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몇 해 전 TV에서 방영된 「여인천하」라는 사극에서 조선시대 여인들의 정치적 파워에 대해서 흥미를 느낀 적이 있었다. 그간의 역사에서는 여성들의 삶이 거의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의 여성에 대해 아는 것은 선덕여왕이나 문정 왕후 등 정치적 활동을 한 여성, 또는 신사임당이나 유관순 등 몇몇 뛰어난 여성들에 불과했다. 조선시대의 여성은 늘 남성에게 가려져 남존여비의 근거가 되는 음양이론 남자는 양지, 여자는 그늘이라는 말 그대로 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사대부가의 여성으로서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이었던 허난설헌은 자신의 고달픈 삶을 세 가지 요소로 압축해서 시로 승화시켰는데, 그 세 가지 중 첫째가 왜 변변치 못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을까, 두 번째는 왜 여자로 태어났을까, 세 번째는 왜 하필이면 조선에서 태어났을까였다. 이 세 가지는 비단 사대부가의 여성이었던 허난설헌뿐 아니라 조선에서 살았던 저 여성에게 강요된 유교적 여성관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전생에서 죄 많이 진 사람이 여자로 태어난다. 이는 조선이 오백년간 유교적 여성관을 신봉한 결과 생겨난 속담이다. 이처럼 조선의 여성들은 철저하게 유교적 여성관에 얽매어 일생을 한 속에서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조선은 통치 이념으로서는 성리학을,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족제도로서는 종법적인 부계 가족 질서를 이상으로 하여 기존의 모든 사회제도를 이에 맞게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은 여성들에게 남존여비, 삼종지도, 칠거지악 등 순종과 정절을 강조하며 현모양처를 여성의 이상향으로 제시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는 여성은 한 집단뿐이라고 생각한다. 궁궐의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모든 사회생활에서 배제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반면 궁궐의 여성들은 오히려 여성이기 때문에 정치에 참여 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여성이었고, 왕의 승은을 입을 수도, 왕자를 생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궁궐 여성의 정치 참여라는 것은 결국 아들을 낳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참여는 대부분 왕비의 친지들 즉 외척들을 통해서, 혹은 임금에게의 간언을 통해서 비공식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리라 보인다. 조선의 역사에서 공식적인 여성의 정치 참여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으나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채 왕이 사망하는 경우 왕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자격으로 후계자를 결정하거나, 어린 왕이 즉위하여 정사를 처리할 수 없으면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행하였던 일은 여러 차례 있었다. 조선 시대는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하는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로 여성의 능력과 권리가 정당하게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특히, 여성들의 외부와의 접촉이 극히 제한되어 있던 상황에서 여성의 정치활동을 살핀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당시 여성들은 정치활동을 하기도 어려웠지만 또 한편으로 어려운 여건을 제치고 활약하였다고 하더라도 역사서술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 자료를 통해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의 역할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유교적 사관에 입각하여 여성을 폄하된 시각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왜곡되어 전해진 부분도 적지 않다. 이번 논문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여성의 정치활동을 재조명 해보고자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왕비를 중심으로 정치참여에 대한 사례를 규명해 볼 것이다. 비록 왕비라는 왕실 내에서의 입장이나, 내외법으로 인한 여성에 대한 차별적 구조가 더욱 심화되었던 시대적 배경에서 왕비의 정치활동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한 불리한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정치적인 영향을 발휘되었다. 왕비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이 바로 수렴청정이다.
Ⅱ-1. 수렴청정을 했던 왕후들
수렴청정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나이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일정기간 동안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리로 처리했던 일을 말한다. 안정된 상태에서 국정을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왕실의 어른인 여인이 왕이 앉아 있는 용상 뒤에 수렴을 드리우고 섭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왕비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정치활동인 셈이다. 수렴청정을 했던 왕후들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순원왕후와 신정왕후는 두 번에 걸쳐 수렴청정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윤정란, 『조선의 왕비』(1999), pp.10-12.
