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소련 꼭두각시 김일성이 농락한
대한민국 건국
공화국 대한민국
김일성을 조종한
소련 군사위원
스티코프의 일기`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미국측 수석대표는 하지 중장(앞줄 맨 왼쪽),
소련측 수석대표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군사위원
스티코프 중장(하지 오른쪽 외투).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설계도는 김일성이
아니라 스티코프가 만들었다.
스티코프가 쓴 일기에 따르면 소련군 대위 김일성은
일거수일투족을 스티코프로부터 지시받았다.
김일성은 완벽한 꼭두각시였다----
< 국사편찬위 .
*** 유튜브 https://youtu.be/tUJmTfDJ9zc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35년 식민 시대가 끝났다.
새 나라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벌어졌다.
미국에서 외교투쟁을 벌이던 이승만이
귀국했다.
중국에서 투쟁하던 임정요원들이 귀국했다.
국내파 독립운동가들도 저마다 비전을
내세우며 건국 주체임을 주장했다.
거기에 소련군 소속 조선인 장교 하나도
끼어 있었다.
소련 제88정찰여단 대대장 김일성이다.
서른셋 먹은 이 소련군 대위가 건국 주도
대열에 포함되면서 건국을 향하던
대한민국 진로는 험로(險路)로 변했다.
그런데 이 김일성이 한 일들은 스스로
계획한 일들이 아니었다.
테렌티 스티코프라는 당시 북한 진주
소련군 군사위원이 갓난애기 이유식
떠먹여주듯 했던 명령을 꼭두각시처럼
따라 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꼭두각시짓이 만든 역사는
지금도 대한민국 공화국을 독뱀처럼
죄고 있지 않은가.
소련군 군사위원 스티코프의 일기
‘1000명 정원 사범대학 2개소와 320명
정원 의과대, 5400명 정원 기술학교
11개소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교재를 검토했다.’(1946년 9월 7일)
‘누구를 공산당 지도자로 지명할 것인가에
대해 레베데프 사령관, 로마넨코 부사령관과
토의해야 한다.’(같은 해 9월 11일)
‘선거 규정을 9월 20~25일에 발표해 각 단위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한다.’
‘최승희 무용학교 정원은 100명으로 한다.’
(같은 해 9월 11일)
이상은 ‘빨치산 출신 북한 지도자’
김일성이 내린 지시가 아니다.
이는 소련군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이자 군사위원인 소련 육군 중장
테렌티 스티코프가 내린 지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스티코프가 남긴 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김일성은 이 지시를 남김없이 그대로 이행했다.
‘스티코프 일기’라고 통칭되는 이 기록은
1995년 러시아 동박학연구소 박사과정에
있던 전현수와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가
발굴해 소개했다.
이 일기에는 김일성 정권이 ‘괴뢰(꼭두각시)
정권’이고, 그 정권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단독 정부를 수립한 과정이 세밀하게 적혀 있다.
지도자로 낙점된 소련 대위 김일성
일본이 항복하기 7일 전인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은 8월 9일 함경북도
경흥을 시작으로 8월 25일 평양에
진주했다.
그날 소련 극동방면군 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에
의해 ‘북조선 주둔 최고사령부’가 설치됐다.
그리고 9월 19일 소련 군함 푸카조프 호가
강원도 원산항에 입항했다.
배에는 김일성을 포함해 고려인으로 구성된
제88정찰여단 소속 병력이 탑승해 있었다.
며칠 뒤 김일성이 평양 최고사령부를
방문해 부사령관인 레베데프와 면담했다.
김일성:
“나는 88정찰여단 대위 김일성이다.
공산당 조직을 도와 달라.”
레베데프:
“좋다. 모스크바와 상의하겠다.”
김일성:
“부탁이 있다.
내 빨치산부대도 대(對)일본 해방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해달라.”
레베데프:
“총 한 번 안 쏜 부대가?
역사를 바꿀 수 없다.”(김국후, 1991년 6월 11일
레베데프 인터뷰,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2008, p77)
김일성은 88정찰여단에서 적기훈장을 받은
장교였다.
북한 접수가 임박하자 소련 지도부는
이 김일성부대를 활용할 계획을 세웠고,
그 지도자로 김일성을 낙점했다.(앞 책, p73)
스탈린에 의해 미래 지도자로 선택됐지만
김일성은 앞 대화처럼 소련군 소속으로
항일투쟁 경력이 전무했다.
