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대금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화센터에서 시작해 사사로 이어진 지 딱 한 달 되는 때였다.
오늘 뵈었으면 해요. 드릴 말씀도 있고...
그의 말을 듣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피해왔던 숙제와 맞닥뜨린 듯 당혹스러웠다.
맨 처음 아이의 요청에 따라 대금 공부를 시작하긴 했지만,
아이가 앞으로 이 길을 계속 가야할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이 얼마간 지도를 해본 후에
아이의 음악적 재능과 지구력, 열정 등을 판단해 취미로 머물 것인지 전공으로 삼아도 좋을 것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해두었던 것이다.
이제 그 시점이 온 것이다.
과연 선생이 아이를 어떻게 평가할지 조마조마했다.
<부추꽃>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전문가가 아닌 내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아이의 국악에 대한 애정은 유별났다.
처음 취미 삼아 시작했던 학교 방과 후 사물놀이 활동에서
장고와 꽹과리, 태평소 등을 익히더니,
이런저런 관심 끝에 집에 구비해놓은 악기도 여러 가지였다.
장고, 꽹과리, 대금, 소금, 피리, 단소...등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더니
나중에는 대금에 유독 관심을 보였다.
지난 겨울 방학 때는 아파트 뒤뜰에 심어진 대나무를 베어 대금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대나무 몸통에 구멍을 뚫어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더니
기어이 음을 만들어내는 아이의 솜씨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갖가지 운동이나 과학 기구, 음악 관련 등
세상의 온갖 것들에 보여온 관심거리를 생각해볼 때,
지금 아이가 보이는 국악에 대한 열정 또한
일시적인 호기심에 불과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능을 갖췄다 하더라도 예술가로 산다는 자체가 워낙 험난하지 않는가.
선생은 20대 후반의 젊은 남자였는데,
우수한 학력과 실기를 갖추고 있음에도 겸손하고 성실한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귀한 인연이다 싶었다.
어제 아이와 나는 고흥군 남양면에 위치한 우도로 여행을 갔다.
하루에 두 번 뭍이 되었다가 다시 섬이 되는 곳.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곳에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여행'을 가자는 말에 아이가 눈빛을 반짝였다.
아이는 여름 내내 가지고 놀았던 카메라 가방과 대금을 챙기더니
대금 가락을 차에서 들을 수 있도록 시디를 작동시켜 놓았다.
날씨는 청명했다.
열흘 이상 비가 지루하게 이어진 탓에 오랜만에 드러낸 햇살이 반가웠다.
지도를 보고 출발해 두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그곳에는
넓은 뻘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로 면한 길의 초입에 이르니,
여자 아이들 대여섯 명이 뻘 밭에서 맨 종아리로 질겅대면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청랑한 하늘만큼이나 높고 맑았다.
꽃게와 망둥어를 잡는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우도로 가는 길을 물었다.
저쪽 길로 좀더 가시면 길이 나오는데요, 왼쪽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물이 빠지면 자동차로도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근처 남양읍에 산다는 아이들이었다.
고맙다고 말하며 막 뒤돌아서는 순간, 아이 하나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우도에는 왜 가려고 그러세요?
나는 예기치 않는 질문을 받고 무척 당혹스러웠다.
응, 바닷물이 갈라지면 길이 난다고 해서...
엉겁결에 대답하고 나니 픽, 웃음이 나왔다.
시간을 잘 맞춰 도착한 것인지, 마침 길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여기저기에 대나무 가지를 꽂아 만든 굴양식 뻘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자동차를 몰아 천천히 섬으로 들어갔고,
아이는 차에서 내려 여기저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바람과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뻘밭 사이를 걸어왔다.
몇 가구 되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따가운 초가을 땡볕 아래 모두들 낮잠을 자는지 마을은 고요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마을의 끝까지 들어갔다가
그물 손질을 하고 있는 노인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면세점도 식당도 찾아볼 수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물때가 열리지 않으면
생필품도 건강의 위중함도 강 건너 불이 되었을 것이다.
여자들은 남편의 통통배에 올라 고기를 잡고,
밤이면 돌아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몸을 섞고
아이를 낳아 구릿빛으로 키워냈을 것이다.
