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개전이후 중일전쟁의 전개과정 및 양측의 군사전략
출처 http://blog.naver.com/atena02/100160560313
태평양전쟁이후 중일전쟁이 사실상 제2전선이 되면서 아예 사람들의 관심밖이 되어 버리다보니 41년이후 중국 전선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서적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설령 있다해도 매우 간략하게 다루거나 주로 화북과 만주에서의 공산군의 활약과 국공 양자간의 대립(신4군 사건같은), 이른바 "삼광작전"으로 대표되는 일본군의 잔혹성에 대해서나 서술할뿐 정작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군과 일본군과의 전투나 중국전선의 변화과정, 양측의 전략에 대해서는 거의 거론조차 되지 못하고 있죠. 예를 들어, 지진성의 "중국현대혁명사"나 쟝세노의 "중국현대사"같은 좌파계열의 서적들은 아예 국민당측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로이드 이스트만의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는 장개석의 무능함과 중국군의 문제점에 대해서만 비판할 뿐입니다. 라이프 2차대전사의 "중국-버마-인도"에서도 대부분 스틸웰의 버마전선과 인팔작전에 할애하고 정작 중국전선에 대해서는 44년 4월~12월까지의 일본 최후 공세인 대륙타통작전에서 보여준 중국군의 무기력한 모습에 대해서만 부정적인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한쪽 당사자인 일본도 마찬가지로, 일본내에서 나온 대부분의 서적들도 태평양과 버마에서 미군과의 전투에 대한 자료는 엄청나게 많지만 중국전선에 대해 다룬 서적은 극소수이며 매우 짧게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시사일본어사에서 나온 "일본 군사사"에서도 만주사변부터 중일전쟁 초반인 남경전투까지만 다룰뿐 그 이후에 대해서는 노몬한전투와 태평양전쟁으로 넘어가버립니다. 다만 태평양전쟁연구회에서 출판한 "도해 일중전쟁"에서 개괄적으로 만주사변부터 항복까지 중국전선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으나 내용이 상세하지 못하고 분량이 적은 것이 흠입니다.(무엇보다 아직 국내에는 번역되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일본어를 알아야 하는데 제 일어 실력이 짧아서리..) 이는 영, 미중심의 시각에서 기술하다보니 중국전선이 상대적으로 타 전선에 비해 비중이 작았고 전쟁기간 전선이 교착상태에 머물렸다는 점이 있지만, 피아 수백만명이 45년 8월까지 치열하게 밀고 당기며 혈전을 벌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닙니다. 독소전쟁의 스탈린그라드전투나 쿠르스크전역처럼 전쟁의 향방을 결정할만한 대단한 전투는 없었으나, 태평양전쟁 개전이후에도 쌍방 수십만이 동원된 대규모 전투가 여러차례 있었다는 점에서 너무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38년말 중국의 임시수도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호북성 한구가 함락되자 전선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가 됩니다. 당초 명확한 국가전략의 수립과 장기전에 대한 대비책 없이 무턱대고 개전을 한 일본은 41년말까지 전체 육군의 절반이 넘는 27개 사단 100만을 중국에 전개했고 전사자만 18만 5천명에 달합니다. 이는 청일전쟁은 물론이고 러일전쟁에서의 전사자(13만 5천명)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국력은 이를 뒷받침할 역량이 없었으며 병참과 병력 동원의 한계에 직면합니다. ※ 37~41년까지 일본 육군의 병력 증강 및 배치 현황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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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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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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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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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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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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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 및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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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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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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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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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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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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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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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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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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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