----1945년 10월 13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환영대회 사진첩.
소련 적군훈장을 달고 있는 김일성 뒤로 스티코프 모습
(뒷줄 가운데)이 보인다.
사진첩 여백에는 한복 입은 사람이 태극기를 들고
소련군을 환영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일성으로 인해 대한민국 건국은 혼돈 속에 이뤄졌다----
< 국사편찬위 >
꼭두각시 김일성, 평양 입성
10월 14일 마침내 김일성이 평양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일성은 양복과 넥타이와 적기훈장을 착용하고
평양공설운동장 연단에 올랐다.
뒤에는 군사위원 스티코프, 최고사령부
정·부사령관 등 소련군이 배석했다.
김일성은 전날 밤 양복 차림으로 레베데프를
찾아와
“이렇게 입고서 내일 인민들이 영원히
기억할 명연설을 하겠다”
고 으쓱거렸다.
부사령관 레베데프 회고에 따르면
“이날 김일성이 읽은 연설 원고는 우리
사령부에서 작성했고 양복과 구두는
사령부 정치국 소속 고려인 2세 강미하일
소좌 것”
이었다.(1991년 6월 11일 레베데프 인터뷰,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1992, p88)
문제는 김일성이 차고 있던 적기훈장이었다.
레베데프가
“소련 훈장은 군중에게 나쁜 인상을 준다”
며 떼라고 지시했지만 김일성은 연단에
올라서도 훈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소련군 장교 신분으로 무장투쟁 경력이
없는 본인 콤플렉스를 훈장 착용으로
만회하려 한 것이다.
스티코프가 기록한 반(反)건국 행동들
1946년 1월 16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계획에 따라 1차 미소공동위원회 예비
회담이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다.
그리고 2월 8일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주도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됐다.
인민위원회는 중앙정부 조직이다.
김일성은
“민주주의적 제당과 기타 사회단체들의
지도자들이 발기부를 조직”
하여 그 의견을 소련군 사령관에게 제출해
승인받았다.(김일성, ‘목전 조선 정치형세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조직문제에 관한 보고’.
정해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북조선인민위원회 연구’, 국사관논총 54,
국사편찬위, 1994, 재인용)
분단의 징조가 북쪽에서 내려온 것이다.
3월 20일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덕수궁에서
열렸다.
스티코프가 수석대표인 소련 측은 신탁통치
반대 세력은 통일 정부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3개월 뒤인 6월 3일 이승만은 이에 맞서
전북 정읍에서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한다”
고 주장했다.(1946년 6월 5일 ‘자유신문’)
북한 단독 정부 수립까지 김일성을 포함한
남북 공산 세력은 스티코프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9월 11일 스티코프는 남쪽 공산 지도자
박헌영에게 ‘反압제 항의집회 조직’을
지시했다.
9월 26일 자 스티코프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김일성에게 훈시를 주다.
김두봉에게도 모든 문제에 대해 훈시를 줬다.’
9월 28일 스티코프는 박헌영에게
‘요구 관철 때까지 총파업’을 지시했다.
10월 1일 대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달 22일 스티코프는 입북한 박헌영,
김일성과 함께 남로당 결성에 합의했다.
12월 19일 스티코프는 정식 발족할
북조선인민위원회 정당 비율을 결정했다.
1947년 1월 4일 김일성은 스티코프가
제시한 북조선 인민위원회 대의원 선거
일정에 동의했다.
이후 남과 북은 분단으로 치달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8월 25일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이틀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구성원이 결정됐다.
내각 명단은 스티코프가 일기에 기록한
그대로였다.
이상은 국사편찬위가 번역한
‘쉬띄꼬프 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이 번역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에 전문이 공개돼 있다.
----초대 북한 내각 기념사진. 1948년 8월 27일 스티코프가
일기에 기록한 명단 가운데 ‘미정’인 인물을 제외하고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 위키피디아 >
꼭두각시에서 조작된 ‘주체’로
1947년 여름 레베데프는 모스크바에
새로운 국기 제작을 의뢰했다.
1948년 7월 10일 북조선인민회의는
모스크바에서 보내온 인공기를 새 국기로
제정했다.(이휘성, ‘태극기 삭제와 인공기
제정을 통해 본 북한의 역사 왜곡’,
2014년 6월 17일 ‘데일리NK’).
