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안
본안전 항변에서 문제없음이 밝혀지자, 이 사안은 곧장 본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1947년 4월 9일 양국이 법원에 무엇을 판결해줄 것을 요청했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1) 알바니아는 1946년 10월 22일 알바니아 해역에서 발생한 폭발과 이로 인한 인명 피해 및 손실에 대해 국제법상 책임이 있는가? 2) 국제법상 영국이 1946년 10월 2일과 11월 12일과 13일 알바니아 해역에서 영국 해군의 행위를 이유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의 주권을 침해하였는가? |
1948년 12월 17일의 법원명령에 의하여, 사안의 판단을 위하여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꾸리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의 해군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구성되어, 현장조사를 하고 두 건의 보고서를 법원에 제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9년 초에 심문과정이 있었고, 같은 해 4월 9일 본안의 판결문이 나왔습니다. 여기까지가 법정 일지입니다.
이번에는 양국의 진술서에 쓰여진 주장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영국의 주장입니다.
1. 1946년 10월 22일 코르푸 해협 Saranda 만의 국제수로에서 영국 함선 HMS Saumarez와 HMS Volage가 기뢰밭에 걸려 44인이 죽고 42인이 부상당함. 이 기뢰밭은 1946년 5월 15일과 10월 22일 사이에 알바니아 정부의 묵인 혹은 그것이 설치됨을 인지한 상황 중에 깔림. 당연히도 알바니아 정부는 이것들이 자신들의 영해에 놓여있었음을 알고 있었음. 2. 알바니아 정부는 1907년 헤이그 조약 제8항에서 요구하는 대로 국제법과 인간애적 일반원칙에 따라 이 기뢰밭의 정체를 알리지 않았음. 결과적으로, 영국 배들에 기뢰밭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데 실패함. 3. 1946년 10월 22일 북코르푸 해협을 통과한 영국 선박은 무고통행권을 행사함. 이것이 성립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알바니아 정부는 그들이 알고있던 알려지지 않은 기뢰밭으로 인한 선박의 손상에 대한 국제책임을 면치 못하고 있음. 4. 결과적으로 알바니아 정부는 영국 정부에 대해 상기한 국제 의무 위반에 관련하여 배상할 필요를 지고 있음. 배상금은 우리 계산으로는 875000파운드 정도면 될 것 같군. |
다음은 알바니아 측 주장입니다. 알바니아가 법원의 다른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인 프랑스어로 진술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판결문에는 영어로 번역된 버전이 올라왔습니다.
1. 첫 번째 본안과 관련하여; 법원은 특별협정에 따라 보상권에 관한 관할권을 갖지 않을 것임. 1947년 10월 22일에 사고를 일으킨 기뢰가 알바니아에 의해 부설되었다는 것, 알바니아를 대신하여 제3의 세력에 의해 부설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으며, 이것들이 알바니아의 도움이나 묵인 하에 부설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으며, 그리고 이것이 알바니아 영해에 설치되었는지 알았는가도 증명되지 않음. 그런즉 알바니아는 자신들의 해역에서 발생한 폭발사고와 이로 인한 인명피해에 대한 책임을 물지 않으며, 보상금을 지불하지 않음. 2. 두 번째 본안과 관련하여; 연안국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자국 영해를 통한 외국 군함의 통행을 규제할 권리를 가짐. 그리고 이 규칙은 북코르푸 해협에 적용됨. 1946년 10월과 11월, 이 지역에는 예외적인 상황이 존재하였고, 알바니아 정부는 외국 군함이 자국 영해를 통과하기 전에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었음. 10월의 통행은 무고한 성격이 아니었고, 11월의 소해작전은 알바니아 당국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였음. 그런즉 법원은 이 두 경우 모두 영국 정부가 국제법 규정을 위반하였으며 알바니아 정부가 이에 대한 만족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발견해야 함. |
그러면 사안 하나하나에 대한 양 측의 입장과 법원의 판단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본안과 관련하여;
사실관계 확인부터 해봅시다. 영국군은 다음과 같은 진형으로 코르푸 해협에 진입했습니다.