조선왕조에 들어서서 최초의 수렴청정은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조가 승하하자 대리로 정무를 보던 둘째 아들인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너무 어리다하여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조선 왕조 두 번째 수렴청정도 파평 윤씨인 문정왕후에 의해 행해졌다. 문정왕후는 인종이 승하하자, 정희왕후의 섭정례에 따라 공사는 원상과 의논하여 처결토록 명하였다. 이후 1557년(명종 22) 명종이 죽고 선조가 15세로 즉위하자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1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1800년(정조 24)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영조의 비 정순왕후 김씨가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1834년(순조 34) 순조가 죽고 왕세손 헌종이 즉위하자 할머니 순원왕후 김씨가 6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1849년(헌종 15)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순원왕후가 또 수렴청정을 하였고, 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고 익종비 신정왕후 조대비가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 이후 조대비는 고종을 자신의 남편인 익종의 대통을 잇게 함으로서 고종 즉위 후 약 2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고 조선왕조 마지막 수렴청정을 한 대비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 역대 왕조의 수렴청정은 조선 시대 8회에 걸쳐 행해졌다. 이러한 섭정은 여성으로서의 공식적 정치참여이지만, 이것은 왕실의 최존장자로서의 권한행사, 즉 모권에 연유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태후?대비에게 섭정토록 한 것은 여성에게 정치를 맡김으로써 왕위찬탈의 위협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대비의 섭정은 대비의 친가인 외척세력의 대두를 가능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왕의 그늘에 가려 투기나 하며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라 여성이 정치 전면에 나서서 직접적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왕권보호와 함께 평화적인 왕위계승에 기여하였음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Ⅱ-2. 중국에서의 수렴청정
수렴청정이라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모습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섭정을 했던 대표적인 여인이 바로 서태후이다. 서태후라는 인물은 1860년을 전후한 중국의 복잡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여성은 황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결국 후궁에서 본처인 동태후를 능가하는 서태후로서 황후가 되기 위해 총명함과 강인함을 버팀목으로 73세를 영유한 중국의 여걸이다.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동태후와 함께 섭정을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왕후들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여자의 질투는 곧 야망으로 연결된다. 조선사와 중국사 대부분의 기초사료에서 여성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재앙을 낳은 것으로 또는 남성에 대한 도전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평가를 부여하는 것이야 말로 올바른 역사의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중국에서도 고위직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여성의 수가 그토록 적은 이유 중의 하나는 여기에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남성우월주의 라든지 조선시대의 가부장적제도가 상당부분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문정왕후를 삐딱하게 보는 시각이 많을 지도 모른다. 지금 21세기에는 모두가 평등사회를 구현한다고는 하지만 제도적으로나 사고방식 면에서 볼 때 아직도 많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선의 여걸이었던 우리 왕후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까 한다.