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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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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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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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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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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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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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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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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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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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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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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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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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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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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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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단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만큼 질적 저하는 심각했으며 병력의 정수와 장비도 감축됩니다. 특히 간부들을 보충하기 위해 교육기간을 4년에서 2년으로 단축했다가 43년이후에는 2~3개월 초단기교육을 이수시킨후 전선에 무작정 투입합니다. 따라서 훈련은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만용만 앞선 젊은 초급장교들 대부분이 선두에 서서 무작정 "반자이 돌격"을 시도하다 전사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죠. 메이지유신이래 국력의 한계로 항상 군의 소수정예화를 기본 방침으로 했던 일본은 서구 열강과 같은 국민총동원과 총력전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잘 훈련된 예비군과 군간부, 부사관의 확보 역시 등한시했죠. 30년대 초반 군비를 대규모로 확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력과 자원동원능력은 여전히 장기전에 아무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여기다 "보급병이 군인이면 잠자리도 새다"라고 말할만큼 병참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았던 군 수뇌부과 현지 부대 지휘관들은 공격에만 치중했을뿐 병참은 소홀히하여 일본군의 공세 지속 능력은 매우 짧았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체면을 위해 "무조건 사수"와 "후퇴불가"를 부르짖었던 스탈린, 히틀러와 달리 장개석은 처음부터 피아간의 전력차이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적절한 지연전술을 펼치면서 병력을 융통성있게 운용함으로서 매번 패퇴하고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도 바바롯사 초반의 키에프 포위전같은 대규모 포위를 당하지 않고 부대를 유지한채 전선을 뒤로 물릴 수 있었으며 일본군에게도 그만한 희생과 부담을 강요하였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은 우세한 기동성과 화력, 압도적인 제공권을 갖추고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중국군을 포위 섬멸하는데 실패했죠. 따라서 어느 쪽도 상대에게 결정타를 먹이지 못한채 점차 1차대전식의 진지전, 소모전화 됩니다. 한구공략을 끝으로 사실상 중국 내지에 대한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일본은 39년부터 조기결전의 실패를 인정하고 지구전으로 전환하여 중국군을 외부로부터 고립시키고 전술레벨의 승리로 조금씩 소모시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겠다는 식으로 방침을 전환합니다. 이를 위해 제21군이 38년 10월 광동을 점령하고 39년 1월에는 해군 육전대 2500명을 해남도에 상륙시켜 점령했으며 6월에는 구룡반도를 제압하는 등 중국의 동남연안가의 주요 항구와 해외수입루트를 차단합니다. 그러나 정작 시간이 지날수록 소모전략과 외교적 고립에 직면하게 된 것은 일본 자신이 됩니다. 일본은 주로 병참에서 유리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점령하여 점과 선으로 병참선을 연결했는데 중국군은 지속적으로 이들 점령지역의 외곽에서 공격을 시도했고 후방지역과 병참선을 교란하였습니다. 장개석은 일본군 후방 교란과 유격전에 전군의 1/3을 투입합니다. 여기다 소련은 중국에 대한 가장 중요한 원조국이었으나, 여전히 러일전쟁당시 무기력했던 러시아에 대한 편견을 여전히 가지고 있던 일본 군부는 소련을 과소평가했으며 관계 개선을 위한 아무런 외교적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장고봉, 노몬한에서의 참담한 패배였죠. 