HMS Mauritius(C) - HMS Saumarez(D) --- HMS Leander(C) - HMS Volage(D) |
보시다시피 일자진으로 들어왔다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HMS Saumarez가 기뢰에 걸리고... 뒤 이야기는 전글에서 적어놓은 대로입니다. 저 하나의 사실이 중요하냐고요? 네 중요합니다. 조금 뒤에 쓰이긴 하지만요.
첫 번째 쟁점은 10월 22일에 터진 기뢰가 11월 13일에 제거한 기뢰밭에 속한 것이었나 하는 것이었지요. 알바니아는 새 기뢰밭이 10월 22일 ~ 11월 13일 내에 누군가가 부설했다고 주장했지만, 씨알도 안먹혔지요. 사실 이걸 주장한 알바니아 본인들도 이 가능성에 대한 증거를 들고오지 않았고, 차피 법원도 여기가 왕립해군에 의해서 두 차례나 소해된 이후 안전한 항로라고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거든요. 거기에 폭발에 대한 증언 등을 보았을 때, GR형 기뢰나 부유기뢰, 자석기뢰 등은 아니었고, GY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11월 13일에 제거한 그것과 비슷한 폭발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 기뢰는 북코르푸 해협에 조성(?)되었던 기뢰밭의 일원이었다고 법원은 보았습니다.
두 번째 쟁점은 이 기뢰밭 조성에 알바니아의 책임이 있었는가의 문제였습니다. 알바니아는 자신들의 해군 전력이 전무에 가까웠으므로 기뢰를 설치하지도 않았고,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고 성명서를 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가 기뢰를 부설하지 않았겠느냐는 자신없는 가능성만 내비쳤죠. 당연히 빠꾸먹었습니다.
영국 측은 이 성명서에서 다른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10월 18일에 쉬베닉Sibenik 항에서 유고슬라비아 해군의 군함 Mljet과 Meljine이 GY형 접촉기뢰를 싣고 코르푸 방향으로 출항한 것을 알아냈죠.
이것을 알아낸 데에는 유고슬라비아 해군의 Karel Kovacic 중위의 증언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영국 측은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 간의 긴밀함을 증명하고자 1946년 7월에 채결한 양국간 우호 및 상호원조 조약까지 꺼내들면서, 알바니아 정부의 묵인 하에 유고슬라비아 해군 군함이 기뢰를 설치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법원은 이 건에 대하여 그럼에도 그 주장을 증명하기엔 무리라고 보았습니다. 양국간의 우호 및 상호원조 조약에 대해서는 ‘그게 가까움을 증명하는건 맞는데, 유고슬라비아가 범죄행위에 참여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서 기각했고, Kovacic의 증언 역시도 영국정부의 주장을 증명하기엔 무리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기억pro memoria에 의한 것 이외의 증거는 없다고 보고 유고슬라비아의 개입과 관련한 영국의 주장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대답하였습니다. 다만 법원의 임무는 알바니아의 책임여부와, 있다는 전제 하의 배상금 판단만이라고 답했을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법원은 알바니아가 이것을 인지하였는가 여부를 보려고 하였습니다. 영국이 다른 방향으로 주장한 것도 이것과 관련있습니다. 어쨌거나 알바니아의 묵인 없이 이 기뢰들을 부설할 수는 없었다고 주장했거든요. 알바니아가 인지하였고, 영국에 알려주지 않아서 사고가 터졌다면, 우리 형법의 방조에 해당하는 책임이 있다고 할 셈이었지요.
법원은 알바니아가 보여준 사실요소가 묵인과 관련있는가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크게 두 가지 요소-10월 22일 사고를 전후한 알바니아의 태도 그리고 알바니아 해안에서 기뢰를 부설하는 것의 타당성에 관한 문제들-를 분석해보고자 하였습니다.