Ⅲ. 사례연구 수렴청정의 정치적인 역할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최초의 수렴청정왕후였던 정희왕후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강한 권력자였던 문정왕후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최초의 여성 실권자, 정희왕후 윤씨 1) 수렴청정 계기 1469년 11월 윤씨의 나이 52세, 조선이 개국한 지 77년 만에 최초로 수렴청정이라는 것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조선의 여러 왕후들 중에서도 최초였기 때문에 더 중요한 역사적 주인공이 되었던 여인은 바로 세조비인 정희왕후 윤씨이다. 윤씨는 어전으로 나가 열네 살이 된 손자 성종이 앉아있는 용상 뒤에 쳐져있는 수렴 뒤에 앉아서 문무백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윤씨가 궁궐로 들어선 계기는 언니 때문이었다. 궁궐의 감찰상궁과 보모상궁이 윤씨 집안에 수양대군에게 적합한 배후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는데 사실 이때 후보자는 윤씨의 언니였다. 궁중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어머니 뒤에 숨어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에게 발탁된다. 뜻하지 않게 감찰상궁을 지켜본 것이 윤씨의 수렴청정을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최초의 수렴청정은 성종대 세조비인 정희왕후에 의해 행해졌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수렴청정이란 즉위한 왕이 너무 어린 경우에 왕실의 최존장자로서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잠정적으로 왕을 대리하여 국정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렴이란 신하와 왕비가 서로 상견할 수 없도록 발을 친다는 뜻으로 유교적인 내외법에 기인 한 것이다. 대비가 수렴하는 장소는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정전이었는데, 대비는 약간 동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정치에 직접 참여하였다. 이때 대비가 내리는 명령을 의지(懿旨)라 하였다. 수렴청정을 통해 정희왕후는 정치 제일선에 서게 되었다. 왕실의 어른으로서 직접 회의에 참여하여 보고를 듣고 결정을 내림으로써 정치의 흐름을 읽고 정치 감각을 익히는 최선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2) 정치적 역할과 효과 수양대군이 문종의 죽음으로 생긴 공백에 뛰어들어 권력을 잡았듯이 정희왕후 윤씨는 예종의 죽음으로 생긴 틈을 이용하였다. 예종 다음 왕위는 마땅히 안순왕후 한씨의 아들 제안대군에게 돌아가야 했으나, 당시 윤씨는 네 살인 제안대군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를 하였다. 그리고 의경세자의 맏아들 월산대군을 제치고 열세 살이 된 자산군(성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강력한 왕위계승권에의 개입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제 9대 임금으로 자산군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성종이다. 그리고 수렴청정은 대왕대비 윤씨의 몫이었다. 정희왕후는 최초였지만 그 역할이 대단했다. 단종 1년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10일을 기해 정변을 일으키려 하였다. 이 사실이 소문나면서 많은 이들이 주저하였는데 이때 윤씨가 중문까지 나가 망설이는 수양대군에게 직접 갑옷을 입혀주며 거사를 격려했다. 원래 윤씨는 수양의 계획을 말리는 입장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진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거사를 부추기는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평소에 조용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는 이런 결단력은 손자 성종의 즉위 등 몇 번에 걸쳐 선보이게 된다. 윤씨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은 세조도 칭찬할 정도였다 한다. 윤씨의 섭정 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그동안 조선왕조의 문물과 제도가 정비되어 그 통치의 근간인 『경국대전』의 교정 작업이 완료되었으며, 호패법을 폐지하여 백성에 대한 관의 간섭을 줄여 민심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반명 숭유억불 정책을 강화하여 불교의 장의제도인 화장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염불소를 폐지하여 도성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 되는 것도 금지하였다. 동성불혼 제를 엄격히 시행하고 『삼강행실』을 전국교생에게 의무적으로 강습하게 하며 일련의 유교문화 강화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민생의 안정을 위해 왕실부터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와 같은 일련의 정책들은 정희왕후 독단으로 이룬 것은 아니었으나 정희왕후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특별한 분란이나 권력구조의 개편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주변의 정치적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능동적로 정치적 역량을 확대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것이 수렴청정이 거두어지고 성종이 친정을 할 때 독자적인 역량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자칫 원상들을 비롯한 훈신세력들의 정치적 독점으로 위기에 몰릴 뻔했던 왕권을 철저히 보호하여 왕실의 안정과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아나갔던 것이다. 3) 정치적 일선에서 물러남 윤씨가 수렴청정을 한지 7년이 흘러 성종도 스무 살의 장부가 되었다. 