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를 몰아쳤던 한파가 물러가고 마치 봄날 같은 따스한 기운이 오후의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점심식사 직후의 나른함이 사무실을 감도는 가운데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김정호 요원이 혀를 차며 일어섰다.
"이거야 원, 스팸 메일이 왜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 거야? 어떻게 메일 주소를 알아내는지 쓸데없는 게 금방 쌓이니 컴퓨터만 켜면 짜증나는구먼. 차단 프로그램도 소용이 없고..."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무심코 담배를 빼어무는 순간 팀장의 호통이 터져나왔다.
"새해부터 금연인 거 몰라? 피우려면 나가 피우라고. 건물 전체가 금연지역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담배를 꺼내는 거야?"
찔끔 놀란 김정호가 담배를 집어넣으며 다시 자리에 앉고 있었다.
"앞으론 허락 없이 스팸메일을 보내면 형사 처벌한다고 하니 좀 줄어들겠지요. 그 전에 담배부터 확실히 끊어 보세요. 이주일 씨가 어떻게 됐는지도 못 봤어요?"
안쓰럽다는 듯 김정호에게 다가간 박철호가 한 마디 던졌다.
"쓸데없는 소리들 그만두고 이거나 살펴봐."
어느 새 두 사람에게로 다가온 팀장이 김정호의 책상 위에 뭔가 자료철을 집어던지듯 내려놓으며 돌아섰다.
"아직 확증은 없지만 마약류의 대량 밀매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자세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누군가 그 조직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보낸 게 틀림없어. 마약수사반에서 보내온 자료도 같이 있으니까 둘이서 단서를 찾아봐."
팀장이 던져 준 자료는 누군가가 익명으로 보내온 것이었다. 영어로 표기되어 있는 한 장짜리 리스트에는 한글로 '병원과 제약회사를 통해 공급되는 마약류'라는 짤막한 제목과 함께 말미에 "이상과 같은 종류의 마약이 조만간 대량으로 시중에 풀릴지도 모름. 현재 모처에 보관되어 있으니 빨리 찾아내기 바람."라는 부연설명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마약수사반이 보내온 자료에는 리스트에 나와 있는 것들이 말기암에 걸린 중환자 등에게만 진통제로 허용되거나 특수한 경우에만 마취제로 사용되는 마약류이며, 이 같은 마약류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코멘트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누가 이런 것들을 유통시키고 있는지, 현재 마약류가 보관되어 있다는 '모처'란 어디인지 등에 대한 단서는 전혀 없었다.
"이걸 좀 보시죠. 인터넷 뉴스 검색에서 찾아낸 기사인데, 참고가 될지 모르겠네요."
자료철을 앞에 놓고 단서를 찾아낼 방법이 없을까 골머리를 앓고 있던 김정호에게 박철호가 프린트한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병원 마약류 도난 급증… 염산날부핀 등 작년 2배"라는 제목의 기사는 병원 등을 통해 번지는 마약류의 폐해가 심각함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올 들어 국내 병·의원과 약국에서 마약·향정신성 의약품이 도난·분실되는 사고가 크게 늘고 있다. 특히 대학병원 4곳, 지방공사 의료원 5곳이 포함되어 있는 데다 6개월 새 두 차례나 털린 병원도 있어 의약품 관리에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에 따르면 6개월 사이에 병원, 의원과 약국의 마약 성분 의약품 도난 사건은 53차례나 돼 지난 한해 48건을 이미 초과했다. 장소별로 보면 병·의원이 44건으로 가장 많았고 약국 8건, 도매업소 1건 등이다. 이중 서울 L신경정신과의원은 아티반(수면제) 등 향정신성 의약품 7천 5백정을 도난당했다. U대학병원에서는 모르핀 65앰플, J대병원은 모르핀 등 1백 90앰플, 또 다른 J대병원은 구연산펜타닐 등 73앰플을 분실했다. 대전 B병원은 지난해 10월 모르핀 33앰플을 분실한 데 이어 올해 3월에도 모르핀 등 85앰플을 도난당했다.
