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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턴 (John Dalton, 1766-1844)의 생애 돌턴은 영국의 컴벌랜드(Cumberland)주의 작은 촌락인 이글스필드(Eaglesfield)에서 1766년 9월 6일 탄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가난한 직물공이었고 그는 형제는 많아서 어릴 때부터 고생스러운 가정이었다. 돌턴家는 영국의 非國敎派 중에서도 그 규율이 가장 엄격한 쿠에카(Quakers)교도이었으므로 그도 일생 동안 이 宗派에 속해 있었다. 돌턴이 받은 유일한 학교 교육은 마을의 국민학교뿐이었다. 그는 로빈손(Elihu Robinson)이라는 과학적 학식을 가진 쿠에카 교도로부터 수학을 교육받았고, 일생동안 로빈손과 교제를 계속하였다. 이 사람은 氣象學에 능통하였고 기계류를 손수 만들었다. 돌턴은 이 사람의 영향으로 기상학에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12세 때, 돌턴의 수재가 인정되어, 마을 국민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는 쿠에카 교도의 집회장을 사용하였는데 1780년 폐쇄되었고, 1781년 15세 때 형 Jonathan과 함께 켄달(Kendal)이라는 곳으로 와서 쿠에카 교도의 학교를 경영하고, 이때 수학,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등을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그는 각가지 과학 연구를 하였고, 나날의 온도, 기압, 雨量 등의 기상학상의 관측을 손수 만든 기구로서 측정하였는데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엔 켄달의 기숙학교(boarding school)에서 조교로 4년간 일을 하였는데, 다음엔 교장이 되어 약 8년간이나 일을 하였다. 이 켄달에 있는 동안 돌턴은 여가의 시간을 기상 관측에 관한 많은 논문도 작성하였는데, 이것들은 모두 자기 혼자서 독학으로 이루어낸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돌턴의 연구는 다방면에 미쳐서 때로는 식물학, 곤충학, 수학에까지 연구의 손을 뻗었는데 자기 연구 수행에 많은 편의를 제공받았던 만체스터의 New College로 옮아 간 것은 1793년이었다. 만체스터의 New College라는 학교에서 수학과 과학 철학을 강의하였는데 라부아제의 「화학 요강」과 찹탈(Chaptal)의 「화학」등을 교재로 화학 강의도 하였다. 약 6년 동안 이 학교에 봉사한 다음 그는 완전히 자유로운 몸으로 수학, 과학철학 및 화학 분야의 강사로 활동하였고 런던, 에딘버그, 글라스고, 및 버밍햄 등지에서 초대를 받고 순회강연과 개인교수 등을 맡았다. 1794년에는 1789년에 설립된 Manchester Literary and Philosophical Society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1800년에는 書記, 1808년에는 부회장직을 역임하고, 1817년에는 회장이 되어 1844년 그가 죽을 때까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돌턴은 기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었으나, 공기와 일반적 기체의 연구를 시작하고, 기체의 용해도에서부터 힌트를 얻어 원자설을 제안하고 뒤이어 배수비례의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원자 가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돌턴의 위대한 업적이었는데, 1808년 그의 저서인 「화학의 신체계」의 제 1 권에다 발표한 것이다. 이 책의 제 2 권은 1810년에 출판되었다. 돌턴의 기상연구는 자기의 가장 큰 연구이었다. 그는 날마다 천기와 기상관계를 매일 기록하였는데, 1777년부터 죽기 전까지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온의 측정이 얼마나 규칙적이었는지 꼭 시계처럼 움직였다고 한다. 그의 연구실 부근의 부인들은 돌턴이 기온을 잴 때 자기들의 시계를 맞추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는 휴일마다 호수지방으로 가서 자기가 만든 기구류를 휴대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산 위의 공기와 지상의 공기와의 차이를 연구한 것이다. 17세기초에 돌턴은 Manchester Literary and Philosophical Society에서 기체에 관한 몇 가지의 중요한 법칙을 발표하였다 그 논문 중에는 기체의 부피는 온도의 상승에 따라 팽창한다는 것, 또한 혼합기체의 용해도는 그들의 分壓에 정비례한다는 것 등 중요한 법칙들이 포함되어 있다. 돌턴은 아주 심한 색맹이었다. 붉은 빛깔이 돌턴에게는 항상 녹색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색맹을 Daltonism이라고 까지 하고 있다. 한 때 돌턴은 자기가 색맹인 줄은 모르고 붉은 것을 녹색으로 잘못 알고 큰 실수를 저지른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색맹인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Dalton이 예순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그에게 월리엄 IV세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하려 하였다. 그러나 Dalton은 궁정의 예복을 입기 싫다는 이유로 그 제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Dalton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옥스퍼드 대학의 예복과 같은 색인 붉은색 예복은 입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퀘이커 교도들은 붉은색 옷을 입지 않았다. Dalton은 색맹이었기 때문에 붉은색이 회색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기 눈에는 회색으로 보이는 붉은색 예복을 입고 궁정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가 1792년이었는데, 「色盲」 (color blindness)에 대해 최초의 논문을 1794년 10월에 발표하였다. 돌턴은 1832년에 옥스퍼드의 「영국학술협회」(The 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로 부터 D.C.L (Doctor of Civil Law)의 학위를 받았고, 1834년에는 에딘버그의 협회로부터는L.L.D (Doctor of Laws)의 학위도 받아, 돌턴의 학식은 널리 인식되었다. 돌턴이 78세인 1844년 7월 해질 무렵, 예에 따라 그날의 기상 기록을 하려고 하였을 때 이상하게도 손이 떨리는 것을 자각한 돌턴은 곧 침실에 누었으나 다음날 인사불성에 빠지고, 의사의 치료도 아무 효과없이 그대로 이 세상을 떠났다. 때는 7월 27일 아침이었다. 장례는 8월 12일에 公葬으로 많은 시민들의 弔意속에 거행되고 그의 유해는 만체스터의 Ardwick 묘지에 매장되었다. 만체스터 市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John Dalton Street」라는 가로까지 이름지어 오늘날까지 이 고독한 한 사람의 학자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
첫댓글 영국 컴벌랜드 지방에서 태어난 돌턴은 1793년 이후 산업혁명의 중심지가 되면서 급속히 팽창하고 있던 도시 맨체스터에 정착하여,<화학철학의 새로운 체계>에서 과거의 원자설에서 화합물은 원자가 모여 이루어져 있으며, 동일한 화합물을 이루는 성분 원소의 원자 수는 항상 일정하다는 화합물 구성의 원리를 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