윤씨 자신도 섭정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으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한 사건이 터지게 된다. 살인죄를 저지른 한 상인이 끌려왔는데, 이 상인은 예전에 세조를 도와 공을 세운 일이 있었다. 당시 세조는 고마운 마음에 소원을 물었고 그는 자기가 나중에 죽을죄를 지었을 때 살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상인은 세조가 써준 약속의 글을 내놓고 선처를 부탁했다. 세조의 어필을 본 윤씨는 유언에 따라 살려주기로 했으나 성종은 살인은 사형시키는 것이 법이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정희왕후 윤씨와 성종의 최조 대립이었다. 이 대립은 성종의 승으로 끝이 났고 동시에 윤씨의 섭정을 비난하는 익명의 글들이 정원에 나붙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윤씨는 섭정을 그만두게 된다. 성종은 윤씨가 섭정을 그만두겠다는 뜻을 전해 받았을 때 더 보살펴달라고 만류했으나 이는 형식적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대신들 또한 윤씨를 밀어내는 듯한 분위기를 보였다. 윤씨는 불쾌했지만 더 이상 방법이 없음을 알고 물러났다. 이로써 윤씨의 수렴청정은 막을 내리고, 성종의 친정이 시작된다. 그러나 윤씨는 성종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7년 동안의 과단성 있는 윤씨의 섭정은 성종대에 와서 여러 문물제도를 완성시킬 수 있게 한 주춧돌이 되었다. 이를 발판으로 성종은 정치적 균형감각을 키울 수 있었으며 재위기간 동안 조선왕조를 반석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현재 우리가 정희왕후의 정치력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대립과 갈등보다는 화합을 이끌어냈던 유연한 정치력과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단적인 사고보다는 정치구조 전반을 넓은 시야로 볼 수 있었던 포용력이다. 또한 필요한 시점에서는 과감한 정치적 추진력을 발휘 했던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정치적 제약이 많았던 환경 속에서 시대 인식에 철저했고 정치적 흐름에 지혜롭게 대처해 나간 그의 정치 역량은 남성중심의 세계를 유연하게 압도하고 여성의 정치적 능력을 입증해 준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20년간 국정을 전횡한 여성독재자, 문정왕후 윤씨 1) 수렴청정 계기 1501년 3월 21일 태어난 문정왕후 윤씨는 열 한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그 이후 어머니 대신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며 자랐다. 당시 궁궐은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가 국모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한 채 신하들의 강권에 의해 쫓겨났고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상태라 왕비의 자리가 빈 상태였다. 그때 장경왕후 오라버니인 윤임의 지지를 받은 문정왕후가 왕비로 간택되었다.1) 1545년 7월 7일, 명종이 즉위한 날이자 대왕대비 윤씨가 대비 전으로 문안인사를 하러 온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처음으로 하교를 내린 날이기도 했다. 인종이 재위한 지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보위에 오른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 명종은 열두 살의 아이에 불과했고, 실권은 당연히 윤씨에게로 돌아갔던 것이다. 윤씨는 왕비에 오르면서 차례차례 정적을 일소하고, 친아들 명종을 왕위에 앉힌 후 수렴청정을 통해 20년간 국정을 전횡하였다. 조선의 왕비 중 그 누구보다 전략적인 인물이었지만 그런 역량을 국가가 아니라 집안만을 위해 사용했기 때문에 훗날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했던 그런 여인이었다. 윤씨가 왕비의 자리에 앉을 당시 궁궐 안은 훈척신 세력과 사림들의 세력다툼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한편 윤씨는 중종이 후궁의 처소를 들락거려도 전혀 질투하지 않았다. 윤씨에게 필요한 것은 국왕의 애정이 아니라 권력이었던 것이다. 윤씨는 『사기』, 『여장부전』, 『진성여왕전』, 『선덕여왕전』 등을 주로 읽었다고 전해진다. 부녀자의 덕목을 강조하는 책보다는 역사나 정치에 관련된 책들 그것도 여왕전처럼 여성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런 책들이 어쩌면 윤씨에게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는지 모른다. 윤씨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시대는 아들이 여자의 정치를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혼인한 지 17년만인 중종 29년 윤씨는 마침내 아들을 낳게 된다. 이 아들이 바로 조선 13대 임금, 명종이다.
