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작금의 카페의 분위기는 판단과 정죄의 칼날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을 방불케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 자부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 서로 욕질을 하고, 공격을 하고,
잠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면 짓밟기에 혈안일까요?
아마도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해와 사회적으로 합의된 세상적 관념에 지배된 판단 때문이라고 보여 집니다.
바라기는 성도들이라면 기록된 말씀을 따라 말씀대로 아멘! 하기를 바랍니다.
② 지금의 성령 시대에는 구약시대와 같은 선지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구약 시대와 같은 선지자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스가랴서 13장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슥13:4~6)."
③ 대신 부르신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사도로, 선지자로, 목사로, 교사로, 복음전하는 자로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이것이 성령의 은사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의 직분을 세우는 것입니다.
④ 그런데 이 성령의 은사의 능력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처럼 바로 바로 증험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달리 성령시대의 성령의 은사는 먼저 성령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그 뜻이 바로 나타나도록 하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이 서로 합력하여 그 뜻을 찾아가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으나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이 이미 활짝 열렸으므로
성령 안에서 온 지체들이 합력하여 하나님을 찾아가도록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세워서 일방적으로 강권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온 지체들이 각양 은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능력으로
합력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드러내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다시 말하면,
성령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예언이 임했나요?
그러면 그 예언의 증험은 구약시대와 같이 확실하고 분명하게 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증험이 부분적이고 희미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⑤ 문자적이고 외견적으로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 예언의 증험 때문에
성령의 은사자는 큰 곤욕을 치르곤 합니다.
거짓 은사자라는 비방과 조롱을 받기 일쑤고, 가짜 선지자라는 손가락질을 받기 일쑤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령의 은사자에게 나타나는 그 부분적이고 희미한 예언의 증험을 확실하고 온전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성도들의 합력입니다.
그 은사자의 예언이 증험으로 나타나나 안나타나나 돌멩이 쥐고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돌멩이를 내려놓고 함께 하나님 앞에 함께 기도하며 마음을 합쳐
부분적이고 희미한 예언의 그 온전한 뜻을 함께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의 법도요,
성령시대 성령의 은사를 대하는 바른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9~12)."
⑥ 그러므로 돌멩이를 쥐고 판단과 정죄를 일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돌멩이가 날아다니고, 송곳으로 찌르고, 괴성과 신음소리가 요란한 요즘 이 카페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해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⑦ 오직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합력하는 것이 성도의 능력입니다.
거짓없는 사랑으로 형제들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연약한 지체들을 위하고 은사를 통하여 교회를 유익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은사는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소리나는 구리와 같습니다.
이것은 오직 은사자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자에게나 은사자에게 임한 능력을 보는 자에게나 동일하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사를 이루는 것은 온 지체들의 합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은사자에게만 있어야 한다고 하는 속삭임은 거짓입니다.
증험이 온전하고 확실하게 바로 나타나야 한다고 하는 속삭임도 거짓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과 계시는 분명하고도 명확한 것이나
성령의 은사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사람의 영감이나 믿음이
하나님의 감동과 계시를 온전하고 확실하게 볼 정도로 장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성도들이 각자 받은 은사로서 합력하여
부분을 보충하고 희미한 것을 밝게 하여 하나님의 뜻이 보다 온전하고 확실하게 나타내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의 능력에 대한 증험이 보다 온전하고 보다 확실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⑧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 주요한 이유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 지체들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이루어 지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에게 각양 은사를 주심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⑨ 이러한 성령의 법을 알지 못하면 구약 사망의 율법을 손에 쥐고 때려 죽일 자세만 갖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함도 아닙니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님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의 증험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괴악한 짓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증험이 없다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를 돌멩이를 쥐고 공격하는 것도 암덩어리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를 이끌고 틀어쥐고 가려는 것도 암덩어리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은 서로 위하고 섬기고 도우면서 함께 자라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안에서 합력하는 것만이 증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1~22)."
⑩ 결론입니다.
성령의 은사의 증험을 보고 싶습니까?
그러면 사랑으로 합력하십시오!
손에 돌멩이를 쥐고 증험을 내놓으라! 윽박지르는 것은
롯에게 천사들을 내놓으라! 윽박지르는 것과 매일반입니다.
그렇게 천사들을 내 놓으라 윽박 질렀던 자들에게
유황불이 내려와 심판했던 일을 거울삼아
성령의 사람들인 성도들은 그런 괴악한 짓을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서로 상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가는 지체들이 되어 지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5:6)."
말을 못알아 듣네요.
구라 아니고 하나님의 심장으로 들여다 보시면 다 보이는 것입니다.
양약을 드시라니까요...
@crystal sea
구라야...
때가 다 되었다 ....
인쟈 딴 살길 알아보거라...
대체 언제까지 성령을 팔아 먹을겨?
@베냐민 양약을 드세요.
왜 약을 안드십니까?
@crystal sea
한약을 줘....
거시기 녹용 들어간걸로....
언제나 따뜻한 글 감사 드립니다
주님의 위로하심이 함께 하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