첫 번째 사건을 전후한 알바니아의 태도부터 봅시다. 알바니아가 1946년 5월 이후 북코르푸 해협에 주목하던건 사실로 보입니다. 당장 영국 순양함 HMS Orion과 HMS Superb가 문전박대당하기도 했고, 사건 이후 10월 29일 UNRRA 소속 예인선도 포탄 맞을뻔 했거든요. 거기에, 해안에서 생긴 모든 일들은 해안초소를 통하여 자신에게 보고되어야 한다는 알바니아의 Ali Shtino 선장의 증언이나, 사건당사자가 아닌 그리스가 10월 22일 이후 위원회를 임명한 것과는 대비되게, 어떠한 진상조사나 영토주권에 대한 법적 수사도 진행하지 않은 채, 알 수 밖에 없었을 기뢰밭에 대한 언급 없이 영국을 비난하는 언어로만 쓰여진 11월 13일과 27일의 알바니아 정부 측 전보도 있었죠. 재판부는 여기서 기뢰가 깔리던 시점에도 알바니아 당국은 면밀히 감시하였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알바니아가 자신들의 해안에서 기뢰 부설을 관찰할 수 있었을지 여부를 봅시다. 우선 재판부는 전반적인 해협이 알바니아에 가깝고, 가까운 기뢰는 해안 500m 거리 정도에 있었고, 예상되는 작업 시간이 2시간에 +α로 30분 정도여서 Kiephali 곶의 Denta Point와 St.George 수도원에 있는 두 해안초소에서 보고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의 검증을 위하여 전문가들이 출격했습니다. 네 맨 위에 등장했던 그 전문가 그룹이죠. 1949년 1월 17일 사란다로 파견된 전문가들은, 알바니아 관료들의 입회 하에 사건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여기서 야간 부설을 시험해봤는데, 소리는 1.8km 밖에서 들렸고, 배 자체도 670m ~ 1900m 내에서 관측되었죠. 이를 통해 재판부는 정상적인 기상조건 하에서 농땡이 피우지 않고 감시했다면 당연히 들켰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냈죠. 그리하여, 10월 22일 사건을 일으킨 기뢰밭은 알바니아 정부의 인지 없이 부설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에 대응하는 알바니아의 마지막 카드는 기뢰 부설과 관리를 규정한 1907 헤이그 조약 제8호였습니다. 알바니아 정부는 이것은 전시에나 적용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사건 이전에 알바니아에 작전 통보가 들어왔고, 영국 선박에 제대 경고해주었다면 책임이 생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항하는 영국의 논리가 그렇게 명문이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찾지는 못했고, 해서 재판부가 판결문에 적은 내용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전 이것도 명문이라고 생각해요.
“The obligations incumbent upon the Albanian authorities consisted in notifying, for the benefit of shipping in general, the existence of a minefield in Albanian territorial waters and in warning the approaching British warships of the imminent danger to which the minefield exposed them. Such obligations are based, not on the Hague Convention of 1907, No. VIII, which is applicable in time of war, but on certain general and well-recognized principles, namely : elementary considerations of humanity, even more exacting in peace than in war ; the principle of the freedom of maritime communication ; and every State's obligation not to allow knowingly its territory to be used for acts contrary to the rights of other States.” 알바니아 당국에 부과되는 의무는 일반적으로 선박 운송의 이익을 위해 알바니아 영해에서 지뢰밭의 존재를 알리고, 접근하는 영국 군함에 지뢰밭이 노출될 위험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의무는, 1907년의 헤이그 조약, 제8호, 전쟁시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반적이고 잘 알려진 원칙, 즉 전쟁보다도 인류의 기본적인 고려, 훨씬 더 엄격한 평화, 해상 통신의 자유 원칙, 그리고 모든 국가가 고의로 타국의 권리에 반하는 영토의 사용을 하지 않을 의무를 근거로 하고 있다. |
알바니아의 의무가 지켜졌는가는, 자신들의 해역 내에 기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10월 22일 이전 충분한 시간 내에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영국 선박들이 보고된 순간과 첫 폭발 순간 사이에 경과한 시간에 달렸죠.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알바니아는 기뢰밭의 존재를 알리지도 않았고, 영국 군함들의 접근하고 있는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지도 않았습니다.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죠.
