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그릇 - 물 마시는 시 (박참새)

[기다려줘]

습기: 모든 질병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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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네
안타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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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일찍 태어날걸
태초에 물이 있었던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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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랑찰랑
걸음걸음마다 내 안에서 물이 아스르르
넘칠 것만 같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발자국이 촉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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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죽 한 그릇 주세요
아픈 사람처럼 말한다 죽은 아픈 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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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 테이블에서는
맛있게 해 주세요라고 한껏 소리친다
​그 말을 하면 맛이 있게 되는 건지 나는 궁금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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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드세요, 아 이건
맛있게 먹으면 안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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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될까? 흰죽은 맛있는데
혹시 내가 맛있게 해 달라고 종용하지 않아서일까 그렇다면 너무나 이상한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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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정체를 모를 축축한 쌀알들이 내 안에서 마구 굴러다닌다 요즘은 좀 어떠세요?
내가 아무리 죽상을 하고 진료실에 들어가도 그는 늘 웃고 있다 맛있는 약이라도 발명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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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이 자요
왜 이렇게까지 자는지 모르겠어요
약이 맛있었다면 몰라,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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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느끼는 고립감은 이상한 거예요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없을 거란 걸 잘 알고 있는 거예요. 피하는 거예요 잠을 자면서 도망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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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얼마나 도망가야 합니까 어디로 가야 사랑받을 수 있는지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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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웃던 얼굴 조금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웃지 않는 법을 모르기에 어떻게든 한다 무슨 말이든 한다 생각을 오래 하고 있는데
배알이 뒤틀린다 흠뻑 젖어 버린 쌀알들이 더 아프다고 소리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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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마셔야겠어요
그러면 다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나도 쌀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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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하지 마세요 다만
피로하게
더욱 피로하기만 하세요
가능성을 잊지 마세요

지겨워 지겨워 정말 지겨워
나는 매일이 뒤틀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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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주러 가야겠다 그만 아파야지 뾰족한 모서리 다 둥글어진 축축한 말들 아무런 효능도 감흥도 없는 무해한 말 그만 듣고 이제는 물을 마셔야지 물만 죽어라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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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미스터 스마일 늘 웃기만 하는 나의 의사를 뒤로하고 나는 온다 오는 물이 컵을 채우며 만들어 내는 비명 비명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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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 보여요
컵이요?
아니요
물이요
​
맛없어요

- 정신머리, 민음사 -