2) 정치적 역할과 효과 윤씨는 왕비가 된 후에 먼저 경빈 박씨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결과 경빈 박씨는 억울하게도 폐서인이 되어 아들 복성군과 두 옹주와 함께 궁궐에서 쫓겨났다. 이 사건의 주모자는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 윤원형의 첩인 난정이라고 한다. 경빈 박씨를 제거한 후에는 김안로를 상대로 싸움에 나서고 결국 김안로도 사약을 마시게 된다. 윤씨는 세자를 불 질러 죽이려는 음모도 꾀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세자를 죽이려던 그 이듬해,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윤씨가 그토록 제거하려고 애썼던 세자가 즉위했다. 바로 인종이다. 이때 유명한 일화가 하나 등장한다. 문정왕후가 인종을 불러놓고 신세한탄을 하였다고 역사는 전한다. 신세한탄을 들은 인종이 석고대죄를 하고 며칠을 빌어서야 노여움을 걷은 윤씨는 그 뒤로도 자주 이렇게 억지를 부렸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어린 인종을 끝없이 괴롭혔다. 인종은 1545년 7월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인조의 죽음을 문정왕후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보아 윤씨가 관련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자식 없이 죽은 인종이었기에, 다음 왕은 윤씨의 경원대군이 지목되고 그가 바로 명종이다. 인종이 세상을 떠나던 날, 윤씨는 즉시 경복궁으로 가서 영의종과 좌의정에게 성종 때 정희왕후가 섭정한 예대로 수렴청정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명종이 열두 살이니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하겠다는 주장은 합법적인 것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문정왕후 윤씨가 드디어 조선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이다. 이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거둔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윤씨는 무서운 여인이었다. 문정왕후는 섭정을 시작하자마자 대윤 영수 윤임 제거에 나섰다. 윤임이 인종비 박씨와 내통하여 역적모의를 한다고 몰아붙여 탄핵하는 교지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일부 조정대신들이 윤임을 탄핵할 만한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하자 문정왕후는 사건을 확대시켜 계림군과 봉성군까지 끌어들였다. 즉 이들이 계림군이나 봉성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이다. 계림군은 윤임의 조카로 성종의 아들 계성군의 양자가 된 인물이며, 봉성군은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의 아들이었다. 결국 윤씨는 윤임 일파를 비롯하여 계림군까지 모두 사사시켜버렸으며 항상 자신에게 비판적 자세를 보였던 사림파까지 연루시켜 제거해 버렸다. 이 사건을 을사사화라고 한다.2) 을사사화를 비롯하여 윤임 일파의 모조리 사사시켜버림으로써 자신을 간섭할 세력은 모조리 제거시켰다.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위한 발판이었다. 을사사화 흔적이 채 가시기도 전인 1547년 9월, 이번에는 ‘양재역 벽서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나라를 망친다.’는 내용의 벽서가 발견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것은 잠시나마 조용하던 정가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역시 이 사건의 배후에는 문정왕후가 있었다. 표적이 된 대상은 조정에 잔존하고 있던 윤임의 세력들이었다. 이미 파직된 몸으로 고향에 돌아가 있던 전 좌찬성 이언적은 이때 강계로 귀양을 가서 끝내 7년 만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로써 세상은 문정왕후와 그녀의 오라버니 윤원형 일파의 독무대가 되었고 내정간섭은 갈수록 심해졌다. 나라에는 흉년이 들어 곳곳에서 굶어죽는 백성들이 속출하는데 대비전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로 툭하면 불사가 끊이지 않았다.3) 문정왕후는 중종 재위 때부터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명종 즉위 전부터 많은 조정 대신들이 이러한 왕비의 불교신앙에 대해 우려했고 그러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수렴청정을 하게 된 문정왕후가 강력한 호불정책을 전개했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불교에 관심을 가진 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만만치 않았다. 문정왕후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쓸 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왕실 재정은 각종 진상과 왕실 소유의 토지에서 거둬들이는 조세 수입이 대부분이고, 이 외에 원당, 능침사, 수륙사 등 왕실 관련 사원의 토지에서도 그 일부를 충당한다. 사원들은 왕실로부터 사회적 존립을 보장받으면서 왕실 불사를 담당하는 한편 왕실의 사재정 일부를 충당하는 공생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바로 이러한 사적인 수입을 위해 불교계를 중흥하려고 하였다.4)