또한 실질적으로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는 독일과 "강철조약"을 체결하여 스스로 영, 미, 프와 관계를 악화시켰으며 이에 대해서도 관계 개선을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영, 미, 프는 만주사변이래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해서 외교적으로 비난하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당장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이 우선인지라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청말이래 열강들의 중국침략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기에 지구 반대편의 동양인들끼리의 싸움따위는 그들에게는 관심밖이었습니다. 더욱이 영, 프는 전통적으로 중국에 대해 매우 비호의적이었으며 중국이 버마와 홍콩, 북부인도차이나를 통해 군수물자를 밀수하는 것이 일본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수시로 단속하고 압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중일전쟁의 수렁에 빠져 극심한 물자 부족(특히 석유)으로 경제가 침체되고 자원이 부족해지자 남방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중국전선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적을 더 늘려나가는 것이었죠. 40년 6월 프랑스가 항복하자 일본은 프랑스령 북부인도차이나에 무단으로 진주한후 비시정부와의 협정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인도차이나 전역을 장악합니다. 이것은 서태평양에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미, 영과 네덜란드에게 심각한 군사적 위협이 되었으며 상호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일본은 외교적 노력보다는 "하늘에 운을 맡긴다"는 식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 기습 공격을 감행하는 최악의 수를 두고 맙니다. 당시 남방작전을 주도했던 스기야마참모총장은 1941년 9월 6일 궁중회의에서 아무 근거의 제시도 없이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천황이었던 히로히토가 신랄하게 "어떤 확신으로 그런 말을 하는가?"라고 질문하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대미개전과 남방작전에 소요될 병력과 자원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계산하지 않았으며 초기작전에 대해서만 계획을 수립했을뿐 그 이후에 대해서는 방침조차 수립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연합함대를 총지휘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조차 "2년차까지는 어찌되었건 그 뒤는 알 수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이죠. 이는 히틀러의 도박보다 더 무책임하고 무계획적이며 무모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대해서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기에, 기껏 수립한 방침이라는 것은 "독일, 이탈리아가 영, 미를 굴복시키면 우리는 중국을 굴복시킨다"라는, 그야말로 자기힘이 아닌 남의 승리에 기대겠다는 식의 요행을 바라는 허무맹랑한 내용이었습니다.(1941년 11월 15일 대본영 대미영란전쟁종말 촉진에 관한 복안)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의 미태평양함대에 대한 전면 공격과 함께 같은 날 영국령 말레이와 홍콩에 대해서도 공격이 개시되어 태평양전쟁이 발발합니다. 일본 육군은 미, 영, 네덜란드, 필리핀, 호주 등을 상대로 한 남방작전을 위해 데라우찌원수를 사령관으로 "남방총군"을 구성했는데 여기에는 총 51개 사단중 겨우 4개군 11개 사단(제14군, 제15군, 제16군, 제25군) 36만명과 육군 항공대의 1/3을 동원하였습니다. 중국보다 훨씬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이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은 겨우 이 정도였던 것이니 처음부터 무리한 작전이었습니다. 또한, 여기서도 일본군은 국력과 자원의 동원능력 한계를 이유로 단기결전을 상정했으나 이를 위한 세부실천계획은 막연한 희망사항을 나열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나름대로 국운을 걸고 사생결단식의 전쟁을 시작했음에도 막상 국가전략 및 군사전략에서는 명확한 목표도 계획도 없었으며 작전의 일관성도 결여된채 수동적, 맹목적이었으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됩니다. 미드웨이에서 우세한 전력을 갖추고도 참담한 패배를 당한 것도 실상 당연한 것이었으며 이후에도 전력을 재정비하기보다는 과달카날에서 압도적인 미군과의 소모전을 벌임으로서 결과적으로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당한 것 이상의 참패와 전력 소모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정공법보다는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적의 허를 찌르겠다는 식의 도박성 작전에 매달립니다. 한편의 코메디였던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만큼은 아니지만, 일본군 역시 그 전략적 방만함과 무모함은 그에 못지 않는 것이었던 것이죠. 태평양전쟁이 개전되자 일본에게도 중국전선은 보조전선으로 관심밖이 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100만이상의 병력을 광대한 중국 전토에 분산 배치하고 있었으며, 북경과 화북일대를 중심으로 한 북지나방면군이 제1군, 제12군, 주몽군(총 9개사단, 11개 여단)이었고 한구의 제11군(7개 사단, 1개 여단)과 상해의 제13군(4개 사단, 4개 여단), 광동의 제21군(4개 사단, 4개 여단)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개전 직전 중국전선의 상황 >
(붉은 색이 일본군 점령지역이며 티벳과 만주를 제외하고 중국 본토의 약 47%를 장악)
태평양전쟁 초반 남방작전이 예상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뉴기니를 점령하고 호주까지 위협할만큼 승승장구하자 남방작전을 조기에 종결하고 병력을 되돌려 중경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지만 42년 6월 5일 미드웨이해전에서 뜻밖의 미해군의 반격으로 대참패를 당하자 일본의 전략은 근본부터 흔들리게 됩니다. 모든 자원을 남방으로 쏟는 대신, 중국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현상 유지를 하되 국지적으로 공세를 유지하여 중국군을 소모시키겠다는 전략이었죠.