재판부의 결론을 봅시다! 기뢰는 사건을 전후하여 부설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알바니아의 감시 하에 있었을 겁니다. 만약 영국 함선들이 21일~22일 넘어가는 밤에 왔다면 통지가 힘들 수 있었겠지만, 22일 13시 넘어서 St.George 수도원의 해안초소에 보고된 것을 보면 통지가 힘들었다고 볼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즉 알바니아 당국이 이번 참사를 막기 위해 시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보고, 그로인해 알바니아는 국제적 책임을 수반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법원은 1946년 10월 22일 알바니아 해역에서 발생한 폭발과 이로 인한 인명 피해 및 손실에 대해 국제법상 알바니아에 책임이 있으며 영국에 배상할 의무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세 번째 쟁점은 영국 정부의 857000파운드의 손해 판단 요청이었습니다. 알바니아는 자신들이 참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구두 진술서에서, 특별협정으로 인하여 법원은 배상액을 평가하는 사법권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뭐 실제로도 알바니아는 영국의 행위에 배상을 주장한 적 없으니 언행일치라고 해야할까요.
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꽤나 간단했습니다. 첫째. 법원이 특별협정 2조에 따라 알바니아에 대한 만족도를 결정할 능력이 있다면, 1조에 따라 영국에 주어야 할 배상액을 결정할 능력이 왜 부족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둘째, 47년 4월 9일 결의안에서 “모든 분쟁은 법원에서 결정되어야 함”이라고 하였는데, 배상금액을 결정하는 대신 배상의무가 있다고만 하면 분쟁은 해결된 것이 아닐 것이다!
다만, 관련 증거가 없으므로 추가적인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어쨌거나 배상액을 평가할 권한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긴 했습니다.
두 번째 본안과 관련하여;
첫 번째 쟁점을 봅시다. 이건 10월 22일 영국 해군의 행위가 알바니아 인민공화국의 주권을 침해했는가의 여부였습니다
1946년 5월부터 10월까지 코르푸 항로를 둘러싼 갈등은 전 글에서 보았을테니 넘어가겠습니다. 법원은 이에 대해서, 국제협약에서 규정되지 않는 한, 연안국가가 평화로운 시기에 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금지할 권리는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알바니아 정부는 북코르푸 해협은 부차적인 중요성만 있을 뿐이고, 오직 코르푸 섬과 사란다를 잇는 항로로만 쓰일 뿐이므로 국제항로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그대로 반박하면서, 이 항로는 에게 해와 아드리아 해의 대체 통로로서 국제항해에 분명 쓰이는 항로라고 보았죠.
영국 정부는 칼을 갈고 나왔습니다. 1936년 4월 1일부터 1937년 12월 31일까지 해협을 통과하거나 해협을 통해 키르케라 항에 입항한 배들의 기록을 전부 찾아서 제출한 것이었죠. 총 2884척의 함선들이 이곳을 통로로 삼았으며, 그리스 선박이 매주 3회, 영국 선박이 2주에 한번 항해 등 정기적으로 해협을 항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죠. 뭣보다 영국 해군은 80년 이상 이 해협을 정기적으로 사용했고, 다른 나라의 해군들도 사용한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 법원은 키르케라 항 교통 때문에 그리스에 특별히 중요하다는 사실까지 보여주면서, 이곳은 국제항로가 맞다고 못박았습니다. 다만, 살얼음판을 걷던 알바니아-그리스 관계, 코르푸 해협을 둘러싼 국경선 문제 등 긴장 상태가 지속되는 관계로, 알바니아가 해협을 통과하는 군함의 통행과 관련하여 규정을 공표하는 것이 정당화되었을 것이라고 보긴 했습니다. 근데 알바니아가 내세운 규정이 통금이나 특별 허가 요건에 준하는 강도가 과한 것이었으니 결국 그점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밖에 없었구요.
이러한 이유로, 법원은 영국 정부가 알바니아 정부의 사전 허가를 받지 않고 해협을 통해 군함으로 침공함으로서 알바니아 주권을 침해하였다는 알바니아의 주장을 받아드릴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제 알바니아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그것이 ‘무해통항’이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해협에 들어설때도 다이아몬드 전투대형으로 기동했고, 기동의 위치도 평시 항행때 그것이 아닌 것이 충분히 위협의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법원은 이렇게 답합니다. 분명 이 항해의 목적은 항로 확보 그리고 알바니아의 태도 시험이었습니다. 이건 앞에서 본 왕립해군 전보에서도 드러나죠. 영국정부는 부당하게 거부당했던 권리를 긍정하기 위해 이 임무를 고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것에 있어서, 완전무장을 하고 해협에 들어온 것도 맞지요. 다만, 알바니아와 그리스가, 그리고 알바니아와 영국이 으르렁대는 대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충분히 적합한 조치라고 판단했습니다. 당장 8월 9~10일 전보로 서로 갈겨버리겠다고 기싸움했던 상황과, 5월 15일 알바니아 포대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대충 이해가 되실겁니다.
