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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역사 그리고 현실
우리 일본은 21세기 동아시아의 선진국 아니 전세계에서 내노라하는 선진국이었다.
나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 21세기의 중반을 넘지 못하고 우리나라에는 거대한 재앙이 터지고 말았다.
환태평양 지진대인 태평양 심해에서 진도 13.0의 전무후무한 강진이 발생했다.
그때 아버지는 갓 스무살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당시 기억들을 자주 말씀하시곤 했다.
지진은 토쿄에서 약 200키로 이상 먼곳에서 발생해서 지진이 났던 당시 새벽에 일본 사람들은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진 관측소에서 최초로 인지가 되고 나서 쓰나미 경보가 발령되고 나서야 긴급뉴스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쓰나미 경보는 보통의 그냥 뉴스 가십거리가 아닌 것이었다.
최고파도 높이 1킬로미터....
낮은 지역은 약 300미터의 쓰나미가 초속 50미터의 속도로 밀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긴급 뉴스와 싸이렌 소리가 몇십초 울리더니, 바로 그 어마어마한 파도가 일본을 덮쳤다고 한다.
그 누구도 피난을 간다거나 대피를 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
일부 일본 국민들은 새벽시간 잠에서 깨어 무슨일인지 어리둥절 해 있었고, 대부분은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내 아버지 또한 그당시 기억으로 아침에 깨어보니 그런일이 벌어진걸 알았다고 한다.
통계로 나타난 수치는 그후 수년이 흐른 후에야 파악이 됬는데 전국민의 95%가 사망 또는 실종 됬다고 한다.
1억명이 넘은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것이다.
말그대로 지옥 그 자체 였을 것이다.
그당시 시체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도달한 사례가 수백건 보고 되었다고 한다.
산업시설 전부가 파괴되었다고 해도 무방하고, 도로, 전기등 사회 기관시설 또한 모두 사라져버려 1년 가까이 전기 없이 생활해야 했다고 한다.
반도국가 였던 한국은 우리나라를 방파제 삼아 심한 피해는 없이 해안 주변 도시가 일부 침수되어 수만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는 것에 그쳤다고 했다.
그이외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말그대로 재앙이었다.
대만은 전국민이 수몰되다 시피하여, 중국 군대가 구호라는 명목으로 무혈 입성하더니만, 결국 중국에 흡수되었다.
동남아시아의 몇몇 섬나라들은 아예 지도에서 사라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후에 UN에서는 동아시아 재난 구호국이 신설되었고 전세계 다른 나라에서 구호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구호활동에서부터 제국주의의 부활을 가져다 주는 빌미가 되었다.
그 중심에는 미국과 중국이 있었다.
미국은 자국의 태평양 함대가 있던 필리핀등 동남아시아 지역 주요 섬나라들에 대해 구호 활동 명목으로 구호인력과 함께 기존 태평양 함대의 유실된 무기, 시설등의 수거 및 치안유지라는 구실로 군대를 함께 보냈다.
사실 구호활동이라고 해봐야 바닷물이 빠지고 나서 거리에 널려있는 시신들을 처리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피해국가들의 정부기능이 상실되고, 대통령부터 국회의원들까지 전부 사망 또는 실종된 상태여서 그 어떤 기능도 할 수 없는 나라가 부지기수 였다.
미국은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도 되도록 중국본토와 거리가 먼 지역의 국가들 부터 자국의 주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했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의 도움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지금 미국의 주는 총 78개이고, 미국 국기의 깃발에도 78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이에 질세라 중국 또한 눈엣 가시였던 대만을 쓰나미 발생 후 단 2개월만에 자국영토로 완전 편입 시켜버렸다.
그리고 베트남, 태국 등을 병합해 버렸다.
우리 일본은 미국이 중국의 견제로 군대 파견을 못하게 되자 바로 한국의 표적이 되었다.
한국도 우리나라에 구호물자와 구조인력들을 대거 보내 주었다.
한국의 우리나라 침탈은 아주 교활하고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처음에는 식료품과 담요 등 구호물자를 배급해주고, 기초의료시설을 지원해 주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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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저기서 강력범죄가 발생하고 한국의 구호물품이 도난 당하거나 구호인력들이 폭행을 당하는 사례가 생기자 치안유지라는 명목으로 경찰을 파견했다고 한다.
이미 일본의 행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그 누구의 허락이나 입국심사 같은 따위의 절차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난 후에 UN에서 동아시아 재난 구호국이 신설 되었을때 우리나라는 외교관도 없고, UN대사 혼자서 동분서주 했다고 한다.
UN대사 역시 본국으로부터 운영자금이 중단되어 일본인이 아닌 직원들은 모두 퇴사하고 일본인들은 스스로 돈을 벌면서 UN에 일본의 목소리를 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주권을 스스로 상실해버린 우리나라를 다른 어떤 나라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자국내의 일본기업들을 모두 국유화 시켰다고 한다.
