였는데, 지금 비로소 뵈니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나를 위하여 덕담을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해 가을에 직지사(直指使 암행 어사) 조영서(趙永瑞)가 올린 추천 조목에 말하기를 “김세명은 학문이 참되고 신실하며 행의(行義)가 순수하고 확고합니다.”라고 하였다. 영조 때 영릉(英陵),익릉(翼陵),순릉(順陵)의 참봉이 되는 망기(望記)에 추천되었다.
매촌정사(梅村精舍)를 건립하고 〈훈가십조(訓家十條)〉를 지어 자식과 조카들을 경계하고 신칙하였다. 또 〈폄위사(貶僞辭)〉를 지어 생도들을 가르치니 원근에서 믿고 따르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았다. 또 계(契)를 만들어 선조를 받들며 가난한 이를 구휼하는 자본으로 삼았다. 을축년(1745, 영조21) 3월 2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5세였다. 가곡촌(伽谷村) 뒤 임좌(壬坐) 언덕에 장례를 지내니, 부인 엄씨(嚴氏)와 상하 봉분으로 되어 있다.
공은 효도로 조상을 추숭함이 더욱 독실하였고 현자를 존숭함이 또한 지극하였다. 필로(畢老 점필재(佔畢齋))를 위하고, 박옹(璞翁)을 위하고, 선친을 위하여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건립하며 행적(行蹟)을 찬술하였다. 또 곽매헌(郭梅軒)과 오한계(吳寒溪)를 위하여 그들을 매림서원(梅林書院)에 제향하였다. 명성과 실제가 모두 융숭해지자 현풍(玄風) 현감 이우인(李友仁)이 명성을 듣고 보기를 청하였으며, 관찰사 이정제(李廷濟)가 편지를 보내 초대하여 보려하였으나, 공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 오직 벗으로 잘 지낸 사람은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월강(月岡) 김남수(金南粹),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과 같은 여러 홍유석학(弘儒碩學)들이었다. 본래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두루 유람하며 기걸한 기상을 기르는 것을 도와 그것으로 그윽한 정서를 표출하였다.
아! 공은 특출한 위의(威儀)와 명철한 재주와 그리고 확고한 절조 같은 것을 가지고서 불행하게도 운명이 어긋남이 많아 일명(一命 최하위 계급)의 벼슬도 하지 못하고 재야에서 은거하였다. 그리하여 서책으로 그 마음을 적시고 효우로 그 가정을 살찌게 하였으되 조금도 원망하거나 후회함이 없었으니, 이것은 어찌 다만 하늘이 품부한 성품에만 특출함이 있었겠는가. 또한 가정에서 교화받은 것에 그러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공의 세계(世系)와 자손록 그리고 부인의 생몰연대 같은 것은 이미 여러 글에 기록되어 있으니, 어찌 다시 군더더기의 말을 하리오.
[주-D001] 도정절(陶靖節)의 …… 뜻 : 도정절은 중국 동진 시대의 도연명(陶淵明, 365~427)을 말한다. 그의 이름은 잠(潛), 자는 원량(元亮) 또는 연명(淵明)이며 세칭 정절 선생(靖節先生)이라고 한다. ‘세상이 나와 서로 어긋나네〔世與我相違〕’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온다. 도연명이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이 되었을 때 군(郡)에서 독우(督郵)를 보냈는데, 현리(縣吏)가 띠와 의관을 갖추고 그를 보라고 하자 “오두미(五斗米)를 위하여 구차히 향리의 소아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 하고, 그날로 인끈을 풀고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주-D002] 졸와공(拙窩公) : 김시락(金是洛, 1658~1710)을 말한다. 자는 희철(希哲), 호는 졸와이다. 1691년(숙종17) 생원이 되어 벼슬이 봉사(奉事)에 이르렀다. 7대 조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시호를 복원하는 데 애를 써서 성사시켰다.[주-D003] 오선기(吳善基) : 1630~1703.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경부(慶夫), 호는 한계로 고령에 거주하였다. 사후에 매림서원(梅林書院)과 남계사(南溪祠) 등에 봉안되었으며, 저서로 《소학석의(小學釋義)》와 《한계문집》 등이 있다.[주-D004] 조태억(趙泰億) : 1675~1728.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대년(大年), 호는 겸재(謙齋)ㆍ태록당(胎祿堂)이다. 1693년(숙종19) 진사가 되고, 1702년(숙종28) 문과에 급제하였다. 1720년(숙종46)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벼슬이 좌의정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주-D005] 박옹(璞翁) : 박재(璞齋) 김유(金紐, 1527~1580)를 말한다. 자는 순경(順卿)으로 김종직(金宗直)의 손자이다. 1568년(선조1)에 진사가 되고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와 고령 교수(高靈敎授)를 역임하였다.[주-D006] 매림서원(梅林書院) : 경북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에 있다. 1707년(숙종33) 지방유림의 공의로 곽수강(郭壽岡)과 오선기(吳善基)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 훼철되었다. 그 뒤 1981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주-D007] 이우인(李友仁) : 1667~?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정보(正輔)이다. 1689년(숙종15) 생원시에 합격하였다.[주-D008] 이정제(李廷濟) : 1670~1737. 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중협(仲協), 호는 죽호(竹湖)이다. 1699년(숙종25)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주-D009] 권상하(權尙夏) : 1641~172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ㆍ한수재(寒水齋)이다.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이이와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며,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저서로 《한수재집》과 《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주-D010] 김남수(金南粹) : 1661~1731.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자순(子純), 호는 월강이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5대손이다.[주-D011] 신유한(申維翰) : 1681~1752.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주백(周伯)ㆍ사의(士儀), 호는 청천으로 고령 출신이다. 1705년(숙종31)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3년(숙종39) 문과에 급제하였다. 1719년(숙종45) 제술관(製述官)으로 통신사 홍치중(洪致中)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벼슬이 봉상시 첨정에 이르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