다이아몬드 전투대형에 대해서는 아마 St.George 수도원의 해안경비대가 오해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맨 위에서 지적했듯, 영국 함대는 일렬로 진입했고, 폭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다이아몬드 대형으로 간 것이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뢰 공격을 당했음에도 영국 해군이 공격성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었습니다. 법원은, 완전무장을 하고서 폭발에 영향을 받지 않은 두 순양함이 그 공격성을 억제하기란 쉽지 않았을텐데,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는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알바니아는 폭발 이후에 해안방어에 대해 관측한 것도 언급했지만, 5월 15일의 선례와 같이, 함대의 제독들이 해안에서 발포될 것을 두려워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법원은 영국이 1946년 10월 22일 알바니아 해역에서 영국 해군의 행위를 이유로 알바니아 주권의 침해당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두 번째 쟁점을 봅시다. 이건 11월 12~13일의 Operation Retail과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10월 22일 폭발 이후 영국 정부는 알바니아 정부에 공문을 보냈고, 알바니아 정부는 소해를 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31일 알바니아 영해에서는 하는 작전은 동의할 수 없다고 명시했죠. 영국정부는 국제 중앙 지뢰제거위원회International Central Mine Clearance Board에 소해를 허가할 것을 요청하였고, 11월 1일 위원회는 “알바니아의 동의에 따라” 해협을 추가로 소해해야한다는 결의안을 냅니다. 그리고 전에 밝혔듯 영국은 11월 10일에, 12~13일에 소해하겠다는 결정을 전보로 보냈습니다. 11일에 이 전보를 받은 알바니아는 영토주권에 대한 고의적인 침해라고 밝혔죠. 이후는 앞에서 본 그대로입니다.
영국은 Operation Retail이 극도로 긴급한 상황 중 하나였으며, 누구의 동의도 없이 이 작전을 수행할 자격이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코르푸 해협은 1945년 11월 5일 Mediterranean Zone Board에 따라 그리스 측에 할당된 곳이었는데, 영국은 그리스에게 허가를 받았으니 소해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원은 1945년 시점에서, 다시 기뢰를 소해할 가능성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허가는 단순 명목상 행위이고, 해협이 알바니아 영해를 통과함에도 알바니아와 협의하지 않은 점을 들어 설득력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영국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 소해 작전은 다른 여타 소해 작전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기뢰를 깐 당사자나 알바니아가 근거를 없애버린다면? 그런 우려 때문에 방어적 측면에서 개입하여, 최대한 빠르게 소해했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법원은 그러한 개입도 지양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개입은 가장 강한 국가들을 위한 것들이고, 국제 정의의 집행 자체를 왜곡시키는 것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죠.
마지막으로 영국은 이 작전이 자기보호Self-Proetction이나 자조Self-Help로 보았습니다. 법원은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그렇다고 해도 영국의 행위가 알바니아의 영토주권을 침해한 것은 맞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영국이 알바니아의 주권을 침해했다고 보았습니다. 뭐 이정도면 알바니아에게 있어서 적당한 만족appropriate satisfaction을 준 결정이 될거라는 말도 곁들였구요.
이때 알바니아가 잠깐 끼어들어서 말합니다. 소해작전 하나 하는데 항모까지 끌고온건 좀 심한거 아니냐? 법원은 이것이 무력시위를 위한 것이 아니고, 두 번이나 맞은 전력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법정은...
1948년 3월 25일 특별 협정에 의해 제기된 첫 번째 질문에, 1946년 10월 22일 알바니아 해역에서 발생한 폭발과 이로 인한 인명 피해 및 상실에 대해 국제법상 알바니아 인민공화국이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10대 6으로, 보상 금액에 대한 평가를 추가로 고려하고, 본 주제에 대한 절차를 오늘 날짜의 주문서에 의해 규제하도록 했습니다.