방법은 너무 간단했다.
일본의 채권, 채무에 대한 담보와 일본경제 파탄에 따른 자국내 일본 공장의 폐업 시 자국민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UN대사에 서류 한장으로 모든 일본의 공장들과 시설, 그리고 다국적 기업이 소유한 토지나, 자산들을 국유화 시켜 버렸다.
이런 일들을 UN대사와 몇 명의 주재원이 어찌해볼 도리도 없었다고 한다.
UN에서 한국이 우리나라의 보호국으로 지정 되던날 UN대사는 자신의 숙소에서 자결 한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말이 보호국이지 이름만 빌린 식민지나 다름 없었다.
우리의 외교권부터 모든 주권의 대리인으로 한국을 지정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우리나라의 보호국에 지정된 것에 세계 열강들은 아무말도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천연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영토가 넓은것도 아니고, 해외에 광범위한게 뻣어나갔던 기업들이 국유화된 마당에 별 효용가치가 없다는 판단이었다고 한다.
말그대로 우린 버림 받은 것이었다.
그날을 우리 독립군에게는 주권을 빼앗긴 국치일로 정하고 있다.
그리고 UN대사의 아들이었던 스무살 청년 카이토선생이 바로 지금의 임시정부 수장이 되었다.
그는 유창한 영어, 프랑스어 실력의 소유자였고,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외교활동을 몸으로 느낀 이였다.
이제 그는 칠순을 넘긴 노인이 되었지만, 독립에 대한 열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내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던 시절 유즈키가 건네준 연설문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당시 해외에 거주하거나 여행 중이었던 일본인들을 규합하고, 모아 10만명이 넘는 후원인이 생겼고 이를 토대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세계 열강들은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목소리는 너무 작게만 들렸다고 한다.
주인 없는 생선이 누구의 것이 될것인지 서로 눈치만 보다가 누군가 하나 집어먹자 서로 달려드는 격이었다.
말그대로 결국엔 서로 나눠먹는 것으로 결론이 난 셈이니 말이다.
태국과 베트남에도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외의 작은 섬나라들은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반기는 분위기인 듯 하다.
그도 그럴것이 이젠 어엿한 미국의 시민이 되지 않았는가?
미국은 덕분에 환태평양 지역을 자국의 영토화 시켰고 그에 따르는 무한한 해양자원을 얻게 되었으니 서로 궁합이 맞아떨어졌다고나 할까?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한참 후진국이었던 한국은 우리의 부재를 틈타 전기, 전자, 반도체, 자동차등 기존에 우리나라가 주력으로 가지고 있던 산업에서 발군의 성장을 이룬덕에 지금은 UN상임 이사국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젠 우리나라 이름을 지도상에서 없애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다.
우리 광복군을 테러 집단으로 규정해놓고, 마음대로 세계 언론을 주도하고 있다.
나는 다음주에 있을 G20정상회담이 열리는 베이징에서 세계 지도자들 앞에 우리의 주권을 강제로 침탈하고 이제는 일본이라는 이름마저 없애려는 한국의 침략자를 처단하려 한다.
내몸이 산산조각 날 지언정 나는 우리나라의 자주국임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한다.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지나가며, 조그마한 배는 어느덧 중국의 이름모를 어촌에 닿았다.
우리는 긴밀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G20정상회담 개최를 앞두고 중국 내에서도 대만 광복군을 비롯한 몇몇 중국에 복속된 국가의 광복군들도 이때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해서, 중국도 이를 경계하는 상황 이었다.
나라 없음이 얼마나 서글프고 원통한 일인지, 나는 두분 형님의 죽음에 그 어떤 언론보도 한번 없이 조용히 무마되는 모습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꼇다.
우리 일행은 일본계 중국인이 거주하는 안가 쪽방으로 안내됬다.
다들 긴장속에 들어선 쪽방에서 웅크리고 앉아 잠을 청해야만 했다.
조용한 어촌마을은 아침닭이 울때까지 우리를 편안하게 맞이해 주었다.
쪽방을 마련해준 일본계 중국인 노인은 우리에게 아침거리로 뜨끈한 국물의 된장국을 내 주셨다.
바다의 해산물로 국물을 우려낸 된장국 맞이 예전 어머니께서 해주신 그 맞 같이 온몸을 노근하게 해 주었다.
급하게 식사를 하는 와중에 노인은 우리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자신의 옛 이야기를 해 주셨다.