올해 마약류 의약품 도난 및 분실이 늘어난 것은 중독·환각성이 강한 염산날부핀이 지난 1월 7일부터 마약류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마약·향정신성 의약품은 마약 사범들에게 비싼 가격에 팔리기 때문에 도난 및 분실 사고가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약류를 도난당한 병·의원이나 약국은 관할 보건소나 파출소에 신고만 하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 한편, 식의약청의 관계자는 "올해 도난당한 34%(18건)가 염산날부핀"이라며 "한 사람이 병원이나 의원 9곳에서 염산날부핀을 훔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우리가 그 동안 이런 사건을 맡지 않아서 그렇지 수십 억대에서 100억대까지 되는 염산날부핀 등 병원용 마약류 밀매조직이 검거되기도 했다는군요. 일단 관련 수사를 담당했던 곳에 협조를 요청해 놨으니 더 자세한 자료는 기다려 보지요. 어쨌든 이것도 그런 사건의 단서일 가능성이 높은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으니..."
박철호가 프린트되어 나온 관련 기사들을 김정호에게 더 건네며 말했다. 그때 김정호의 컴퓨터에 새 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가 들어왔다.
"메일이 도착한 모양인데 왜 안 보세요?"
컴퓨터를 켜놓고도 거들떠보지 않는 김정호에게 박철호가 물었다.
"보면 뭘해. 보나마나 또 요상한 스팸메일일 텐데... 지우느라고 힘만 들지."
박철호의 참견에 마지 못해 김정호는 마우스를 잡았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마우스 보턴을 눌렀다. 메일이 뜨는 대로 지워버리리라 작심한 듯 건성으로 화면을 흘깃 살피던 김정호는 웬일인지 두 눈을 크게 뜨며 컴퓨터 가까이 의자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보내드린 자료는 잘 받으셨나요? 도대체 어디를 찾아보라는 건지 무척 궁금하게 여기실 것 같아 힌트를 더 드립니다. 특히 염산날부핀에 중독된 사람들이 무척 많은데, 그게 마약류로 고시된 다음부터 그들을 위한 은밀한 장소로도 제공되는 곳입니다. 지난 연말에 날부핀에 중독된 40대 남자가 어느 아파트 정문 근처의 쓰레기통 옆에서 동사체로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1회용 주사기가 주변에서 여러 개 발견되었지요. 마약류가 보관되어 있는 집은 바로 그 아파트 단지 내에 있으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아 참, 혹시 세븐 카드를 해보신 적이 있나요? '4 풀하우스'를 기억하세요. 그럼 이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이유로 누가 이따위 제보를 해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 알고 있다면 직설적으로 알려주면 될 것을 마치 무슨 게임이라도 하듯이 힌트를 흘리는 것도 이상했다. 메일의 내용을 곰곰이 살핀 김정호와 박철호는 우선 동사체가 발견된 아파트를 확인하기 위해 급히 경찰청에 협조를 요청했다.
"맞아요. 제가 발견했습니다. 그땐 얼마나 놀랐는지...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어요. 나중에 뉴스를 보니까 인천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왜 여기까지 와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년 사내의 동사체를 맨 먼저 발견했다는 일명 '비둘기아파트' 관리인이 당시 상황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근처에 대단위 공단이 자리잡고 있어서 입주자들 중에 들고나는 사람이 매우 많은 아파트였다. 한 층에 9가구씩 15층짜리 4개동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단지는 동마다 입구가 하나씩 있었고, 엘리베이터도 한 대씩밖에 없는데다 복도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걸로 봐서 지은 지 오래 되었음이 한눈에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101동부터 104동까지 4개동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모두 500가구가 넘습니다. 동마다 101호부터 1509호까지 135가구씩 있으니까요. 동과 호수를 모르면 찾기가 쉽지 않지요. 몇 동 몇 혼지 알고 오신 건가요?"
아파트 관리소장이 김정호와 박철호의 신분을 확인한 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떨구고 있던 박철호 요원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건 염려마십시오. 그 집이 몇 동 몇호인지 알고 왔으니까요. 선배님, 서둘러서 지원을 요청해야겠습니다."
순간 김정호 요원이 그 집을 어떻게 알아냈느냐는 의아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박철호를 쳐다보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