1948년 3월 25일 특별협정에 의해 두 번째 질문에, 14대 2로, 1946년 10월 22일 알바니아 해역에서 영국 해군의 행위를 이유로 영국이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판정하였고, 다만 1946년 11월 12일과 13일의 작전 과정에서 알라비아 해역에서 영국 해군의 행위로 인해 영국은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의 주권을 침해했고, 이 법원의 선언은 그 자체로 적절한 만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949년 12월 15일의 재판으로, 12-2로 알바니아 인민공화국은 영국에게 843947 파운드를 변상할 것을 명하면서 이 재판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 이후의 이야기
공식적으로 이 사건의 발단이 된 기뢰밭을 깐 주범이 누구인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마 여기까지 읽으신 독자분들은 누가 깔았는지 대충 짐작하실겁니다. 뭐 당시 최강급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영국을 상대로 내가 그랬다고 겁 없이 배후를 자처한 국가는 없었으니 아직까지 범인은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칩시다.
영국은 이 사건 이후로 알바니아와의 국교 수립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놓았습니다. 알바니아의 반응을 보려고 배들을 보냈는데, 그 대응이 기뢰였으니 누구라도 같이 논의할 맛이 안났을겁니다. 결국 이들의 국교는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이 붕괴되고 ‘민주적인’ 정부가 수립될 무렵인 1991년에서야 복구됩니다.
마지막 문제를 보기 전에, 갑자기 흥미가 생겨서 유고슬라비아 해군 중위 카렐 코바시치Karel Kovacic에 대해서 썰을 풀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왜 알바니아의 우방국 유고슬라비아의 인물이 영국의 증인으로 나왔는지 의문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이 자는 1946년 유고슬라비아 군 당국에 의하여 스파이와 탈영 혐의로 총살형을 선고받은 인물입니다. 궐석재판에서요. 그 말은 즉, 이 사람은 사건이 있기 전에 이미 유고슬라비아를 탈출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그게 언제였냐면.. 1946년 7월 14일입니다. 이미 그 해 10월 6일이면 런던에 도착다고 추정되죠. 10월 18일 기뢰 부설을 위해 2대의 기뢰부설선이 출항했다는 그의 증언과 배치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알바니아의 변론을 맡았던 프랑스인 변호인 피에르 코트Pierre Cot는 법원에 대놓고 두 명의 아름다운 사기꾼과 외국의 스파이를 믿는 심각한 사건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물을 정도였죠. 뭐 결과적으로 재판부가 코바시치의 증언을 사실상 불신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으니 코트의 항변이 먹혀들었다고 할까요.
유고슬라비아 보안국이 기를 쓰고 잡고자 했던 코바시치는 영국 정보국의 도움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 잘만 살았고, 미국 시민과 결혼했고, 조용히 살다가 1975년 61세의 일기로 루이지애나에서 평화롭게 갔습니다.
자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 바로 돈문제를 보도록 합시다. 영국은 왠만하면 법원이 알바니아에게 변상하라고 한 843947 파운드를 받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알바니아는 기뢰를 부설할 정도의 큰 배도 해군에 보유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결국 영국의 배상금 청구권도 철회시키지 못하고, 그렇다고 영국과 협상으로 주권 침해에 대한 배상금도 받아내지 못한 알바니아는 답이 없었습니다. 뭐 어째요, 어떻게든 깎아야죠. 이렇게 하여 어떻게든 받아내려는 쪽 vs 어떻게든 깎으려는 쪽의 자강두천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작은 알바니아였습니다. 1950년 알바니아는 영국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가 돈이 없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일단 4만 파운드만 드리면 어떨까요?” 하지만 대충 85만 파운드를 4만 파운드로 깎는 짓은 봉이 김선달이나 김두한도 절레절레할 협상법이었지요. 1951년 영국은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 다음은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모종의 소스’를 통하여 알바니아 소유의 금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 양의 금괴면 85만 파운드에 근접한 돈에 상응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배상금을 대신하여 가져오려고 하였죠. 알바니아도 당장 돈이 없으니 그것을 넘기기로 하고, 협상장에 들어가 도장을 찍으려는 순간 ‘모종의 세력’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ICJ로 이 사안을 보내죠. 영국은 또다시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번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글은 ‘모종의 세력’이 ‘모종의 소스’의 금에 슬쩍 개입한 사건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첫댓글 여러분들께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습니다. 법정 파트 이렇게 쓰는거 괜찮나요? 양측 이야기를 전부 최대한 넣으면서 짧게 쓰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글이 길어지긴 한데.. 여러분 보시기에 형식상 어떠신지 한번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아주 괜찮고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지루한 법정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쓸수 있다니, 부럽습니다.