짠물에 개구리헤엄을 치며 자라난 아이들은 하나 둘 도시로 빠져나갔겠지.
비바람이 몰아치면 마당까지 밀고 들어오는 물결에 가슴을 조였을 것이며,
맑은 날이면 마루 끝에 앉아 끝없는 수평선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물을 손질하며 갯펄에 나가 꾸물거리는 낙지를 집어 올렸거나,
꽃게나 망둥어, 바다 고둥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며 늙어갔을 것이다.
산다는 것이,
그렇게 한 생(生)을 흘려 보내는 일이구나 싶었다.
<우리 마을에 온 손님, 간첩인가 살펴보자.ㅎ>
한동안 백사장을 서성이다가 되돌아 나왔다.
바다 가운데로 난 길 위에 자동차를 세우고 사방을 주욱 들러보았다.
바람도 시간도 모두 잊은 고요한 풍경이었다.
내가 개펄에 지천으로 널린 바다 고둥에 눈길을 팔고 있는 동안,
아이는 차안에서 대금을 꺼내 자동차 보닛에 앉아 불기 시작했다.
칠갑산, 황성옛터, 삼포가는 길, 희망가, 장녹수, 어디로 갈거나 등이 계속 이어졌다.
햇살은 뻘 위에 엎드려 고둥을 줍고 있는 내 등언저리에 따갑게 내려앉았고,
살금살금 다가온 바람은 낮게 엎드려 귀를 기울였다.
고둥을 줍다 돌아보니 이 녀석, 폼생폼사가 따로 없다.
대금과 놀고 있을 때, 아이의 표정은 환하게 빛난다.
어쨌든 오늘 오후, 선생을 만나러 가야 할 텐데...
만약 선생이 아이의 음악적 소양에 낙제점을 내리면 어쩌지?
자신의 길이라고 믿고 싶은 아이에게 대금이 등을 돌려버리면 어떡하지?
아이의 짝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아이는 닫힌 문 앞에서 얼마나 막막해할까.
짝사랑하는 대금이 고 년.
이쁜 년.
첫댓글 ㅎㅎ 미소가 절로 생기는 글이시...행복하게 느껴진다는 말이여
그렁가...? ㅎㅎㅎ 넘 보기에만 좋지, 맨날 싸우느라 우리 집 두 주둥이가 천장에 떠있다네 그랴~~
우리국악의 천재한명이 탄생되기 직전이네. 사진도 멋지고 글이야 물론 잼있고. 언제 우리 이쁜넘 모셔다가 "삼포가는 길"을 듣고 싶어. 진지하게 충고하건데, 직녀! 그대의 모든것을 이넘에게 올인하시오!!
짱언니가 그렇게 얘기해주니 정말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헐랑갑써... 앞으로 뭣이 될라고 이 야단을 떠는지 원~~~ 맨날 이 눔 보면서 '잡기에 능한 눔'이 될까 걱정이 태산이란 말이시.
부러운 글이네요.사랑받는 대금이도 부럽고,짝사랑에 빠진 아이도 부럽고......저도 잠시 행복에 젖어보앗습니다.
고맙습니다. 어쩌다가 행복하게 표현되긴 혔는디요, 실제로는 아니올시다... 입니다. 그래서 고민입니다.^^
대금이 고거 정복하기 힘들다던데...선생님 말씀이 기대되네~난 장녹수...
글씨 말이여요, 힘들다는 거 해야 전망이 좀 나을틴디... 아들 덕에 자꾸 듣다보니 대금 소리가 점점 좋아질락말락 헙니다요.^^
아무리 서양악기 소리가 좋다한들 대금소리는 정말 멋져..저 아이가 저번 다쳤던 녀석인가? 남다른 아이가 분명해..10년후에 머하는지 꼭 소식을 전해 주도록..