한편, 장개석은 중일전쟁 개전을 결정했을때부터 국력상 중국 단독으로 일본을 상대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중국이 일본과 싸우다보면 언젠가 서구 열강들이 개입할 것이며 이들의 원조를 받아 양면에서 포위함으로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그야말로 장개석이 꿈에서도 그리던 일이었죠. 그러나 정작 서구 열강들은 장개석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허약했고 아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공격을 받아 도처에서 여지없이 깨집니다.
41년 12월 11일, 일본 제15군이 버마를 침공하여 42년 3월 8일 랭군이 함락됩니다. 이 과정에서 미, 영의 군사력은 물론이고 군사전략도 매우 형편없었으며 서로간의 협조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영국은 중국군의 버마진입조차 거부하다가 최악의 순간에 마지못해 제한적으로 허락하였습니다.) 더욱이 버마원정군을 지휘한 스틸웰은 일본군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휘하 중국군에게 무작정 공격을 명령했다가 참담한 패배를 당합니다. 중국군은 전략예비대이자 최정예부대인 제5군과 제6군의 태반을 상실하였죠. 매우 오만한데다 철저한 백인우월주의자였던 스틸웰은 패전의 책임을 전적으로 중국군탓으로 돌렸으나 영국 제14군을 지휘했던 슬림중장은 "중국군은 병력도 부족하고 장비도 매우 빈약했으나 병사들은 강인하고 용감했다. 그들은 수년간 단련된 베테랑이었으며 우리연합군중 가장 잘 싸운 것은 중국군이었다"라고 극찬하였습니다.
 버마전선에 투입된 손입인중장휘하 제38사단. 미국식으로 개편된 최초의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인도를 침공한 무다구찌의 일본군을 완전히 박살냈고 버마를 탈환합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g17/140019097023
버마작전과 함께 1941년 12월 24일 한구의 제11군이 장사에 대해 제3차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장사를 방어하는 제9전구는 이미 3개월전의 제2차 공격때 큰 피해를 입으면서 근근히 방어해낸 상태였습니다. 장개석은 일본이 장사방면으로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3개군(제73군, 제74군, 제79군)을 증원합니다. 양측의 병력은 일본군 제11군 산하 3개사단 12만명에 대해 중국군은 4개집단군 14개군 37개 사단 30만명 정도였습니다. 이 전역에서 설악이 지휘하는 중국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일본군을 상대로 맹목적인 진지전을 고수하기보다 적을 깊숙히 유인하여 병참이 한계에 직면하자 그 퇴로를 차단하였습니다. 더욱이 포위되어 병참이 끊긴 일본군은 후퇴과정에서 다수의 아사자와 동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물론 기동성과 화력, 제공권에서 열세였던 중국군은 일본군을 포위섬멸하는데 실패했고 더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작전의 주도권을 쥐고 이전보다 효과적으로 방어하여 적의 후퇴를 유도하였습니다. 즉, 무기와 장비에서 1/10도 되지 않음에도 중국군은 자신들이 가진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것입니다. 43년에 일본은 중국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 이른바 "3대 섬멸전"을 추진합니다. 구체적으로 3대 섬멸전이란 43년 2월~3월까지 양자강 북방에서 진행된 "강북섬멸전", 43년 5월~6월까지 양자강 이남에서 진행된 "강남섬멸전", 43년 11월~44년 1월까지 진행된 "상덕섬멸전"입니다. 이 각각의 전역에서 일본군은 국지적으로 중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토탈해 약 6만6천명의 중국군을 사살했으나 병참의 한계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한채 철수함으로서 단지 전술적 승리일뿐 전략적으로는 무의미한 공격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화북에서는 북지나방면군이 국민당군과 공산군의 유격전에 휘말려 소모적인 토벌전을 반복해야 했으며 따라서 결정적인 전과는 내지 못한채 서로 깨작거리는 전투만 거듭됩니다. 