두분 부모님이 신혼여행으로 중국에 오셨다가 엄청난 쓰나미를 TV중계로 보게된 이야기며, 중국 정부로 부터의 강제 이주, 수용소 생활, 수용소에서 태어난 자신, 그리고 젊으신 나이에 폐렴으로 두분 부모님을 차례로 잃고 중학교때부터 혼자 고아원에서 자란 이야기 까지 듣고나니 이내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제대로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채 고아원에서 도망쳐 이곳 어촌까지 흘러 들어온 이야기까지 다 듣고 나니, 나는 더욱더 결심을 굿건하게 할수 있었다.
그의 어눌한 일본어를 들으면서 그의 목소리에서 한맺힌 70년의 세월을 느낄수 있었다.
그간 우리 민족이 당한 설움과 울분만이 아니다.
지금 심정으로는 한국을 향해 국제적으로,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는 슝늉까지 대접을 받고 바삐몸을 움직였다.
조용한 어촌에 낮선이들 여섯명이 모여 다니는 모습은 아무래도 의심이 갈수밖에 없기 때문에 빨리 대도시로 나가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어야 했다.
우리는 베이징 근교의 랑팡으로 이동했다.
베이징 보다는 검문이 덜 심하지만 한나절이면 G20회담 장소로 이동가능한 거리였다.
우리 여섯명은 2인1조로 3개조가 투입될 예정이다.
나와 내 파트너는 플라스틱 폭탄을 몸에 두르고 갈 것이다.
내파트너는 다름아닌 유즈키.
우리는 부부로 위장하여 G20 행사장으로 향할 것이다.
그녀 또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
내가 소년기를 평탄하고 행복하게 보냈다면 그녀는 어린시절을 슬픔과 배고픔의 연속으로 보냈다.
함께 훈련을 받는 내내 그녀는 웃음 한번 보이지 않았었다.
늘 말이 없고 단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흔드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곤 했다.
밀항을 하기 전날 훈련을 받던 동지들과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부모님은 독립군 투사셨고, 아버지께서는 독립군 전투에서 전사 하셨다.
그때 그녀는 엄마의 뱃속에 있었고, 그녀는 아빠를 사진속에서만 보고 자랐다고 했다.
엄마 또한 임신한 상황에서도 전투에 참여 하셨고, 다리에 몸에 총상을 입으셨다고 한다.
총상으로 인해 출산 후 급격한 체력저하, 그리고 계속적으로 쫒겨다니며 긴장한 상황의 연속으로 그녀의 엄마는 딸에게 젖한번 먹이지 못하고 삼일만에 남편을 따라 갔다.
그녀는 그렇게 7개월만에 엄마의 배속에서 나와 3일만에 고아가 되었다.
그녀의 지갑속에는 오래된 사진 한장이 있다.
젊은 남녀가 소총을 한자루씩 어께에 품고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있는 사진이다.
그 둘에게는 웃음이 있었고 꿈이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부푼 꿈이, 희망이 있었다.
두 부모님이 그렇게 홀연히 떠나시고, 독립군들의 손에 길러지다가 네살이 되었을 즈음부터 그녀는 고아원에서 컷다고 한다.
그리고 열네살이 되던해에 한국인 고아원 원장에게 몹쓸짖을 당하고, 그녀는 도망치듯 고아원을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일본인 이라는 뿌리를 찾고자 일본으로 돌아왔고, 무너져 내린 건물들과, 제대로 도로시설 하나 없는 일본의 실제 모습을 보고 그녀는 다시금 한국으로 돌아가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녀의 삶이 평탄치 못했음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곳에 있으면서 나는 그녀와 나는 가상 부부로 연기를 하면서 점점더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유년기를 그렇게 보냈지만, 뽀이얀 피부만큼이나 마음씨도 아릿따운 처녀 같았다.
우리는 부부처럼 보이기 위해 늘 함께 다니고, 행동했다.
말수가 적고, 평소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아 차갑게만 보였다.
그녀와 나의 대화는 늘 앞으로의 거사와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했다.
서로에게 공통점도 없고, 그녀는 일본말이 조금 서툴고, 나는 한국말이 조금 서툴렀다.
주위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G20 정상들의 동선으로 몸을 날릴 방법을 찾는다는게 쉬운일이 아니었다.
나와 그녀의 몸에는 플라스틱 폭탄 10키로를 몸에 두르게 된다.
그래서 평상시에 복대에 모레를 넣어 그 무게를 유지하고 있다.
움직일 때 몸이 부자연 스러워 보이거나, 무게를 이기지 못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한번은 그녀와 오랜시간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죽음에 대한 주제를 꺼내었다.
그녀는 의외로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해 주었다.
“저는 죽으면 별이 될거에요. 어두운 하늘에 어둡게 비추는 별,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늘 그곳에 있는...”
그녀의 소망은 어린아이 같지만, 아름다웠다.
나는 어둑한 하늘에 한두개 보이는 별들을 바라봤다.
일본에서는 설수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이곳 중국에서는 황사 때문인지 볼수 없었다.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지, 날씨가 스산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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