@흑풍 칭찬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감사합니다!
저는 법정에서 일어나는 이런 사건들이 전투, 특히 공성전이나 고지전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투에서 방어군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방어선을 만들어 진격을 저지하는 것처럼, 피소당한 쪽은 방어논리를 만들어 패소를 방지하거나 핵심 이익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공격군이 온갖 방법으로 방어선을 뚫으려 하듯 원고 측도 공격논리로 방어논리를 뚫고 핵심 이익을 차지하려 하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법정물은 어느정도 전투 서술과 궤를 같이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여긴 전투를 빼면 섭한 토탈워 카페이니 더더욱 그 성격을 살리고 싶구요.
잘 읽었습니다. 영국의 ‘야만성’(...)을 국제법이 잘 억누르네요ㅋㅋㅋ 그것보다도 당시가 1946년인 걸 고려한다면 알바니아 뒤에 소련이 있었던 탓이었겠지만요.
그나저나 ‘모종의 세력’이라니, 적인 소련, 이기주의 엉클 샘, 애증관계인 바게트 냄새가 나는데요. 영국에 딴지를 걸 국력을 보유하기도 했고요. 알바니아 소유 금괴는 파쇼 파스타가 알바니아를 합병하고 꼬불쳐둔 조구 왕의 금괴일까요?
+윗댓에 관하여. 저는 긴게 더 좋긴 합니다. 글이 길어야 담기는 정보량이 늘어나죵
확실히 현장에서도 그렇고, 사후 대처에서도 그렇고 "주먹이 운다 징징징" 하는 상황에서 주먹 안 휘두르고 보여주는 선에서 끝났기 때문에 영국에 우호적으로 결론이 나왔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다만 법정의 표결 결과를 봤을 때 쏘련이 기를 쓰고 이 사건을 비호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14-2로 결정난 사안들에서 2에 해당하는 판사들의 국적이 눈에 아른거린다고 해야할까요. 하긴 ICJ에 오는것도 상임이사국 쏘련과 당시 비상임이사국 폴란드가 표결에서 기권해서 오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쏘련이 막 뒷배로서 크게 휘두르고 그러진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모종의 세력'은... 거의 근접했다는 말만 드리고 함구하겠습니다. 스포니까요 ㅋㅋㅋㅋ
의견 감사합니다! 지난 글이랑 2배 이상 차이가 나서 걱정을 좀 했었는데, 괜찮다면 계속 이런 식으로 쓰죠 뭐.
@Neogul 옹 소련이 의외의 모습을 보였네요. 전후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벌어진 일들 때문에 골 싸매느라 그런 거려나요.
그리고 베네룩스+스위스+노르딕 애들은 옅은 정치색 덕인지 훌륭한(?) 국제기구의 조정 담당들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ㅋㅋㅋ 맨날 중재자 역할은 요동네 애들한테ㅋㅋ
@bamdori 국제기구에서 쏘련의 소확행은 팩트 국가들에 대한 내부정리가 끝난 시점에 본격화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뭣보다 강철의 대원수 양반도 미적지근했다 싶어요. 1947년 7월에 토치카좌... 아니 엔베르 호자가 스탈린을 만나서 "우리가 안깔았어요 억울해요 징징징" 했는데 우리의 대원수께서는 깔쌈하게 씹어버렸죠.
그리고 아무래도 저 조합이 유럽 대표 중립국이라 더 그런것 아닌가 싶어요. 말 통하지, 그동안 맡긴바도 잘 해왔지, 중립국이라 시비에 걸릴 일도 줄어들어서 조정셔틀(?)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