44년 4월부터 12월까지의 대륙타통작전은 일본으로서는 그야말로 치밀한 계획과 가능한 최대한의 준비끝에 시작한 최후의 대공세였습니다. 동원병력만도 제11군, 제23군을 비롯해 50만명에 달하여 태평양전쟁기간 단일 전역으로서는 최대의 작전이었습니다. 이는 1차대전 막판 1918년 독일 최후의 공세였던 루덴도르프 공세에 비견될만큼 그야말로 나라의 사활을 건 작전이었으며 중국군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맹타함으로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전술적인 것에 불과했고 중국군에게 큰 타격은 입혔어도 결정타를 먹이지는 못했습니다. 애초에 목적 자체가 중국군을 격멸하는 것이 아니라 계림, 유주 등 연합군 비행장들을 제압하고 중국 대륙을 관통하여 남방의 물자를 본토로 수송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점령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병참선을 확보할 역량이 없다는 현실은 완전히 무시한 것으로, 그야말로 마지막 남은 병력과 물자를 낭비한 어리석은 작전에 불과했습니다.
대륙타통작전당시 중국내 미군 비행장과 일본군의 진격로. 중국군은 탕은백의 제1전구와 설악의 제9전구가 치명타를 입기는 했으나(이때문에 서구측은 중국군의 군사역량 자체를 멸시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군의 주력은 보존할 수 있었고 버마에서 승리함으로서 45년 1월부터 점진적으로 반격을 준비하게 됩니다. ※ 45년 동부전선에서 일본군 최후공세와 중국군의 반격 : http://blog.naver.com/atena02/100153761616
37년 7월 노구교사변으로부터 45년 8월 항복까지 만 8년간의 전쟁에서 중국은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순수하게 자신들의 역량만으로 국력에서 4배나 우세한 적을 상대로 싸워서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비록 중국군이 거대한 물량을 투입해 베를린까지 진격했던 소련군의 모습을 재현해내지는 못했으나 소련은 중국보다 훨씬 공업화된 국가였으며 또한 전쟁기간 내내 영, 미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중국은 반봉건적인 후진국이었고 30년대 내내 치열한 내전을 겪었으며 그나마 근대화되고 군수공장을 갖춘 동남연안가의 대도시들마저 개전 초반에 상실하였습니다. 여기다 중국은 정치적으로 여전히 분열된데다 국가 총동원을 위해 필요한 근대화된 행정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장개석 정권은 중국이 가진 총역량의 겨우 5%미만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일본과 서구 열강들은 아편전쟁이래 허약했던 중국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군의 전투력과 그 역할에 대해 평가절하했습니다. 그러나 40년 6월 서부전역에서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채 6주만에 항복했던 프랑스나, 독일과 거의 대등한 경제력을 갖추고 인구에서 2.5배나 우세했으며 500만의 병력과 1만2천대의 전차를 가지고도 바바롯사 작전 초반 연패를 거듭하며 엄청난 손실을 겪었던 소련과 비교했을때 중국군의 전투력은 1/10에도 미치지 못했음에도 프랑스나 소련이 당했던 그런 대규모 포위섬멸을 당하지 않은채 전투력을 보존했으며 39년 12월에는 근 10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는 저력을 발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면에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기간의 중국군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죠.

< 태평양전쟁 종전시점에서 중국전선의 상황 >
※ 주요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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