2013년 8월 8일 북한 ‘노동신문’은
‘김일성이 국기를 완성시키며 애국자의
붉은 피와 단일민족과 조선 인민의
정신을 뜻한다고 설명했다’고 보도했다.
김일성이 인공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2018년 ‘조선중앙통신’은 1945년 평양
환영대회 김일성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해
공개했다.
이 사진에는 김일성 가슴에 있던 소련군
적기훈장이 지워져 있다.
옷부터 연설까지 꼭두각시였던 김일성을
그 후예들이 ‘주체’와 ‘자주’의 민족 지도자로
상징조작한 것이다.
건국을 방해하고 완벽하게 전(前)근대 조선으로
회귀해 버린 해방 정국 북조선 풍경이었다.
----2018년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김일성 환영식 사진.
가슴에 달렸던 소련 훈장이 지워져 있다.
‘소련 꼭두각시’ ‘괴뢰정권’이라는 이미지를 없애고
‘주체’를 강조한 조작이다----
박종인 선임기자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보수우파 개딸
양산 문어벙도 북괴가 시키는데로 했음
사실과자유
소련 대위 김성주가 '전설 속의 김일성'으로
둔갑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김형석 교수가 북한에서 해방을 맞고, 김일성이
군중 연설을 한다 해서..
기대해서 갖더니 애송이 김성주가 나와 자기가
그 김일성이라고 사기를 쳤다고 육성 증언하고
있습니다.
로타블루
저 꼭두각시의 꼭두각시들이 지금 남한에서 암약,
아니지 요즘엔 대놓고 활약들을 눈부시게 하고들있죠..
국회의원도하고 청와대도 들어가고...
그러면서도 그걸 민주주의라고 부르짖기까지 합디다.
월남이 어떻게 패망했는지를 잊어선 안됩니다.
ewl1180
돼지 떼들의 합창에 속아서 지지한 북한 동포들이
불쌍하구나...
마치 전대협 출신 애송이들이 빨리 출세하여
권력잡고 이 나라를 한 입에 쳐 먹으려고 한
짓거리들이 다 김성주의 본보기에 따른
것이었네...
어떻게 이 사악한 일파들을 처단할꼬?
이 나라의 미래가 걸린 중차대한 일인데....
부르스박
저런 놈을 인간이라고 따르던 인간들이 바로
종북좌파 공산주의자들이 아닌가!
메가네우라
"대한민국은 反조선의 국민주권 공화국"이라는
박종인 기자의 국가관 역사관에 깊이 공감한다.
1392년~1910년 존속한 조선과 1946.2.28.
건립되어 현재 존재하는 조선은 군주의 성만
다를뿐 사회 시스템, 대외관계에서 동질 동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남 이승만은 구조선에 저항하여 민주화를
도모했고 3.1 운동으로 왕정 복고가 공식적으로
거부되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북한 자유화를 통일의 근본으로
삼아 김씨왕조 체제 해체를 밀어붙이고 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노예의 길
쏘련에서 파견된 스티코프 조차 김일성의 자질에
대하여 의문이 많았군요.
언젠가 남침에 참전했던 인민군 상위 문용형
(문재인 아비)에 대하여 진실을 알려주세요.
그남자
이런 역사 기록을 널리 널리 알려서 북한 정권의
실체에 대해서 정확한 인식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청소년 현대사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호랭이야
이런것 많이 알려지게 지속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좌파에서 만든 백년전쟁같은 다큐멘터리도
만들어서 보게해야 한다
난다날아간다
대한민국 은 아직 이념전쟁중입니다.
종북 친중하는 자들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파수안
김일성은 스티코프의 꼭두각시....
문재인은 김일성의 손자인 정은이
여정이의 꼭두각시.....
Worldwide1
세기와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김일성사상과 지시를
하느님 받들듯이한다.
호국공화
김일성이 자기 애비를 닮아서 잘 하는 게 오직
각종 사기와 대중 선전선동이구나.
주사파 전대협이랑 하는 짓이 아주 똑같네.
이들은 할애비가 김일성 친구인지, 아니면 운동권
시절 의협심에 무협지 주인공처럼 날아다니면서
돈까지 버니까 맛 들린 건지?
더불어 나라도 망치고 돈도 버니까 재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