3) 정치적 일선에서 물러남 윤씨는 명종이 스무살이 됨에 따라 국법에 따라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명종의 친정은 허울뿐이었다. 섭정을 거둔 뒤로도 윤씨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명종이 하지 않으면 명종에게 주상이 보위에 오르게 된 것은 다 나의 힘이라는 말로 명종을 호되게 꾸짖었다 한다. 국왕이상의 권한을 휘둘렀던 윤씨의 삶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성공했을지언정, 후세에 아름답게 기억되지는 못했다. 역사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녀를 원망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녀를 이해한다고 해도 왕보다 더한 권력을 잡고도 그 권력을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만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가문만을 위해 사용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증거들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도 사실이다. 문정왕후의 외척세력에 대한 의지는 여성으로서 아무런 정치적 조직도, 학맥도, 인맥도 없이 자연히 피붙이인 친정세력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불교에 대한 집착도 내세관이나 현실기복사상, 그동안 정치적 격변기를 거쳐 오는 동안 겪은 인간적 갈등에 기인한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명종)의 수명장수, 왕실의 안녕 등을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수시로 거행하고 이를 통해 마음의 평정과 위안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유교이념을 국시로 하는 조선왕조에서 불교의 비대와 과잉노출은 정치의 기본판을 흐트러뜨리는 무리한 선택이었으며 측근들의 과다한 부정부패는 문정왕후의 정치적 입지를 축소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문정왕후는 권력을 잡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질렀지만 역사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그녀가 원래 성격이 그악스럽거나 표독하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녀는 분명 자신의 자세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녀가 궁궐에서 지내는 동안 후궁들의 권력다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권력을 잡을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렸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 왕조에서 왕위에 오르기 위해 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형이 동생을 죽이는 등 많은 살생이 있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문정왕후만 이렇게 역사 기록에서 최고의 악녀로 평가받는 이유는 사대부의 나라에서 불교를 융성시킨 것과 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가 왕보다 더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것을 조선시대 남자들은 인정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에게 아무도 좋은 평판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Ⅲ. 결 론
지금까지 조선 왕비의 정치참여, 수렴청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수렴청정은 왕비의 공식적인 정치참여로서 모권에 연유한 권한 행사였다. 그러나 일반적 형식이나 구조는 같다 하더라도 수렴청정으로 인한 정치적 영향은 시대에 따라, 또 수렴청정을 행하는 대비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수렴청정이 행해졌던 당시의 정치역학구조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대비를 둘러싼 정치세력에 의해서도 좌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희왕후는 비교적 순조롭게 수렴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철저하게 왕권을 보호하여 성종의 정치적 입지를 열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세자 훈련과정을 거치지 못한 성조의 부족한 점을 수렴청정 기간동안 철저히 보완하여 정치적 균형감각을 익히게 하였으며 왕권강화 과정에서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당시 기득권 세력인 원상을 비롯한 훈신세력들과 원만하게 타협하면서, 또 외척세력을 적절히 등용하여 세력균형을 도모하였고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의 성장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와 함께 시기적으로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당시는 조선왕조의 문물제도가 정비되는 안정기로 접어들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정희왕후의 정치력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유연성과 포용력이다. 문정왕후의 경우 왕에 대한 지나친 압력, 외척세력에 대한 의존, 인사권?경제권 독점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비교적 자질도 총명하고 남성중심의 정치사회에서 남성을 압도하는 과감한 정치적 장악력도 탁월하였으나 외척들의 무능과 부패, 불교에 대한 극단적 집착 등이 유교 중심의 조선사회를 헤쳐 나가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수렴청정 자체가 왕권을 위축시킨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왕권을 해치려는 것보다는 그동안 계속되어 온 정치적 혼란상황과 신진 사림세력들이 대두되는 시대적 변화기 에서 볼 때 도전에 대한 방어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여하튼 대비의 수렴청정은 왕실의 최존장자인 여성에게 정치를 맡김으로써 왕위찬탈의 위험을 예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 500년의 왕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디딤돌의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의 여성상은 순종적이고 희생적이며 인내하는 모습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조선 시대에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왕후들을 통해서 그늘에 가려져 있고 역사에서 배제되어 왔던 모습 외에도 여성 역시 하나의 주체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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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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