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 스페셜, 1월 5일(木) 밤 10시, 요한 정약용 선생 형제들 신앙활동 보도
2012년 1월 5일 목요일 밤 10시, KBS 1 TV역사 스페셜에서 요한 정약용 선생 형제들의 신앙생활과 활약상을 다루며 보도한답니다. 금년에 3차에 걸쳐 천진암 연구소에 와서 촬영한 귀중한 여러 고문서 원본 사진들 제시도 겸하므로, 그 동안 반세기에 걸쳐 반대하던 교회 內外 여러 識者들도 이미 함께 共認하는 단계에 이르렀다지만, 그러나 우리 신앙 선조들의 眞面貌와 그 업적의 의미와 가치와 교훈과 결과와 영향을 제대로 파악하기까지는 아직도 멀었다고 봅니다.
이번에는 적어도, 정약용 선생이 훌륭한 천주교 신자였고, 임시 준 성직단의 사제였으며, 10세 이전 어려서부터 천진암 서당(天學堂)에서 이벽 성조한테 10여년간 공부하였으며, 천진암은 요한 정약용 선생의 母校였다는 것, 등이 다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007년 12월 22일 저녁 8시에도, 같은 KBS 1 TV의 역사 스페셜에서 이미 광암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한번 다룬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정약용 선생을 중심으로 다룬답니다.
천진암 성지에서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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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bs.co.kr/1tv/sisa/historyspecial/view/vod/1768519_30885.html
정약용 3형제, 과연 신(神)을 버렸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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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3형제, 과연 신(神)을 버렸나? |
▣방송 : 2012. 1. 5. (목) 22:00~22:5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고정훈 PD ▣글, 구성 : 박미연 작가 ------------------------------------------------------------------------
다산 정약용의 또 다른 이름. “사도 요한”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신을 향한 믿음은 곧 이단이자 죽음을 의미했다.
정약용은 왜 신을 믿었는가? 그의 형제 정약전, 정약종 또한 천주교도의 길을 걸었는데!
1801년, 신유박해. 살아남은 정약용과 정약전! 그들은 과연 신을 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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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
▲ 다블뤼의 <조선 순교사> |
정약용은 초기 전주교의 핵심인물이었다. 1846년 조선에 온 제 5대 천주교 조선교구장 다블뤼가 집필한 <조선 순교사>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실학자 정약용이 천주교에 관한 거의 모든 일에 처음부터 관계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둘째 형 정약전과 셋째 형 정약종 또한 천주교도의 길을 걷는다. 유학(儒學)의 명가 나주 정씨의 후손이었던 정약용 3형제는 어떻게 한꺼번에 천주교에 빠져들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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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
▲ 황사영 백서 |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인 1801년, 역사상 가장 잔혹하게 천주교도를 박해한 신유박해가 발생한다. 이때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3형제도 한꺼번에 의금부로 끌려오는 비극을 겪게 된다. 가장 늦게 천주교를 받아들인 정약종은 모진 고문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끝내 순교한다. 남은 두 형제, 정약용과 정약전은 각각 경상도 장기현과 신지도로 유배를 떠난다.
-백서의 발견, 두 번째 피바람이 불고...
얼마 못 가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帛書)가 발견되면서 잠잠해지던 조정이 발칵 뒤집힌다. 황사영 또한 천주교도로, 박해를 피해 토굴에 숨어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발각이 되고, 그가 지니고 있던 백서로 인해 정약용과 정약전은 다시 시련에 빠진다. 황사영의 배후로 지목된 두 형제는 극심한 고문을 받고 또다시 귀양길에 오른다. 정약용은 강진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행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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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이 설계한 수원 화성 |
신유박해가 있기 전, 정약용은 배교한 과거가 있었다. 노론이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들을 천주교와 관련됐다며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이때 국법에 따라 천주교를 버린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을 특별히 아꼈던 정조는 노론의 비난 속에서도 정약용에게 화성의 설계를 맡기는 등 끝없는 신뢰를 보인다. 이런 정조의 뜻을 받들어 정약용은 일종의 양심고백을 행한다.
“신이 이른바 양학에 대해서 일찍이 그 책을 보았습니다…(중략) 지식이 자라자 문득 적수로 여기고 분명히 알게 되어서는 더욱 엄하게 배척하였고, 이미 늦게나마 깨우치고서는 더욱더 심하게 미워했으니...”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 중에서
배교하고도 계속되는 의심에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지만, 후견인인 정조가 승하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신유박해의 소용돌이로 휩쓸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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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의 유배지, 흑산도 |
▲ 전라남도 강진의 다산초당 |
천주교를 등지고 귀양을 떠난 두 형제의 삶은 어떠했을까? 흑산도로 내려간 정약전은 섬사람들과 어울리며 유배지에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자산어보>를 남긴다. 보통 유배 죄인은 현지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데 정약전은 어떻게 엄혹한 유배 생활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 이유가 “신앙심”을 계속 간직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어땠을까? 그는 학문 활동에 매진하며 <다산문답>, <논어고금주>, <맹자요의>와 같은 저서를 남기는데, 대부분을 성리학 연구에 할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천주교에 입교했던 사실을 후회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가톨릭계에서는 정약용의 말년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1874년 프랑스의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 정약용이 유배 이후 천주교 신앙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관련 서적을 남기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정약용의 장남 정학연도 훗날 천주교 신앙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정약용의 배교 논란을 조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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