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 하면 당신은 무엇이 떠오릅니까?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그리움이 가슴 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지 않나요?
외갓집이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라면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하겠지요.
우리 외갓집은 시골 한적한 강마을 '다래월'이라는 동네에 있습니다.
몇년전 그 마을로 골프장이 들어오면서 10여가구 되던 집들이 거의 떠났지만
우리 외갓집은 30m 정도 아래쪽으로 이사를 갔고, 지금도 다른 두 집과 함께 다래월을 지키고 있습니다.
골프장 아래로는 강이 흐르고 강건너에는 국보 6호인 중앙탑이 보입니다.
외갓집 뒤편으로는 고추밭과 담배밭이 있고, 우거진 숲속에서는 자연의 교향곡이 흐릅니다.
고즈넉하게 진행되는 사계(四季)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정말 순수하고 욕심없이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외갓집 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우리집은 외갓집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매새'라는 동네였고, 어머니는 가끔 나를 데리고 친정엘 갔습니다.
밭과 밭사이로 난 신작로를 지나 마차가 다니는 논둑길을 걸어 한참을 가다보면 저멀리 다래월로 가는
작은 언덕이 보이고 그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입니다.
몇백년은 됐을 그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얼마나 큰지 멀리에서도 금방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어서 오라"고 손짓하듯이, 느티나무는 이파리를 팔랑거리며 나를 환영해주곤 했습니다.
멀리에서도 그 나무를 보면 이제 외갓집에 다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픈 다리도 금방
가벼워지곤 했습니다. 어쩌다가 그 느티나무 아래에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가 나와 계시다가
나와 어머니를 발견하면 반갑게 맞아주시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언젠가 다래월에 골프장이 들어와, 마을 사람들이 거의 떠났다는 말을 들었고 몇년후 추석에 외갓집엘 갔을 때,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 언덕과 그 느티나무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래월은 이미 그 옛날의 정겨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마치 수몰마을의 잔해처럼 서너집만 남아 있었지만,
그 느티나무는 용케 버텨주었습니다. 그 옛날 외할아버지의 잔기침과 외할머니의 작고 단아한 모습이 있던
외갓집 터에는 무심한 외지인들의 골프채가 햇빛을 가르고 있었고, 사촌들과 강에서 베톨올갱이를 주워
돌아오며 재잘거리던 오솔길엔 매끈한 잔디가 덮여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외갓집동네가 그렇게 변했지만, 그 느티나무는 그대로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휜다는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그 느티나무.
그 느티나무 한 그루 속에 외갓집에 관한 내 추억이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세월의 저 편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외갓집을 찾아오던 꼬마를 쳐다보던 그 느티나무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찾아온 이순(耳順)의 남자를 맞아주고 있습니다.
그 나무는 늙고 병들었지만 여전히 넉넉한 품을 벌리고 "어서 오라"고 말합니다.
외할아버지의 잔기침과 단아한 외할머니의 미소를 그 품에 간직한 채.
가만히 그 느티나무를 안아봅니다. 물론 내 양팔로도 다 안지 못할 나무의 둘레는, 이를테면
그 나무가 살아온 기나긴 세월의 부피겠지요.
느티나무의 가슴에 귀를 대고 가만히 들어보니, 세월이 흐르는 소리가 그 속에서 들리는 듯합니다.
우리도 그 느티나무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먼 훗날 다시 찾아와 그 품에 안기고 싶은 그런 인간이---.
첫댓글 친정이 시골이라 낭만잇는 추억이 주렁주렁 하겟습니다. 부럼..
느티나무는 고향의 역사책이고
산 증인?! 이라 할 것이네요.
시골마을 입구에는
동구밖 느티나무가 있지요
요즘은 마을마다 마을회관이 있는데
예전에는 그 나무가 마을회관 역활을 했었지요
저희 외가집 마을에도 그런 나무가 있었지요
외갓집은 없어져도 느티나무가 그대로 있으니 다행이네요.
요즘은 강산이 수시로 변하니 오랫만에
가보면 어디가어딘지 어리둥절합니다.
글을 읽으며 옛시골을 그려봅니다~^^
어머님 어린시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일찍 돌아가셔서 외가집 기억이 전혀 없지요
외갓집
단어만 봐도 푸근합니다~
중앙탑이면 충주가 외가 이신가 봅니다~~~
시골이 친가나 외가면 어릴적 기억들이 있지요~~~~
즐거운 명절 되십시요~~
맞습니다. 외갓집이 중앙탑에서 강건너 맞은 편이지요^^
나이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나요
님의 글을 읽으며 내고향을 추억해봅니다
지금은 개발되어 흔적도 없는 고향언덕이
추억속에만 있답니다
저는 정년퇴직하고 귀향
하여 살고 있지만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한
개발에 화가 나는 일도
있지요.
마음에 품은 외갓집 품에
잘 간직 하시길요.
저는 외 손자에게 자상한 외 할미로 기억 되려고 부단히 노력 하는 중입니다 요즘 외갓집 대부분이 아파트이고 정서적인 기억이 전무할 것같아 외할미 인성으로나마 기억할까해서 ㅎㅎ
손자와 정신적 교감에 치중합니다
제 생각이지요만
외갓집은 늘 그리움의 원천 입니다.
저도 장터에서 외할아버지 드릴
정종 1병들고 신작로길을 따라
외갓집을 다니던 어린 추억이 있습니다.
지그 그리움이
금은 신도시로 변해버렸네요.
외갓집이 서울.
외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데 사진 한 장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외할아버지 환갑 잔치때 동갑내기 손녀 둘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각각 무릎에 앉히고 사진을 찍으셨는데...
하필 할아버지 무릎에 외손녀인 저를 앉혔답니다.
친손녀는 할머니 무릎에 앉히고.
외숙모가 서운타고 두고두고...
그게 그리 중요한 시절이었을까요?
아니 여전히 중요할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 손녀둘이 벌써 그 사진 속의 할아버지 나이가 되었답니다.
외갓집 가는 길의 느티나무를 그리워할 수 있는 님의 추억창고가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