네, 저번에 다쳤다는 눔입니다요. 그동안 많이 염려해주셔서 요로코롬 잘 지내는 거이 사실입지요. 사이 언니들이 모다덜 이뻐해주셔서요.^^
뭔가 보여줄 아이라는 생각이 맨날~! 미라 생각과 같음 ^^*
땡큐~~
바다와 대금, 그리고 푸른 가을하늘의 절묘한 조화가 너무 멋져요. 폼으로 봐서는 마치 전생에 대금을 무척 잘 부르던 선비가 아니었을까 생각될정도... 아이가 대금과는 필연이어서 만난것이니 아무 걱정 마시라요~. 좋은 소식을 듣게 될거가튼 예감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폼생폼사 아닙니까요. 폼에 죽고 품에 산다는..ㅎ 아무튼 좋아하는 일 허고 살자는 게 제 모토이니... 하루 두 끼만 먹고 살아도 헐 말 없겠쥬.
참말로 멋진 아들을 두셨군요~~~행복하시겠어요 ^^*
이쁘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언젠가는 그 눔의 실체가 발각되고야 말 것 같아 가슴이 콩닥콩닥헙니다요.^^
사이에서 헤드라인 유스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이가 합격점을 받았다는...! ㅎㅎ
내 그럴 줄 알았당께요~~~~한턱 내실꺼쥬~~~만사제껴놓고 갈껀디~~에궁 남말 헐께 아니지롸 나도 건수가 있어야 한턱 낼건디~~암튼 축하 혀유~~~
우덜이 더 기분좋네요. 추카 함당!!^^.
고맙습니다. 앞으로 지가 할 나름이겠지만... 기분이 좋네요. 땡큐^^
ㅎㅎㅎ 축하할 일이그만...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합격했다는 거 만큼 좋은 일이 없겄지.
한국예술종합학교란데가 있따, 직녀야. 갸가 갈곳이여.
알았시요. 그 눔한테 꼭 전할게유~ 불끈!
자기 하고 싶은걸 해야 행복해 하기싫은것은 돈을 줘도 안해
그러게요. 지가 하고 싶다고 했응게,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밀고 나가는 걸 지켜볼 수 밖에요.^^
예술가의길..지가 하고싶어 하는일 지가 함시롱 행복 해 할 것 같아서 택한길...겁나게 험한 것 같습디다.(겁 주는 말은 아니고) 지금 그모습 보고 있는 것 만 으로도 사실 행복 한거여...얼매나 이뿐지.
겁나게 험한 거, 맞는 것 가터요. 다만 크게 기대하진 않고요, 제가 행복하믄 됐다고 생각할라만요. 사실, 허고 싶은 건 많아도 다 못허고 사는 세상이잖아요.^^
엄마, 아들 모두 행복한 모습이 가슴으로 느껴지네요. 잘 하시고 계시는 거여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그리고 하게 해주는 사이가족의 모습 또한 제가 항상 이 공간에 감탄하고 감사하는 샘물이지요.
고맙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는데, 제 경우, 이왕 질 바에야 진다는 느낌 없이 페어플레이하는 방식이지 않나 싶습니다. 결국 지 인생 '스스로 책임지게 '만드는 거지요 뭐... '누가 너한테 그 길 가라고 했냐?' 하면서...낄낄.
나하고 교육관이 같구만..ㅎㅎ 너하고 싶은거하고 대신 니가 책임지고 살아라~
대금이 고년과 잘노는 고놈이 정말 멋진놈이네요 .
고맙습니다. 정말 멋진 놈이 되어얄틴디...^^ 꼭 전해줄게요. 귀여니 버전으로 <그놈은 멋있었다.>
직녀 님 글은 정말 완벽해요.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 문학지에 실리는 글들 읽어보면 어떤 글은 이 글이 여기에 왜 실렸을까 싶은 글들이 수두룩한데 직녀님 글은 항상 명문이야요. 행복한 정경을 묘사하면 읽는 모든 사람이 행복에 빠지게 만드는 그런 글... 슬픔을 그리면 모든 독자가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는 글... 잘 읽었고요, 아들내미 꼭 행복한 인생 살기를 빌게요. 출세보다는 행복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peace!!
무슨 과찬의 말씀을...^^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에 의욕이 떨어지곤 했는데... 그래도 이런 말씀을 들으니 기분이 좋네요. 아름다운 가을이에요. 좋은 일 많이 만드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